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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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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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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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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34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3)

DUMMY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경비병은 철저히 마법사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단호히 선을 긋는 그녀의 태도에서는 강직함이 절로 풍겨 나왔다.

그러나 이미 현우의 입에서 쏟아진 한 마디는 여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경비병들은 물론, 주변의 구경꾼들에게도 생생히 전해진 지 오래였다.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퍼져나가듯, 마법사가 일으킨 물결은 약해질지언정 계속해서 입에서 입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었다.


"에헤, 내가 그래도 친구를 모를까. 일 년 남짓하긴 해도 수업도 같이 듣고 했던 이를 내가 잊어버릴 것 같아?"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진다. 한낱 경비병과 마법사의 관계라면 이토록 사람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을 이유가 없을 텐데, 그들은 무언가 엄청난 것의 꼬투리라도 잡은 것마냥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제서야 자국에서 날개의 마법사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옆에 있는 상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톰슨 씨는 저 경비병이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자네가 이미 알고 있다 하지 않았나?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이제야 보니 알게 되었네. 어째 상인인 이 몸보다 훨씬 눈썰미가 뛰어난 겐가. 마법사란 족속들은 전부 그런 건가?"

"아뇨. 당연히 보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있은 만큼 훨씬 더 잘 아는 건 당연합니다. 톰슨 씨가 희끄무레한 버터에 잠깐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상품의 품질이나 값어치들을 매길 수 있는 것처럼요."


현우는 톰슨의 말재간에 말려들기 전에 재빨리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제가 알고 있는 미아가 여기서는 뭐, 유명한 집 자제라도 되는 모양인가 보네요? 다들 이렇게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말입니다. 하기야 그런 자제분이 수도의 경비병 일을 하고 있을 리가..."


손사래를 치며 마법사는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생각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인정했다.

자신이 그간 보았던 미아의 행동들. 벤이나 자신과도 거리낌없이 지냈던 데다가 기숙사나 대학에서도 별 잡음이 없던 성격. 그저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는 평판 정도.

여태껏 현우가 알고 있는 미아의 특징은 혹시라도 모를 그의 추측과는 교집합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맞네."

"에?"


왜 상황은 짓궂게만 흘러가는 것일까.

톰슨은 단 한마디를 내뱉는 것으로 현우의 입꼬리를 곧바로 밑으로 내려버렸다.

마나의 길을 걷는 이로서 신을 믿는 것은 아니나, 고향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우는 분명 주변의 신전을 한번쯤은 들려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현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톰슨은 마법사의 표정을 보고선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단한 집 자제긴 하지. 아니, 무릇 세계수가 뿌리를 뻗은 이 땅을 사는 엘리안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우러러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네. 저 멀리 불어온 광풍을 막아낸 위대한 엘프의 직계이자, 또한 그와 모든 역정을 같이 겪은 명문가의 후손이기도 하니."

"...로열(Royal) 오브 로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혼잣말에 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 엘리안을 수식하는 뒷말은 공화국. 그렇다는 건 이오니아나 알피오르처럼 왕정이 아니라는 소리다. 실례가 될 수도 있는 표현이었다.

톰슨 또한 고개를 저으며 현우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왕이 없지. 귀족들과 우리가 뽑은 나라의 대표들이 모인 최고 회의가 그를 대신할 뿐. 뭐, 자네의 말을 빌리자면 귀족 중의 귀족이라 할 수는 있겠군."

"하, 하하..."

"당연히 이야깃거리가 될 만 하네. 귀족가의 여식이 올랜도스를 가지 않고 다른 나라의 대학을 선택한 것부터 흥미롭지 않나."


올랜도스가 무어냐는 현우의 말에 톰슨은 엘리안의 제일가는 대학이라 답했다. 으레 귀족이라면 다들 올랜도스를 거쳐 회의에 이름을 올리는 이가 되거나 다른 뜻을 둔 곳으로 꿈을 이어나가는 법이라며 상인의 입에서는 말이 끊이질 않았다.

현우는 흘릴 것은 흘리고 주어들을 것은 주어들은 후, 이를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내가 마드라드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면 되겠군.'


"필시 자네는 이오니아에서 온 마법사일 테고. 흥미롭지 않나? 여러 이야기들을 지어낼 수 있을 테지. 예컨대 자신의 친구를 보기 위해 옷이 헤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여기까지 걸음을 옮긴 한 젊은 마법사의 사랑이야기라던가..."

"네? 어휴, 가당치도 않은 말씀 마십쇼."


그제서야 현우는 얼굴을 구기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들어 옅은 금발의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눈길이 마주친 미아의 얼굴은 베일에 가려져서 명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현우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지금이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했니, 바보야.'라고.


* * *


그녀가 자국의 대학이 아닌 이오니아의 마드라드를 선택한 것은 자그마한 일탈의 일환이었다.

