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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이야기

깊은 상흔의 잔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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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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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2)

DUMMY

시초의 마을을 완전히 포위한 뒤, 이틀간 전선을 유지한 것은 흑표군단의 격렬한 저항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


하제르 호수에서 1,352명의 동족들을 지워버렸던 ‘그것’의 재등장을 우려해 주변 마력을 샅샅히 살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초월적 존재의 비개연적인 개입이 일어날 조짐은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아르센과 엘제어는 포위 3일째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엘제어, 만약 여기가 우리 유포레아스 공화국의 수도였다면 어땠을까?”


시초의 마을과 밀림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름 모를 언덕의 정상.

어슴프레 밝아오는 하늘 아래로 과거의 잔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것을 지켜보던 아르센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그리고 그 뒤에 그림자처럼 서있던 엘제어는, 아르센이 눈에 비친 경치가 아닌 다른 감각으로 시초의 마을을 바라보고 있음을 이해했다.


“확실히 마력 환경 하나만큼은 저희 수도보다, 아니 대륙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것 같습니다만.”


그랬다.

마치 연못에 갇혀있던 물고기가 거대한 강물을 만난듯한 상황.

방대한 마력이 빼곡한 나무들 사이를 지나 중앙탑을 향해 끝없이 모여들고 있었고, 때문에 그 힘을 원천으로 삼는 동족들에겐 가히 최고의 환경이 펼쳐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민할 것은 천도(遷都)가 아니라 벨리안느가 이 마력을 이용할 방법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하제르 호수에서의 일이 반복될 수도 있으니.”


“.. 벨리안느가 그 일을 저질렀다고 확신하는 말투인데?”


“정황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틀간의 정찰에서 의장님께서 말씀하신 ‘동족을 말살시킬 수 있는’ 존재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월영군이 위치한 중앙탑은 아직 살피지 못했지. 분명 우리가 모르는 거대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애초에 마력이 이렇게 모여드는 현상도 말이 안되잖아?”


스스로에게 되묻는듯한 말을 끝으로 아르센은 먼거리에서 손톱처럼 보이는 중앙탑을 노려보았다.


마치 발 밑의 궤를 따라 돌던 중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거대한 톱니바퀴를 마주한 느낌.


하지만 그 톱니가 무엇인지, 어디로 향하는지를 지금 고민해봐야 무용했고, 때문에 아르센은 엘제어의 충고를 수용키로 했다.


“아무튼.. ‘그 존재’도 주변에 없는 듯하고, 이정도 마력 환경이면 벨리안느와의 마법전도 훨씬 수월하겠지. 결국 주의할 건 벨로나 정도려나?”


“벨로나 세라트너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녀의 결정이겠지.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우리 동족만큼이나 목적 의식이 뚜렷한 인간인데..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예상대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하겠지요.”


“그럼 다행이지만.. 만약 이곳에서 결착을 내려한다면 꽤나 귀찮아 질거란 말이야.”


물론 아르센의 그 걱정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포위망을 넓게 펼쳐 돌파를 유도하되 결국 월영군을 벨리안느의 족쇄로 만드는 작전.


이후 끝없는 추격을 통해 벨리안느와 월영군이 지칠대로 지쳤을 때쯤, 모두를 일망타진하는 계획이 현재로선 가장 이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벨로나가 전면전을 택한다면 그 의지만큼은 박수칠만 하네요.”


하지만 지난 이틀동안 다른 수많은 가능성 또한 고려했기에 엘제어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전력 차이와 마력 상황. 그리고 월연방국까지의 긴 행군로와 보급 문제까지 생각한다면, 여기서 승리할지는 몰라도 월영군은 결과적으로는 패배할 테니까요.”


“그럼에도 벨로나라면 전면전을 택하지 않을까? 그 혼란을 틈타 벨리안느를 탈출시킬 수 있으니.. 그렇게 벨리안느를 지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라 여기는거지.”


“그건.. 너무 요원한 기대입니다. 결국 그 어디에도 갈곳 없는 그녀는 붙잡히고 말테니까요. 물론 시간이 조금 걸릴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귀찮아질거라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긍정의 침묵.

그렇게 아르센의 자승자박의 말로 대화를 끝낼까하던 엘제어는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아르센의 다른 걱정 또한 파악할 수 있었다.


“뭐... 벨리안느를 다시 붙잡는 수고가 있더라도 저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전면전을 치루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결국 저희를 위협하는 것은 이상(理想)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복수라는, 신기루 같은 이상을 품은 벨로나와 월영군을 제거할 수 있다면 큰 이득일 겁니다.”


“신기루 같은 이상?”


“인간 집단이 품은 이상은 영속될 수 없으니 하는 말입니다. 유한한 삶에서 집단 구성원은 각기 다른 욕심에 따라 움직이며, 결국 집단의 이상은 사라져 버릴테니까요.”


“······”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사욕으로 움직이는 인간들은 결코 저희 땅에 먼저 발을 들이진 않을 겁니다.”


“우리에게서 얻을것이 없기 때문에?”


“예. 냉정히 말해 인간들에게 있어 저희 영토는 큰 매력이 없는 곳이니까요. 아! 그런 점에서 적어도 풍부한 마력과 산림을 갖춘 이곳은 수도로 적절치 않을 것 같군요.”


