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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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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3.11.05 12:09
최근연재일 :
2024.06.02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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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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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3
추천수 :
246
글자수 :
442,959

작성
24.05.1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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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DUMMY

이렇게 현태룡이 파리를 떠나버렸다. 때마침 이원기 대령마저 비슷한 시기에 국방무관 임기가 끝나고 미련 없이 서울로 돌아갔다. 그렇게 방원철은 예의 가면을 던져버리고 본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김기전이 있긴 했지만 원철에게는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그를 날려버릴 기막힌 계획이 있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원철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책상에 다리를 쭉 뻗어 올리면서 이순영과 그 비싼 국제 통화를 했다. 단 한 번도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지 않았고, 회사 내 전화도 사적 통화는 웬만하면 삼가는 태룡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회사를 찾아온 김기전이 봤으면 뭐라 한마디 할 광경이었지만 마침 김기전은 오늘 서울국제상사에 들어올 일이 없었다.


“맞습네다. 현태룡이에 이어서 마침 이원기도 임기 만료로 귀국한 덕에 박가하고 김가만 남게 됐습네다. 박가(박성민)야 소속도 다르고 또 각하께서도 미워하시니까네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김가가 문제입네다. 하지만, 다 수가 있습네다. 아주 기발한, 흐흐.”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이순영의 목소리는 현태룡을 서독으로 보낸 것이 혹시 방원철의 독단이 아닌지 걱정하는 어투였다. 또다시 적을 만든 건 아닌지 이 ‘제자’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아, 그거 제 독단 아닙네다. 부장님께서 먼저 얘기하신 겁네다. 그 다음만 제가 부드럽게 흘러가도록 알아서 한 겁네다. 여튼 제가 승진하면, 형님이랑 회장님께도 한몫 해드릴 것이니까네, 회장님 뵈면 안부 전해주십쇼.”


방원철은 이순영과 더불어 방석주 회장의 ‘은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한몫 해줄 것인지는 그도 지금 바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 아니었다.


“감사합네다. 서울은 밤이 늦었겠습네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또 연락드리겠습네다.”


방원철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신이 곧 ‘파리(교민 사회)의 왕’이 된다는 사실에 기뻐 온 건물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었다. 직원들이 지사장실에서 들려오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수군거렸다.


“지사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현 지사장님 떠나니까 기분 좋으신 거지. 십 년 전부터 현 지사장님한테 계속 밀리셨다매.”


“듣자 하니, 예전에 방 지사장이 김창환 특무대장 오른팔이었담서.”


“출근하다가 총알 세례 받고 죽은 놈? 그게 대체 언제적 얘기야. 거의 10년 전 얘기인데. 중정에서도 부장 똘마니짓하다가 밀려나서 여기로 온 거라고.”


말이 ‘서울국제상사’지, 이 ‘회사’가 기관,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센 기관 소속이라는 건 직원들 모두 다 아는 사실이었다.


“에휴. 저런 망나니가 우리 상사라니.”


“그러게. 현 지사장님 그립다.”


...


그 날 저녁 김기전은 방원철이 자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11구 바타클랑(Bataclan) 극장 근처의 한 갤러리에 들어섰다.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면서 말이었다. 바로 몇 주 전 방원철이 제안한 미술품 구매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약간 장발 스타일에 수염을 기른 화교 계통의 동양인 미술상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김기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사실 현태룡과 오상호라면 누군지 눈치챌 인물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황수일이었다. 1년 전에 서울국제상사에 취업하러 왔다가 실패한 바로 그 자 말이었다. 김기전이 직원 면접을 충직한 현태룡과 오상호에게 위임한 게 바로 오늘은 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계 무역회사 지사장이 뒤바뀌었다는 소식은 교민 사회 뿐만 아니라 화교 사회에도 흘러들어갔다. 황수일은 다시 한번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 인물은 방원철이 파리에 오고 얼마 안되어 화교 쪽 업체들과 접선할 때 그에게 접근했다. 화려한 화술과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돈을 내세워 그의 환심을 사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어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과 황은 서로 상부상조할 음모를 꾸몄고 오늘은 바로 그 계획이 실행되는 날이다. 머리는 어찌어찌해서 길렀지만 수염은 방금 전에 붙인 가짜였다.


