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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이야기

깊은 상흔의 잔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연재수 :
18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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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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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47,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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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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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7)

DUMMY

“푸하!”


중앙탑 입구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끝에서 에스트는 허리를 젖히며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자신을 내려보는 존재와 눈이 맞았다.


“.. 눈을 깔아야 할 것 같단 말이지.”


새삼스레 느끼게 되는 중앙탑의 거대한 크기와 위압감.

게다가 지하에 있는 정체불명의 마법진까지 생각하자 더욱 위축 될수밖에 없던 그는 그럼에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미엔 엘리느.’


페니탈 사제를 만나기 위해 움직인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미엔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몰아 붙였나.. 그래서 무슨일이 생기는건 사양인데.’


피를로니아 부단장에게 일체주의가 꾸미는 일을 고발하고, 그들의 계획을 막고자 했던 제안.


바르나프 가(家)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엔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하길 바라며 건넨 제안이었으나, 아무래도 큰 부담이었으리라.


때문에 미엔이 페니탈 사제와 함께한다해도 크게 놀랄일은 아니었으나, 에스트의 본능은 그게 끝이 아닐거라 말하고 있었다.


“마력의 눈물이라...”


이곳에서 만들어질 고대의 무언가가 너무나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그로 인해 미엔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일종의 책임감을 다시 느낀 에스트는 숨을 깊게 들여마쉰 뒤, 중앙탑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또다시 붙잡았다.


‘잠깐. 내가 굳이 왜 이런 일을..’


마치 공주가 사로잡힌 성에 혈연단신으로 들어가는 어느 이야기속 주인공이 된 듯한 상황.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그 역할을 맡기 위해선 책임감말고 다른 당위성이 필요했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고, 그렇게 고민하길 수분.


“맞다. 바르나프한테서 책상을 받아야지.”


이 일이 끝나면 바르나프에게 받기로한 집무실 책상으로 간신히 움직일 이유를 찾은 그는 결국 중앙탑 입구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곧, 그 책상을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야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에스트였다.



엄청난 비밀을 지녔을 것 같은 외관과 달리 중앙탑의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때문에 미엔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이, 에스트는 뻥뚫린 바닥의 외각면을 따라 소용돌이처럼 나있는 계단을 통해 지하 동굴로 내려가고 있었다.


처음 이 계단을 내려갔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


무덥고 습하기만 했던 공기는 지하에서 올라오는 정체 불명의 한기로 가득했고, 그 수준은 콧김이 까끌까끌한 콧수염에 얼어서 엉길 정도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여기에 막사를 칠 걸 그랬네.”


더위에 잠을 설쳤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에스트는 곧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전장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계단 위에 살얼음이 깔려 있었기 때문.

여기에 이전에는 무늬에 불과했던 벽면의 마법진이 푸른빛으로 빛나며 살얼음 위를 비추고 있어 더욱더 위험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공평하다면 나름 공평한 승부랄까...’


마법진의 불빛마저 없었다면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때문에 최대한 긍정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 계단과의 승부를 받아들이기로한 에스트는 한걸음씩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래뵈도 혹한의 도시, 월영시 출신 군인이라고.’


그렇게 고향과 소속의 자부심을 걸면서 승부에 집중한 덕분일까?

원래라면 머리 속을 가득 메웠어야 할 매서운 한기에 대한 의구심과 활성화된 마법진에 대한 불안감을 잠시 잊을 수 있던 에스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계단의 끝에서 형태를 갖춘 채 나타난 불안감은 에스트에게 차디찬 현실을 보여주었다.


동굴 바닥으로 이어지는 내려막길 입구가 얼음덩이 같은 물질로 막혀 있는 것이었다.


“이건.. 예상밖인데.”


마치 견고한 성문마냥 빈틈없이 입구를 막아선 정체 불명의 물질.

표면에 손가락을 살짝 갔다댄 에스트는 그것이 얼음덩이가 아닌 어떤 마법 물질임을 확인하고서는 고민에 빠졌다.


‘신체향상을 하면 깰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왔다고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는데...’


하지만 기분 나쁠 정도의 조용함과 월영시의 한겨울이 생각나는 추위, 그리고 활성화된 정체불명의 마법진 등 여기서 더 나빠질 상황도 없긴했다.


“밑져야 본전이지, 뭐.”


그렇게 여태껏 장식에 불과했던 월첨검을 서서히 뽑은 뒤, 다른 손으로 챙겨온 신체향상구슬을 꺼내려던 순간.


뒷편에서 울려퍼지는 익숙한 말소리.


중앙탑 꼭대기에서 지하까지 뚫려있는 그 길고 거대한 구멍에서 미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


“사제님! 정말 뭐가 진실인거에요?”


하늘로 치켜든 고개와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간절한 표정.

그리고 불규칙한 숨결이 만들어내는 새하얀 입김.


마치 하늘 위의 절대자를 바라보며 질문하는 모습이었으나, 미엔의 눈에 비친 존재는 다름이 아니라 5층 높이의 수로 위에 서있는 페니탈 사제였다.


하지만 절대자와 상당히 거리가 먼 그에게 단 한가지,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침묵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 사실은 미엔을 미치게 만들었다.


지하 계단쪽 입구가 막혀있어, 험하고 긴 수로길을 걸어와야 했던 지난밤.


그 힘겨운 노고는 바르나프 가(家)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결과물이었으나, 기대와 달리 수로에 물이 잘 흐른다는 사실 외 여태껏 알게된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제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일체주의를 위한 일이더라도 아무것도 모른채 움직이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고.. 그러니 제발..”


