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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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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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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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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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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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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자
20쪽

17화. 너에게 하고 싶은 말.

DUMMY

“아니! 내 진정으로, 마음 깊숙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그대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오!”

“……!”



손발이 오그라드는, 사극 톤의 연기. 어떻게 해도 굉장히 부끄러워,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상대역은 유진이와 리유. 설정 상으로, 유진이는 상당히 귀한댁 아가씨로 등장하고, 악역이고, 무서운 아이다. 리유는, 가난한 집 소녀. 말하고 있는 상황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결혼하기로 한 유진이를 물리치고, 원래의 사랑하는 리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상황.



“……너 이거 일부러 이렇게 썼지 근미래?!”

“아핳!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냥 제 문학적 소양을 마음껏 발휘한 것일 뿐인걸요!”

“어후…… 저걸 때릴 수도 없고.”



종이를 돌돌 말고, ‘컷!’ 하고 마음에 드는 표정으로 마치 제가 영화감독인양 행동하는 미래에게 한 마디. 미래는 특유의 놀리는 웃음을 안면 가득 띠운 채 깔깔대며 웃는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침착해라, 이건 미래의 함정이다! 함정인 걸 알면 뭐하나, 뻔히 속아넘어가고 있는 나인데.



“뭐, 미래가 부탁하니까 해주지만. 악역이라니, 나하고 너무 이미지 안 맞지 않아?”

“……아뇨,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에? 나 그런 이미지였어?!”



도도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유진이. 드립이겠지. 드립일 거야.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게(?) 저런 말을 할 수는 없어. 저지른 짓이 있는데. 미래는 싱긋 웃으며 ‘완전 메소드 연기거든?!’ 하고 자신의 인사고과를 자화자찬한다. 뭐, 그건 인정. 과거와는 별개로, 발연기인 나와는 달리 유진이는 연기를 상당히 잘 하니까.



“나랑 웅도랑 갈아엎은 게 유진이 때문 아니었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 제 잘못이에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아아~ 다 지난 일 가지고 또.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서 악역 잘 어울리지만.”

“히잉!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돼!”



리유의 돌직구에 유진이는 잔뜩 울상이 된다. 오랜만에 보이는 무조건적 사죄모드. 뭐, 뿌리깊게 반성하고 있고, 뭣보다 이미 예전에 리유의 용서를 받은 유진이니까. 이제는, 예전 일도 다 드립에 불과하지. 악역 연기를 잘 하는 건, 이미 한 차례의 연기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그나저나, 이게 다 무엇이냐. 조물주에게 소원이 있다면 첫째로 공부, 둘째도 공부, 셋째도 힘주어 ‘대한민국 학생들의 완전한 공부와 인서울 국립 대학교 입성’을 울부짖을 우리나라 학교에서, 이런 특별활동 같은 시간이라니.


……잠깐만, 인서울 국립 대학이면 서울대밖에 더 있냐고. 몇십 만명의 학생들이 그걸 위해 이렇게 무의미한 소모전을 하고 있다니. 자랑스런 우리 조국이구나. 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그냥, 학교생활만 하다보면 틈틈히 이 자랑스런 공교육 체계에 대해 까고 싶어서 안달이 나 버려서.





대체로, 2학기는 1학기보다 빨리 지나가는 경향이 있다. 1학기는 새학기이고, 새로운 학년이나, 새로운 년에 대한 이런저런 기대감 때문인지 어쩐지, 단순한 플라시보 효과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충실하고 착실하고 느리게, 그러면서도 빠르게 적절한 시간대로 지나가곤 한다.


하지만 2학기는 자비가 없다. 원래 인생도 황혼기에 세월이 더 빨리 지나가지 않는가. 18살 먹은 학생이 그런 말을 지껄일 자격은 없는 것 같지만. 뭐랄까, 개학하고 8월 말이었는데 어느사이 한달이 훌쩍 지나가 이제는 9월 말, 10월을 바라보고 있다.


10월 초~중순 사이에, 우리학교는 축제를 한다. 물론 여기는 일본이 아니고 대한민국이기에, 그렇게 엄청 큰 규모의 축제를 하지는 않지만. 다 구색내기용이지. 이마저도 축소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훌륭하다, 훌륭해 어른 놈들. 자기들은 어릴 때 축제 즐겁지 않았나. 나는 이제 학생 아니니 상관없다 이건가. 아니면,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생이 같은 어린애들이 발랑 까져서 남자애 여자애 어울리고 다니는 게 짜증난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정상적이다.


