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6.14 19:20
연재수 :
215 회
조회수 :
22,016
추천수 :
512
글자수 :
916,378

작성
24.02.13 23:49
조회
26
추천
1
글자
10쪽

청소하는 날 (10)

DUMMY

154화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늪에 뗏목을 띄웠다.

밤 열 시가 조금 안 돼서 출발했는데, 뭍에 오르고 보니 해가 중천에 뜰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늪 속에 있던 섬에서 육십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밤새 노를 저어 도착한 이곳은, 어네스퍼드주 남서부에 위치한, 페드모어라는 마을 인근의 황무지이다.

이곳에서 남쪽 방향으로 대략 삼 킬로 정도만 내려가면 콘체스터주가 나온다.

주 경계에서 콘체스터 성까지의 거리는 이십 킬로가 조금 넘으니, 말을 타고 달리면 고작 이십 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라는 얘기다.


다음 달이면 열다섯 살이 되는 어린 소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반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오지에서 숨어 살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심경이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소녀의 손을, 지난달에 생일이 지나서 먼저 열다섯이 된, 소년이 다정하게 꼭 잡아 주었다.

소녀의 손을 잡은 그 소년의 눈에도 벅찬 감동의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발칙하게도 어린 나이에 벌써 눈이 맞아 커플이 된 두 꼬마가 괘씸했던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일행 앞에 웬 괴한들이 나타나 길을 막아서 버렸다.


“정보 길드 어네스퍼드 지부에서 나온 로빈이라 하옵니다. 말을 준비해 두었사옵니다. 고귀하신 분들이 타시기에 부족한 놈들이기는 하오나, 천한 것들이 급하게 준비하느라 그런 것이오니 부디 내치지 마옵소서.”


일행 중 유독 키가 큰 두 인물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거드름을 피우며 사례를 하였다.


“이따가 본체를 만나면, 영감들이 알뜰하게 챙겨 주더라고 이야기하마. 수고들 하였다. 돌아들 가 보아라.”

“각하, 황감하옵니다!”


공손히 절을 한 세 사내가 종종걸음으로 길가로 비켜섰다.

세 사내의 극진한 환송을 받으며 일행은 말에 올라 남은 길을 재촉하였다.


전대 콘체스터 백작인 마일즈 드레이시의 막내딸이자 드레이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소피아 양은, 눈앞의 두 키 큰 사내를 보며,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녀의 맏오라비가 괴상한 몰골로 나타났던 것이 칠월 말경이었다.

살기 위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숲속을 정처 없이 헤매던 그녀와 그녀의 보호자들 앞에, 붉은 머리의 거구가 대뜸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늪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무려 반년을 내팽개쳐 놓았다.


늪으로 들어가기 전에 족히 백 마리가 훌쩍 넘는 야생 짐승을 잡아다 주었기에, 죽었다 살아 돌아온 오라비가 드디어 철이 든 줄 알았다.

푸짐하게 먹으면서 잠시만 기다리라는 뜻으로 보여 준 배려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이어지는 충고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틀에 한 마리씩만 먹어라. 내 아무리 늦어도 열 달은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물과 열매만 먹으면서 반년 정도를 버텨 볼 요량이라면, 양껏 처먹어도 말리지는 않겠다. 그 정도는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않겠느냐? 한창 성장 중인 꼬마가 둘이나 되어서 베푸는 친절이니, 항상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지어다.”


나이 차가 아홉 살이나 나서 말 붙이기도 어려운 오라비라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녀의 오라비는 사실 주고 욕먹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이남 일녀의 무인도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무인도에 샘도 있고 나무도 충분히 있어, 생존에 지장이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다 세 사람 중 가장 연장자인 컬버트는 마법 수련에 미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양팔만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다른 두 어린것들은 혼례라도 치른 신혼부부처럼 행세하느라 다른 의미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각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세 사람 앞에, 한 달 전인 올해 일월 이일, 신장 삼 미터 삼십의 머리 검은 괴수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기함을 할 듯이 놀란 컬버트가 마력을 일으키다가 꿀밤을 맞고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마자, 당시는 열네 살이었던, 꼬마 래널프가 검을 뽑아 들고 여자 친구의 앞을 막아섰다.

