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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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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4.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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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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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십강 사무엘

DUMMY

144화 <십강 사무엘>



아침이 밝았다.

한겨울의 냉기가 사라지고 봄 내음이 반겨주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캣니스가 제일 먼저 미주친 사람은 기둥에서 풀려난 남자 영천이었다.


“영천 님. 좋은 아침이에요”


영천은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터벅터벅 밖으로 나갔다.

캣니스는 전날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그 행동 원리를 이해했다.

사람 하나 백치가 된 일이 전날 밤에 있었다. 하루아침 만에 정신 차리기에는 심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야. 잘 잤냐? 잘 잤겠지. 사람 하나를 쓰레기로 만들어놓고.”


다음으로 캣니스가 본 사람은 사무엘이다.

사무엘의 얼굴은 지난밤에 시달린 앙금이 남아있었다.

전날 밤에 다 같이 그를 쓰레기로 몰아세웠고, 그는 쓰레기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한참 동안의 대치 끝에 피해자인 영천의 여동생 한아와 연락했다.


“사과는 됐어. 결국 그 여자의 부탁을 거절한 건 맞으니까.”


당사자와의 연락 끝에, 그에 관한 루머는 오해로 풀렸다.

사무엘은 전날에 있었던 일로 화를 낼 수도 있지만 마음씨 좋게 넘어갔다.

애초에 지금 건성건성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 이 일을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보인다.

그런 어중간한 태도는 한아와의 관계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됐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래도 사무엘 님과 오해를 풀어서 다행이에요.”


캣니스는 상쾌한 아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해를 풀고 관계에 진보가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사무엘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현재 그들의 관계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를 알려면 전날로 돌아가야 한다.

영천의 귀한 여동생인 한아와 이야기했던 지난 밤의 시간으로.



*****



전날 밤.

사무엘의 죄질을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와 연락했다.

영천이 품에서 통신석을 꺼내어 사건의 당사자를 불렀다.

통신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건너편과 연결됐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쪽 나라 특유의 미형인 여자가 나왔다.


“오라버니. 제가 거듭 말씀드렸잖아요. 이 아이는 제 선택으로 가진 아이라고요.”


영천의 여동생인 한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제일 먼저 들은 말이었다.

그들은 사건의 경위를 영천이 아니라 한아에게 들었어야 했다.


“후우. 그래요. 제가 어째서 그와 만났는지 들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영천이 고집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자, 한아는 마음속에 담아두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금지옥엽 이쁨받으며 자란 한아의 일생이 과연 어땠는지. 어째서 사무엘과 관계를 한 건지를 말이다.


“배부른 소리라는 건 알지만. 제 어린 시절은 유복할지언정 행복하진 못했어요.”


한아는 모든 일의 발단인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사치 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옥이 박힌 목걸이도, 비녀도, 고급비단으로 짠 옷도, 하물며 당혜도 넘쳐났다.


“아마 여태까지 받은 선물을 모두 계산하면, 좋은 저택 하나 사고도 평생 먹고살았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고급 선물을 넘치도록 받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마음에 둔 선물은 없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에 안 차서가 아니다. 조금만 선물이 헐면 버리라는 할아버님의 명령으로 인해 버려졌다.

방 안에는 미처 정을 주지 못한 채 버려질 물건들만 가득했다.

한 달은커녕 일주일이면 사라질 것들이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어요. 제 삶의 행복은 제가 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요.”


과거를 돌아보는 한아의 얼굴은 서글펐다.

한때 선물이 버려지는 일이 싫어서 반항한 경험을 말했다.

그때 한아의 할아버지는 귀한 딸이 쓰레기를 안고 있는 일을 못 보겠다며 불태웠다.

좋아하던 인형이 잿더미가 됐다.

그때부터 가족에게 반항하기를 포기했다.

눈앞에서 애장품이 불태워지는 것 보다는 차라리 다른 시종에게 보상으로 주는 게 낫다는 걸 알았다.

어려서부터 남의 잣대로 마음을 포기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저보다 못한 아이가 많으니까. 저는 이 집안에 태어난 걸 감사히 여기고 가족에 충실해야 한다고 교육받았어요.”


겉으로는 화목한 가족 놀음.

하지만 속내는 애정이 결핍된 채 썩어갔다.

어른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지만 빈 마음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일방적인 사랑을 받는 시간은 열다섯의 나이까지 흘러갔다.


“어느날 할아버님과 아버지께서 어느 날 제 남편감을 데려왔어요. 갑작스러운 결혼도 선물과 마찬가지였어요. 제 마음과 의견은 중요하지 않더군요.”