고모는 이미 나라 전역에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이었고, 아버지 또한 나라의 국정을 논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 나서지 않고 있을 뿐 대강 알 사람은 알고 있는 유명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쪽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그녀를 보면 반푼이다 뒤에서 툴툴거리는 아버지 핏줄의 친척들이 그녀의 어머니만 보면 입을 꽉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하곤 했다.

그런 부모님의 밑에서 그녀는 꽤나 무거운 압박감에 시달렸다. 아니, 압박감인 줄도 몰랐던 것이 현실이었으리라.

막연히 머리나 몸이 고되다고만 느꼈던 감정이, 비로소 바깥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서야 깨달았으니 말이다.


아마 자신을 감시하는 이가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아무런 편견 없이 그저 '미아'라는 이름을 가진 하프엘프로만 보는 환경을 접하게 되어 그녀는 마드라드의 생활에 너무나도 만족했다.

정체를 아는 교수진들은 다행히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었고, 미아 또한 말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정체를 들키지는 않았는지 되물어가며 말을 아꼈다.


마드라드에서 사귄 친구인 벤과 현우에게도 미아는 너무나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알 수 있으리라.

배를 타거나 수십 일을 걸려 마차를 타고 와야 할 정도로 먼 타국에서 마드라드로 올 정도에다가, 이오니아의 말과 학문을 높은 수준으로 구사하는 그녀의 배경에 있을 부와 권력이 얼마나 대단할지를.

허나 벤과 현우는 그런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아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었고, 그 덕분에 그녀는 향수를 딛고 마드라드의 생활에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물론 하프엘프라는 출신을 안 그들이 몇 가지의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다행히도 미아의 개인사에 대한 것들보다는 엘프란 종족이 가지는 일종의 선망에 대한 것들이었으니, 이스윈 출신이었던 아버지에게 들은 것들이 적잖게 있는지라 미아는 친구들이 묻는 수십 개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지만.


그렇게 현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던 그녀였으나, 평소의 상황과는 반대로 자신의 모국에서 이렇게 그를 만나게 된 지금.

미아는 스스로에게 너무 친구를 좋게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재평가를 요구하고 싶었다.


"저 분이 그..."

"맞아, 미아 아가씨. 그리고 저 앞에 있는 마법사가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았고."

"아는 사이지? 그렇지?"

"틀림 없다니까. 내 25년 동안 마누라에게 시달리며 먹은 눈칫밥으로 볼 때 틀림 없어. 저 마법사는 분명히 아가씨를 좋아해서 여기에 온 거라니까."


엘프라 하여 모두가 귀가 밝은 것은 아니었다. 귀가 크다고 하여 청력이 좋다면, 애초에 몸뚱아리가 커서 모든 것들이 다 커다란 오거(Ogre)는 왜 귀가 어두울까.

하지만 미아에게는 그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평지사람'들 보다 길고 큰 귀를 통해 그녀는 구경꾼들이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지 똑똑히 들었으니까.


"젠장."


마드라드에 와서 벤과 현우와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도 제법 걸걸해졌다.

아마 그녀의 아버지가 지금의 광경을 봤다면 까무러치게 놀랐을 일이었고, 어머니가 봤다면 호탕하게 웃으며 좋아라 할 광경이었다.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아야 저들의 입에서 더 이상 자신이 언급되지 않을까 하여 고심하던 미아에게, 역시나 그녀의 친우가 구원의 손길을 들이밀었다.


상인 톰슨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 준 것처럼, 현우는 한숨을 쉬더니 방금 입은 로브를 묶은 허리끈에서 주머니를 찾아, 그것의 입구를 열고 메달을 꺼냈다.

백금색의 메달은 태양빛을 받아 찬란히 빛났으며, 저 멀리 무리의 끝자락에 있는 구경꾼들이라 할지언정 마법사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메달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랑 이야기? 웃기지 마세요. 아직 그 쪽에 뜻이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이가 제일 먼저 결혼에 성공하곤 하지. 암. 예부터 전해지는 말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말이야."

"저는 오히려 초대를 받아서 온 겁니다. 초대를요. 도중에 사건이 좀 생겨서 몰골이 이렇긴 합니다만... 제 친구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서 온 거라고요."

"미안. 전혀 관련이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겠어."


경비병의 말에 현우는 눈만 끔뻑거렸다.


"아무리 내가 너를 부정한다고 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믿지 않을 테니까, 그냥 말을 놓아도 되겠지? 오랜만이네, 현우야."

"역시 네가 맞았네."

"네가 갑자기 어디론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벤이랑 얼마나 걱정을 한 줄 알아? 물론 곧바로 나도 엘리아른으로 떠나야 했으니 피차 벤에게 걱정을 끼친 건 맞겠지만."


베일을 벗은 뒤에 드러나는 머리카락과 얼굴은 현우가 익히 알던 이의 것이 맞았다.

