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크리스티앙 공자
레베카 황녀와의 약속을 위해 일을 어느 정도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리리카는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며 빨래를 했다.
그리고 3시가 다 되어가자, 방으로 이동해서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1층의 귀빈실로 이동했다.
그런데 1층에 내려오자, 처음 보는 청년이 중앙홀에서 외투를 벗고 있었다.
갈색의 곱슬 머리에 붉은 눈동자와 대비되는 하얀 피부 전체적으르 샤프한 외모를 지닌 남자는 놀랍도록 미인이었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여자로 착각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빈스도 어디 가서 다시 보기 힘든 미남이었지만, 저분도 어디서 또 뵙기 힘들 것 같은 미모를 가지고 계시네.]
그런데 남자는 아주 높은 분인지 시녀장이 직접 나와서 마중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환영한다는 시녀장의 남자는 활짝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말을 했다.
“제가 전혀 반갑지 않을 것인데, 이리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바, 반갑지 않다니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이해는 합니다. 저라고 해도 별로 반갑지 않을 것 같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남자의 비아냥에 시녀장은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한마디 반박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시녀장을 저렇게 쩔쩔매게 만드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할 때쯤, 남자와 리리카가 눈이 맞았다.
“저 레이디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리리카를 보고 남자가 시녀장에게 누구냐고 묻자, 시녀장은 리리카를 확인하고 바로 대답했다.
“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시녀입니다.”
새로 들어온 시녀라는 시녀장의 대답에 남자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리리카를 바라봤다.
“호오~ 그럼 저 레이디가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그 리리카 각하인가 보군요.”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든 존재라는 말을 또 듣고 부끄러움으로 리리카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히잉! 대체 어디까지 알려진거야.]
리리카는 부끄러움으로 계단 중간에서 얼굴만 붉힌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시녀장이 리리카에게 호통을 쳤다.
“거기서 뭐하는 거냐, 리리카? 어서 내려와서 손님께 인사를 드리고 안내를 해야지!!”
“아! 예, 예. 시녀장님!!”
최근 하녀들과 함께 빨래 일만 하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지만, 리리카는 청룡궁에서 황녀의 시녀로서 있는 것이었고, 손님의 접대를 맡는 것은 시녀의 업무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리리카 헐레벌떡 내려와서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청룡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황녀궁의 시녀인 여성이 우아하게 커트시해서 인사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는 모습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고, 시녀장은 자신이 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려버렸다.
“하하.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칭찬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는 리리카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남자는 리리카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정중한 자세로 사과를 했다.
“이런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조롱하는 모양세가 되어버렸군요. 사죄 드리겠습니다.”
빈스와 함께 자신에게 이렇게 정중하게 행동하는 남자를 처음 보는 리리카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닌가 봐.]
리리카의 마음속에서 남자에 대한 평가가 긍정으로 소폭 상승해서 사과를 받아드렸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니 부디 마음 쓰지 마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리카의 배려에 고맙다고 말한 남자는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하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인사 드리겠습니다, 각하. 저는 베르나르도 공작가의 장남인 크리스티앙 알렌 베르나르도라고 합니다.”
“베, 베르나르도 공작가요?!”
리리카는 베르나르도 공작가라는 가문명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만 자빠질 뻔 했다. 그 이유는 빈곤하게 살아서 세상일에 잘 모르는 리리카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반 황실 세력인 귀족파의 수장인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가주인 베르나르도 공작은 이 제국의 수상이었다. 거기에 동생인 다비에르 후작은 군부를 총괄하는 군무대신, 친척이자 방계 가문인 아르헨디오 백작은 제국의 재정을 총괄하는 재무대신이었다.
이 제국의 중요 요직을 대부분 장악한 공작가는 그 위세와 재력이 황실을 능가할 정도라고 평가될 정도였다.
“노, 높으신 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크리스티앙 공자님.”
“하하하! 그렇게 어렵게 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신분이 높으신 분은 그저 공자에 불과한 저보다 작위를 가지고 계신 각하가 더 높으십니다. 그러니 그냥 편하게 크리스라고 불러주십시오.”
마치 태양과 같이 밝게 웃는 크리스의 모습에 리리카는 주책 맞게 얼굴에 홍조가 띄고 말았다.
그렇지만 황실과 척을 지고 있는 가문의 후계자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리리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리카. 공자께서는 황녀 전하를 만나러 오셨으니, 손님을 안내해 드리거라.”
“제, 제가요?!”
리리카는 황실과 척을 지는 무서운 사람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아서 시녀장에게 사정을 했다가, 시녀장의 무서운 표정에 깨갱하고 물러서야 했다.
“히잉~ 제,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감사합니다, 각하.”
혼나서 의기소침해진 리리카를 보고 조금 미안해진 크리스는 뻘쭘한 마음이 되서 따라 나섰는데, 그때 리리카에게서 이상한 말이 돌아왔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저를 각하라고 부르시는 거죠? 제 이름은 리리카인데요?”
