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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4.27 10:06
연재수 :
1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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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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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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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46화 십강 사무엘

DUMMY

146화 <십강 사무엘>



성녀 일행과 베르길드는 여관 밖으로 나왔다.

마차 안에 짐을 싣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까지도 영천은 어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멍한 모습으로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만큼 영천은 본래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은인에게 감사 인사는커녕 독이 든 칼빵을 놓은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괴로워했다.


“심지어 동방을 떠나라고 종용한 사람도 현아였다니···!”


그 여파로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눈 밑에 생긴 눈그늘로 보아 밤새 잠을 못 이룬 게 분명했다.

차라리 어제까지 보였던 음침한 웃음이 나아 보이는 모습.

지금처럼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건 보는 사람도 괴로웠다.

낙담하는 영천의 어깨 위로 커다란 손이 여러 개 얹어졌다.


“영천이여. 힘내게. 그래도 여동생은 오라비가 죽는 모습을 원치 않을 걸세.”

“조금 꼴사납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야 잘못도 빌고 용서도 받지 않겠어?”


브레드와 쌍둥이 모험가가 말했다.

어째선지 죽는다는 전제로 말한다.

그래도 헤어지는 마당이니 나름 좋은 소리 한다고 한 걸 거다. 캣니스는 그들이 좋은 일 생길 거라며 덕담한다고 치부했다.


“왜 다들 제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본인은 말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근육 삼인방은 막무가내로 덕담을 밀어붙였다.


“야. 사제.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여관 문에 기댄 사무엘이 말했다.

한 번 더 안 싸워서 보내기 아쉬운 캣니스에게 시선 보냈다.


“여기서 더 남쪽으로 갈 거예요.”

“여기서 남쪽이면 쓸데없이 덥기만 한 곳? 왜 갈 곳이 없어서 그런 데로 가냐?”

“아쿠아 님이 정했으니까요. 저희는 그저 따를 뿐이에요.”

“굳이 신도 안 믿는 나라를?”


사무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종교쟁이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 생각해보니 난나 오하라 그 여자도 뭔 생각하고 사는지 알 수 없었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손등을 내저었다.


“빨리 가버려. 산적 놈들은 내가 관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번거롭게 대신 맡아주셔서 감사해요.”

“고맙기는 뭘. 안 그래도 집이 어지러워져서 청소할 사람이 필요했어.”


문 뒤에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치는 산적들이 있지만 무시한다.

꼭 죽음만이 최고 형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캣니스는 잘 알았다.


“빨리 가라니까 왜 안 가고 있어? 여기서 더 털어갈 건 없으니 후딱 가버려.”


계속 빨리 가버리라고 재촉하자, 캣니스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을 뻗어서 여관 안쪽으로 가리켰다.


“그게, 아쿠아 님이 아직 안 나와서···.”


쿵.


말하기 무섭게 여관 안에 큰 소리가 났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잠에서 깬 아쿠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아쿠아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청소하는 산적들을 내려다봤다.

성녀답게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산적들에게는 자비 없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차, 착하게 살겠습니다!”


겁먹은 산적들이 무릎 꿇었다.

그러나 캣니스는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실을 보았다.

아쿠아의 겉모습은 차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지독한 피로감이다.

밤늦게까지 이야기 듣다가 아침 일찍 출발하려니 죽을 맛인 모양이다.

그런 불쾌한 감정이 발소리에 담겨있었다.


“왔네요. 이만 갈게요.”


캣니스는 사무엘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사무엘은 대답 대신에 간단하게 고갯짓했다.


“야, 너.”

“엉?”


그런데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

아쿠아가 사무엘에게 말을 걸었다.

대인 기피를 밥 먹듯이 하는 그녀가 먼저 아는척하는 건 귀한 일이었다.

모험가가 황금 슬라임을 발견할 정도로 드문 일이다.


“뭔데? 할 말 있어?”


사무엘은 입가심용 허브를 씹으며 눈썹을 세웠다.

이에 아쿠아가 입을 열었다.


“너 글러 먹었네.”

“뭐?”

“행복하겠어. 아주 그냥 여자에게 붙잡혀 살 관상이야.”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사무엘의 표정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아쿠아는 덕담인지 험담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마차 쪽으로 움직였다.

