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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이야기

깊은 상흔의 잔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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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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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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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2)

DUMMY

“때문에 어렸을적 벨로나는 귀족집 장녀의 표본처럼 보였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나 예의 바르며, 모난 구석 없는 그런... 하지만 무혼 반란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죠.”


타인의 비극을, 그것도 한때 신세졌던 세라트너 가문의 몰락을 상세히 떠들어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가문 사람들 중 벨로나와 그녀의 동생, 시세느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트리스트 또한 잘 알테였고, 예상대로 그는 이후의 일에 대해 질문했다.


“그래서 결국 그때의 복수심으로 월영군에서 검을 쥐게 된 것인가?”


“물론 영향이 아예 없진 않았겠죠. 하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아닐겁니다.”


“그래?”


“무혼반란 후 입대 전까지 벨로나는 인형에 대한 복수보단 가문 재건을 위해 의약사 공부에 매진했으니 말이죠.”


“······”


“그러던중 당시 소년단에 머물고 있던 그녀의 남동생, 시세느 세라트너가 사전 입대를 한 것이 큰 영향을 줬을 겁니다.”


아무리 바르나프의 지원이 있다고 해도 혼돈의 시기에 고아인 두 자매가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의약사의 길을 택하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아직 교육을 받긴 어렸던 시세느가 당시 보육원격인 소년단에 머물렀고, 그러다 정규군이 되는 조건으로 최소 급여를 받으며 후방을 지원하는 사전 입대병이 된 것이었다.


“물론 누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시세느였겠지만, 벨로나로서는 생각이 많아졌을 겁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의약사란 길을 선택한게 아니었으니...”


그렇게 우애가 도드라지는 두 자매의 선택 중 누가 더 위험한 길을 걷게 될지는 분명했다.

사전 입대란 제도가 생길만큼 그 당시 월영군의 사망률은 지금과 비교할 수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생의 목숨을 담보로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던 벨로나는 그렇게 정규군이 될 수 있는 나이인 16살 생일날 입대를 하게 되었죠.”


“그럼 입대 당시에도 인형에 대한 복수심은 없었단 말인가?”


“...그랬을 겁니다. 전방보단 동생이 정규군으로 편입될 때 도움되도록 행정직 쪽으로 빠지길 기대했었으니...”


“그런데 최전방을 누비며 월영군 역사에 길이 남을 전사가 되었단 말이지.”


이야기가 흥미로운지 살짝 격앙된 트리스트의 목소리.

아니, 호기심뿐만 아니라 이유 모를 기대감이 말속에 섞여 있었고, 그 낯선 반응에 바르나프는 여태껏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마차 구석의 그림자 속에서 상체를 기댄 채, 한 손으로 턱을 괸 그의 모습.

하지만 두 눈은 맹수처럼 번뜩이며 바르나프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에 왠지모를 불길함을 느낀 그는 어서 이 대화를 마무리 짓고자 마음먹었다.


“그럼 역시 지금의 그녀를 만든 것은 ‘필멸지 작전’이라 봐야겠군?”


때마침 그 맹수가 선택한 먹잇감은 벨로나에게 ‘전설’이란 칭호와 동생의 죽음을 안겨준 작전이었고, 이에 바르나프는 여기서 대화를 끝낼 각을 봤다.


“그 사건 뒤, 몇 년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해 어떤 상태였는지는 모릅니다만... 얼마나 자신을 내려놨는지는 들려오는 소식으로 잘 알겠더군요.”


승패에 관계없이 참여했던 전투마다 들려왔던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활약상.

누군가에게는 환호와 전율을 불러 일으키는 영웅담이었지만, 바르나프에겐 낙화하는 꽃잎의 슬픈 비행처럼 느껴졌던 이야기들.


“그렇게 한참뒤 만난 벨로나는 고상한 귀족소녀도, 성실했던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죽기 위해 떠났던 여정에서 돌아온 그녀는... 마치 그녀 곁에서 죽은 월영군의 피웅덩이에서 자라난 한송이 꽃 같았죠.”


“······”


“트리스트 사제여. 벨로나는 그렇게 피어난 꽃이기에... 욕심과 필요성에 의해 재배되는 이곳 곡식과는 결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잠시간의 침묵 뒤 벨로나가 어떤 욕심과 야망으로 움직이진 않을 것이란 의견을 낸 바르나프.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좀더 용기를 내어 옹호의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를 따랐던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으로 그녀의 뿌리가 만들어졌기에, 오히려 그 사실만 잘 헤아려준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단지 자신의 가장 큰 뿌리인 흑표군단을 찾아 카릿치오스로 향했고, 이후에는 군의 주적인 인형을 상대할 것이란 지극히 개인적이며 긍정적인 기대.


“벨로나가..”


그 희망의 말에 트리스트가 곧바로 반응해오자 저도 모르게 긴장한 바르나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어떻게 움직이든 상관없다. 쓸데없는 잔뿌리가 많다면 잘라내면 그만이니. 다만, 다른 화분에서도 꽃을 피울수 있는지가 관건이지.”


도무지 그 뜻을 알수 없는 대답.

이에 말문이 막힌것도 잠시, 뭔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불안감에 중요한 기밀을 입밖에 내고만 그였다.