서두가 참 길었는데, 어쨌든 그 알량한 축제이시다. 축제라면 당연히! 필수요소로 들어가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음. 고등학교 축제가 뭐 있나. 그냥 뻔하게, 반 장기자랑이라고 알량한 연극이나 이런 거나 하고, 보기도 싫은 엉성한 댄스나 재미 하나도 없는 꽁트, 왜 하는지 모르겠는 노래자랑에 다른 학교 찬조출현 댄스 동아리나 밴드 동아리 같은 것들. 아, 남고라면 필수적으로 여장이 들어가곤 할텐데.


……그냥 학생 입장에서도 충분히 재미없을 것 같은데. 왜 하지, 그런 축제. 공부하는 데에도 방해되고. 별로 좋을 게 없잖아. 게다가, 축제라고 해도 전야제 하나에 다 몰려있고. 음, 잘은 모르겠고, 춤이나 춥시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우리 반의 장기자랑은 그 알량한 연극이다. 조례시간, 귀찮다는 듯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고 불순한 극도의 자치권을 부여한 사감 선생님. 이어 미친듯이 손을 들어 자신이 시나리오/감독이 되겠다고 강력하게 어필하는 미래. 미래의 주장에 따라, 이런저런 배역들이 결정이 되었고─ 나는 아무런 저항할 권리도 없이 당연하게 주인공이 되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억울하잖아?! 다른 애들은 제비뽑기로 뽑아놓고 왜 나만?! 왜 나는 당연하게 처음부터 주인공인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선거로 뽑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에에~ 생떼 부리기에요? 그런 게 허용되는 건 고1까지라구요, 오빠?”



억울한 마음에 연습하다말고 벌컥 화를 낸다. 그렇잖아. 솔직히,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역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은데. 사실 어느 쪽이냐면 그냥 축제를 즐기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 미래가 추천할 때야, 선생님도 쳐다보고 있고, 다른 애들도 ‘우우~’ 하면서 밀어주는 느낌이니까 하긴 했지만. 미래는 싱긋 웃으며 돌돌 만 종이를 나에게 가리키며 말한다.



“생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당한 의견 제시거든?! 매도하지 마!”

“으음~ 그치만, 남자라곤 오빠밖에 없는 게 우리학교 현실이잖아요. 아무리 못 생기고, 찌질하고, 병X 같고, 우울하고 음습해보이는 오빠라고 해도, 어쨌든 남자는 남자니까. 오빠는 기둥서방 같은 역할이에요.”

“폭언 쩐다 너?! 나, 나 못생겼었냐? 그래도 기본은 가는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미래의 폭언에 내 멘탈은 가루가 돼 버렸다. 그, 그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여자애들 몇 명 씩이나 나 좋아해주고 그러니까 중간 이상은 가는 줄 알았는데. 잔뜩 시무룩해진 나에게, 미래는 ‘에헤헤─ 농담인 줄 알았죠? 진담이랍니다!’ 하곤 더욱 내 속을 벅벅 긁어놓는다.



“자자, 한 번만 더 해보고 이만 농땡이 칩시다~!”

“아하핫.”

“응!”



넉살좋게 말하는 미래의 말에 다른 여자애들이 깔깔 웃는다. 음, 확실히. 침착맨과 사귀고부터는 미래, 어느 정도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하고도 적절한 교류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잘 됐네. 나 같은 이상한 녀석하고 놀 때엔 우리 우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우리하고만 놀았는데.


뭐, 그런 것보다도 싫어할 이유가 없겠지. 지금 시간은 원래 야자시간. 미래가 특유의 행동력으로 선생님에게 찾아가 ‘연극하는 애들 연습해도 될까요!’ 하고 말해서 야자 빼고 연습하고 있는 거니까. 그리고, 우리 미래사단(?)의 모토는 1시간 열심히 하고 2시간 농땡이 피우기. 이러면 애들이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희세랑은 잘 돼 가?”

“푸흡─!!”

“어머, 정곡이었나. 미안.”



한 차례 연습을 마치고, 농땡이 피우는 시간. 물을 마시고 있는 나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네는 유진이. 나도 모르게 물을 벌컥 바닥에 뱉어냈다. 여자애들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아하하, 사레들어버렸네’ 하고 혼잣말. 그리곤 유진이를 흘겨본다. 싱긋 웃는 유진이. 아직도 연기 모드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흑막 같은 의미심장한 미소다.



“그, 뭐, 내가 잘 되던 말던.”

“어엉~ 그건 너무한데. 그래도 한 때 너 좋아했던 여자애한테.”

