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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4.27 10:06
연재수 :
1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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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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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34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DUMMY

134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성안에 마련된 만찬장.

오늘 초대받은 인원이 먹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성에서 손님 응대를 불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손님은 리친스의 국왕 못지않게 높으신 분.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손님을 응대하기 위한 일을 수행했다.


뎅-


벽시계가 만찬 시간인 정오를 알렸다.

성의 주인과 초대받은 손님은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를 중앙에 두고 섰다. 수십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하얀색 테이블의 끝과 끝자리에 앉았다.


“리친스 왕국의 책임자. 리처드 그레이슨이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들 중 여유가 넘쳐흐르는 남성이 입을 열었다.

리친스의 젊은 왕, 리처드 그레이슨.

30대의 나이에도 회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나 입는 흰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격식 있는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질타받는 국왕치고는 가람 왕국 현왕 못지않게 총명함이 담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캣니스와 브레드가 있었다면, 소문이란 믿을 게 안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반가워요. 저는 셀레브리디 여신님의 여섯 번째 날개. 아쿠아 센츄어리라고 해요.”


그와 대면한 여성도 통성명했다.

셀레브리디 교단의 성녀, 아쿠아 센츄어리.

현재 아름다운 아쿠아의 모습은, 평상시 그녀를 아는 이라면 놀랄 모습이었다.

그럴게. 지금 아쿠아는 백색 드레스 위에 세련되게 검은색 외투를 걸쳤다. 꽃과 장신구로 한줄기로 땋아서 금빛 머리카락을 빗장뼈 앞에 내리뜨렸다.

동화 속 왕자님이 실존한다면 아쿠아를 보고 한눈에 반할 모습이다.

하지만, 목에 채워진 은빛 구속구가 연회의 꾸밈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연. 소문대로 아름다우십니다. 성녀님.”


국왕 리처드는 형식에 박힌 인사말을 했다.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성녀의 외모는 한껏 꾸미고 나니 더욱 돋보였다.

거기에 성녀 특유의 분위기가 덮어지면서 한 여인으로서나 성녀로서나 절로 감탄이 나오는 품위가 갖추어졌다.

그의 칭찬에, 아쿠아가 가볍게 고개 숙였다.


“칭찬 감사해요. 이렇게 사적인 자리가 익숙지 않은 터라 많이 긴장되네요. 그래서 혹시 그레이슨 님만 괜찮다면 부디 사람들을 물러주실 수 있을까요?”

“오, 물론입니다. 셀레브리디 여신의 고귀한 손님이시여.”


따악, 리처드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사용인들이 움직였다.

모든 사용인이 최대한 움직임으로 만찬장을 나갔다.

유리 술잔에 백포도주를 따른 사용인이 마지막으로 인사 올리고 문을 닫았다.

사람이 빠지자 적막함이 드리웠다.


“이렇게 성녀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왕가에 다시는 없을 축복이겠지요.”


적막함 속에서 리처드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제 앞에 놓인 그릇 위의 음식들을 개인 접시로 옮겼다.

뭐 하나 아쉬운 점 없는 식탁이었다.

음식의 수준도 모두 일품이었다.


“이건 북쪽의 산지에서 키우는 품종인 꿩입니다. 이건 리친스 왕국을 먹여 살리는 강에서 잡은 민물 가재와 조개에 향신료를 배합하여 만든 요리이죠. 그리고 이건 고랭지농법과 과수원에서 재배한 것들로 만든 샐러드인데···.”


식탁 위의 음식들을 일일이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그러다가 리처드가 고개 들었다.


“성녀님을 위해 준비한 만찬인데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리처드는 설명을 멈추고 아쿠아를 바라봤다.

총 일곱 가지 음식 소개가 있던 동안에도 단 한 개의 음식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의 권유를 받고 나서야 시선이 음식으로 향했다.

하지만 여전히 포크와 나이프를 잡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정말 훌륭해요.”

“그렇습니까?”