뒤늦게 사무엘이 발끈했지만, 캣니스가 말렸다.


“하하. 그러면 진짜로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사무엘 님.”


벌써 세 번째 인사였다.

사무엘은 질린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영천 님도 조심히 돌아가세요!”

“예,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여정에 무운을 빌겠습니다!”


릴리트가 근거리 게이트를 열었다.

마차 두 대가 푸른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금발 머리의 사제가 한 번 더 손을 흔들며 들어갔다.

지난 사흘간, 여관을 꽉 채우던 손님들이 모두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



<후일담- 십강 사무엘>



“후우. 사무엘. 정말 미안하다.”


귀한 손님이 떠나고 두 사람만 남았다.

영천이 다시금 사죄의 말을 전했다.

아무리 사죄해도 덜어지지 않는 죄책감에 고개 숙였다.

도저히 이전처럼 사무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잘못한 줄 알았으면 됐지. 뭘 자꾸 귀찮게 말을 걸어.”


사무엘이 여전히 곱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영천도 안다.

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마음씨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마워. 사무엘.”


빙빙 돌려서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말에 감사 인사했다.

이에 사무엘이 미간 사이에 골을 만들었다.

영천은 저 짜증 내는 얼굴도 쑥스러워서 짓는 표정임을 알았다.

새로이 안 사실에 감사하고 만족하여서 미소 지었다.


“사무엘. 나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려 해. 한아의 출산 날 때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용서를 빌어야지.”

“그래. 얼른 가 버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너만 괜찮다면 함께 돌아가지 않을래?”


영천은 사무엘에게 제안했다.

한때 가문 전체가 사무엘을 적대했던 일을 사죄하고 싶었다.

함께 돌아가서 진실을 알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축복하려고 했다.


“됐어. 혼자 가.”


그러나 충분히 이득이 될 제안을 사무엘이 거절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영천이 아쉬움을 담아서 재차 물었다.

사무엘은 허브를 퉤 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여기 왔던 목적이 아직 해소되지 않아서 그렇다, 왜.”


까칠한 답변이다.

그래도 영천은 기분 상하지 않았다. 조금 전 말을 곱씹었다.

한아에게 듣기로는, 사무엘이 이런 반응을 보일 때는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거다.

여기 찾아온 본래의 목적이라는 게 있었는지 고민하다가, 지난 대화를 기억했다.


“···같이 있어줄까?”

“됐어. 징그럽게 남자 둘이서 뭐 하러 그러고 있냐?”


영천은 형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진심으로 사무엘이 질색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봐도 비슷한 나이의 사람에게 장난치는 기분이다.


“그러면 사무엘. 언제든지 우리 가문을 방문해줘.”


당장 손님으로 초대하는 일은 거부 받았지만, 언젠가 그가 오기를 기원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포권지례하였다.

상대방이 인사를 무시하듯 하품하여도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하여간에 남매가 쌍으로 끈질기기는. 언젠가 근처 지나갈 일 생기면 들리지, 뭐.”

“고마워. 너에게 진 빚은 이자까지 쳐서 모두 갚을게.”

“어서 가. 하도 오랜만에 북적거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알겠어. 본국에 도착하면 한아의 안부를 전하도록 할게.”


사무엘은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다.

영천은 구십 도로 허리 숙인 뒤, 숲 바깥쪽으로 걸음 돌렸다.

동방의 사내가 본국으로 떠나니 여관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갔나?”


그제야 사무엘은 삐딱하게 문에 기대던 자세를 풀었다.

귀찮은 손님이 모두 갔음에 만족했다.


“야. 술하고 술잔 가져와.”


청소하던 공짜 노예들에게 명령했다.


“잠시 다녀올 테니 사고 치지 말고 있어라.”


공짜 노예가 가져온 술과 술잔을 챙기고 떠났다.

사무엘이 뒤돌아서 걷는 걸음 따라서, 허리춤의 칼이 흔들렸다.

그 또한 여관에서 멀어졌다.

깊은 숲속으로 향했다.


“캬하. 술맛 좋다.”


숲속 개울가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흙으로 빚은 하얀색 술잔에 파란 하늘이 비쳤다.