어린 소피아 또한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힘을 보태겠다고, 단검을 꼬나 쥐고는 남자 친구의 옆에 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용맹한 어린 검사가 눈물, 콧물, 침, 오줌을 질질 흘리며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무슨 싸움을 하겠다는 거야? 당장 내 뒤에 숨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제가 싼 오줌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리던 어린 소녀가 “닥쳐! 죽으려면 같이 죽어! 이제 나 혼자만 살아남는 일은 두 번 다시! 절대로 없어!”라고 외치며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마계에서 강림한 듯한 괴수 앞에서, 손발을 덜덜 떨면서 검을 쥐고 있느라, 사력을 다하는 예비 신랑 신부를 보고 새 오빠 하지운은 감격해 버리고 말았다.


“내 매제 중에 처음으로 성에 차는 놈이 나왔구나! 순 한심한 병신들만 보다가 너를 보니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넌 무조건 합격이다! 다음 달에 식을 올리자꾸나! 성을 깨끗이 치워 놓아야 하니 딱 한 달만 기다리거라.”


이 동네 기준에 귀족 가문 출신의 아이가, 기사 서임도 받지 않고, 십 대 중반에 혼인을 한다는 게 약간 이른 감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하지운의 사정을 생각하면, 강제로라도 둘을 혼인시켜 놓고 숲 너머로 떠나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둘의 꼴을 보아 하니, 이미 ‘성춘향과 이몽룡’이 따로 없었다.

하지운의 입장에서 손도 안 대고 코 풀 상황이 흡족하게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검은 머리 마귀가 오라비 행세를 하기에, 용기를 낸 소피아 양이 눈물을 훔치며 눈앞에 있는 괴수의 상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맏오라비의 생김새가 약간은 남아 있었다.


“하하! 이 오라비가 또다시 작은 성취가 있었느니라. 그래서 꼴이 이런 것이니 너무 놀랄 필요 없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라비의 면상이 뒤틀리더니 키까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두 아이 모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통곡을 해 버리고 말았다.


상념에 빠져 있던 소피아 양에게 복제 인간 중 하나가 충고를 하였다.


“꼬마야, 네 오라비가 그새 키가 좀 더 커졌거든. 그러니 뭘 보게 되든 이번에는 너무 놀라지 마. 너 저번에 너무 울더라. 이제는 아랫것들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그렇게 애처럼 행동해선 안 돼. 네 오라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라, 실질적인 가주 노릇은 네가 해야 해.”

“저... 이번에는 얼마나 커지셨는데요?”

“뭐, 이번에도... 아니, 이번에는 좀 많이 커졌어. 그놈이 최근에 이것저것 처먹은 게 많았거든. 아직도 성장기가 끝나지 않았나 봐. 무럭무럭 잘도 자라네.”

“그,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아휴, 그냥 사 미터를 조금 넘겼어. 그래도 오히려 면상이랑 머리색은 예전 상태에 가깝게 돌아왔어. 금발 머리들을 꾸준하게 처먹어서 그런가? 다행히 개돼지들이 면상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지 뭐야. 천만다행이야. 하마터면 우리까지 개돼지처럼 될 뻔했어.”

“그러니까! 난 '그놈 면상이 돼지머리처럼 변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식음을 전폐했었다니까.”

“무슨 소리야? 우린 원래 밥 안 먹잖아?”

“말이 그렇다고!”

“미친 또라이 새끼.”

“애 앞에서 말 좀 곱게 해라. 다 듣고 있잖아.”

“아...”