“리친스의 부흥을 꿈꾸는 이다운 호화로운 식탁이에요.”


한마디에, 리처드의 표정이 굳었다.

마치 한 방 먹은 사람처럼 허를 찔린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짧게 헛기침하고는. 다시 남은 음식을 마저 소개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이건 백일동안 숙성해야 먹을 수 있는 과일인데···”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처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성녀님께서는 정말 상냥하시군요! 설마 성녀님께서 이리도 마음이 넓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찬사 비슷한 말을 했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성녀를 손님으로만 대하고 있던 태도가 변했다.

아주 미세하게 경계의 빛이 생겼다.


“그런가요? 제가 실언하여 리처드 님의 기분이 상한 거 같은데, 혹시 언짢았을까요?”

“천만에요! 저는 그럴 재간도 없고 그렇게 가벼운 남자도 아닙니다! 그저 소문과 다른 면모에 감탄해서 그런 일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리처드는 잇몸을 만개하며 웃었다.

아쿠아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그러나 맨 처음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웃는 얼굴 밑에서 두 사람의 감각이 곤두섰다.


“그레이슨 님과는 말이 통할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영광입니다. 제 하찮은 존재에서 성녀님을 즐겁게 해줄 부분이 있다니요.”

“생각보다 즐겁네요. 초대 방식도 상당히 참시했고요.”


아쿠아는 조용히 제 목을 건드렸다.

절그럭, 은과 마법으로 만들어진 구속구가 소리 냈다.


“하지만 저를 왕성에 잘못 들어온 동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마법으로 만들어낸 구속구는 강력했다.

다른 이도 아닌 성녀의 이능을 제한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

명백하게 성녀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한 족쇄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누가 성녀님의 힘을 탐할지 몰라서 그런 거니 이해해주시길.”


리처드는 사과의 말을 담았다.

하지만 표정에서 미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성력을 억제하는 그것을 찬 채라면 성녀님의 힘을 노리고 습격할 자가 적을 겁니다. 물리적인 위협은 왕성에서 막아드릴 테니 부디 안심하시길.”

“제힘을 노리는 자들을 막겠다인가요···.”

“물론입니다. 그 외의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거짓말하기는.

아쿠아는 입 안에서 이 말을 되풀이했다.

단어 하나하나 곱씹고는 웃음 짓는데, 은근히 기분이 상한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그런데요, 그레이슨 님. 이건 뭔가요?”


툭, 아쿠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앞에 있던 유리 술잔을 건드렸다.

술잔 안에 담긴 금빛 수면이 흔들렸다.

달콤한 향기가 먼 곳에서도 느껴졌다.


“아아. 그건 말입니다. 일 년에 백 개도 안 나온다는 유명한 브랜드의 백포도주를······”


아쿠아는 손등에 턱을 기댔다.

무언가 고심하듯 유리 술잔을 빤히 바라봤다.

술에 관해 거의 무지한 그녀가 봐도 훌륭한 술이었다.

금을 풀어 넣은 듯한 색채는 물론이고, 향기 또한 너무 달콤해서 애주가들이 목을 맬 만한 상품이었다.


“정말··· 호화스러운 대접이네요···.”


고민이 끝났는지 천천히 유리 술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아름다운 황금빛 술이 물결쳤다.

천천히 잔을 옮겨서 테이블 건너편과 겹쳤다.

술 안에 한 나라의 왕이 섞여 보였다.


“그레이슨. 그거 아시나요? 어느 나라에서도 저를 위해 술을 준비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열심히 술에 관해 설명하던 리처드가 말을 멈췄다.


“그렇습니까? 혹시 제가 불쾌하게 해드렸습니까?”

“아. 오해하지 마세요. 술을 대접하는 일 자체가 무례하다는 말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무례는 제가 저지르죠. 제가 술이 많이 약해서 한 모금만 마셔도 취하거든요.”


그리 말한 아쿠아는 유리잔을 들어서 붉은 입술에 갖다 댔다.