집안 식구들은 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이야말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다.

한아의 결혼 철학에 대해서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라고 무시하며 진행했다.

가문의 높으신 사람들이 멋대로 정혼자를 정하고, 정혼자에 맞춰서 취향을 강요하며, 끝내 억지로 미래 사돈 앞으로 끌고 가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문득, 한아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떠드는 공간에서 생각했다.

이게 정말 행복한 삶일까 하고.


“다른 건 몰라도 결혼은 아니었어요. 타인까지 제 불행한 삶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집안이 정해준 자신과 결혼하게 될 남자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가문에 얽매여 결혼할 상대가 불쌍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불행한 결혼 생활이 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는 한순간의 직감이 아니었다. 지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예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저는 가문에서 도망칠 생각했어요.”


어렸을 적부터 억눌렸던 반항심이 다시금 불을 지폈다.

나이를 먹은 만큼 예전보다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예전에 제 속마음을 털어냈다가 혼이 난 기억을 토대로, 협박조차 시도하지 못하게 일을 벌일 생각이었다.


-외국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려나.


성인이 되면 높은 집안의 명예와 이름을 전부 버리고, 먼 곳으로 도망갈 예정이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장소에서 소소한 낙원을 꾸리고 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러네요. 제가 처음 보는 이에게 그토록 강한 마음을 품는 건 예상 못했어요.”


계획 실행까지 일 년 가까이 남은 그때.

마음이 죽어가던 때에 우연히 아버지와 영천이 데리고 온 손님과 마주쳤다.

용제와 상장군의 명으로 최씨 가문에 머무르게 된 용병.

한아는 용병을 처음 마주한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보는 순간 알았어요. 저분은 제가 되지 못한 꿈이라는 걸요.”


첫 만남부터 연정의 마음을 품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호기심에 비롯된 호의였다.

하지만 호기심이야말로 그녀의 지난 생을 통틀어 가장 자극적인 요소였다.

용병이 사는 곳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다.


-야. 용병. 바깥 이야기좀 풀어봐.

-또 너냐? 사람 귀찮게 굴지 말고 가라.

-말 안 해주면 저녁밥에 오이 넣으라고 할 거야.

-씨발. 내가 애냐? 오이도 못 먹어? 완전 말투도 생각도 애새끼네.


이런저런 협박과 핑계로 바깥 이야기를 들었다.

그와 세상에 관해서 조금씩 알아갔다.


“아마 멈춰야 했다면 그때였겠네요. 첫 만남 때 얼굴만 보고 관심 가지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후로도 찾아가는 날은 많았다.

그때마다 두 사람 다 투덜거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비가 오는 날에도 찾아가고, 너무 더운 날에도 찾아갔다. 사무엘이 잠깐 나갔다 오면 어딜 갔다 왔냐고 삐지기도 했다.

어느덧 소녀는 세상 이야기보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묻는 횟수가 많아졌다.


-네가 나를 데리고 가 주면 좋을 텐데.


작은 창 앞에서 혼잣말할 정도로 그의 존재가 커졌다.

한 소녀의 호기심이 연정으로 변하고,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피어났다.


“하지만 일장춘몽[一場春夢]. 서쪽 말로 풀면 이루지 못할 달콤한 꿈이란 걸 알고 있어요.”


사무엘을 향한 마음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고 절제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밤에 현실을 바라보자며 스스로 다그쳤다.

어차피 그는 잠시 들렀다 가는 객. 자신도 얼마 안 가서 가문을 버릴 평범한 여식.

계획이 다가오는 한 달 전부터 그에게 갈 발걸음도 끊었다.

언젠가 그가 떼준 벚꽃만 잘 말려서 작은 병 안에 보관하였다.

한때의 추억이라 여기고 간직하였다.


“시간은 흘러서 계획을 실행할 날이 왔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계획 당일이 됐다.

시종의 눈을 피해서 마차에 올라탔다.

미리 매수한 마부였고, 평범한 상자 중 하나로 위장했으니 검문에도 들킬 일 없었다.


“그렇게 어린 저는 가문에서 벗어난 자유를 꿈꿨어요.”


어떠한 억압도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 거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가문에서 벗어나 평범하게 행복해지는 일조차, 제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더군요”


마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이상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순수하게 미래를 그리느라 너무 안일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만약 조금만 주변을 의심했다면 별 수모 없이 그날 밤을 보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요. 저는 마부를 믿었는데. 정작 그는 저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더군요.”