이제는 옷을 많이 걸치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

벌써 날이 풀렸다. 애초에 이쪽 지역은 겨울에도 땔감 없이 살만하다.

짧은 겨울을 버틴 푸른 나무들이 바람을 따라서 흔들렸다.


-사무엘. 미안해요. 저는 미움을 받아도 어쩔 수 없겠죠?


그러던 와중, 불현듯 떠오른 지난 밤의 기억으로 입 안이 메말랐다.

모두가 잠든 뒤에 한아와 단둘이 나눴던 통화 내용이었다.


“쯧. 술맛 없게.”


사무엘은 또 한 번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비우고 나면 또 한 번 술잔에 새로운 술을 채웠다.


“나참. 그러게 그냥 잊으면 될 것을. 왜 굳이 사서 고생해서···.”


흐르는 개울을 빤히 바라봤다.

작은 물고기가 튀어 오르고 들어갔다.

그러나 튀어 오른 물고기를 보지 못했다.

개울에 비친 지나간 기억만 회상했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여인과의 추억이었다.



*****



“자. 이거 받아.”

“이게 뭐예요?”


사무엘이 밤새도록 정사를 치르고 비몽사몽인 한아를 깨웠던 때의 기억이다.

무방비한 들어서 데운 물로 씻겼다.

그 뒤에는 콩알만 한 녹색 열매를 손안에 쥐여주었다.

하룻밤 상대에게 녹색 열매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피임약이야. 딱히 이건 부작용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한아가 좋은 여자라는 점만 높이 평가했다.

너무나도 좋고 사랑스러운 여자였기에, 자신 같은 용병과 연관되어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고 여겼다.


“그. 뭐냐. 밤새 그렇게 했으니까 문제가 생길 거다.”


옛날에 선물 받았던 약을 그녀에게 주었다.

관계 이후에 생기는 생명의 싹을 미리 대비하기에는 효과 만점이었다.


“···이걸 먹으면 평상시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평소처럼 굴면 돼. 나도 여기 있던 일 전부 비밀로 할 테니까.”


이 제안은 오로지 한아 그녀를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편이 귀족 아가씨에게 이롭기에 배려했다.

아무래도 귀한 가문의 자제이니까. 자신은 한 곳에 얽매이지 못하는 글러 먹은 용병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면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사무엘.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녹색 열매를 보며 슬프게 웃던 한아의 얼굴.

말을 들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던 거 같다.


“한아야!”

“사무엘! 한아를 어디로 데려가셨던 겁니까!”


사무엘과 한아가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이 격하게 반겼다.

대충 나들이 갔다가 길을 잃었다고 설명하고, 아무렇지 않게 평상시로 돌아갔다.

아니, 평소처럼 돌아간 줄 알았다.

한 달 뒤. 밤을 보낸 이후 발걸음이 끊겼던 한아가 돌연 찾아오기 전까지는.


“떠나주세요. 사무엘.”

“뭐?”

“어디든 좋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주세요.”


갑작스러운 결별 선언에 사무엘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당황스러움과 별개로 순순히 짐을 쌌다.

역시 하룻밤 보낸 남자랑 같은 집 안에 있는 게 불편할 테니까.

단순하게 미움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무엘, 사랑해요. 그러니까 당분간 돌아올 생각하지 마요.”


한아는 미련을 털어내는 말과 함께 배웅했다.

은화가 잔뜩 담긴 주머니를 손에 쥐여줬다.

이때는 한순간 주머니를 내동댕이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하지만 마주 본 한아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얌전히 떠났다.


“나참. 이렇게 안 해도 비밀로 해줄 텐데.”


짤랑짤랑.


주머니를 공중에 던졌다가 받았다가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발길을 재촉하다 보니 금방 고나라의 국경에 다다랐다.


“자. 아들놈 혼자서 잘 지내나 만나러 가볼까.”


여기를 지나면 그가 알던 문화권으로 돌아간다.

이제 그에게 동방의 문화를 생각할 요소는 옷과 돈주머니 정도밖에 없었다.

몸에 난 잇자국과 손톱자국도 거의 다 사라졌다.

미련도 금방 사라질 줄 알았다.


“저, 정말로 사, 사무엘 이그나이트이십니까?!”

