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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스파이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드라마

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3.11.05 12:09
최근연재일 :
2024.05.19 19:32
연재수 :
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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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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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18,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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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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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태권도 연습 (1964년 여름, 프랑스 파리)

DUMMY

현태룡이 동생을 차에 태운 채 직접 운전까지 하며 향한 곳은 17구 뇌이-포르트 마요(Neuilly - Porte Maillot)역 근처에 위치한 한 소형 체육관이었다. 한국 교민들이 스포츠 대련 장소로 자주 빌리는 곳이었다. 운동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현태룡에게 있어 또 다른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본인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바로 현태준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그 몸집 좋은 윤 검사 덕에 김현욱과 방원철이 어떤 망신을 당했는지 소식을 듣는 일은 매우 즐거웠지만 현태룡은 파리에서 처리하는 일들 때문에 매우 신경이 쓰였다. 거기에 자기 혼자 잘난 맛으로 사는 동생까지. 아내가 팔레 가르니에에서 벌어진 일을 애써 축소해서 얘기했지만 현태룡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인 추측으로 그리고 교민들 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의외로 현태룡은 태준을 심하게 다그치지 않았는데 그래봤자 전혀 소용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성인이라고 현태준은 무엇이든지 다 혼자 했다. 연구부터 공부부터 먹는 것부터 뭐든지. 심지어 형이 애써 데리고 간 풋살장에서 동생이 정작 하란 축구는 안하고 구석에서 논문을 읽고 있는 것에 태룡은 너무 답답해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새로운 운동을 가르치면 현태준의 생활 양식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동생이 싫어해도 할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밀어붙여야 했다. 그리고 마침 보험도 하나 마련한 참이었다.


“내리자, 태준아.”


“...”


싫다는 걸 억지로 데려온 탓에 현태준은 매우 뾰로퉁한 표정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그는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었다.


“안 내려?”


“싫어.”


“나 원 참. 이게 그렇게도 싫니?”


“하기 싫다고 몇 번을 말했잖아.”


“임마. 너도 같은 한국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지내야지 그렇게 독고다이로 있으면 뭐가 좋냐? 이런 거라도 해야지.”


“공부하고 연구하는 게 재밌지, 형은 이런 게 재밌어? 운동은 나도 혼자서 잘한다고.”


“대체 무슨 운동인데? 네가 무슨 혼자서 운동을 한다는 거야?”


동생이 진짜 무슨 운동을 하는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현태준이 시간이 날때마다 달리기라든지,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 등을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형에게 있어 진짜 운동이 아니었다. 진짜 운동이란 사람들과 같이 부딪히고 땀흘리고 대화하면서 하는 것이라는게 현태룡의 ‘운동 철학’이었다. 심지어 팔굽혀펴기도 여럿이서 같이 해야 제맛이었다. 그에게 혼자 하는 ‘운동’이란 없었다.


“할 수 있는 거 많지. 그리고 내가 형보다 수영도 더 잘하잖아?”


현태준의 말은 사실이긴 했다. 수영 실력 만큼은 육군 장교 출신임에도 태룡이 따라잡기 힘들었다. 어쩄든 현태룡은 이 시점에서도 동생이 전혀 지지않고 체육관에 들어갈 생각을 안하자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그래. 내 동생이 절대 변할 리가 없지. 그렇다면...”


현태룡은 품에서 영어로 된 최신 물리학 논문집을 하나 꺼내 현태준 보라고 대놓고 흔들었다. 동생이 가장 아끼는 구독 논문집이자 바로 현태룡의 ‘보험’이었다. 오늘 현태준의 하숙집에서 동생을 데리고 오면서 슬쩍한 것이었다. 천재 물리학자라지만 형의 스파이 본능 앞에서 동생은 몇십 분 전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 한창 뾰루퉁해있던 탓에 형을 쳐다보지도 않던 태준은 뭔가 이상한 기운에 형을 흘낏 봤다. 그리고 논문집을 보고 놀람과 충격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뭐야! 형이 대체 왜 그걸 가지고 있어?”


“내가 누구냐. 이럴 줄 알고 네 가장 소중한 물건 중 하나도 몰래 슬쩍 할수 있는 사람 아니냐. 네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말이지. 군생활하고 요원 짬밥 무시하지 말렴.”