붉은 입술 틈새로 금빛 술을 모조리 삼켰다.

살며시 눈을 감으며 빈 잔을 내려놨다.

유리 술잔이 바닥에 닿고 나서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조금 전 대화를 나눴던 일이 무색할 정도로 먼저 입을 열기 불편한 공기가 있었다.


“그러면 리친스의 왕 리처드 그레이슨. 네가 자진한 대로 내 상대를 해줘야겠어.”


침묵을 깨트린 건 아쿠아의 한 마디였다.

리처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성녀의 분위기가, 말투가, 온화하던 조금 전이랑 완전히 달라졌다.

리처드의 눈 안에 짙은 경계의 빛이 자리하였다.


“뭘 그렇게 놀라? 주정뱅이의 취담 처음 겪어 봐?”


굳이 말할 필요 없이 굉장히 놀랐다.

성녀의 말처럼 주정뱅이의 취담을 처음 겪어서는 아니었다.

리친스의 왕. 리처드.

그는 스스로 칭하기를 장사꾼이라 불렀다.

이 말은 본인과 장사꾼을 낮춰봐서가 아니었다.

사람 사이의 거래에서 완벽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형제 중에 왕의 재목을 가진 이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제1 계승권을 내놓았을 정도로 장사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결국 왕이 된 건 그였고. 그러한 사실을 번복할 수 없다.

가끔 나라를 운영하는 일에서 머리를 굴리고, 손에 땀이 흥건한 거래 현장을 경험하는 쾌감이 그가 사는 유일한 낙이었다.


“하하. 이거야 원. 생각보다 더한 거물을 만난 거 같군요.”


그런 그였기에 지금 만남이 흥미로웠다.

상대는 센츄어리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성녀이다.

동시에 소문과 많이 다른 사람인 거 같기도 하였다.


“술에 취하면 실례를 범한다고 했습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취한 사람들은 흔치 않게 실수를 저지르곤 하죠.”


리처드는 성녀 따라서 백포도주를 들었다.

원래에 계획은 성녀를 끌어들이는 일에서 끝났다. 하지만 머릿속에 성녀에 대한 호기심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한 호기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유리잔의 백포도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웠다.


“크으. 부디 성녀님과 어울리는 데 있어서, 저지른 실수 몇 개를 묵과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용인할게. 용인 안 할 이유가 없지.”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순수하게 웃는 얼굴 뒤로 몇 개의 거짓 감정이 도사렸다.

만약 이곳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심상치 않은 느낌에 떨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제 인사가 매우 형편없었군요.”


문득 리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중한 움직임으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


“성녀님의 행차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왕국에 방문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소 뜬금없는 감사 인사였다.

그 모습에, 아쿠아는 코웃음 쳤다.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 고개 숙였는데, 이런 식으로 코웃음 치는 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당연히 감사해야지. 하지만 괜히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그레이슨 당신이 내게 감사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그런데도 여전히 제 할 말만 했다.

리처드는 입매를 비틀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또 감사할 부분이 있었나 보군요. 그러면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설마 성녀님의 외모를 더욱 찬양하지 않아서 삐지신 건 아니겠지요?”


서로 웃으면서 혓바닥 아래의 칼을 들이밀었다.

상대의 어느 곳을 찌를지 가늠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겨우 악마의 거래에 응한 일로 우리는 큰 보답을 바라지 않거든.”


그러던 와중, 아쿠아가 먼저 한 방 먹였다.

리처드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난처한 기색조차 일순 엿보였다.

그에게 한 방 먹였는데. 아쿠아는 별 감흥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군요. 성녀님의 선의에 감사드립니다.”

“이 정도로 무얼. 그리고 내 행동을 선의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섣부른 감이 적잖이 있지 않아?”


리처드를 향해 연달아서 들이민 말.

리처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달라진 그녀의 언변에 휘둘리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선의는 어디까지나 선의일 뿐.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가면 그곳에 베푸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텐데. 그런 당연한 사실을 몰랐던 거야?”