“어. 그래 형이야. 보초 서느냐고 고생하네.”


국경의 경비병이 신원 조사했다.

사무엘은 고생하는 경비병에게 은화 한 닢 쥐여주려 했다.


“뭐야. 왜 이게 여기에 있어···?”


그러나 주머니를 열자마자 제자리서 굳었다.

일전에 열었을 때 보이지 않던 물체가 주머니 안에 있었다.

녹색 열매를 집어서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

틀림없이 그가 준 녹색 약이었다.


“사무엘!”


그때였다.

하늘에서 용 한 마리가 날아왔다.

감시탑보다 훨씬 큰 용이 지상에 내려오자 바람이 세게 불었다.


“한아를. 내 딸을. 대체 어떻게 한 것이야!”



*****



“노인네 녀석. 쓸데없이 목청만 좋았지.”


사무엘은 술잔을 뒤로 젖혔다.

쓴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우리 집안의 귀한 딸에게 손을 댈 수 있습니까!”


국경을 넘기 전에 짧은 만남이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사무엘을 회유할 목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무엘이 몇 마디를 뱉자, 본래 목적도 잊고 노발대발 역정을 냈다.

그들 사이에 차마 입에 못 담을 말들이 오갔다.


-사무엘. 당분간 돌아올 생각하지 마세요.


사무엘은 화을 받는 와중에도 쓰게 웃었다.

가문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대신 떠나기 전에 들었던 한마디만 몇 번이고 떠올랐다.

그 순간 들었던 말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하룻밤 사랑을 나눴던 여자는 모를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겁니까!”


부탁하나 지키겠다고 가문의 장로들에게 별의별 욕을 다 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한아가 부탁했던 말을 들어주었다.

이 모든 일을 제 책임인 것처럼 미움도 자처하였다.

미움받는 건 익숙하기에,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만 향하도록 하였다.


“당신에게는 실망했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얼굴 붉히며 자리를 떠났다.

대강 여기까지는 여관에서 한 이야기로 유추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한 가지.

한아도, 영천도 모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



“방금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고나라의 국경을 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사 몇 명이 사무엘의 주위를 둘러쌌다.

기사가 아니라 무사다.

이곳에서 볼일 없는 족속들이었다.


“오해하지 말게, 사무엘 공. 나는 단지 공에게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으니.”


숲속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입고 있는 옷이나 연배 그리고 태도로 보아 대충 한아가 속한 가문의 장로 중 한 사람임을 직감하였다.


“사실 나는 그대가 지닌 물건을 원하네. 한아가 약을 받고 그걸 다시 돌려줬다고 들었거든. 그 약을 이리 내놓게. 그러면 우리는 순순히 물러나겠네.”


싸아-


겨울의 추위가 차라리 따뜻할 분위기가 이어졌다.

항상 장난스러운 태도를 유지한 사무엘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걸 왜 네가 찾냐?”

“아. 오해하지 말게. 내가 따로 쓰는 게 아니라 한아에게 먹일 것이니.”

“그러니까 왜 내 약을 받아서 그 여자에게 먹일 생각하냐고.”

“그야 그 계집이 어지간히 고집이 심해야지. 첫 시도에 성공했다면 좋았을 텐데. 한 번 실패하고 나니 먹는 것에 조심스러워져서 말이지.”


실패. 먹을 것.

자세한 사정을 듣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하. 어이가 없어서.”


손의 뼈마디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낯선 이를 대하는 감정은 점점 차가워졌다.

또 한편으로는 늙은이의 행보에 기가 찼다.


“이미 시도했다가 실패했어? 그러면 안타깝게 됐네. 이건 남자의 씨앗만 죽이는 약이야. 이미 아기가 자리 잡기 시작한 이상 효과가 없거든.”


장로의 계획을 조롱하며 녹색 열매를 꺼내서 보여줬다.

그가 독대한 목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늘에 던졌다가 받았다.


“건방진 것.”


그게 화근이었다.

화살 하나가 날아와 무방비한 등에 박혔다.


“윽!”


화살을 맞은 몸이 비틀거렸다.

장로의 세력은 눈에 보이는 무사가 전부가 아니었다.


두두두두두두두.