현태룡의 말투는 어느새 10여년 전 장난끼 있던 소년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돌려줘!”


현태준은 애써 태룡의 품에서 논문집을 뺏으려고 했다. 그러나 현태룡은 전혀 빼앗길 틈도 안 주고 웃으면서 논문집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아, 돌려달라니까 형!”


현태준이 짜증과 불안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약속 하나만 해주면.”


“무슨 약속?”


“체육관 같이 들어가자.”


“대체 왜? 싫어!”


“싫으면 할 수 없지.”


할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현태룡은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창문을 열어 밖으로 논문집을 던지려 한 것이다. 그 광경에 현태준의 목소리는 매우 다급해졌다.


“안돼! 알았어 형 알았다고! 씨...”


현태준이 울상이 된 표정을 지으면서 항복했다. 현태룡이 이긴 것이다.


....


현태룡이 동생에게 소개하고자 한 운동은 바로 태권도였다. 태룡 역시 이 깊은 무술 철학에 푹 빠져 있었다. 비록 9년 전 자신과 여러 사람을 아프게 한 사건도 이 태권도 때문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서구식 생활에 익숙해졌을 태준에게 이제 새롭게 만들어내는 한국의 ‘전통’을 일깨워 주고 싶은 것이다.


형제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체육관 한가운데 자리 잡은 광경은 다름아닌 도복 차림의 이원기 대령이 상대방과 대련 연습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 대령은 국방무관으로서의 임무 뿐만 아니라 태권도 보급에도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는 태권도에 아주 열정적이었고 국방부에서 요구하는 이상으로 무술 보급 활동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어찌 보면 그는 국방 무관이라기보다는 무술을 보급하는 제복 입은 민간 외교관에 가까웠다. 태룡은 이 대령을 태준의 새로운 스승으로 삼고 싶던 것이었다.


대련 연습을 마친 이원기 대령이 현태룡과 현태준을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현태룡이 웃으면서 경례했다.


“충성.”


“아이고 우리끼리 무슨 경례인가, 현태룡 소령. 편하게 인사해.”


이원기 대령 역시 웃으면서 현태룡과 악수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번 연회에서 못 봐서 죄송했습니다, 하하.”


“아냐, 자네 할 일 했어야지비. 덕분에 대신 여기 자네 동생하고 아주 즐겁고 건설적인 대화를 했었네. 안 그런가, 현태준군?”


이원기가 현태준을 쳐다보며 웃었다. 현태준은 얼마 전 형수에게 혼난 기억 때문에 고개를 숙이며 멋쩍어했다.


“하하 네, 대령님...”


“들어봤겠지만 내가 현태룡 소령을 이 태권도 세계로 이끌었지. 나한테는 현 소령 소속이 어디이든 영원한 주장이고 이 친구에게는 내가 직급, 계급이 무엇이든 영원한 교관이지 허허.”


현태룡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태권도부가 재밌었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었지만... 9년전인데... 내가 모두에게 미안하지...”


방원철과의 악연이 떠오른 이 대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관님.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잘 왔어. 형에 이어 동생도 한번 이 새로운 무술의 세계를 맛봐야지. 안 그러나 현태준군?”


“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뾰루퉁한 기분이 안 가신 현태준은 말꼬리를 흐렸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 주관대로 싫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논문을 인질로 잡힌 태준은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말 잘 듣는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지덕체를 모두 갖춰야 해. 자네는 지는 그 누구보다도 탁월해. 아무도 감히 따라올 수 없지. 그러나 덕, 체는 잘 모르겠어. 마음씨는 좋은 것 같고 몸도 뭐 나빠보이지는 않는데 아직 많이 갈고 닦아야 해. 태권도는 그 덕, 체를 모두 자네의 그 탁월한 지력의 수준으로 끌고 올 수 있어. 그래서 완전한 인격체가 되는거지. 어때 한번 해보겠나?”


“...”


현태준은 아무 말 없이 현태룡을 쳐다봤다. 형은 웃었다. 이 상황에서 동생이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 뿐이었다.


“해볼게요...”


“좋았어. 이봐, 김군! 도복 남은 거 있으면 좀 가져와보게!”


이 대령이 대련 상대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


태권도복을 입은 현태준은 어색한지 도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계속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이 귀여운 듯 이원기 대령이 웃으면서 자세를 가르쳐줬다.