또 한 번 그를 질타했다.

정론에 가까운 말들로 그를 적나라하게 비난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리처드는 입을 다물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기에 묵묵히 비난을 받아들였다.


“정말 실망이야. 이곳에서의 추억이 좋은 일이 아니라 지독한 이해득실만 남을 거 같아서.”


아쿠아의 입이 닫힐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쿠아의 말이 끝나고 제 차례가 되어서야 리처드는 깊이 심호흡했다.


“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온 첫 대화는 감탄이었다.

웃는 얼굴 안에 은밀하게 모욕당한 기분을 감추었다.


“하지만 진성 장사꾼이라면 이런 일을 또 기쁜 추억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통 무능한 왕이라면 기분이 상해서 떠날만한데 끝까지 자리를 파하지 않았다.

취객을 자처하며 막말하는 아쿠아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제 밑천이 들통난 시점인데도 아쿠아와 더욱 오래 대화하였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지. 건배하자.”


짠.


술잔이 부딪쳤다.

리친스의 목에서 백포도주의 향에 만족하는 소리가 나왔다.


“크으. 오늘은 기쁜 날이로군요. 좋은 상품과 이리 좋은 손님이 함께하다니. 분명 리친스의 장사꾼이라면 너무 기쁜 나머지 강아지처럼 지려버렸을 겁니다.”

“재밌는 말을 하네? 나도 리처드도 장사꾼이 아닌걸?”

“그래서 더욱 위험한 외줄타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이미 인생을 건 장사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한 번 더 잔을 부딪친 리처드는 기뻐 보였다.

조금 전까지 있던 불안을 완벽하게 지워냈다.

억지로 감정을 끌어내고 끌어내린 결과가 아니었다.

기쁜 감정이 진심에서 우러났다.


“이건, 주위의 모든 걸 건 위험한 장사입니다!”


흥분했다.

이 상황을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 하였다.

정해진 시나리오가 틀어지는 데 있어서 어떠한 불쾌감이 없었다.

리처드는 순수하게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서 저는 성녀님께 제안하겠습니다. 부디 제 촌극에 어울려주지 않겠습니까?”


연극 또한 장사의 일환.

이 싸구려 연극이야말로 리처드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서사라는 믿음이 있었다.


“거절할게. ‘마물의 습격으로 꼼짝 못 하는 성녀, 성녀를 구하러 오는 교단의 성기사님’이라니. 흥행 요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촌극이네.”

“하하하. 그렇군요!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성녀님께서는 이곳에 있는 시간이 싫은 듯한데. 왕국은 성녀님께서 괴물에게 피해받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는걸요.”


꿈틀, 술잔을 만지던 아쿠아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 모습에, 리처드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레이슨. 이미 악마에게 정보를 산 일부터 손해 보는 장사였음을 왜 모르실까? 아무리 봐도 손해를 메꾸기 위해 열심인 걸로 보이는데.”

“손해를 봤었으니 어느 정도는 채워야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성녀님. 성녀님이 이곳에서 취하는 모든 것은 교단에서 채워줄 테니까요.”


리처드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거래의 승자를 본인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애초에 성녀 혼자 들어왔을 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제일 중요한 인물을 수중에 넣었으니 자신의 승리였다.


“푸훗. 그러니까 그 부분. 왜 내가 아무 말도 안 한다고 생각해?”


그러나 다음 순간, 아쿠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예상에서 벗어났다.

뚝, 신나서 떠들던 리처드의 입이 멈췄다.

승리를 확신하던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생판 남에게 인륜과 운에 기대어 거래하려 하다니. 장사꾼치고는 최악의 도박 수를 뒀네?”

“···소문과 다르시군요. 분명히 제 계획에 어울려주리라고 생각했는데요.”


손을 내린 리처드의 얼굴은 진지했다.

아직 미숙해도 한 나라의 통치자다웠다.