“인형들을 정벌하는데 벨로나를 이용하실 계획이 아니었습니까?”


“그 계획에 변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걱정 말도록.”


“·········”


하지만 그 대답에 오히려 머리속이 복잡해진 바르나프가 좀더 명확한 답을 듣고자 입을 열던 순간.


“흥미로운 이야기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도착했군.”


그 말과 함께 트리스트의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갔고, 바르나프는 흙길에 출렁이던 마차의 흔들림이 어느새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눈에 들어오는 창밖의 낯선 풍경.


하늘거리는 황금빛 들판과 유유히 흘러가는 크레이센강 대신 차지하고 있는 곧게 세워진 검회색 성벽과 그 아래 유속이 느려 땅처럼 보이는 해자(垓子).


마침내 퀠른 도시의 외각 성벽에 도착한 것이었으나, 긴 여정이 끝났다는 개운함보단 좀전의 대화가 남긴 찝찝함에 사로잡힌 바르나프였다.


때문에 이곳 경비병의 소리로 추정되는 목소리와 무기의 절그럭 소리가 다가왔음에도 좀처럼 벨로나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 멍하게 앉아있을 때.


“옛 제자에 대한 것은 잠시 잊고, 곧 있을 일에 집중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트리스트가 마차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자 바르나프도 뒤늦게 따라 움직였으나, 대답은 시큰둥했다.


“뭐... 아라한에서 그랬듯 크게 할일은 없지 않습니까?”


서명만 남겨둔 계약서 최종본처럼 그 어떤 협의도 필요 없었던 아라한에서의 일.


단지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성주로부터 석탄과 철광석 공급을 약속받은 그 기억에 당연히 이곳의 일 또한 순조로울 것이라 생각한 바르나프였다.


“저번처럼 쉽게 풀릴 일이라면 벨로나의 거취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쟁이 벌어져야 거취가 불명확한 명장이 쓸모있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식량을 조달 받지 못한다면 인형과의 전쟁에 차질이 생길테고, 그렇다면 벨로나의 쓰임새도 달라질거란 말.


“······”


그 말을 끝으로 트리스트는 마차 밖으로 나섰고, 잠시 당황하던 바르나프는 아직 궁금증이 하나 남았음을 깨달았다.


“... 설마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지요?”


“그랬다면 이 유명한 성문 앞에 무사히 서 있을 수 있겠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트리스트의 시선을 따라 보게 된 퀠른 도시의 성문.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중앙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3층짜리 계단식 망루가 눈에 띄는 구조.

하지만 그 망루에 시선이 머문것도 잠시, 어떤 압도적인 존재에 의해 저도 모르게 성문 상단부를 올려보게 된 바르나프였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3개의 아치형 지지대와 ‘태양 훔치개’라 불리는 금박덮힌 지붕.

노을마저 그 화려함에 사로잡힌듯 돔형 모양의 그 지붕은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잔뜩 머금고 있었고, 그 모습은 정말 명성 그대로였다.


“저 지붕의 이름만큼 이곳 성주도 꽤 흥미로운 인물이지. 마치 뿌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서 문제지만.”


“..그렇습니까?”


트리스트가 드물게 흥미를 드러낸 것에 살짝 놀란 바르나프는 ‘태양 훔치개’의 주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곡물의 왕, 마메트 3세’


일개 도시의 성주임에도 왕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자였고, 일리오스 제국의 특사를 문전박대한 일화는 그것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무사할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대륙의 곡물 무역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과 그 주도권을 지킬만한 군사력까지 갖췄기 때문.


따라서 정말 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사내라 할 수 있었고 이런 사실들을 차례로 떠올리자, 바르나프는 트리스트의 우려를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일이 벨로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수도 있단 생각이 들자, 자신 또한 저 반짝이는 황금 지붕을 마음편히 볼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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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7) 23.02.28 11 0 12쪽
181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6) 23.01.04 35 0 10쪽
180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5) 22.10.26 43 0 8쪽
179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4) 22.10.17 37 0 8쪽
178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3) 22.10.13 38 0 11쪽
177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2) 22.09.07 43 0 10쪽
176 [4권] 2장. 불티_1화_프랙탈 (1) 22.08.10 37 0 10쪽
175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5) 22.08.02 40 0 14쪽
174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4) 22.07.26 40 1 9쪽
173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3) 22.07.19 50 0 9쪽
172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2) 22.07.12 49 0 9쪽
171 [4권]1장. 뿌리_ 2화_ 열기(1) 22.06.27 48 0 11쪽
170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4) 22.06.02 40 0 12쪽
169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3) 22.05.23 44 0 10쪽
»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2) 22.05.06 47 0 9쪽
167 [4권]1장. 뿌리_ 1화_곡식의 왕 (1) 22.04.21 41 0 7쪽
16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5) 22.03.23 43 0 12쪽
165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4) 22.03.16 43 0 9쪽
164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3) 22.02.28 45 0 10쪽
163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2) 22.02.14 43 0 8쪽
162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1) 22.02.03 41 0 7쪽
161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0) 22.01.20 39 0 8쪽
160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9) 22.01.10 40 0 9쪽
159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8) 21.12.27 46 0 9쪽
158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7) 21.12.20 46 0 11쪽
157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6) 21.12.03 43 0 11쪽
156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5) 21.11.10 44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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