산과 같은 지형을 몇 번 오르내리고 마차가 멈췄다.

한아는 숨어있던 상자를 열었다.

벌써 도착했나 고개를 내밀었더니 흉악한 남자들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들에게 저는 반항 한 번 못하고 끌려갔어요.”


난데없는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부는 저 멀리서 돈을 받고 있었다.

배신감이 용솟음쳤다. 살인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가문의 보호에서 벗어난 무력한 몸으로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였다.


-닥치고 따라와!


처음 보는 남자의 손에 입을 막힌 채 끌려갔다.

그때 몸을 더듬던 감각은 아직도 인상을 찡그리게 하였다.


“그곳은 아주 더러운 장소였어요.”


끌려간 곳은 한눈에 봐도 수상한 장소였다.

커다란 건물 안에 감옥 같은 우리가 나열되어 있었다.

건물 안쪽으로 끌려가는 동안에 수많은 생물을 보았다.

사람을 묶어놓고 욕정 하는 더러운 이가 있고, 취급해서는 안 될 마물들도 목줄을 채워 길렀다.

수십 개의 감옥이 있었는데, 감옥 안에는 허름한 옷차림인 사람들이 있었다.

감옥 안 허름한 옷차림인 사람들은 마음이 죽은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마치 새로운 동족을 보는 눈빛. 불쌍하게 여기는 눈빛.

한아는 그들의 눈빛에서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잠깐만. 한아야.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분명히 저 나쁜 놈에게 속아서 정조를 빼앗긴 것 아니더냐?!”


이야기를 듣던 영천이 끼어들었다.

여관의 누구보다도 지금 이야기에 충격받고 있었다.

그가 알던 사정과 다른 진실에 혼란스러워했다.


“오라버니. 제 이야기를 듣기나 했던 건가요? 대체 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그런 결과를 도출해낸 거죠?”


이내 영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멍청이가 되었다.


“사무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안해요. 모자란 오라버니가 심려를 끼쳤어요.”

“됐어. 이 녀석 멍청한 거 한두 번 보나.”


졸지에 두 사람에게 험한 말을 들은 영천이었다.

그는 죄인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한아는 다시 이야기하려다 눈을 크게 떴다.

미안함을 담은 눈빛으로 그들 사이의 누군가를 보았다.


“잠시만요. 실은 여기서부터는 조금 남사스러운 이야기인지라. 그쪽의 어린아이가 들어도 괜찮을까요?”

“네? 어린아이요?”

“저야 이미 지난 일이고, 사무엘 님과의 추억이니 말씀드려도 상관없는데요.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듣기에는 조금 수위가 있달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 통신석 너머에 있었다.

여관 안의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러다 이내 여사제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네? 저요?”


모인 시선에, 캣니스는 당황하였다.

곧 진실을 깨닫고 크게 반발하며 일어섰다.


“저는 어른이에요! 알 거 다 아니까 게르드 님에게 저를 들여보내라는 말 하지 마세요, 아쿠아 님!”

“어머. 그렇군요. 하지만 고나라에서의 성인은 열아홉 살부터이니···”

“올해로 열아홉 살이에요! 그러니까 이야기를 마저 진행해주시겠어요? 한, 아, 님.”


이 말에 한아는 매우 놀랐다.

그녀의 반응에 캣니스는 또 한 번 상처받아야 했다.


“죄송해요. 원래 서쪽이 신체 발달 시기가 빠르다고 들어왔던지라. 당연히 그 외모면 성년이 아닌 줄 알았어요.”


이젠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말로 된 칼에 푹푹 찔린 캣니스는 기진맥진했다.


“알겠어요. 그러면 계속 이야기할게요.”


한아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



납치된 날은 늦가을이었다.

한평생 따뜻한 방에서만 생활해오던 그녀이기에 얇은 차림으로 밤을 보내면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뜨거워···.’


하지만 지금은 춥다는 생각이 일절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이곳에 납치한 일당들이 먹인 이상한 약 때문이었다.


‘제발 누가 몸에 불을 꺼줘···.’


약을 먹은 이후로 온몸의 감각이 이상해졌다.

한아는 가슴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에서 전신으로 퍼져가고, 머릿속이 녹아내릴 거 같았다.


“오라버니··· 아버지··· 저 좀 살려줘요···.”


가문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으면서 가족을 찾게 되었다.

그 모순을 알지만 혼자서 견딜 수가 없었다.


“흑. 흐흑.”


우는 소리가 나왔다.

산적이 먹인 약은 원래 사람에게 쓰는 용도가 아니기에 독했다.