“……그런 말을 잘도. 너는 이제 하나도 안 어색해?”

“어머, 어색해? 아직도 나 의식하는구나~ 웅도, 전형적으로 바람기 있구나? 나쁜 남자?”

“그, 그런 말이 아니라!”



미래조련자격증은 1급을 넘어서 특급까지 딸 기세인 나지만, 유진이에겐 한 수 접고 들어가야한다. 한 수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는데.


성빈이와 시아를 쳐낸(?) 지 한 달. 그 뒤로 어떠한 진전은 전혀 없었다. 성빈이와 시아를 쳐내는 데 모든 기력을 소진한 정웅도는 이어지는 희세에게의 고백에서 거짓말처럼 패배하고……


아, 안 돼!

돼!


하아. 이런 시덥잖은 개드립이나 생각하고 있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인 건 이제 다들 눈치챘는데. 정작 당사자들이 그렇게 밍기적대고 있으면 어떡해?”

“……알아, 아는데. ……아 왜 고백은 남자가 먼저 해야 하는데?!”



사실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리유와 헤어지고 멘탈이 가루가 되었을 때, 내 입으로 희세에게 먼저 이별 통보 비슷한 걸 했으니까. ……웃긴 게, 사귄 적도 없는데 이별통보라니. 얼마나 우스운가.


막상 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희세에게 올인하려니 또 불안하고 자신감이 안 생기니까. 그…… 정말, 희세도 나 좋아하는 거 맞으려나? 그냥 성격 자체가 새침데기인 거 아니야?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며 고백을 미루고 있는 나. 그래서, 미묘하게 희세와 더 말도 안 하고 기묘하게 어색해진 상태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흐흥. 그럼 기다리던가. 감이 저절로 떨어져서, 누워 있는 웅도 입으로 정확하게 떨어지기까지. 내 생각엔 농장주가 따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계속 기다리다간, 희세 다른 사람한테 따·먹·힌·다·구?”

“너, 너……!”

“아핫. 나는, 차라리 웅도 쪽이 먼저 따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희세도 바라고 있지 않을까? 네가 따먹어주길.”

“유진이 너 왜 그래!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으응? 아니, 내숭이지. 여자애들은, 좋아하는 남자애한테만은 한없이 야하니까. 그리고, 웅도는 내가 좋아했었던 남자애니까. 이 정도 한꺼풀 벗는 건, 상관없잖아? 뭣하면, 그거 프랜드라도?”

“으아아아아! 이러는 거, 유진이답지 않아! 나 다운게 뭔데! 내가 아는 채유진은! 후으으…….”



미래와는 궤를 달리하는 유진이의 섹드립에 얼굴이 절로 빨개진다. 눈치 100단인 유진이의 말로 추측하자면, 어쨌든 희세도 나를 좋아한다, 그런 말 같은데. ……‘따먹어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잖아, 유진이 말은. 믿기지 않지만.





--





“연극 연습은 잘 하고 있어?”

“응, 뭐. 덕분에 야자도 째고 잘 지내고 있지.”

“흐흥. 축제기간이니까, 그 정도야.”



야자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시간. 아 뭐, 야자는 안 하고 미래 사단에서 농땡이 피우고 있었지만. 왼편의 성빈이가 싱긋 웃으며 물어보고 대답해준다. 안타깝게도 성빈이랑 희세는 반이 다르니까 연극연습에 마주칠 일이 없다. 같은 반이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어쩌면 주연에 희세가 등극해서 자연스럽게 고백 연습처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러면 이럴수록 희세가 더 의식된다. 힐끔 희세를 쳐다본다. 으앗, 눈 마주쳤다!



“그럼 그만큼 더 공부해야지? 이따 열람실 올라와.”

“어우야, 좀 봐줘라. 나 주연이라 대사 외우고 그런 것 때문에 머리 터질 것 같은데. 조금은 휴식을!”

“공부는 꾸준함이거든? 농땡이 피울 생각 접어.”

“……넵.”



괜히 의식했다. 정작 희세는 나에게 전혀 그런 어색한 감정 없는 모양이다. 하긴, 내 쪽에서 성빈이랑 시아 쳐내느라 심적 고통을 겪고 있는 거지. 희세에겐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도리어 공부 안 하고 놀고 있는 요즘의 나에게 상당한 반감이 있는 것 같은 희세인데.



“흐흥. 열심히 공부해.”

“음? 성빈이 넌 열람실 안 오게?”

“오늘은 좀 쉬려구. 너무 늦게까지 해도 다음날 학교에서 졸리니까.”