“자 이건 내딛기고, 이건 모딛기. 그래 맞아.”


현태준이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아니 역시 천재 답다고 할까, 그는 빠르게 자세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역시 도복을 입은 옆에서 현태룡이 특수 서기를 시범 보이자 현태준은 형의 모습을 따라했다. 형의 시범에 더 빨리 자세를 습득하는 듯 하자 이원기 대령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형이 도와주는게 더 잘 눈에 들어오겠지비. 현 소령이 잘하는군.”


이 대령이 명천 지역 어투로 만족을 표했다.


차렷! 경례! 얍! 퍽퍽.


그렇게 그 날 오후 현태준은 바로 상대방과 실제 대련을 시작했다. 오늘 태권도를 시작한, 아마추어 중에서도 상 아마추어인 현태준은 역시 밀리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이내 상대방을 발로 차며 압도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역시 내 동생인가...하하.’


그 형에 그 동생이랄까. 어찌 보면 자신보다도 더 뛰어난 운동 신경을 보여주는 태준의 모습에 태룡은 자랑스러웠다. 공부만 아는 동생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을 오늘 발견한 것이다. 현태준은 마침내 상대방에게 이단 발차기를 날렸고 상대방이 쓰러졌다.


“오오. 대단한데...”


“쟤 오늘 처음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하하 참...”


구경하던 모든 교포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심판은 현태준의 승리 선언을 했다. 현태준은 이원기와 현태룡이 가르친대로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태권도는 이기는 것만이 주 목적이 아니라 상호 예절을 가르치는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좀만 가르쳐주니 바로 잘하네. 역시 형제구만!”


이 대령은 새로운 인재를 찾았다는 기쁨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가 원하던 지덕체를 모두 갖춘 새싹이 오늘 그 능력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현태준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준 이원기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현태룡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눈이 마주친 태준은 역시 형에게 미소를 지었다. 지구 반대편 고국에서 모든 연루자들이 패배자로 전락한 사건이 있었다면 적어도 이역만리 파리 땅의 이 체육관에서는 모두가 승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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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 24.05.19 13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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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그놈의 식사 예절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5 12 2 8쪽
82 골칫거리는 잘 씹어삼켜야 한다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5 14 2 12쪽
81 기습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5 15 2 10쪽
80 마타도르(Matador)의 도착 (1965년 9월, 프랑스 파리) 24.05.12 31 2 13쪽
79 전사(戰士)는 기쁨을 위해 싸운다 (1965년 중순, 프랑스 파리 & 한국 서울) +2 24.05.11 55 2 13쪽
78 김백영의 월북 (1964년 11월, 일본 니가타 & 한국 충남 대전) +2 24.05.06 54 3 13쪽
77 아바이 잘가오 (1964년 10월 중순, 프랑스 파리) 24.05.05 20 2 11쪽
76 빨간 마후라 (1964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05 27 2 15쪽
75 페르노 (1964년 가을, 파리) 24.05.04 18 2 10쪽
74 태권도 시합에서의 도발 (1964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01 89 3 17쪽
» 태권도 연습 (1964년 여름, 프랑스 파리) 24.04.28 24 3 11쪽
72 중정 압수수색 쇼 (1964년 여름, 서울) 24.04.28 34 3 9쪽
71 별들의 순간-검사 윤동석 (1964년 여름, 서울) 24.04.21 242 3 8쪽
70 서울, 1964년 여름(인민혁명당) (1964년 5월, 서울) 24.04.21 26 3 7쪽
69 수상한 사내 2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20 20 2 11쪽
68 수상한 사내 1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20 20 2 13쪽
67 팔레 가르니에 연회 4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14 25 2 10쪽
66 팔레 가르니에 연회 3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14 24 3 14쪽
65 팔레 가르니에 연회 2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13 23 2 9쪽
64 팔레 가르니에 연회 1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13 26 2 11쪽
63 싸 이라(Ça ira)-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1964년 초겨울, 프랑스 파리) 24.04.07 35 2 11쪽
62 박사 학위 수여식 (1964년 초겨울, 프랑스 파리) 24.03.31 42 3 12쪽
61 불사조 방원철 2 (1963년 여름, 서울특별시) 24.03.24 4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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