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64년 여름(인민혁명당) (1964년 5월, 서울)
1964년도 어느 새 2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 국내를 요동치게 만든 이슈는 역시 한일 회담이었다. 광복된 지 불과 20년도 안된 시점에서 최소 30대 이상 세대들은 그 무참했던 왜정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쾌한 기억일수록 더 잘 기억되는 법이었다. 일본과 수교하는 것은 언급 자체로도 국민의 역린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물론 김일성, 나아가 중공, 소련과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협력 관계가 중요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공통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있었다. 바로 양국 정권들의 태도였다. 그리고 일본은 보상 논의에 있어 한국의 국민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했고 박 정권 역시 자국 여론에 대한 생각은 고려 대상이 아닌 듯 했다. 밀실 토론만 주구장창 이어졌고 정작 국민들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어차피 총칼로 여론을 밀어버리면 되는 한국과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의 환상의 콜라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양국 정부의 무심한 듯한 태도에 여론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게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연이어 전국을 뒤덮고 있었고 정부와 중정은 이런 동향에 극도로 민감해했다. 어떻게든 이것이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는 건 막아야만 했다.
5월의 어느 날, 산뜻한 봄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찬 여름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시기, 중정부장실에서 김현욱은 집무용 책상에 다리를 뻗고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전날 있었던 서울대생들이 주축이 된 ‘한일굴욕회담 반대 대학생 총연합회’가 주도한 일명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관한 보고서였다. 방원철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김현욱은 김영일, 그보다도 김지하라는 필명을 주로 쓰는 한 시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 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 조사(弔詞)를 가만히 읽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던 김현욱은 ‘에이씨’ 하며 보고서를 집어 던졌다. 방원철은 자세를 구부려 던져진 서류철을 수습한 뒤 다시 기립했다.
“이야, 빨갱이 새끼들, 말은 기가 막히게 한다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 김지하라 했나? 그 자가 쓴 소위 조사를 읽는데 나까지 숨막혀 가지고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니까? 이러다 내가 큰일날거라 생각해서 덮었다우. 지하로 처박아 보낼 간나 새끼. 개소리를 아주 웅대하게 늘어놨다우. 감히 각하를 능멸하다니,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간나...”
김현욱이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방원철이 라이터를 잽싸게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김현욱이 손가락에 담배 꽁초를 낀 채 연기를 내뿜었다. 잠시 진정이 된 모양인 지 김현욱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들었다.
“빨갱이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줘야 해. 민족의 지도자이신 각하께서 국익을 생각해서 한일 수교를 추진하시겠다는데 그걸 반대해? 그게 매국이 아니고 뭐니. 후...”
김현욱이 뿜어대는 담배 연기를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방원철은 꿈쩍하지 않았다.
“6.25 사변 때 국민학교나 겨우 다닌 꼬맹이들이 뭘 안다고 나대. 먹물 놈들 이참에 손을 봐야 한다우.”
방원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네다. 마침 조사 쓴 놈 이름이 지하니까네, ‘지하조직’과 엮어보려 합네다.”
“흠.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
“간단합네다. 김일성이 지령받고 움직이는 좌익 정당이 시위를 조장했다 하면 됩네다.”
“좋아. 정당이라면 이름도 있어야디. 생각해둔 이름 있네?”
방원철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인민혁명당이라니, 난 처음 듣소! 그게 대체 무슨 당이오? 난 일본에 있다가 잠시 귀국한 것뿐이오!”
방원철은 중정 지하 심문실에서 재일 교포인 김백영이란 자를 가혹하게 심문하고 있었다. 방원철의 창의적 공작을 위한 희생양의 첫 타자였다. 영문도 모른 채 김백영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결론을 정해놓은 방원철 앞에서는 씨알도 안먹혔다.
“야, 김백영이. 자꾸 모르는 척할 거야? 네가 만들었잖아, 이 간나새끼야!”
“왜 억울한 사람을 이렇게..”
“하. 이 새끼, 적당히 패서는 안 되겠구만. 에디슨.”
고개를 돌린 방원철이 부하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에디슨’은 전기고문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에디슨이 전기의자를 발명하여 전기고문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유래된 참으로 고약한 어원이었다. 방원철의 부하가 집게를 가져왔다.
“으으윽!”
김백영은 전기고문을 받다 혼절했다. 그러나 방원철은 9년 전 박광세가 쓰러졌을 때와 달리 침착했다. 이제 서서히 관록이 쌓이기 시작한 방원철 역시 배워야 하는 것은 잘 배우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결코 옳지 못한 배움일 뿐.
“간호원!”
방원철의 호출에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여자 직원이 고문실로 들어와 김백영을 응급처치했다. 다행히도(?) 그는 죽지 않았다. 김백영이 깨어나자, 그가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입에 수건을 물리고는 매질과 물고문 따위로 괴롭혔다.
“야, 너,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그러니까 여기 서명해. 그래야 네가 죽을 수 있어.”
김백영만 끌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를 비롯하여 인민혁명당, 즉 인혁당 간부로 지목되어 ‘남산’ 고문실로 끌려온 이들은 산 채로 고문당하는 것보다 고문실에서 풀려나고 죽기를 선택하였다. 방원철은 자신이 작성하고 김백영 등은 서명만 한 ‘진술서’를 기자회견 형식에 맞게 꾸민 뒤 부장실로 갔다. 부장은 방원철이 만들어낸 ‘작품’에 만족스러워했다.
“훌륭하다우.”
다음 날 아침, 김현욱은 기자회견실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일명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김백영 등 오십칠 인이 북한 괴뢰 노동당 정권의 지령을 받아 우리 대한민국에
인민혁명당이라는 비밀 지하조직을 창건하여 국가변란을 기도한 혐의를 확인하였다.”
기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현욱은 승리감을 느낀 듯 자신 있게 발표문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이들은 변란의 1단계로써 한일 협정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였으며, 이 데모를 4월 혁명과 같이 전국적인 수준으로 발전케 하여 우리 정부를 전복하고자 하였다.”
기자들을 감시하고 있던 방원철 역시 언론 동향이 급격하게 공안 정국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고 만족스러워했다. 특무대에 이어 그의 능력이 다시 십분 발휘된 순간이었다.
4일 뒤 김백영 등은 보강 수사 및 기소를 위해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어차피 대한민국 검찰청은 중정이나 다른 정부의 보안 기관의 시녀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검사들은 경찰, 중정, 국방부에서 읊어주거나 ‘친절하게’ 만들어준 진술서 그대로 믿고 기소할 뿐이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고 기소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사례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욱과 방원철은 세상에 100퍼센트는 없음을, 그리고 ‘미친 놈’은 어딜 가나 꼭 한 명씩 있고 그 미친 놈이 자신들의 공작을 아주 집요하게 걸고 늘어질 수 있음을 뻐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 작가의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후일 회고에서 1964년 5월 20일 김지하(1941~2022)가 발표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를 두고 "나는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이전에도 아니 그 이후에도 이것만큼 통렬하게 5‧16혁명정부를 비판한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출처: 프레시안, 노회찬을 만든" '세번의 쿠데타 주역' 박정희를 만나다, 201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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