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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이야기

깊은 상흔의 잔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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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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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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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4)

DUMMY

그렇게 카니엘은 벨리안느의 얼굴을 한번 본 뒤, 앞으로 걸어나가며 검날을 치켜 세웠다.


신체향상을 할 수 없어 압도적으로 불리했지만, 곱게 벨리안느를 빼앗길 마음은 없었기에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니엘의 전투 의지가 무색하게 아르센은 싸울 마음이 없는지 더 이상 접근해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인형들이 널부러진 가장 자리에서 물끄럼히 카니엘을 바라볼 뿐.


그렇게 의도를 알수 없는 시선과 마주하며 적대감을 드러내던 것도 잠시,


역시 상대는 사사로운 감정 따윈 신경쓰지 않는 인형임을, 그것도 직접 나설 필요없이 패잔병의 최후를 지켜볼수 있는 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런 씨발!”


새로운 국면에 대한 카를의 감상평을 뒤로한 채, 시선을 조금더 뒤로 옮긴 카니엘은 ‘죽음’이란 결말을 확인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진 의미없는 질문 하나.


‘신체 향상 없이 오백기의 멀쩡한 인형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후속대로 보이는 그들이 오열을 맞춘채 모래변으로 걸어나오는 모습 앞에서 질문에 대한 답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아니, 전투는커녕 필사적으로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할 지경이었고, 그럼에도 그 어떤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을 때.


“온다!”


잠시라도 멈춰있길 바랬던 500기의 인형들이 질주를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져 발버둥치는 같은 동족들은 무시한 채, 오직 일행들만 노려보며 진격해오는 인형들.


숫적으로는 물론, 번뜩이는500개의 검광만 볼 수 있는 절망적인 전투력 차이 앞에서 카니엘은 기적을 바라는 것 말고는 할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간절히 바랜 기적은, 벨리안느나 벨로나라는 현실 속 인물, 또는 달의 여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전자보다 현실적이며, 후자보다 초월적인 존재.


‘정체 불명의 존재가 다시 나타다면..’


그 순간 일행들을 꿰뚫어 버릴 듯 질주해오던 인형들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멈춰섰다.


그러더니 절대 불변할 것 같았던 검날과 시선의 방향을 일제히 호수 방면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정말 그 존재가 돌아온 것일까?


재빨리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모래변에 검은 그림자가 스치는듯하더니 큰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얼굴을 바닥에 파묻고 있는 상황.

이어서 등을 짓누르는 강한 힘과 뒷목에 닿는 검날의 서늘함에 꼼짝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살짝 움직여 베여나온 진득한 핏방울이 땀과 함께 목을 타고 흐를 때.


“월영군? 사람이냐?”


달의 여신, 혹은 벨로나나 벨리안느, 그렇다고 그 존재도 아닌 평범한 남자의 목소리.


그럼에도 기적의 음성과 다를바 없는 그 말에 흔쾌히 대답하려던 찰나, 거친 손길에 의해 하늘을 보게된 카니엘은 곧 낯잊은 얼굴과 마주했다.


긴 갈색 머리와 훨칠한 콧대.

그리고 투구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의 선한 눈매와, 그와 대비되는 강렬한 푸른 눈동자.

여기에 새로 받은 보급품처럼 완벽하게 정비된 무구들과 오른쪽 견갑에 새겨진 흑표범의 얼굴.


그 충분한 증거들과 함께 누군가의 외침으로 눈앞의 존재가 누군지 확신할 수 있게된 카니엘이었다.


“부단장님! 여기 벨로나 단장님을 닮은 자가..!”


그랬다.

벨로나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사람.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에서 흑표 군단 절반을 통솔하고 있는 피를로니아 가우스 부단장이 카니엘을 향해 검날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카니엘은 주변 모두가 똑똑히 들을수 있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전 월영시 수색 독립대대 소속 카니엘 시닉스라 합니다! 여기 제 일행들은 월영군 총군단장 벨로나 세라트너님을 따라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월영시에서 왔습니다!”


그 외침으로 목에 겨눠진 검날의 살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정확한 소속명과 현월수의 존재, 무엇보다 벨로나 세라트너라는 이름이 카니엘의 말에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피를로니아 부단장님! 인형들도 인형들이지만, 단장님 상태가...”


이어서 통성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피를로니아는 망설임 없이 검을 거두고 명령을 내렸다.


“1중대! 이중 삼각진형으로!”


그 외침과 함께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카니엘의 목을 겨누던 피를로니아의 검날 또한 500기의 인형에게 향했다.


“.. 우선 일행들과 물러나시길.”


자초지종을 듣기보단 눈앞의 인형들에 집중하려는 듯, 그 말만 남긴 뒤 전방으로 향한 피를로니아.


벨로나와 겹쳐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카니엘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앞으로 신속히 나아가는 월영군 사이로 다행히 별탈 없어 보이는 일행들.

특히 의무병들이 벨로나의 상태를 살피는 것에 큰시름을 놓은 카니엘은 이어서 전황을 살폈다.