“흐응, 그래.”



살짝 나에게 눈치를 주며 말하는 성빈이. 움찔 하게 된다. 일종의 ‘신호’인 것일까. 나와 희세가 열람실에 가는데 성빈이가 가지 않겠다고, 대놓고 나에게 눈을 찡긋 하며 말하는 건, 바보가 아닌 담에야 알아차릴 수 있지.



“또 딴짓 할래!”

“어, 응.”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희세는 정말, 나에게 공부를 가르치려는 생각이니까요. 뭐, 열람실은 모두가 쓰는 곳이라 말을 제대로 할 순 없지만. 일정 시간마다 힐끔 나를 쳐다보며 딴청 피우고 있을 때마다 호되게 말하는 정도. 그것만으로 큰 스트레스.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갇힌 채 하고 있다면 누가 하고 싶겠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할 지도 모른다고. ……잠깐, 그거 그냥 우리나라 학교 상황이잖아. 이래서 청소년 자살률 1위의 위엄이구나.



“……그, 상담할 게 있습니다.”

“……공부 안 하려는 수작질 아냐?”

“아니, 정말.”

“…….”



도저히 안 되는 공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희세에게 말을 꺼냈다. 열람실이기에 속삭이는 목소리로. 희세는 잔뜩 얼굴에 불신을 띄우고 말한다. 고개를 저으며 엄격·근엄·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영 시원찮은 표정의 희세.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고 따라 나온다.



“그래서 뭐.”

“음…… 그러니까. 내가 공부를 안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봤는데.”

“공부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근성과 나태한 정신상태 때문에?”

“헉, 초장부터 너무 정곡이라 할 말이 없는데. 아니, 이게 아니라.”



근엄한 표정으로 옥상의 난간에 팔을 기대고 섰다. 희세는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섰다. 밤인지라 시원한 공기. 한 달 전 즈음에, 여기서 성빈이에게 그랬었지. 말만 들으면 엄한 짓 한 것 같은데. 실은 전혀 시궁창이지만.


이성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희세에게 말할 때 껄끄러울 이유는 없다. 도리어 이렇게 일방적인 매도와 수비가 이루어지는 대화라면 간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 간단하게 희세에게 매도당하고 피식 웃는다. 희세도 구태의연한 나를 보고 ‘제법이네’ 하는 표정으로 싱긋 웃는다.



“그…… 근본적으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저, 꿈이 없습니다.”

“응, 맞네. 그냥 여자만 밝히고 아무 생각도 없는 거, 그게 정웅도 아니었어?”

“아니 왜 요즈음 그렇게 나에 대해 까칠하게 평을 하는 겁니까.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나희세 씨.”

“아니, 근본이 그런 거니까. 네 쪽에서부터 솔직하게 말하니까, 나도 솔직하게 말해야지.”



맥락도 주제도 없이 갑자기 ‘꿈이 없다’는 개소리에, 희세는 현명하게 그것을 인정하며 폭언을 내뱉는다. 물론 전부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반박해본다. 희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어 말한다. 어째 점점 매도의 강도가 강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희세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무슨 말인데. 자세히 말해줘야 알아먹지.”

“음…… 그러니까.”



사실은, 나 너 좋아해. 아, 말해버리고 싶다. 왜 생각만 하고 말을 못 하니. 검은 하늘과 어두운 공간과는 대비되는, 희디흰 피부의 희세 얼굴. 빨려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 새침한 표정. 아니, 지금은 그 얘기 하려고 나온 게 아니잖아! 고백 타이밍 아니야, 지금은.



“저번에, 희세 너는 꿈이 있다고 했잖아.”

“어…… 뭐.”



일전에 얘기할 때.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화려한 희세와는 다소 상반된 꿈을 살며시 얘기했었지. 아니, 유치원 선생님이 어때서. 그냥, 희세라면 판사나 변호사나 여군 같은 게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네 말대로 핑계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런 것도 없이 생으로 공부하려니까, 도리어 답답하고 짜증만 난달까.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동기부여도 안 되고.”

“음, 확실히. 핑계이긴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목표의식하고 동기부여가 무엇보다 중요하긴 하니까.”



깔 건 까면서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희세. 내가 말하면 공부를 피하기 위한 궤변 같지만 희세가 말하면 그럴듯해 보이는 건 함정이다. 나부터가 나를 인정하고 있지 않잖아. 그게, 희세는 모범생이니까.