“찾으시는 거 있으십니까?”


황수일이 유창한 불어로 물었다. 파리에 널리고 널린 게 화교와 베트남계라 김기전은 이 동양인 미술상을 보고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 공사는 1년 동안 부쩍 늘어난 자신의 불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 회사 응접실에 걸어놓을 합리적 가격의 그림을 찾고 있소.”


“합리적인 가격이라,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는지요?”


“만 프랑 정도? 편성된 예산이 그 정도요.”


“만 프랑이라... 피카소의 가장 값싼 그림이 5만 프랑 정도 되죠.”


피카소란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김기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절대 안된다는 눈치로.


“그 사람 공산주의자 아니오? 비싸기만 하고 나는 빨갱이 그림 필요 없어. 굳이 유명한 사람 아니어도 좋소. 예산이 중요하니까.”


“흠, 그러면 잠시 이쪽으로 와주시죠.”


김기전이 피카소가 빨갱이라고 싫다고 했지만, 황수일은 그를 기어코 피카소의 그림이 놓인 곳으로 데려갔다.


“이건 파블로 루이즈란 사람의 그림입니다. 고아원에 무료로 기부했다가 그 고아원이 문을 닫으면서 저희 화랑으로 값싸게 넘어온 겁니다.”


그림에 관해 조금만 알아도 피카소의 그림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지만, 그런 쪽으로는 일자무식인 이 군인 양반은 황수일의 말을 별다른 의심 없이 믿었다.


“유명한 사람이요?”


“프랑스에서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값에 비하면 아주 싼 거죠. 5천 프랑만 주시면 됩니다.”


황수일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피카소의 풀네임이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지 진실을 일부 숨겼을 뿐이었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진짜 김양이 미술 수업 들어보라고 권유했을 때 들어봤어야 했는데 참..”


김기전이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사실 겁니까?”


“일단 사겠소.”


“정말 탁월한 안목을 지니셨군요. 높으신 분들이 다 좋아할 겁니다.”


“여기 5천 프랑이요.”


“아, 현금 결제하시면 할인해드립니다.”


황수일은 천 프랑을 김기전에게 돌려주었다. 김기전은 그림을 갖고 갤러리를 나오면서 유명한 사람의 그림을 아주 싸게 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서울국제상사로 향했다. 자신이 방금 전 아주 단순하고도 치명적인 계략에 넘어간 것도 모른 채 말이었다.


...


“공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다음날 아침, 김기전이 그림을 들고 서울국제상사 사무실로 들어왔다. 오상호가 그에게 다가갔다.


“상호, 그림 좀 받아주게.”


“사무실에 좋은 그림이 하나 필요해보여서 사왔네.”


“아니, 이거는...”


오상호는 누구 그림인지 바로 눈치챘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방 지사장은 어딨나?”


“잠시 나갔는데..”


“일단 걸라우.”


오상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 피카소의 걸작을 복도에 걸어놨다. 이윽고 직원들이 다가와 그 그림을 보고 웅성거렸다.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대한민국 땅에서 피카소가 무슨 취급을 받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인기’ 많은 그림 앞에 직원들이 몰린 광경에 김기전은 그들의 소근거림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방원철이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사장실은 사무실 안쪽 구석에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지사장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무실을 거쳐야 했다. 방원철은 그림을 보더니 바로 김 공사에게 다가갔다.


“공사님, 정신 나가셨습네까?”


방원철이 김기전에게 손가락질했다.


“아니 이 간나, 보자마자 갑자기 뭔 지랄이네?”


김기전이 돌변한 방원철의 모습에 황당해했다.


“지랄은 지금 공사님이 하시는 겁네다.”


“뭐가 어째?”


“저 그림 말입네다. 어떻게 구하셨습네까?”


“저게 뭐가 어때서 그러네? 보기 좋지 않네? 내가 기껏 생각해서 예산 써서 구해다줬더니... 또 횡령했다고 뒤집어씌우려는 겐가?”


김기전은 14년 전 지리산에서의 그 악몽이 떠올랐지만 당당하게 항변할 자신이 있었다.


“저건 피카소 그림입네다. 피카소가 빨갱이란 거 공사님이 더 잘 아시지 않으십네까?”