피를로니아와 함께 나타난 월영군 병력은 1개 중대 규모인 100여명.

여기에 호수 북쪽 방면에서 1개 중대가 추가로 접근해오고 있어 총 200명의 병력이었고, 500기 인형을 상대로 열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비할바가 아니었다.


“카니엘. 저기 있는 인형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줘라. 그러니 전면전은 절대 해선 안된다고.”


그 순간, 카를이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소리쳤고, 동시에 잠시 비쳤던 한줄기 희망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느낀 카니엘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그렇게 참사를 막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던 찰나, 카니엘의 시야 속에 들어온 낯익은 형상.


좀 전까지 쓰러져 있던 벨리안느가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듯 몽롱한 표정으로 모래변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벨!”


하지만 그 부름에도 벨리안느는 모랫바닥만 멍하니 응시했고, 반갑게 다가가려던 카니엘 또한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느낌.

인형과 전투를 할 때마다 목숨을 위협하곤 했던 마법의 위화감이 벨리안느 주변에 감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 그녀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모래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쳤고, 거대한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주변을 지배했다.


“세상에... 난나의 힘이..”


그 힘에 섣불리 다가설수 없었던 카니엘은 뭔가를 파악한듯 중얼거린 테일리아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거야? 아까 마력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벨이.. 난나의 힘을 품고 있는 것이다. 사람 몸으로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는데..


“마력을 품고 있다?”


신향구도 아니고 벨리안느가 마력을 품고 있단 말에 얼이 빠진것도 잠시,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은 카니엘이었다.


인형과의 대치로 팽팽히 긴장하고 있던 월영군들이 벨리안느 주변에서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이었다.


“제 일행입니다! 아마 인형들을 물리치려...”


그렇게 경계하는 월영군 앞을 막아서며 적극적으로 변호하던 카니엘은 그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손쓸틈도 없이 벨리안느가 20보폭 가까이 공중으로 떠올랐던 것이고, 이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장면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500기의 인형과 월영군 사이의 중간 지대.

그곳에 널부러져 있던 수백의 인형들이 공중으로 뜬 벨리안느를 따라 홀린듯 일어서더니 새로운 대치선을 만든 것이었다.


“벨리안느...”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법 현상이 눈앞에 펼쳐지자 자연스레 위를 올려본 카니엘은 그럼에도 정말 벨리안느가 저 인형들을 움직인 것인지를 의심했다.


'인형이 사람의 의지에 따른다..?'

그 기능적 문제부터 생각하던 카니엘은 그러다 원래 인형은 주인의 명에 따르는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이어서 월영군과 다른 인형을 감시하듯 서 있는 인형들의 모습에서 그 주인과 명령의 의도 또한 확신할 수 있게되는 것이었다.


이 대치선을 넘지 말아달라.


그렇게 양측에 극심한 피해가 발생할 전투 자체를 막으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곳에서 벨리안느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 의지는, 과거 그녀가 인형과 공존이란 이상을 꿈꿔서 생긴 비극처럼 뒤틀려 해석되어 버렸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있던 월영군이 벨리안느를 쓰러진 적을 부활시키고, 진영 후미에서 마법을 시전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해버린 것이었다.


“안돼!!”


그렇게 신체 향상된 몇몇 월영군이 만류하는 카니엘을 가뿐히 제치고 벨리안느에게 돌격하려던 순간.


“모두 대기!”


본능적으로 내뻗는 검조차 멈추는 단호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카니엘은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녀 또한 제 일행입니다.”


현월수에 기대어 서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한 벨로나가 깨어났던 것이고, 그녀의 모습에 어느 때보다 깊은 안도감을 느낀 카니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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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7) 23.02.28 11 0 12쪽
181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6) 23.01.04 32 0 10쪽
180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5) 22.10.26 42 0 8쪽
179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4) 22.10.17 36 0 8쪽
178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3) 22.10.13 37 0 11쪽
177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2) 22.09.07 43 0 10쪽
176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1) 22.08.10 37 0 10쪽
175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5) 22.08.02 39 0 14쪽
174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4) 22.07.26 39 1 9쪽
173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3) 22.07.19 48 0 9쪽
172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2) 22.07.12 48 0 9쪽
171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1) 22.06.27 47 0 11쪽
170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4) 22.06.02 38 0 12쪽
169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3) 22.05.23 43 0 10쪽
168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2) 22.05.06 45 0 9쪽
167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1) 22.04.21 40 0 7쪽
16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5) 22.03.23 43 0 12쪽
»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4) 22.03.16 42 0 9쪽
164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3) 22.02.28 44 0 10쪽
163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2) 22.02.14 42 0 8쪽
162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1) 22.02.03 40 0 7쪽
161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0) 22.01.20 39 0 8쪽
160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9) 22.01.10 39 0 9쪽
159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8) 21.12.27 45 0 9쪽
158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7) 21.12.20 46 0 11쪽
157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6) 21.12.03 40 0 11쪽
15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5) 21.11.10 44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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