그가 생각한 비장의 수가 조금 전 가로막혔다. 계속 똑같이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성녀님. 저는 성녀님의 협조를 바랍니다. 아니, 애초에 협조만큼의 수고도 아닙니다. 성녀님은 그저 이곳에서 쉬십시오. 사치를 부리십시오. 그러면 다른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부탁했다.

이런 왕의 말을 듣고 따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는 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할 터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성실함과 거리가 먼 사람뿐이라는 게, 그가 인식하지 못한 문제였다.


“처음에는 납치. 이후에는 사기. 다음은 협박이네? 또 다음은 뭐야?”


대의 같은 건 아쿠아가 알 바가 아니다.

적어도 아쿠아는 본인을 그렇게 평가했다.

거절당한 리처드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지금, 우리를 버리겠다는 겁니까? 고작 며칠 머무르다가 떠나면 되는데. 그 정도도 못 하겠다는 겁니까?”

“응. 못해. 나는 나 때문에 걔들이 움직이는 일이 싫거든.”

“다시 한번 재고해 보십시오. 만약 리친스가 멸망하면, 이 세상에 많은 난민과 센츄어리 대륙의 정세가···”

“쉿, 조용히 해.”


아쿠아가 손가락 올리며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행동이었다.

이에 리처드는 두 눈을 살벌하게 떴다.

목에 핏대가 보일 정도로 분노하였다.

곧, 가슴부터 올라온 분노를 입 밖으로 뱉으려던 그때였다.


“됐어. 헛소리는 이쯤 하자.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러는 건 어때?”


아쿠아가 리처드를 몰아세우는 일을 멈췄다. 그의 계획에 놀아나는 일 대신에 새로운 계획을 제안했다.

리처드는 소리치려던 행동을 멈추었다.

큰 소리를 삼켜내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차라리 이러자니···. 무엇을 말입니까?”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나왔다.

리처드는 처음과 다르게 여유로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맨 처음 성녀를 두고 생각했던 일과 다르게. 성녀가 손해를 계산할 줄 아는 장사꾼이었다는 사실이 변수였다.


“밖에 있는 마물 처리해줄게. 대신에 요구조건 세 가지 들어줘.”


성녀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일을 맡은 사람처럼 가볍게 말을 뱉었다.


“잠깐만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리처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조금 전 말을 들은 리처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괴물을 처리해준다고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놀랍게도 성녀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어떤 금은보화보다 혹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리처드가 성녀의 말을 신용할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정말로 처리해준다는 겁니까···?”

“정확히는 내 동료들이.”

“왕국에는 국경 수호와 치안 유지 인력도 버겁기에 함께 싸울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녀님은 동료의 힘만으로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가능하겠지. 내 동료들은 강하거든.”


확신마저 느껴지는 발언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이 변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리처드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끝나지 않을 무한한 굴레에서 답을 내린 건. 정작 이성과는 거리가 먼 한쪽으로 기우는 마음이었다.


“그리된다면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로군요···.”


리처드는 반쯤 넋이 나간 채 말했다.

만약 정말로 성녀가 일을 해결해준다면 모든 왕국 운영이 수월해진다.

반대로 성녀가 둘 최악의 수를 가늠하면, 차라리 괴물과 자멸하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미래가 기다릴 터였다.


‘너무나도 달콤한 제의를 해오는군. 그렇기에 의심스러워.’


리처드는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왕국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다.

이 거래는 대신들과 며칠을 밤새워 고민하며 신중에 신중을 가해도 모자랄 일이다.

그러나 성녀는 한시라도 빨리 답변해달라고 재촉했다.


‘그렇다면 나는···’


침통한 표정이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요구조건 세 가지를 말씀하시지요.”

“대답이 빠르네? 당연히 내일까지 미루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러기에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서요. 그리고 아시잖습니까? 지금 제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주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리처드는 성녀의 손을 빌리기로 정했다.

애초에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게 들통난 이상 거부의 여지는 없었다.

본래 리처드는 성녀의 이름을 이용해 대신전의 기사들을 불러올 속셈이었다.