그들의 대화를 한창 엿듣고 있던 컬버트 브리즌 호소인의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반년 전 아이 둘을 데리고 추적자들을 피해 숲을 헤매던 그의 앞에, 키가 이 미터 팔십이나 되는 붉은 머리 괴수가 나타났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뻔한 컬버트 호소인이 기겁을 하며 마력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물방울들이 모여들더니 실물 사이즈의 새 동생 래널프의 형상을 만들어 갔다.

물의 래널프는 형태를 갖춘 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듯, 검지를 세우더니 좌우로 까딱거리기까지 하였다.

누가 봐도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였다.


뭔가 울컥하는 심정에 물 덩어리를 얼려 버릴까 생각하는 컬버트 호소인의 면상 앞에 이번에는, 오분의 일 길이로 축소시킨, 벌겋게 타오르는 오리지널 버전의 로저 드레이시가 등장해 버렸다.

불꽃의 로저 드레이시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까불면 뒈진다는 메시지를 성의 있게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컬버트 호소인의 전의가 콩알만 하게 오그라들어 버렸다.


일행 중에 오리지널 로저 드레이시를 못 알아볼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붉은 머리 괴수의 낯짝을 한참이나 뜯어보던 소피아 양이 갑자기 흙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울음 속에는 안도의 감정부터 희망,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오라비에 대한 원망, 원수들에 대한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오열하는 그녀를 보고 컬버트 호소인도 긴장을 풀고 마력을 흩어 버렸다.

‘적어도 새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라는 로저 호소인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고 절망했었던 컬버트 호소인이다.

어떻게든 붉은 머리 괴수를 극복해 내겠다는 마음 하나로, 반년 동안, 미친 듯이 수련만을 거듭해 왔던 그이다.


그런데 미친 괴수 놈도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아 온 모양이다.

가만히 서서, 권능 따윈 필요 없이, 아파트 이 층 창문을 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니 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은 줄 알았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87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0) 24.04.19 20 1 10쪽
186 새 역사 창조의 건아 (9) 24.04.17 22 1 9쪽
185 새 역사 창조의 건아 (8) 24.04.16 28 1 10쪽
184 새 역사 창조의 건아 (7) 24.04.13 27 1 10쪽
183 새 역사 창조의 건아 (6) 24.04.11 23 1 9쪽
182 새 역사 창조의 건아 (5) 24.04.09 20 1 9쪽
181 새 역사 창조의 건아 (4) 24.04.07 29 1 9쪽
180 새 역사 창조의 건아 (3) 24.04.05 25 1 10쪽
179 새 역사 창조의 건아 (2) 24.04.03 26 1 10쪽
178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 24.04.02 25 1 11쪽
177 웬도버의 봄 (15) 24.03.28 26 1 12쪽
176 웬도버의 봄 (14) 24.03.26 28 1 10쪽
175 웬도버의 봄 (13) 24.03.25 27 2 10쪽
174 웬도버의 봄 (12) 24.03.22 26 1 10쪽
173 웬도버의 봄 (11) 24.03.21 27 1 10쪽
172 웬도버의 봄 (10) 24.03.18 30 1 10쪽
171 웬도버의 봄 (9) 24.03.17 34 1 10쪽
170 웬도버의 봄 (8) 24.03.15 29 1 9쪽
169 웬도버의 봄 (7) 24.03.13 32 1 9쪽
168 웬도버의 봄 (6) 24.03.10 26 1 9쪽
167 웬도버의 봄 (5) 24.03.08 30 1 10쪽
166 웬도버의 봄 (4) +2 24.03.06 30 2 10쪽
165 웬도버의 봄 (3) 24.03.04 30 1 9쪽
164 웬도버의 봄 (2) 24.03.02 32 1 10쪽
163 웬도버의 봄 (1) 24.02.29 23 1 10쪽
162 청소하는 날 (17) 24.02.27 24 1 10쪽
161 청소하는 날 (16) 24.02.25 23 1 9쪽
160 청소하는 날 (15) 24.02.24 25 2 10쪽
159 청소하는 날 (14) 24.02.22 30 1 10쪽
158 청소하는 날 (13) 24.02.20 22 1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