“그치만, 「꿈」 같은 중요한 걸, 단순히 못 찾겠다는 이유로 타인한테 물어보는 것도 좀 아닌 거 같은데. 조언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그 조언이라도. 정말, 별달리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될지도 전혀, 하나도 안 떠오르고.”

“음.”



다급한 심정으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빼고 희세에게 말한다. 희세니까 이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거지. 이제 점점 피부로 와닿고 있으니까, 고3이 다가오는 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 이러다 잉여인간 되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잔뜩 들고. 희세는 내 말에 살짝 입술을 깨문다.



“우선, 뭐든 간에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건 없어. 나도, 유치원 선생님이 목표라고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게 맞지만. 또, 바뀔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니까. 그렇게 완벽하게 계획대로 살 수만은 없으니까.”

“……그래서 조언은! 얼른 조언해주세요, 현기증 날 것 같단 말에요!”

“에휴. 내 말, 듣고는 있어?”

“아몰랑! 얼른 조언! 나 뭐 하면 될까!”



확실히, 희세는 어른스럽다. 뭔가 철학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없다, 불변의 진리는 없다, 그런 그리스 고대 철학 같은 얘기인가. 나는 확답을 듣고 싶은 건데. 잔뜩 짜증스럽게 생떼를 부린다. 희세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팔짱을 풀고 나와 똑같이 난간에 손을 올린다.



“군인 하는 거 어때.”

“싫거든!? 지금 나 놀려! 너 군대 안 간다고, 남일이라고 막말하는 거 아니야!?”

“왜, 군인 좋잖아. 안정적이고, 건강하고, 국가를 지키는 훌륭한 직업이잖아.”

“개뿔, 총기난사에 가혹행위에 방산비리에! 가기도 전부터 잔뜩 불안하거든?!”



아직 4년 남은 군대에 대한 얘기를 벌써부터 건드리다니! 신성모독이다! 아니, 신성하지도 않지만. 도리어 더욱 걱정만 늘어날 뿐.



“아하하. 그건, 음. 사업 같은 건 어때?”

“더 불안정해! 확실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인데! 그리고 그런 자본 없어 나!”

“에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러면 공무원 해 공무원.”

“……그건. 남자가 가오가 있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무원은.”

“그냥 자살하는 건 어때? 20살 되자마자. 군대도 안 가고 좋네.”

“너무하잖아! 나도 좀 살게 해 줘라!”



이런저런 제안에도 대답하지 않는 나에게, 자살을 권하는 희세. 그렇지, 너도 나도, 그저 죽으면 끝이지. 부자나 빈자나 공통점은 죽음 하나! 너나 나나 죽창 한 방이면! 아니, 이게 아니지. 뭔가 대화가 영양가 없이 돌아간다.



“……아니면, 나랑 같은 대학 오던가……?”

“……에?”



살짝 말끝을 흐리며 말하는 희세. 이번에도 분명 알아들었지만, 이번엔 정말 당황스러워서 ‘에? 난닷테?’를 시전했다. 살짝 얼굴이 상기된 채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희세. 이거……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요?!



“……어쨌든 대학 목표를 크게 잡으면, 나중에 사회 나가서도 그 간판으로 뭐든 벌어먹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공부 하라고 공부!”

“아, 네 일 아니라고 너무 편하게 말한다?! 네가 가는 대학을 내가 어떻게 가!”



희세는 부끄러워하며 잔뜩 나에게 몰아붙인다. 이런 대화에서 정색하고 말하는 것도, 분위기에 맞지 않으니까. 그에 걸맞게 대답한다.


꿈에 대한 심도 있는 상담은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결론은 ‘공부해!’ 라는 상투적인 대답. 열람실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한다.


그래도, 뭔가 확신 하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희세가, 나…… 싫어하지 않는구나. 어쩌면, 좋아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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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13화 - 4 +8 15.11.23 828 14 22쪽
199 13화 - 3 +2 15.11.21 719 21 21쪽
198 13화 - 2 +2 15.11.20 787 17 20쪽
197 13화. 기말고사 치고는 너무 밝은 거 아닙니까?! +9 15.11.19 867 19 20쪽
196 촬영은 다시. +8 15.11.17 703 13 15쪽
195 촬영이 끝나고 난 뒤 ----- 휴재 +10 15.10.17 916 17 19쪽
194 -동결- +8 15.10.15 849 12 1쪽
193 12화 - 4 +10 15.10.14 982 18 25쪽
192 12화 - 3 +8 15.10.13 862 17 18쪽
191 12화 - 2 +10 15.10.12 840 17 20쪽
190 12화. 먹어 줘! +12 15.10.10 999 2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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