리리카의 의문에 니오넬 시녀장은 화들짝 놀라서 리리카에게 조용히 하라 눈치를 줬는데, 리리카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서 당황하고 만 있었다.
크리스는 리리카를 보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흐음~ 아무래도 자작 각하의 모습을 보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리리카는 무슨 소문인지 알지 못해서 눈만 말똥 뜨고 있었는데, 크리스는 리리카의 모습을 보고 잠시 시녀장을 노려봤다가 인자한 얼굴로 리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위를 가지고 계신 분께는 각하라는 존칭으로 부른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리리카 각하께서는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계시니, 당연히 각하라 불러 드려야지요.”
작위를 가진 귀족에게는 각하라는 존칭으로 불린다는 것을 처음 안 리리카는 그 존칭이 부담스러워서 거절을 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그냥 편하게 리리카라고 불러주세요.”
귀족이 존칭을 포기한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보기에 니오넬 시녀장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던 크리스 역시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곧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리리카.”
“그럼 안내해 드릴게요.”
리리카는 황궁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하녀 다운 일을 해보기에 기분이 업되서 룰루랄라 하며 크리스를 안내했지만, 니온넬 시녀장은 기본적인 예법도 모르는 리리카의 모습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크리스를 안내하며 1층의 귀빈실로 이동한 리리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귀빈실에는 레베카 황녀가 미리 와서 리리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꽃사슴 왔어!”
웃으며 반겨주는 레베카 덕분에 리리카는 표정이 사르르 풀리며 시름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엄마도 금방 왔······”
활짝 웃으며 자신을 반겨주던 레베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괴상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리리카가 의하하게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뭐야? 왜 우리 리리카 뒤에 공자가 있는 거야?!”
레베카는 리리카 뒤에 따라 들어오고 있는 크리스를 보고 괴상한 표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하하! 신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나는 환대 한 적 없거든!!”
“하하하!! 신도 전하를 오랜만에 뵙게 되어 반갑기 그지 없사옵니다.”
“어휴!! 진짜 공자하고는 말이 안 통해!!”
여유로운 크리스와 달리 레베카는 크리스를 별달리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실과 귀족파의 관계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모습은 아닐 것이었다.
다만 리리카가 보기에 이상해 보이는 점은 꼭 나이 많은 사촌 오빠가 어린 여동생을 놀리는 모습처럼 둘이 애매하게 친분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두분이 친분이 있으신가 봐요?”
리리카의 질문에 레베카는 친하지 않다고 외치려 했지만, 크리스가 먼저 말을 해서 황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보니, 리리카에게는 아직 설명을 드리지 않았군요. 전하와 저는 약혼을 한 사이입니다.”
“예?! 약혼이요?!!”
둘이 약혼을 한 사이라는 말을 듣고 리리카는 얼이 빠진 상태로 멍하니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황실과 베르나르도 공작가가 약혼을 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지만 그보다······
“시, 실례지만 두분 나이 차이가······”
리리카가 하고 싶은 말을 크리스도 잘 알고 있어서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하께서 올해로 12세가 되셨고, 저는 22세가 되었으니, 정확히 열살이 차이 나는 군요.”
“그,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는데, 어, 어떻게 약혼을······”
리리카가 이렇게 당돌하게 질문을 할 것이라 생각을 못했는지, 크리스가 당황하고 말았다.
“그, 그거는······”
“공자는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변태라서 그래.”
“저, 전하!!”
크리스의 말을 가로막으며 튀어나온 레베카의 말에 리리카는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봐서 크리스는 억울해서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하십니다, 전하.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을 신이 어찌하겠습니까.”
억움함이 가득 담긴 크리스의 말을 듣고 리리카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듣기로 귀족간에는 서로 좋아서 혼인을 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오직 가문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혼인을 한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평민들은 그런 귀족들의 결혼을 두고 결혼장사라고 풍자해서 부를 정도였다.
리리카는 크리스가 변태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레베카가 부러웠다.
자신은 삶에 치여 살아왔고, 비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남자들의 조롱과 희롱의 대상만 되어와서 한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여자인 만큼 운명의 왕자님과 로맨틱한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멋지고 잰틀한 크리스와 약혼 관계라는 사실에 부러움이 든 것이다.
“그래도 엄······ 황녀 전하가 부러워요. 이렇게 멋진 남성분과 약혼도 하시다니요.”
크리스를 향해 멋진 남자라고 하는 리리카의 말에 레베카는 질색하는 얼굴이 되었고, 크리스는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다.
“공자 같은 남자가 멋있다니! 우리 리리카가 이렇게 남자를 보는 눈이 낮아서 어떡하니? 나중에 공자와 달리 제대로 된 남자를 소개시켜 줘야겠네.”
“하하하! 너무하십니다, 전하.”
“공자는 그냥 다물고 있어.”
레베카 황녀는 마치 크리스와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농담을 주고 받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리리카의 흐뭇함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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