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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스파이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드라마

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3.11.05 12:09
최근연재일 :
2024.06.02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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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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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42,959

작성
24.05.0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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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바이 잘가오 (1964년 10월 중순, 프랑스 파리)

DUMMY

백건용은 다리 골절로 인해 한일친선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준우승자인 현태준은 애초에 그의 다리를 부러뜨린 가해자인지라 권한을 승계할 수 없었다. 결국 한일친선전은 취소되었다. 부아가 난 백건용은 현태준의 폭행을 고소하려 했으나, 현태룡이 직접 나섰다. 태룡이 직접 그를 만나 그동안 백건용이 백선협 대사와의 친분을 과시 및 과장하며 파리에서 저지른 비위 행위 증거들을 보여줬다. 개중에는 미술품 강매도 있었고 투자 명목 아래 교포들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도 있었다. 아무리 천하의 백건용이라 한들 중정 요원, 그것도 대한민국 최대 기업 총수이자 여당 실세의 사위가 직접 나서서 경고하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썩어넘친다 한들 권력 앞에서 장사가 없었다. 현태룡이었기에 망정이었지 방원철 같은 성격이었으면 지금쯤 백건용은 ‘공구리’ 당한 채 지중해나 대서양 어느 깊은 곳에 쳐박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룡은 아무리 동생을 위해서라 해도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런 식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것에 씁쓸해했다. 그러나 태준을 위해서라면 그런 씁쓸함은 그냥 무시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것이 육사 입학 이래 10년 간의 세월 동안 배워온 사회 생활의 한가지 규범이었다. ‘있을 때 있는 힘을 잘 이용해야 한다.’라는 규범 말이었다.


그렇게 동경 올림픽이 지구촌을 달굴 시간이 다가왔다. 파리지앵들은 물론이요 교민들까지 이 지구촌 최대 축제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현태준은 반차를 내고 대사관 체력단련실에서 홀로 쓸쓸하게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원래 일정상으로는 아마추어 무술인으로서 그 역시 올림픽 기간에 맞춰 재불 한인 태권도 동호회와 일본인 가라테 동호회 간 친선전에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현태준과 백건용과의 그 사건 때문에 동호회 분위기도 나빠져서 아무도 운동하러 오지 않았다.


태준은 운동을 마친 후 체력단련실에 설치된 간이 샤워장에서 몸을 씻었다. 그 뒤 대사관 복도에 놓인 고려일보를 보았다. 고려일보는 한국 소식을 궁금해하는 파리 주재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을 위해 국내에서 발행된 신문을 정기적으로 공수해 주고 있었다. 비록 며칠 혹은 몇 주 사이의 시간 차가 있긴 했어도 교민들의 욕구를 풀어주기에는 충분했다. 파리 내에서 교민들 사이의 소식을 보도하는 자체 신문들이 발행되고 있긴 했으나 고려일보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비록 시사에 관심이 없어 신문 따위는 쳐다보지 않는 태준이었지만, 백건용과의 일 이후로 그는 계속 쓸쓸함을 느끼던 탓인지 외부 소식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신문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평상시처럼 집으로 가지 않고 감정을 다스리고자 센강으로 걸어갔다. 도도한 센 강의 저녁 노을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태준은 신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1면 페이지를 보자마자 이 과학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마음을 죽창마냥 찔러대는 뉴스였기 때문이었다.


“어머 도련님!”


태준이 신문을 쳐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산책 나온 김혜린이 시동생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태준은 그녀를 쳐다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혜린은 태준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마치 친동생 같은 태준의 표정이 좋지 않자 혜린은 궁금한 표정으로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계셔요. 하하.”


“형은 아직 퇴근 안 했어요?”


“그이는 늘 늦게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도련님은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어요?”


“별 일 아녜요...”


“별일 아니긴. 얼굴에 ‘나 지금 문제 있어요. 슬퍼요.’라고 쓰여 있구만.”


혜린이 태준의 이마를 톡 쳤다. 시동생은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슬픔의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진짜 별 거 아닌데.”


“현태준 박사님. 이 형수님 실망합니다...”


“신문 보니까 우울해져서요...”


“하긴. 우리 도련님이 신문도 다 보시고. 신기하네요. 근데, 뭔데 그래요?”