순식간에 쏘아진 화살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하늘을 채운 화살 비가 사무엘의 몸과 바닥에 잔뜩 박혔다.


“쯧쯧, 우둔한 것.”


화살 비가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무엘이 쓰러졌다.

장로는 화살로 고슴도치가 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게 시장에 굴러다니는 말뼈다귀 같은 놈이 왜 귀한 상품에 손을 대시나.”


엎어진 사무엘의 손을 짓밟았다.

신발로 손을 펼쳐서 녹색 열매를 빼앗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한 번 실패한 이후로 한아가 시도 때도 없이 너를 찾곤 한단다. 그러니 네가 준 약을 보여주면 다른 약도 흔쾌히 받아먹지 않겠니?”

“웃···기지 마. 그런 식으로 아이를 잃으면··· 여자는 망가질지도 모른다고···.”

“오. 아직 말할 기력이 남았나?”


장로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금방 원상태로 눈을 뜨고 껄껄 웃었다.


“그런데 아이를 잃으면 여자는 망가진다고? 오히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일이지. 다들 그 아이가 귀해서 어쩔 줄 몰라 하지만. 글쎄. 솔직히 나는 몇 대에 걸쳐 얻은 귀한 상품을 결혼 장사로만 이용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라는 바가 없네.”


장로는 사무엘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핏물이 흥건한 얼굴 앞에서, 본인의 얼굴을 들이밀고 이죽거렸다.

승리를 자축하고 그를 조롱하고 다시 내려두었다.

볼 일이 이거 하나뿐이었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망가져도 돈 많은 노인과 결혼시키면 된다네. 계집 하나로 이득을 보는 장사가 되겠지.”


약을 빼앗은 장로는 철수를 명했다.

사무엘이라는 용병에게서 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리던 그때였다.


“씨발. 이 새끼고 저 새끼고 아주 나를 호구로 보는구나.”


쓰러진 사무엘이 목소리를 냈다.

사경을 헤맬 이가 멀쩡한 목소리를 냈다.

장로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후웅.


이윽고 들려온 바람 소리에 뒷걸음쳤다

뒷걸음질 치다가 다리가 꼬여서 엉덩방아 찧었다.


“어. 어억···!”


반응이 늦었다.

일상생활에 중요한 오른 손목 아래가 사라졌다.

잘린 손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으, 으, 으아아악-!”

“시끄러워. 손 하나 잘린 일로 소리치지 마.”


칼을 쥔 사무엘이 잘린 손을 밟았다.

제 손을 밟은 것처럼 짓이겼다.


“내 여자를 망가뜨린다는 망언을 퍼붓는 놈을. 내가 그냥 보내 줄 줄 알았냐?”


장로는 손목을 부여잡은 채 눈을 시뻘겋게 떴다.

충혈된 눈으로 수하들에게 외쳤다.


“감히 내 손을! 무사들아, 놈을 살려두지 마라!”

“좋아. 정신 회복이 빨라서 좋네. 아까 하던 이야기마저 해 볼까?”


철수를 준비하던 무사들이 다시 검을 뽑았다.

은신한 궁병들은 숲의 한 방향에서 화살을 쏘았다.

이번에도 화살이 날아가서 사무엘의 몸에 정확히 박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멀쩡히 서 있던 나무 하나가 윗동 채 잘려 나갔다.


“누굴 병신 호구로 알아? 한 번 맞아줬으면 됐지. 뭘 좋다고 쏴 재끼고 있어?”


사무엘이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어느새 모든 상처가 회복되어 있었다.

스킬에 의한 회복이었지만 죽어가던 남자가 멀쩡히 살아난 모습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상황은 역전되었다.

수월히 진행된다고 여겼던 계략이 난관에 봉착했다.

장로와 무사들은 이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용병 하나가 전신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날뛰었다.


“괴, 괴물···.”


장로는 숨을 헐떡였다.

어느새 주변에 살아있는 이는 두 사람이 다였다.

죄다 이등분 삼등분이 된 채 바닥을 뒹굴었다.

단신으로 수십의 무사를 처리하고도 멀쩡한 괴물이었다.

장로가 보는 사무엘의 두 눈은 피보다 더한 붉은빛을 띠었다.