“뭔 소리네? 내가 갤러리 사장한테 피카소는 빨갱이니 그 사람 것 말고 추천해달랬어. 그 사장이 파블로 루이즈의 작품이라면서 이걸 추천해준 거라우.”


김기전의 이야기를 들은 오상호 이하 서울국제상사 직원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걸 본 순간 김기전은 무언가 자신이 방원철의 함정에 빠졌음을 눈치챘다.


“그게 피카소입네다.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 지금 직원들 표정 안 보이십네까?”


“...”


김 공사는 할 말을 잃었다. 직원들은 김기전에게 ‘잘 가십시오, 공사님.’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방원철에게 직접 체포되어 본 오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대사님과 부장님께 보고하겠습네다.”


김기전은 그 자리에서 총이라도 한 발 쏘고 싶었지만, 방원철의 뒷배를 생각해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며칠 뒤 김기전은 김현욱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가 피카소의 그림임을 모르고 샀고 또 단순 소장 목적이었음이 입증되어 형사 처벌은 면했지만 애초에 죄를 밝히려는 게 부장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김 공사는 그거와 상관없이 징계를 받았다. 김기전은 연구관 발령 명목으로 한직으로 좌천당했다. 그의 ‘죄질’에 비해서 해임 안 당한게 정말 다행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방원철은 1965년 한해가 지나기도 전에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공사 겸 중앙정보부 프랑스 지부장 겸 유라프리카(유럽+아프리카) 총괄 지부장 자리에 올랐다. 비록 유라프리카 총괄 지부장의 권한이 명목상에 가깝지 실제로 다른 나라 지부들을 세세하게 통제하는 건 아니라지만 나이에 비해 엄청난 영전인 건 분명했다. 이는 대통령에 의해 처음부터 부장, 차장, 실장급 수뇌부로 임용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례 없는 속도의 승진이었다.


방원철은 그렇게 프랑스 교민 사회의 ‘왕’이 되었다.


작가의말

1.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의 원래 성씨는 본래 아버지의 성인 루이즈이다. 그러나 19살이 되던 해 그가 부계 성씨 대신 모계 성씨인 피카소를 자신의 성씨로 선택하면서 파블로 피카소가 되었다.


2.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스탈린을 매우 싫어했다.


3. 1960년대 피카소는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의 검열 대상이었다. 1969년 삼중화학공업에서 ‘피카소 크레파스’, ‘피카소 수채화 물감’이란 이름으로 미술 상품을 만들자 검찰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대표를 입건하고 광고를 중지시킨다. 같은해 코미디언 곽규석이 생방송에서 엉망으로 그린 그림을 가리켜 ‘피카소 같다.’고 발언했다가 역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조사받는다.


출처: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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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9ps
    작성일
    24.05.19 17:42
    No. 1

    볼 때마다 저를 돌아보게 만드는 얘기입니다.
    일요일이네요. 편안한 시간 되세요. 고맙습니다 :D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1 중평장
    작성일
    24.05.19 17:51
    No. 2

    감사합니다. 남은 주말도 즐겁게 보내십시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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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 24.05.19 20 2 10쪽
85 인사 없는 작별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9 17 2 7쪽
84 뱃속은 거지새끼잖아요 (1965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18 18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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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마타도르(Matador)의 도착 (1965년 9월, 프랑스 파리) 24.05.12 33 2 13쪽
79 전사(戰士)는 기쁨을 위해 싸운다 (1965년 중순, 프랑스 파리 & 한국 서울) +2 24.05.11 59 2 13쪽
78 김백영의 월북 (1964년 11월, 일본 니가타 & 한국 충남 대전) +2 24.05.06 56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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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페르노 (1964년 가을, 파리) 24.05.04 20 2 10쪽
74 태권도 시합에서의 도발 (1964년 가을, 프랑스 파리) 24.05.01 102 3 17쪽
73 태권도 연습 (1964년 여름, 프랑스 파리) 24.04.28 25 3 11쪽
72 중정 압수수색 쇼 (1964년 여름, 서울) 24.04.28 36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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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수상한 사내 2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20 21 2 11쪽
68 수상한 사내 1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20 22 2 13쪽
67 팔레 가르니에 연회 4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14 27 2 10쪽
66 팔레 가르니에 연회 3 (1964년 2월 15일, 프랑스 파리) 24.04.14 32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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