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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이야기

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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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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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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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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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9)

DUMMY

자만은 아니었으나, 여태껏 치룬 수많은 전투 속에서 단 한번도 절망이란 감정에 사로 잡힌적이 없었던 벨로나였다.


아니, 딱 한번.

자신의 동생, 시세느 세라트너를 죽음으로 몰고간 필멸지 작전을 제외한다면.


그 어디로 도망칠 곳 없는 광활한 필멸지에서 1개 소대로 100여기의 인형을 상대해야 했던 그 작전.


인형들의 추격 속도를 줄이기위해 한 명씩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지켜봐야했고, 그럼에도 살아남을거란 희망조차 가질 수 없던 순간들.


그리고 지금.

그 작전에서 느꼈던... 아니, 그보다 더 큰 절망감이 벨로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카를! 카니엘! 가까이 오지말되 너무 떨어지지도 마십시요!”

세상이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그렇게 외쳤으나, 자신이 옳은 명령을 내렸는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명령을 검토할 시간 따위 없이 벨로나는 곧바로 눈 앞에서 탄생하는 공포에 대비해야 했다.


두드러기가 일어나듯 인형들의 기폭 마법이 온 사방에서 시전된 것이었다.


그 기폭 마법의 숫자는 어림잡아 수백여개.

작은 동산을 송두리채 날려 버릴만한 위력이었고, 그런 마법 폭격이 수시간 동안 이어졌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명백했다.


“벨리안느!..”


짧은 호흡 후 이어지는 검사의 일격처럼 시전과 거의 동시에 구현되는 기폭 마법.


벨리안느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수 십개의 기폭 마법을 상쇄할 수 있었고, 여기에 샤즐 사제가 기(氣)막을 형성해 어떻게 치명타는 피했던 것이었다.


"크읏. ."


하지만 갈기갈기 찢겨 죽는 상황만 겨우 면할 뿐.


상쇄하지 못한 기폭 마법들이 고막을 찢는 굉음과 살인적인 바람이 되어 일행을 덮쳤고, 그러자 모두는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그 폭력이 무사히 지나가길 빌어야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폭발음.

흙과 나무의 잔재들이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땅위로 쏟아졌고, 그보다 더욱 잘게 부서진 생명의 입자는 구혼을 떠도는 영혼처럼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산 자는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에서 기침을 해대며 주변을 살피던 벨로나는, 이내 좀 전에 보았던 세상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마치.. 그 때의 필멸지처럼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는 황폐한 대지.

여기에 하늘의 태양마저 먼지에 집어삼켜져 악몽 같은 세상.


“다들 괜찮습니까?”


“.... 아직 목숨은 붙어 있네.”


그 악몽속에서 샤즐 사제의 목소리만 들려오자, 심장이 덜컥한 벨로나는 재빨리 벨리안느가 있던 방향으로 내달렸다.


“······”


상단이 박살난 나무 밑동에 축 늘어져 있는 그녀.

옆구리의 상처에서 스며나오는 핏물과 어린아이가 내키는대로 박아놓은 듯한 나무 파편이 당장 눈에 들어왔으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벨리안느,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

그리고 영혼이 새어나가는 듯 힘없이 벌어진 입술.


넝마 인형같은 그녀를 일으킨 벨로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뗐으나 계속된 전투로 힘이 부쳤고, 결국 얼마 못가 부서지는 잔해에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렇게 벨리안느와 함께 미끄러져서 바닥을 구르게 된 벨로나.


한시가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마음 같아선 벨리안느에게 쓴소리를 퍼붓고 싶었으나, 그녀가 이런 상태가 된 이유를 이해 못한 것은 아니었다.



벨로나 일행을 추격해오던 3천의 인형과 그 길목에 있었던 300명의 길리아스 부대.

만일 추격군이 인형들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과 무관한 그들 모두는 무사했으리라.


하지만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그 특성답게 인형들은 마법 연계를 확인하기 위해, 좀더 빠른 추격을 위해서 어마무시한 마법으로 길리아스를 ‘삭제’ 해버렸다.


그렇게 간담이 서늘해지는 마법 폭발과 함께 생긴 구멍 속으로 사라져버린 길리아스 병사들.


마법사가 없어 그 어떤 저항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사라진 그들을 대신해 울음섞인 비명을 내지른 것은 벨리안느였다.


‘순수한 최악의 죄인’


인형에게 희생된 모든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벨리안느에게 눈앞에서 벌어진 300명의 또다른 죽음들은 악몽보다 더한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벨리안느는 카니엘의 위로조차 소용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은 뒤 헤어나오질 못했고, 그나마 무의식적으로 인형들의 마법을 막아주는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벨로나는 그 기적의 끝을 직감하고 있었다.


마법 공격과 별개로 그 어떤 기적도 통하지 않을 인형 추격대의 검날이 점차 다가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었다.


“벨리안느.. 어서!”


그렇게 다시 그녀를 부축한 벨로나는, 그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온갖힘을 다했다.


모래성처럼 부서지는 나무 파편 위를 기어오르고, 벨리안느의 팔을 잡아끌며 나아가는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필사적일 정도.