“그래, 나 괴물 새끼야. 괴물인 줄 알았으면 알아서 사렸어야지.”

“컥!”


장로의 턱이 걷어차였다.

사무엘은 뒤로 넘어진 장로를 내려보다가, 가슴 위로 발을 올렸다.


“아니. 생각해보니 열 받네?”

“끅. 끄으윽!”

“너는 내 여자도 아니고. 심지어 그냥 여자도 아닌 데. 사내새끼가 대체 뭘 믿고 나를 건들이고 지랄이지?”

“끄아아아악!”


우드득-


발에 힘을 주니 장로의 흉곽이 내려앉았다.

입에서 피가 뿜어지고 코피가 흐르는데도 여전히 발을 떼지 않았다.


“나보다 한두 살은 더 먹었을 새끼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 어린 애를 건드리고 지랄이냐고”


콰드드득.


장로의 두 눈과 콧수염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찼다.


“쿨럭. 사, 살려···.”

“아. 걱정하지 마. 안 죽여. 나 회복약 있어. 걱정하지 말고 아파해도 돼.”


한쪽은 처절한 모습에 반해, 한쪽은 여유롭게 행동했다.


“사, 살려주시오···.”

“안 죽인다니까? 오히려 네가 원하던 선물도 줄 테니까 나중에 갚아라?”


사무엘은 허리 가방에서 회복약을 꺼냈다.

장로의 몸 위로 붉은 액체를 쏟아붓고 빈 병은 내던졌다.

그러고 나서 덜덜 떨리는 턱을 붙잡았다.


“야. 그거 알아? 이 약 있잖아. 이거 난나 오하라 그년이 준 거야.”

“컥. 커흑. 대, 대체 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오! 하라는 다 할 테니 제발 목숨만큼은··· 허읍!”

“네가 원하던 약이야. 꼭꼭 씹어서 삼켜. 뱉으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장로가 반항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입이 다물려서 녹색 약을 씹어 삼키게 됐다.

녹색 열매를 다 씹어먹은 장로는, 제발 목숨만큼은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너. 자식은 있냐? 거짓말하면 죽는다?”

“어, 없소. 우리 가문은 자식이 귀한지라 나 같은 자가 비일비재하오.”

“그래? 그러면 걱정하나 덜었네. 내가 준 약이 또 엄청 신비하거든.”


사무엘은 씨익 미소 지었다.

장로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에 덜덜 떨었다.


“그년 말대로라면 남자 안에 있는 남자 씨앗도 싹 다 죽인다더라. 그나마 다행인 건 약의 효과가 짧은 기간만 지속된다는 정도?”

“가, 감사하오. 다, 다시는 그대를 귀찮게 하지 않겠소.”

“그래. 그래. 감사해야지. 네 오랜 걱정을 덜어줬는데 말이야. 아 그리고 한아 그 여자에게도 손대면 죽는 거 알지?”

“며, 명심하겠소. 다시는 근처에도 가지 않겠소.”


장로의 얼굴이 밝아졌다.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그의 말에 복종할 것을 거듭 맹세했다.


“야. 아니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

“예? 커윽!”


또 한 번 흉곽 위로 발이 올라왔다.

장로의 얼굴에 두려움이 다시 떠올랐다.

햇빛과 등진 사무엘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네가 앞장서서 누구도 그 여자에게 손을 못 대게 해. 내가 나중에 한 번 들릴 거거든? 그런데 그때 내 아이가 없다? 남자와 함께 사는데 울고 있다? 그때는 너희들 다 죽는 거야. 용제고 상장군이고 나발이고 너희 가문 통째로 멸족시킬 거라고.”


장로의 턱이 따닥따닥 맞물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신체적인 아픔은 지금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아, 알겠소. 하, 한아를 내 자식처럼 보살피겠소···!”


똑바로 직시하는 사무엘의 눈빛에 공포를 느꼈다.

살벌하다 못해 구역질이 나는 살기가 뼛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밀폐된 방에서 타오르는 불씨가, 언제 모두를 불태울지 겁먹었다.


“그래그래. 지금 마음 먹은 대로만 해. 한 가문이 멸문한 이유에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면 안 되잖아?”


완벽하게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가 정해졌다.