심지어 한아는 얼마 전에 성년이 된 몸이다. E로 이런 내성을 기른 적도 없으니 몸뿐만 아니라 정신에까지 영향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요···.”


머릿속으로는 약해 보이면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어지러운 정신만큼이나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때였다.


“오, 오지 마!”


약을 먹인 놈들이 다시 나타났다.

목과 발을 붙잡고 팔을 묶으며 제멋대로 남의 몸을 더듬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짜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이다.

몽롱한 정신에서 몇 번이고 그 사실을 자각하며 발버둥 쳤다.


“건들지 마! 건들지 말라고! 나한테 손대지 마!”


온 힘을 다해 반항했다.

하지만 상대는 남자다. 한 명이 아닌 여럿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그녀는 빗자루 하나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여자였다.

심지어 약에 취해있으니 반항은 무의미하다시피 했다.


“제발, 제발 누가 구해줘-!”


남자의 손에 제압당한 채 험한 일이 기다렸다.

이제는 거의 울다시피 외쳤다.


“살려줘! 살려줘요! 누가 제발 저 좀 살려줘요! 제발-!”


처음 바깥으로 나온 세상은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었다.

가족이 경고하던 세상의 무서움을 이리 빨리 겪을 줄 몰랐다.

그래도 이 일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멍청한 선택이 불러온 화였다.

모든 책임을 그녀 혼자서 껴안아야 했다.


“흑. 흐윽. 누가, 누가 제발···.”


마음껏 미워할 대상도 찾지 못한 채 큰 소리로 펑펑 울었다.

발등 앞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가출하지 말 걸 후회하였다.

이대로라면 나쁜 놈들에게 꼼짝없이 겁탈당할 상황이었다.

끔찍한 미래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뭐야? 여기는 돼지우리냐?”


그때였다.

지금 환경과 어울리면서도 낯선 거친 말투가 들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여기 있다고 믿기 힘든 사람이 나타났다.

처음에 한아는 약 때문에 환각이나 환청을 보는 줄 알았다.


“야. 너 뭐하냐? 지금 누구 앞에서 바지를 까는 거야?”


그러나 눈앞에 이어진 건 붉은 선이었다.

현실 같지 않은 감각 속에서 더욱 가짜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여간에 마차에 몰래 올라타서 가출이라니. 귀족 아가씨들의 일탈은 알아줘야 해.”


붉은 작약꽃이 사방에서 피어났다.

꽃이 피자 몸을 압박하던 불쾌한 감각들이 전부 사라졌다.

무슨 요술을 쓴 건지 그들이 전부 쓰러졌다.

그들 대신에 흐트러진 자신을 품에 안은 남자는, 어떤 나쁜 놈들과 다르게 기분 나쁜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야. 살아있냐?”


덕분에 살았다.

최악의 상황을 겪지 않고 살아있다.

한아는 고개를 들어서 은인을 보았다.

붉은 꽃밭 안에 붉은 머리 신선이 있었다.


“야. 정신 차려 봐. 여기 내가 왔다고.”


찰싹찰싹. 뺨을 두들겼다.

요술을 부린 신선의 손길이 닿자, 한때 기분 나쁘던 접촉이 기쁨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신선인가요?”

“뭐? 너, 상태가 왜 이래?”


신선이라 여긴 이가 자신을 걱정했다.

한아는 그 모습에 더욱 시선을 빼앗겼다.

불꽃보다 더 강렬한 눈동자에 정신이 팔렸다. 시선뿐 아니라 마음 전부를 빼앗겼다.


“아니면 구미호···?”


동화 속 구미호에게 홀린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했다.

지금 그녀가 그러했다. 완전히 그에게 푹 빠졌다.

지금껏 이성을 붙잡던 머리가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 거부감은 없었다. 오로지 기쁨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신선님. 신선님. 신선님!”

“야이 씨. 그만 엉켜. 닥치고. 이거나 마셔.”

“네. 입에 넣어주세요.”


한아는 그가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하지만 물이 혀에 닿는 순간에 통증이 일어나서 바깥으로 흘리고 말았다.


“커흡. 죄송해요···. 이상하게 자꾸 목이······.”

“하. 손 많이 가네.”


보다 못한 신선이 직접 약을 들이켰다.

그 광경을 시선 못 떼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돌연 그가 자신에게 입맞춤했다.


“읍-!”


한아는 몸이 굳었다.

무의식중에 입을 닫았다.

그러자 툭툭, 부드러운 물체가 반쯤 닫힌 입술을 건드렸다.