미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담담한 눈으로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들고 있는 메달, 라이카 님의 증표잖아. 맞지?"

"학회장님을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마법 학회에 참여했던 적이 있어?"


대륙 마법 학회가 열렸던 곳은 대륙의 중심 알피오르 왕국의 수도 랜싯.

이오니아에서도 몇 십일이 걸리는 거리이며 이는 엘리안에서도 마찬가지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대륙 마법 학회의 수장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공화국의 최고 위원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너도 이오니아의 국왕 전하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정말로 왕을 독대하기까지 했었던 현우였기에, 그는 미아의 사뭇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한 물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날개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친우 중 한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더군다나 어떻게 고모님의 이름을 모르고 있겠어. 어렸을 때면 일주일에 한번씩은 얼굴을 뵙곤 했었는데."

"...참담하네. 지금 심정이 말이야. 무슨, 나를 두고 세상 모든 이들이 작당을 한 기분이야, 지금. 세상에나, 죄를 묻는다고 해서 불려간 마법 학회에서 나를 엘리안으로 보낸 사람이 친구의 고모였다는 게 믿어져?"

"나도 마찬가지거든. 갑작스럽게 수도에서 소동을 피운 이가 있어서 달려와봤더니, 그 범인은 마드라드에서 알게 된 친구이자 어디론가 잡혀갔다는 애였어. 이게 믿어져?"


구경꾼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미 톰슨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돌렸던 크림을 제거한 우유(Skim-milk)는 거의 바닥을 보였다. 제 집으로 가져간 이들도 더러 된 데다가 수십이 넘는 사람들이 두 세 잔씩만 마셔도 단숨에 줄어들 테니.

이런 진귀한 광경을 보고 있는 데에 먹을 것이 빠지면 섭섭한지라, 벌써부터 멀리 떨어진 난전에서 버터제조 소동을 지켜본 상인들 중에선 손수 가판대를 이끌고 합류한 자들도 있었다.


경비병들이 흩어져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있지만, 줄어들기는커녕 점차 더 몸집을 불려가는 인파에 미아는 고개를 팍 숙이며 현우에게만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카 고모님의 손님이라면 일단 우리 집에서 묵는 게 나을 거야. 거리도 가까운 데다가, 어차피 현우 너도 어디 여관에서 애먼 돈을 쓰는 것보다야 편하지 않겠어?"

"고맙네. 역시 좋은 친구는 두고두고 도움이 된다더니 타지에서 이런 도움을 받을 줄이야."

"에휴. 나중에 방을 구했다던 여관이나 말해줘. 사람을 보내서 짐을 가져와야 하니."


미아는 큰 소리로 '라이카 님의 손님이니 이 자는 자신이 직접 상대하겠다'며 사실을 알렸고, 다른 경비병들의 태도와 더불어 그녀가 직접 소명을 한 바, 혹시 모를 의혹들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사람들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소재거리가 떨어지자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경비병들에게도 사정을 설명한 미아는 좌우로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고, 현우 또한 그녀의 뒤를 쫓아 속도를 맞추었다.

도착지는 척 보기에도 부유해 보이는 저택들이 밀집해있는 거리, 미아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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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237화. 이스윈의 그녀는 울부짖노라(1) 20.05.28 27 0 14쪽
236 236화. 상견(2) 20.05.27 30 0 14쪽
235 235화. 상견(1) 20.05.26 28 0 14쪽
» 234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3) 20.05.22 28 0 13쪽
233 233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2) 20.05.21 26 0 13쪽
232 232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1) +3 20.05.20 30 0 14쪽
231 231화. 마이-아우카흐티 20.05.19 25 0 14쪽
230 230화. 탐닉의 뿌리(4) 20.05.18 24 0 13쪽
229 229화. 탐닉의 뿌리(3) 20.05.15 30 0 14쪽
228 228화. 탐닉의 뿌리(2) 20.05.14 26 0 13쪽
227 227화. 탐닉의 뿌리(1) 20.05.13 27 0 14쪽
226 226화. 여기가 엘리안은 맞는 거지?(3) 20.05.12 28 0 13쪽
225 225화. 여기가 엘리안은 맞는 거지?(2) 20.05.11 29 0 14쪽
224 224화. 여기가 엘리안은 맞는 거지?(1) 20.05.08 25 0 14쪽
223 223화. 불과 달의 윤무(4) 20.05.06 26 0 14쪽
222 222화. 불과 달의 윤무(3) 20.05.05 29 0 14쪽
221 221화. 불과 달의 윤무(2) 20.05.04 27 0 14쪽
220 220화. 불과 달의 윤무(1) 20.05.01 30 0 14쪽
219 219화. 학회의 밤은 길었다(4) 20.04.30 30 0 14쪽
218 218화. 학회의 밤은 길었다(3) 20.04.29 3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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