피식자는 그에게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포식자의 붉은 눈에는 언제든지 이 말을 실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담겨있기에.

한 가문의 높으신 장로조차 배신과 거절의 마음을 깔끔히 접었다.



*****



“쯧. 술맛 다 버렸네.”


아직 숲에 자리한 사무엘은 혀를 찼다.

지난 기억의 늪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험악하던 회상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개울가에 앉아서 옛 기억이나 돌아보는 한심한 남자만 있었다.

남자가 바로 사무엘 자신이다. 그 사실에 짜증이 나서 미간을 찡그렸다.


“어쨌든 그렇게 됐다. 너보다 어린 새엄마를 소개해주려 했는데. 욕이든 절연이든 다 들을 생각으로 왔는데 그럴 수 없게 됐네.”


혼잣말하며 술병을 거꾸로 세웠다.

술병은 이미 텅 비었다.

그래도 최대한 술을 털은 뒤, 개울 앞으로 다가갔다.


“괜히 어린 동생에게 질투하지 말고. 어른처럼 행동해. 알겠어?”


개울 위로 술잔을 띄웠다.

흐르는 개울을 따라서 술잔이 아래로 떠내려갔다.

사무엘은 시야에서 술잔이 사라질 때까지 개울 앞을 지켰다.


“진짜 여기서 여관이나 해야 하나···.”


일어나서 허리를 폈다.

떠오르는 근심에 붉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공식적인 은퇴는 안 했지만 사실상 은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남은 삶을 먹고 자고만 할 수는 없으니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며칠 손님을 받아본 결과, 생각보다 여관 일도 잘 맞는 거 같아서 고민됐다.


-사무엘. 언제 한 번 와주세요.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건 너무 가엾잖아요.

-사무엘. 언제든지 우리 가문을 방문해줘.


문득 떠오른 기억으로 고민을 멈췄다.

턱에 손을 댄 행동 그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오랜만에 한 번 얼굴이나 보러 갈까.”


술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울가의 손님은 왔던 길로 다시 사라졌다.

그래도 숲은, 개울은 모든 걸 보고 있었다.

대륙의 강자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또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했다고. 아주 오래전 붉은 머리 남자가 이곳에 들렸음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용사와 관련된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작가의 tmi: 녹색 열매는 엘프들이 애용하는 열매다. 여성이 섭취할 경우 삼 일 정도에서 효력이 그치지만, 남성이 섭취할 경우 삼십 년 이상 유지된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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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154화 전사의 나라 24.04.22 5 0 12쪽
186 153화 변하지 않는 24.04.19 6 0 25쪽
185 152화 변하지 않는 24.04.15 5 0 13쪽
184 151화 사막의 나라 24.04.13 6 0 15쪽
183 150화 사막의 나라 24.04.10 6 0 17쪽
182 149화 사막의 나라 24.04.08 6 0 16쪽
181 148화 사막의 나라 24.04.05 6 0 21쪽
180 147화 사막의 나라 24.04.03 7 0 12쪽
179 외전 다섯 번째 용사 終 24.04.01 8 0 31쪽
178 외전 다섯 번째 용사9 24.03.29 6 0 13쪽
177 외전 다섯 번째 용사8 24.03.27 7 0 16쪽
176 외전 다섯 번째 용사7 24.03.25 7 0 28쪽
175 외전 다섯 번째 용사6 24.03.20 5 0 21쪽
174 외전 다섯 번째 용사5 24.03.18 6 0 20쪽
173 외전 다섯 번째 용사4 24.03.15 10 0 19쪽
172 외전 다섯 번째 용사3 24.03.13 6 0 18쪽
171 외전 다섯 번째 용사2 24.03.13 7 0 14쪽
170 외전 다섯 번째 용사1 24.03.08 7 0 13쪽
» 146화 십강 사무엘 24.03.06 5 0 25쪽
168 145화 십강 사무엘 24.03.04 8 0 17쪽
167 144화 십강 사무엘 24.03.01 9 0 20쪽
166 143화 십강 사무엘 24.02.28 12 0 12쪽
165 142화 십강[十强] 24.02.26 10 1 14쪽
164 141화 십강[十强] 24.02.23 8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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