그냥 막사에 있는 편이 최선이었을까?

이로써 일체주의자와 에스트는 물론 스승님에게도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스런 마음이 전달된 것인지, 여태껏 석상처럼 가만히 있던 페니탈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고, 이내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미엔과 얼굴을 마주했다.


“돌아가십시요, 미엔. 여기에서 당신이 해야할 일은 더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미엔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었다.

이윽코 페니탈은 동굴 벽면을 향해 고개를 돌린 뒤, 두 눈마저 감으로써 미엔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엔의 마음속에 절망과 함께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긴 했다.


“···그럼 이것 하나만 알려주시죠.”


고아였던 그녀가 바르나프 눈에 들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같은 일체주의자인 칸타 사제를 죽였지요?”


“······”


입김이 채 사라지기도 전 번개처럼 이어진 미엔의 다음 말.


“같은 길을 함께 했던 자도 쉽사리 죽는 마당에 저 또한 그렇게 죽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잖아요? 안그래요?”


자신의 대범함으로 단번에 핵심을 파고들고자 마음먹은 미엔은 곧바로 페니탈의 반응을 살폈다.


필시 당황하고 있을 그의 눈동자.

그것을 직접 보고 싶었으나, 도무지 수로를 기어 올라갈 방법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찰나.


“미엔.”


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無)의 목소리가 미엔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여기와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지만... 당시와 사뭇 달라진 환경에서 과거의 힘을 재현하려면 꽤나 자극적인 방법이 필요하더군요.”


“.....?”


이해못할 설명과 함께 페니탈은 동굴 벽면을 향해 손을 치켜들어 올렸다.

마치 뻥뚫려 있는 동굴 천장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것을 두팔 벌려 반기는 듯한 모습.


그 뜬금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 바위 경계면마냥 동굴 벽면을 가득 메우는 마법진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린 미엔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당신이라면 좀더 손 쉽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게.. 무슨..?”


그 순간 페니탈의 손길을 따라서 동굴 천장의 마법진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언가가 깨어나듯 땅이 조금씩 흔들렸고,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 중 어느 하나에만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길일뿐, 일체주의를 위한 올바른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 저는 개인의 어긋난 욕심보단 차라리 무지(無知)가 더 낫다고 판단한거죠.”


점차 거칠어지는 땅의 울림에 맞춰 소리치듯 동굴에 울려퍼진 페니탈의 말.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자기 대신 칸타 사제를 택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 미엔은, 이어서 그 선택이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름이 돋았다.


“원래..저를... 죽이려고..?”


넋이 나가 중얼거린 미엔의 말은 페니탈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묵직한 마찰음을 내는 대지의 신음 소리에 이어서 또다른 천재지변 같은 소리가 동굴안을 가득 매웠던 것이었다.


천장의 거대한 구멍과 동일한 넓이의 우물.


그곳에는 본디 깊이를 알수 없을 정도로 물이 차있었으나, 여기에 완공된 수로를 통해 공급된 호숫물로 넘치기 직전까지 수위가 올라온 상태였다.


그랬던 우물안의 물들이 동굴의 마법진이 활성화되자 갑자기 공중으로 치솟은 것이었고, 그 모습은 흡사 폭포가 뒤집어진 듯한 광경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굉음 속에서 정신을 차릴수 없었던 미엔은 이게 꿈이 아닐까했다.


하지만 천장의 구멍 언저리에 부딫쳐 아래로 폭우처럼 쏟아지는 물이 온몸을 강타하며 이것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여기에 동굴 안을 가득 채우던 정체불명의 한기로 일부는 우박이 되어 쏟아졌고, 그렇게 꿈에서 깬 미엔이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수로 아래로 몸을 피하려던 찰나.


새하얀 수증기들과 투명한 물로 가득한 세상에서 너무다 돋보이는 검은 물체 하나.


하늘로 받쳐지는 재물같이 서서히 동굴 천장을 향해 올라가는 그 물체를 목격한 미엔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에스트의 지난 말 한마디.


‘눈씻고 찾아봐도 칸타 사제의 흔적은 못찾겠던데?’


그랬다.

에스트가 찾을 수 없었던 칸타 사제의 시체가 물의 제단과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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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7) 23.02.28 11 0 12쪽
181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6) 23.01.04 35 0 10쪽
180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5) 22.10.26 43 0 8쪽
179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4) 22.10.17 37 0 8쪽
178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3) 22.10.13 38 0 11쪽
177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2) 22.09.07 43 0 10쪽
176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1) 22.08.10 37 0 10쪽
175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5) 22.08.02 40 0 14쪽
174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4) 22.07.26 40 1 9쪽
173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3) 22.07.19 50 0 9쪽
172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2) 22.07.12 49 0 9쪽
171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1) 22.06.27 48 0 11쪽
170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4) 22.06.02 40 0 12쪽
169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3) 22.05.23 44 0 10쪽
168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2) 22.05.06 47 0 9쪽
167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1) 22.04.21 41 0 7쪽
16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5) 22.03.23 43 0 12쪽
165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4) 22.03.16 43 0 9쪽
164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3) 22.02.28 45 0 10쪽
163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2) 22.02.14 43 0 8쪽
162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1) 22.02.03 41 0 7쪽
161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0) 22.01.20 39 0 8쪽
160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9) 22.01.10 40 0 9쪽
159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8) 21.12.27 46 0 9쪽
»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7) 21.12.20 47 0 11쪽
157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6) 21.12.03 43 0 11쪽
15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5) 21.11.10 44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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