따라서 벨리안느를 놓쳐 추격이 길어지더라도 그 기간 동안 인간들이 먼저 공격해올 가능성은 낮다.


그 결론을 앞선 천도 이야기와 연결해 마무리한 엘제어는 과연 아르센의 의중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자부할만 했다.


“엘제어. 그럼 영겁의 시간속에서 오직 이상의 실현을 위해 움직이는 우리들은 뭐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어진 질문은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들의 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외 다른 목적을 가지지 못했기에 존재 자체가 의미없는 신기루가 되어버릴까?”


“······”


그 말을 듣고서야 아르센이 앞으로의 일, 벨리안느를 붙잡은 뒤 재개될 무혼혁명보다 더 치열한 전쟁과 그 결말에 대해 고민함을 깨달았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서 일어날 전투에 집중하란 말을 하고 싶었으나, 사실상 벨로나의 결단만 기다리는 상황.

따라서 이 기회에 흔들림 없는 목표를 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엘제어였다.


“의장님. 혹시 노빌리스크에서 해방시켰던 ‘겨울 씨앗’들을 기억하십니까?”


그 물음에 곧장 떠오른 향락을 위해 나열되어있던 동족의 처참한 모습들.


“물론 그때의 의장님의 행동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씨앗들 입장만 놓고보면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들 모두가 도시를 벗어나려다 죽어 버렸는데도?”


“어짜피 그대로라면 인간들의 손에 죽을 때까지 노리개로 살았을테니 그렇게 저항이라도 해본 것이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답을 묵묵히 들으며, 아르센은 어째서인지 엘제어를 만들었던 이유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씨앗들과 저희 동족들의 처지가 근본적으로는 다를바 없다는 점이 중요 하겠지요.”


“어떤 측면에서?”


무혼혁명 후, 그 어떤 인간적인 요소없이 오직 동족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엘제어.


“바로 죽음의 원인이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


즉, 그는 가장 인간적으로 만들어진 아르센의 대립자로서 진정으로 인형(人形)에서 벗어난 존재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시간에 의해 죽음이 확정된 인간들의 발버둥치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저희가 인간이란 사인(死因)에 저항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너무 슬픈 이야기 아냐? 인간을 멸하는데 존재의 의미를 두는 것은?”


“글쎄요... 하지만 적어도 저기 저 월영군들은 저희를 멸하는데 존재 의미를 찾는 듯하니, 그 유사점으로 위안을 삼으시지요.”


“······”


엘제어의 그 말에 아르센이 침묵한 것은 자신의 반면(反面)을 설득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뿐만 아니라, 다른 방해 요소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집단동화(集團同化)를 통해 포위망의 끝자락에서 유의미한 정보 하나가 전달된 것이었다.


“그래.. 그런데 아무래도 슬픈 존재들끼리 의미를 찾기 위한 전투가 곧 시작될 것 같네.”


“그럼 반드시 저희쪽에서 먼저 그 의미를 찾도록 해야겠지요. 어떤 내용입니까?”


이틀 간의 기다림.

아니, 어쩌면 지난 몇 년간 멈췄던 전쟁의 서막을 알릴 소식 앞에서도 전혀 조바심을 비치지 않는 아르센에게 아르센은 짧막한 정보 하나를 공유해주었다.


『모든 전선에서 월영군 이탈 확인』


“이탈? 돌격이 아니라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인 것은 분명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어 엘제어가 머뭇거릴 때,


"엘제어. 찰나의 순간 속에서는 우리나 인간이나 큰 차이가 없어. 그러니 때론 인간들처럼 충동적인 발자취를 남기는 것도 답이 되지 않을까?"


그 말을 끝내자마자 아르센은 언덕 아래로 뛰쳐 내려갔고, 엘제어는 잠시 동안 멍하니 숲풀 사이로 모습을 감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저 멀리 아침 햇빛에 빛나는 중앙탑을 한번 바라본 이후, 아무일 없었다는 듯 아르센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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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일러스트]_인물 소개_벨로나 세라트너 20.05.31 326 0 -
182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7) 23.02.28 11 0 12쪽
181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6) 23.01.04 35 0 10쪽
180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5) 22.10.26 43 0 8쪽
179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4) 22.10.17 37 0 8쪽
178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3) 22.10.13 38 0 11쪽
»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2) 22.09.07 44 0 10쪽
176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1) 22.08.10 37 0 10쪽
175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5) 22.08.02 40 0 14쪽
174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4) 22.07.26 40 1 9쪽
173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3) 22.07.19 50 0 9쪽
172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2) 22.07.12 49 0 9쪽
171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1) 22.06.27 48 0 11쪽
170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4) 22.06.02 40 0 12쪽
169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3) 22.05.23 44 0 10쪽
168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2) 22.05.06 47 0 9쪽
167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1) 22.04.21 41 0 7쪽
16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5) 22.03.23 43 0 12쪽
165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4) 22.03.16 43 0 9쪽
164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3) 22.02.28 45 0 10쪽
163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2) 22.02.14 43 0 8쪽
162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1) 22.02.03 41 0 7쪽
161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0) 22.01.20 39 0 8쪽
160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9) 22.01.10 40 0 9쪽
159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8) 21.12.27 46 0 9쪽
158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7) 21.12.20 47 0 11쪽
157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6) 21.12.03 44 0 11쪽
15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5) 21.11.10 44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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