그 재촉에 못 이겨서 입을 열자 타인의 숨결과 약이 숨 가쁠 정도로 흘러들어왔다.


“읍. 으읍. 읏. 후아···.”


입맞춤은 짧았지만 강렬하고 짜릿했다.

언젠가 시종이 말해주었던 경험보다 더 자극이 강하고 중독성 있었다.


“···사무엘?”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한아의 정신이 돌아왔다.

당연히 머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 어? 사, 사, 사, 사무엘?”

“귀신 봤냐? 기껏 구해줬더니 반응이 왜 이래?”

“꺄아아아악!”


한아는 스스로 머리채를 붙잡았다.

약에 취해있었지만 멀쩡히 정신이 남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보인 추태와 생의 첫 입맞춤이 부끄러운 감정을 만들어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비명을 질렀다.


“흐어어어엉! 사무에에에엘!”

“이건 반가워하는 거야? 싫어하는 거야?”


품에 안기는 한편, 모순되게도 얼굴을 최대한 밀어냈다.

반가워하면서 이름을 부르지만, 고개 돌리면 얼굴을 치웠다.


“하아.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사무엘은 지쳤다.

귀한 아가씨의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의 배려에 힘입은 한아는 붉어진 얼굴을 최대한 숨겼다.


“보지 마! 고개 돌려! 계속 고개 돌리고 있어!”

“야. 잠깐만. 너 이러다가 떨어진다?”

“보지 말라니까 왜 자꾸 보는 거야! 보지 말라고. 보지 말라··· 흐어어엉.”

“아니. 넘어진다고!”


찰팍.


넘어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기우뚱한 중심이 바로잡혔다.

그런데 발을 떼기 무섭게 바닥에서 질척한 소리가 났다.

한아는 우는 소리도 멈춘 채 몸을 뻣뻣이 굳혔다.


“히꾹.”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환각 안에서는 꽃이 피었고, 현실에 남은 게 무엇인지를 마주하였다.


“사무엘. 이 사람들···.”

“죽였어. 쓰레기 같은 놈들이니 죄책감 가지지 마.”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좋은 말 하나 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가 해준 말대로 최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무엘이 해준 말이니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 자들이 험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이 자리에 사무엘이 없었더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겪었을 터.

죄책감 느낄 필요 없이 죽어 마땅한 쓰레기들이라고 결론 내렸다.


“저기 사무엘···.”

“응? 야. 잠깐···.”

“미안. 우욱.”


하지만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현장은 끔찍했다.

하필 밤이라서. 횃불에 비친 바닥 위의 참사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우웨에엑.”


차라리 이렇게 약을 토해낼 수 있어서 나을지도 모른다.

해독제까지 토해내는 건 낭패지만 말이다.


“하. 씨발.”


물론 이 모든 참사를 겪은 사무엘만큼 낭패는 아니었다.

우는 한아를 내치지 못한 채 표정이 썩어갔다.

사무엘의 몸 위로 말간 죽이 흘러내렸다.

차마 아래를 못 보고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이 처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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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151화 사막의 나라 24.04.13 6 0 15쪽
183 150화 사막의 나라 24.04.10 6 0 17쪽
182 149화 사막의 나라 24.04.08 5 0 16쪽
181 148화 사막의 나라 24.04.05 5 0 21쪽
180 147화 사막의 나라 24.04.03 7 0 12쪽
179 외전 다섯 번째 용사 終 24.04.01 8 0 31쪽
178 외전 다섯 번째 용사9 24.03.29 6 0 13쪽
177 외전 다섯 번째 용사8 24.03.27 6 0 16쪽
176 외전 다섯 번째 용사7 24.03.25 5 0 28쪽
175 외전 다섯 번째 용사6 24.03.20 5 0 21쪽
174 외전 다섯 번째 용사5 24.03.18 5 0 20쪽
173 외전 다섯 번째 용사4 24.03.15 9 0 19쪽
172 외전 다섯 번째 용사3 24.03.13 6 0 18쪽
171 외전 다섯 번째 용사2 24.03.13 5 0 14쪽
170 외전 다섯 번째 용사1 24.03.08 6 0 13쪽
169 146화 십강 사무엘 24.03.06 4 0 25쪽
168 145화 십강 사무엘 24.03.04 6 0 17쪽
» 144화 십강 사무엘 24.03.01 8 0 20쪽
166 143화 십강 사무엘 24.02.28 10 0 12쪽
165 142화 십강[十强] 24.02.26 9 1 14쪽
164 141화 십강[十强] 24.02.23 7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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