태준이 형수에게 1면에 실린 기사를 가리켰다. 태준이 보고 극도로 우울해하던 기사는 다름아닌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었다. 1.4 후퇴 와중에 함남 이원에서 월남해 지금은 남한에 사는 신문준씨가 북괴의 육상선수로 출전한 딸 신금단을 만나기 위해 동경까지 달려갔다. 상봉이 성사될지 말지 설왕설래가 벌어지면서 부녀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그렇게 10월 9일 오후 4시 55분, 동경의 조선회관에서 부녀는 만났다. 조총련의 감시 속에서 단 7분 동안. 전쟁 통에 이별한 지 14년 만이었다. 그리고 사상 처음 성사된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정전 협정이 체결된지 10년이 훌쩍 넘었건만 1,000만 이산가족 중에 잠시라도 서로의 생사를 확인한 건 오직 2명 뿐인 것이다. 그렇게 헤어지면서 27살 된 딸은 49살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아바이(아버지), 잘가오’라고...


“아...”


태준이 왜 침울해졌는지 깨달은 혜린은 발랄하게 시동생에게 장난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단, 7분 만에 끝났대요. 14년 만에 만나고선 고작 7분.”


“네...”


“그래도 저는 이 부녀가 너무 부러워요. 어쨌든 만나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잖아요. 저나 형은 가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뭐하고 살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렇죠...”


“형수님 친척 분들 중에도 평양에 남은 분들 계시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다 먼 친척들이라 잘 몰라요. 저희는 직계 가족들은 물론이고 조부모님, 고모님, 이모님까지 왜정 때 전부 내려왔으니까.”


“그러면 차라리 낫네요. 형수님은 그리운 사람이 없으셔서 좋겠어요.”


“아니, 그게...”


실향민이지만 실향민의 기억이 전혀 없는 김혜린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었으나 그 어떤 변명도 현태준의 슬픔을 희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다물고 잠자코 이 어린 시동생의 말을 들어주는 것 뿐이었다.


“저는 부모님과 누나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형이 놀러간다고만 말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거든요. 인사는커녕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이젠 사진 보면서 예전 기억 떠올리려 해도 생각이 잘 안 나요. 꿈에서조차 가족들의 모습이 희미해져 가요...”


혜린이 위로의 의미로 태준의 손을 잡아주었다. 현태준은 센강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씁쓸한 미소에는 한과 슬픔이 서려있었다.


“형이 가끔 원망스러워요. 그때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영원한 이별이라고. 놀러 가는 거 아니라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거나, 떼써서라도 부모님과 함께 남아있거나 했을 건데...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요. 앞으로 볼 수 없는 막내아들이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그 모습 말이에요...”


혜린은 태준의 슬픔에 이입하면서도 여태껏 학문에만 몰입하는 줄로만 알았던 태준의 감수성과 표현력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고 또 직접 만난 이래 여지껏 궁금해왔던 의문점을 이 순간 하나 풀었다. 왜 사춘기때 내려온 태룡보다도 동생 태준이 훨씬 더 고향을 그리워했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이었다. 영원한 이별의 순간을 전혀 예측 못하고 대비도 못한 채,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 갑자기 역사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버린 과거에 대한 한이었다. 14년 전 겨울 형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막내 동생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전쟁과 이산은 태준에게 그리도 잔혹한 것이었다. 차라리 아예 기억도 못할 아기였으면 이런 한은 덜했을 것이다.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기억, 어머니와 누나의 그 따뜻한 사랑의 기억이 애매하게 보존된 채 월남한 소년에게 그 편린은 형이 가지고 있는 슬픔보다도 더 큰 칼날이 되었다. 매 순간마다 그 칼날이 이 청년의 몸과 마음을 찢어놓고 있던 것이었다. 14년 동안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될 영겁의 기간 동안.


“그건 도련님 탓이 절대 아니에요. 자책 말아요.”


“과연 형은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할까요? 무심해 보일 때가 많거든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도련님,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태룡씨가 이북의 가족들에게 느끼는 그리움과 괴로움은 도련님만큼이나 커요. 단지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죠. 그게 업계 생리고요...”


김혜린 역시 아내이기에 남편 현태룡이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건 잘 알았다. 그리고 남편은 그걸 제어할 줄, 아니 제어해야만 하는 걸 안다는 것도. 그렇지만 현태준만큼 큰 건지는 오늘만큼은 확실하지 않은 듯 했다. 그만큼 시동생의 원한은 컸다. 그러나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형과 동생의 고통은 같다는 것 뿐이었다.