성녀 일행이 마물의 습격을 받아서 왕국에서 보호 중이라는 편지 하나를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도박 수인 만큼 이 일에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첫째, 외부의 힘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왕권이 약해지는 것.

둘째, 훗날에 왕국이 대신전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부금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성녀가 대신전에서 온 사자들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


특히 세 번째 단점이 왕권의 위협 이상으로 위험부담이 따랐다.

그래도 리처드는 한때 위험을 무릅쓰고 성녀의 명성에 기대어 보았는데···.

그랬다가 맞닥뜨린 게 지금 상황이었다.

첫 번째 도박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 거절할 수 없는 거래를 제시해오니···.’


너무나도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앞선 모든 단점을 없애고 새로이 나타난 선택지였다.

성녀의 선에서 상황이 해결된다면, 셀레브리디 교단을 이용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이쪽의 위험부담도 훨씬 커지지만···.’


물론 모든 점은 어디까지나 모든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이야기.

만약 모든 일이 엉망이 되었을 때는, 부디 자신의 목 하나로 끝내주길 바라였다.


“그러니 세 가지 조건을 어서 말씀하시죠. 왕국을 구하는 대가로 무엇을 바랍니까?”


그렇게 리처드는 아쿠아의 세 가지 조건을 듣기로 했다.

이에 따라서 거래를 다시 생각하는 것도 고려했다.

물론, 이외의 방책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이 시원하니 좋네. 내가 받아 갈 보수는 총 세 가지야.”


아쿠아는 세 손가락을 펼쳤다.

바라던 대로 입을 열었다.


“첫째, 모험가 길드장이라는 인간을 풀어줘.”

“그자는 이번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부 왕국에 돌리려 했습니다. 그런 자를 풀어주라는 겁니까?”

“둘째, 이 일을 비밀로 해. 교단에도 알리지 말고 너희 쪽에서 처리한 일로 하자.”

“그건 저희에게 너무 유리한 조건 아닌지···. 이런 보수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셋째, 언젠가 너희에게 도움을 청할 날이 올 거야. 그때 아무 말 하지 말고 도움을 줘.”

“사실상 앞선 두 가지 조건은 이걸 위한 말이었군요,”

“그래서 싫어? 싫으면 내 일행 불러서 여기서 나갈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리처드는 고민에 빠졌다.

성녀는 흔쾌히 그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리처드가 생각하기에, 성녀의 처음 두 가지 조건은 들어줄 만했다.

모험가 길드장을 풀어주는 일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두 번째 조건이 성립되면 문제 될 게 없다.

결국 문제가 되는 건 세 번째 조건.

언제 어디서 어떤 도움을 청할지 모르니 이런 약속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적어도. 무엇을 바라는지는 말해주실 수 없습니까?”

“그레이슨.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이건 너에게 이득이 되는 장사야.”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소리라서 달콤한 꿀이라도 된 것처럼 받아들일 뻔했다.

하지만 이 거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지 수표와 같은 조건을 내건 거래는 상당히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리처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돌이켜보니. 제게 악마와 거래한 순간부터 손해 보는 장사라고 했습니까?”

“그렇지. 비슷한 말이지만 같은 맥락이야.”

“확실히 그렇군요. 악마가 웬일로 좋은 말을 해주나 생각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서서히 눈뜨며 비참한 웃음을 흘렸다.

보기 좋게 왕국의 손해를 메꿔보려 했지만, 이 장사는 처음부터 일그러졌다.

애초에 악마의 계략에 넘어간 일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차후에 성녀가 들이민 게 독이 든 성배라는 걸 알아도, 지금 이 손을 잡는 게 최선일지 모른다.


“하! 하하! 그 악마 놈! 이딴 한심한 계획을 황금 마차 세 대 값이나 받아 처먹다니!”

“그러게, 악마의 소리에 넘어가지 말지 그랬어?”

“맺겠습니다. 계약! 프로텐시아 님의 이름 아래서 성녀님이 내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이행하기로 맹세하지요!”