때문에 이를 꽉 깨물어 벨리안느를 들쳐업으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짜피 필멸지 작전 이후로 내놓은 목숨이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전투에 나서면서도 두렵지 않았고, 무모할 정도의 작전도 수행했으며, 역설적이게도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지금도 칼을 빼들고 최후를 준비하는 편이 그녀다웠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벨로나는 필멸지 작전 당시로 돌아간 것 마냥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반드시 살려야할 사람이 있어서인가.’


등에 업혀있는 소녀가 지닌 목숨의 무게.

마법 연계를.. 벨리안느를 지켜내어 제2의 무혼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함인가? 하지만... 시세느가 죽었던 그 작전도 이와 비슷한 목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보다 같이 살아나가고 싶은..’


벨로나의 그 생각은 끝을 맺지 못한채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뿌연 하늘에 가려졌다.


또렷한 정신과 달리 반나절에 걸친 전투와 신체향상의 여파로 저도 모르게 주저 앉아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며,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터트린 벨로나는 이내 웃음을 싹거두고 큰 소리로 외쳤다.


“카니엘!!”


마력 감지에 쏟아 붓는 인형들의 마법공격을 피해 강제로 떨어져 있었던 카니엘.

그랬던 그의 이름을 벨로나가 크게 외치자, 카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현월수를 탄채 폐허가 된 숲을 가로질러왔다.


“단장님.”


숲의 잔해를 길게 쓸어내며 미끄러지는 현월수와 그 위에서 뛰어내려 벨로나 앞에 착지한 카니엘.


단호한 대답과 함께 손은 쓰러진 벨로나에게 내밀었으나, 그의 눈길은 벨리안느를 살피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난 벨로나는 잠시 카니엘의 시선을 살피다가 뭔가를 결정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곁에서 검날을 보태겠단 그 말.. 다음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


“지금 당장 현월수에 벨리안느를 태우고 여길 빠져나가십시요. 두 사람이 타려면 아마 모든 무장과 짐들을 버려야할 겁니다.”


귀를 의심케하는 말을 한 뒤, 벨로나는 품속에서 신체향상 구슬을 꺼내들며 그 말뜻을 다시 확인 시켜주었다.


“단장님.. 설마..”


신체향상 한계점.

최대 3번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신체향상 마법의 그 마지막을 사용하려는 것이고, 그것은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대로라면 어짜피 추격대에 포위당해 모두가 죽을 겁니다. 그러니 가십시요! 저와 샤즐 사제가 최대한 동쪽으로 유인할테니, 하제르 호수를 끼고 달리십시요. 샤즐 사제!”


그렇게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린 뒤, 벨로나는 곧바로 샤즐 사제를 찾으며 카니엘의 항변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하지만 샤즐 사제가 달려오는 동안에도 카니엘은 축처진 벨리안느를 안은 채 머뭇거렸고, 벨로나는 그런 그의 결정을 돕기 위해 한 마디 더 이어갔다.


“저의 부족함으로 당신의 염원을.. 제게 목숨을 맡겼던 모든 이들의 목표를 이뤄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카니엘.”


카니엘의 눈에 비친 벨로나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망설임이나 절망 대신 바램이 씌여 있었다.

그것이 과거 속 바램인지, 앞으로 희망한 바램인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저처럼 죽은이의 짐을 떠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살아남아 택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을..”


그 순간이었다.


“온다! 오는 것이다!”


폐허 저편에서 울려퍼지는 테일리아의 격앙된 목소리. 그리고..


“이씨발 새끼들이! 덤벼라고!”


300명의 휘하 장졸을 잃은 카를의 분노 서린 외침으로 두 사람은 이 모든 것의 끝을 알리는 인형들이 등장했음을 깨달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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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7) 23.02.28 14 0 12쪽
181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6) 23.01.04 37 0 10쪽
180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5) 22.10.26 47 0 8쪽
179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4) 22.10.17 40 0 8쪽
178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3) 22.10.13 42 0 11쪽
177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2) 22.09.07 49 0 10쪽
176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1) 22.08.10 42 0 10쪽
175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5) 22.08.02 43 0 14쪽
174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4) 22.07.26 44 1 9쪽
173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3) 22.07.19 52 0 9쪽
172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2) 22.07.12 55 0 9쪽
171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1) 22.06.27 50 0 11쪽
170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4) 22.06.02 44 0 12쪽
169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3) 22.05.23 48 0 10쪽
168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2) 22.05.06 49 0 9쪽
167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1) 22.04.21 44 0 7쪽
16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5) 22.03.23 44 0 12쪽
165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4) 22.03.16 46 0 9쪽
164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3) 22.02.28 47 0 10쪽
163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2) 22.02.14 45 0 8쪽
162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1) 22.02.03 44 0 7쪽
161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0) 22.01.20 42 0 8쪽
»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9) 22.01.10 44 0 9쪽
159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8) 21.12.27 50 0 9쪽
158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7) 21.12.20 51 0 11쪽
157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6) 21.12.03 48 0 11쪽
15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5) 21.11.10 4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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