“네...”


형수의 말이 진심이라 느낀 건지 아니면 거짓말이라 생각한건지는 알 수 없지만 태준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말을 마친 태준은 혜린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것을 민망해하면서 돌멩이를 집어 강가에 던졌다. 그런 태준의 심리를 파악한 혜린도 태준처럼 돌멩이를 강가에 던졌다. 공감해주는 모습에 기분이 풀어져서 그런 것일까, 태준은 씁쓸한 미소를 풀고 정겨운 미소를 지었다. 혜린 역시 그를 마주 보며 정답게 웃었다.


“통일이 될까요?”


태준이 말했다.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겠죠? 작년에 형도 통일이 될 거란 얘길 했는데, 여태껏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조금의 기미도 보이지 않네요.”


“더 기다려봐야죠. 여기 옆의 독일도 갈라졌는데, 힘 없는 우리나라라고 별 수 있겠나요. 도련님께서 할 일은 고향 돌아가서 가족들 만날 때까지 열심히 살아서 그분들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는 거에요. 형제가 당당하게 성공해서 집안의 이름을 드높여드리자고요.”


“상상이나 가실까요. 청천강 물 속에서 숨 참으며 놀던 일곱 살짜리 막내가 지금 이렇게 컸다는 걸요. 이렇게 파리에서 과학자로 일한다는 걸요. 또, 열다섯 살 소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 외교관이 된 걸.. 부모님과 누나들에게 형과 저의 이런 모습을 딱 한번만이라도 보여드렸으면..”


“그래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왜정도 35년 만에 끝났으니, 20년 안에 통일이 되겠죠? 그때까지 건강하게 우리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요. 도련님이 이렇게 멋지게 자란 모습을 보여드려야 되잖아요. 그때까지 인내하자고요. 내가 태룡씨와 도련님을 잘 도와줄테니...”


“고마워요, 형수님.”


“그러면 우리 저 유람선 타면서 기분이나 전환할까요?”


혜린이 센강 유람선 대기 장소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마침 유람선이 한 바퀴 돌고 돌아오고 있었다.


“네. 하하.”


그렇게 둘은 유람선을 타고 센 강을 돌아다녔다. 태준은 형수 덕에 일단은 울적한 기분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근원에 자리 잡은 한은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만들어낸 즐거움으로 잠시 덮어버릴 뿐이었다.


작가의말

정전 협정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의 주인공이 된 신문준은 1983년 12월 27일 67세로 사망했다. 북에 남은 신금단은 북한에서 인민체육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2024년 현재 생존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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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 24.05.19 18 2 10쪽
85 인사 없는 작별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9 16 2 7쪽
84 뱃속은 거지새끼잖아요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8 17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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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골칫거리는 잘 씹어삼켜야 한다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5 19 2 12쪽
81 기습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5 19 2 10쪽
80 마타도르(Matador)의 도착 (1965년 9월, 프랑스 파리) 24.05.12 33 2 13쪽
79 전사(戰士)는 기쁨을 위해 싸운다 (1965년 중순, 프랑스 파리 & 한국 서울) +2 24.05.11 59 2 13쪽
78 김백영의 월북 (1964년 11월, 일본 니가타 & 한국 충남 대전) +2 24.05.06 56 3 13쪽
» 아바이 잘가오 (1964년 10월 중순, 프랑스 파리) 24.05.05 23 2 11쪽
76 빨간 마후라 (1964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05 29 2 15쪽
75 페르노 (1964년 가을, 파리) 24.05.04 20 2 10쪽
74 태권도 시합에서의 도발 (1964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01 102 3 17쪽
73 태권도 연습 (1964년 여름, 프랑스 파리) 24.04.28 25 3 11쪽
72 중정 압수수색 쇼 (1964년 여름, 서울) 24.04.28 36 3 9쪽
71 별들의 순간-검사 윤동석 (1964년 여름, 서울) 24.04.21 249 3 8쪽
70 서울, 1964년 여름(인민혁명당) (1964년 5월, 서울) 24.04.21 28 3 7쪽
69 수상한 사내 2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20 21 2 11쪽
68 수상한 사내 1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20 22 2 13쪽
67 팔레 가르니에 연회 4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14 27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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