“좋은 판단이야.”


아쿠아는 보기 좋게 미소 지었다.

그에 비하여 리처드는 거의 실성 직전 단계였다.

그런 그를 동정하며 빈 잔을 높이 들고 살짝 기울였다.

분한 얼굴인 리처드에게 어서 잔을 들지 않냐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보기 좋게 속은 리처드 님을 위해 건배.”

“건배! 젠장! 정말로 고맙습니다!”



*****



오늘 국왕은 입이 닳도록 본인이 자랑하던 분야에서 망신살이 당했다.

심지어 다른 장소도 아닌 본인에게 유리한 공간에서였다.

그렇기에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도, 입소문도 퍼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왕성 함구령에 예외는 있었다.

왕성 밖에까지 새어나가는 이야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평범한 여관 안에서 누군가의 통신을 줄곧 기다리고 있던 인물들.

오늘 국왕이 겪은 수모를 아는 이들이 생겼다.


“-라는 일이 있었어.”


한밤중에 통신한 아쿠아가 본인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도 성녀가 외부로 연락하는 통신까지 제지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사적인 이야기까지 하리라고는 예상 못해서 그랬겠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맡겨만 주세요. 어차피 이곳 사람들과 앞으로의 대륙을 위해서도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베르길드는 통신석 너머 아쿠아에게 말했다.

그들은 조금 부끄러운 국왕의 실패담과 함께 아쿠아로부터 중요한 부탁 하나를 들었다.


“그러면 브레드 님. 출발할까요?”

“그리하도록 하지. 아쿠아는 무사한 거 같으니.”


용건이 끝나고 통신석의 마력을 차단했다.

거대한 배낭을 메고 신세 졌던 여관을 나갔다.


“밤이네요.”

“마물들이 날뛰기 좋은 시간이지.”


하늘은 깜깜한 밤이었다.

원래 지금 시간에 모험은 위험했지만, 확실히 대량의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지금 움직여야 했다.


“언니. 어디 가?”


그때. 여관 안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뒤로는 가족 전체가 마중 나왔다.

캣니스는 걱정하는 가족이 안심할 수 있게 미소 지었다.


“아기님, 신자님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사했어요.”

“애들 표현으로는 못 된 괴물을 혼내러 가는 거지 뭐.”

“부디 우리가 여기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게.”


캣니스와 라나 그리고 브레드.

그들은 리친스 왕국에서 신세 진 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 후에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움직였다.

목적지는 두 곳. 현 왕국에서 문제가 되는 산악 지형과 습지였다.

다행히 왕국의 의뢰가 생겼기에, 사전에 준비했던 경비병을 따돌릴 계획은 실행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일 동트기 전까지 일을 끝내죠.”


토벌 대상은 한 나라 전력을 몰살시킨 괴물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발걸음에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본래 계획했던 일을 끝내기 위해 움직였다.

목적은 자이언트 웜 토벌.

모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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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151화 사막의 나라 24.04.13 6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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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149화 사막의 나라 24.04.08 6 0 16쪽
181 148화 사막의 나라 24.04.05 6 0 21쪽
180 147화 사막의 나라 24.04.03 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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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외전 다섯 번째 용사9 24.03.29 6 0 13쪽
177 외전 다섯 번째 용사8 24.03.27 6 0 16쪽
176 외전 다섯 번째 용사7 24.03.25 6 0 28쪽
175 외전 다섯 번째 용사6 24.03.20 5 0 21쪽
174 외전 다섯 번째 용사5 24.03.18 5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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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외전 다섯 번째 용사3 24.03.13 6 0 18쪽
171 외전 다섯 번째 용사2 24.03.13 7 0 14쪽
170 외전 다섯 번째 용사1 24.03.08 7 0 13쪽
169 146화 십강 사무엘 24.03.06 4 0 25쪽
168 145화 십강 사무엘 24.03.04 8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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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142화 십강[十强] 24.02.26 10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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