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레이프 남작의 제판
엘버트 백작에 의해 법무성 감옥에 갇힌 레이프 남작은 자신의 재판을 느긋한 태도로 기다리고 있었다.
보니헤르트 제국은 죄인이 귀족인 경우 일반 재판소가 아닌 귀족 재판소에서 재판이 이뤄졌는데, 귀족 재판소는 말이 좋아 재판소이지 형식적인 재판만을 하는 곳으로 평민들에게 귀족들의 특권이 공고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곳에 불과했다.
덕분에 이 재판소에 회부된 귀족들은 같은 귀족을 상대로 범죄를 벌인 것 아닌, 평민이나 빈민을 상대로 한 범죄 정도로는 웬만해서는 처벌이 나오지도 않았고, 나와봐야 벌금 몇십실링이 전부였다.
그래서 남작도 느긋한 태도로 재판의 시작을 기다리며, 돌아가면 저녁에 새로 사둔 와인에 어떤 요리가 어울릴까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감옥 안으로 간수와 기사들 몇 명이 들어와서 레이프 남작이 있는 감옥 문을 열었다.
“재판소로 이동할 것입니다. 나오시지요.”
“응? 재판이 오늘이었나? 드디어 이 냄새 나는 곳에서 나갈 수 있겠구나.”
남작은 간수에게 수고하라며 어깨를 토닥여주고 기사들과 함께 귀족 재판소로 이동했다.
레이프 남작은 귀족 재판소의 재판장에 들어서고도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며 피고석에서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레이프 남작이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재판장의 문이 열리며 이번 재판의 진행을 맡게 된 재판관이 들어왔는데, 재판관의 얼굴을 보고 남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재판관은 자신과도 친분이 있는 스케이프그레이스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레이프 남작은 이번 재판을 맡은 재관판이 자신과도 친분이 있는 스케이프그레이스 후작임을 보고 아주 일말의 불안마저 지워내며 완전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레이프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케이프그레이스 재판관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 각하. 그간 격조하셨는지요?”
귀족식 예의로 재판관에게 인사를 하는 남작이었지만, 재판관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피고인은 자리에 앉으시오.”
퉁명스럽게 말하는 재판관을 보고 레이프 남작은 의아함이 들었지만, 곧 자신의 무죄를 친분으로 이용해 준 것이 아니라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포석이라고 생각해서 현명한 스케이프그레이스에게 감탄하며 자리에 앉았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검사측 사건 개요를 설명하세요.”
재판을 시작한다는 말에 검사석에 앉아 있던 검사인 알레한드로 백작이 일어났다.
그는 법무성에서도 몇 안되는 황제파 인물로 평소 특권을 남용하는 귀족들을 처벌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재판관을 총괄하는 사법성이 대부분 귀족파에 장악되어 있어서 그가 승소를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피고는 지난 주 빈민가에 거주하는 젊은 여인을 무력으로 억압하여 겁간하려 하였기에, 기소가 되었습니다.”
알레한드로 검사의 기소내용을 경청하던 스케이프그레이스 재판관은 검사의 발언이 끝나자, 이번에는 레이프 후작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피고는 이 사실을 인정합니까?”
“전혀 사실 무근입니다.”
젊은 여성을 겁탈을 하려 해놓고 아니라고 말하는 남작의 뻔뻔스러운 거짓말에 재판장에 있는 방청객들이 술렁였다.
스케이프그레이스 재판관은 소란스러워진 실내에 정숙하라는 의미로 법봉을 몇번 두드린 뒤,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럼 사실이 아니라고 피고측은 주장하는 건가요?”
재판관의 질문에 변호가 일어나 대신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피고는 원고에게 돈을 주고 관계를 갖는 계약. 즉 매춘을 한 것입니다. 결단코 겁탈이 아닙니다.”
재판관은 이번에는 검사에게 할말이 있냐며 바라보자, 검사는 증인을 신청했다.
“재판관님! 피고의 유죄를 입증할 증인을 신청합니다.”
증인 신청에 재판관은 받아드리겠냐는 의미로 레이프 남작을 바라봤다.
레이프 남작은 어차피 무죄로 줄거면서 왜 이렇게 재판을 번거롭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짜증이 올라왔지만, 괜히 재판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기에 순순히 신청을 받아드렸다.
어차피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작이 받아드리자, 재판장의 문이 열리며 기사가 한명 들어왔는데, 들어온 기사는 바로 레베카 황녀의 호위기사단인 청룡 기사단의 단장인 엘버트 백작이었다.
“본인은 신성한 법정에서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위증을 할 시 그에 맞는 처벌을 달게 받을 것을 맹세합니다.”
엘버트 백작의 증인 선서가 끝나자 검사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증인은 그날 보신 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말씀해주겠습니까?”
검사의 질문에 엘버트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증언을 시작했다.
“당시 황녀 전하를 모시고 안으로 들어갔을 당시 레이프 남작은 리리카라는 여성을 온몸으로 짓누르고 억압하고 있었고, 그녀는 폭행이라도 당했는지, 코피가 난 상태로 한쪽 얼굴이 부어있는 상태였습니다.”
기사단장의 입에서 나온 정황 증언만 들어보며 누가 봐도 레이프 남작이 리리카를 겁탈하려고 하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검사가 더 할말이 있냐는 시선으로 레이프 남작을 바라봤지만, 레이프 남작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을 했다.
“제가 신사답지 못하게 폭력을 사용한 점은 인정합니다. 허나 그것은 돈을 받아놓고 갑자기 못하겠다고 떼를 쓰는 그 계집의 태도 때문에 화가 나서 한 행동입니다.”
폭력을 사용한 상황을 설명하는 레이프 남작의 말에 엘버트 백작이 바로 반박을 했다.
“그때 황녀 전하 앞에서 한 말과는 다릅니다. 저자는 황녀 전하에게는 리리카양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할 경우 대신 몸을 받겠다는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엘버트 백작의 말에 재판장의 모두가 술렁였다.
백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작은 채무를 빌미로 여인을 겁간하려고 한 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리카양은 25실링을 빌리고 다음날 빌린 돈을 갚으려 했지만, 남작은 받으려 하지 않고 억지로 자신의 몸을 짓눌렀다고 했습니다.”
엘버트 백작의 추가 증언에 레이프 남작은 여유로운 얼굴이 없어지고, 짜증이 난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레이프 남작이 아무런 말이 없자, 제판관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선고를 했다.
“양측의 의견을 들어본 바 본 재판부는 피고의 유죄를 의심하기 힘듭니다. 하여 판결을 하겠습니다. 피고인 레이프 남작에게······”
레이프 남작은 여유로운 태도로 판결을 기다렸다.
백작의 증언 때문에 무죄는 무리겠지만, 그래봐야 벌금 몇실링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여유로운 태도로 있을 수 있던 것이다.
판결을 모두 듣기 전까지는······
“북부 탄광에서 50년간 강제 노역을 명령하는 바입니다.”
“하하! 감사합······ 뭐, 뭐라고요?!!”
남작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하며 재판관의 말을 집중해서 다시 들어봤는데, 스케이프그레이스 재판관의 입에서는 더 절망스런 말들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판결의 이유는 성별과 신분을 막론하고 상대로 강제로 겁간할 경우 최대 사형에 처한다는 지엄한 제국법과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다는 레이프 남작의 모습에 법정 최고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을 위해 노력한 레이프 남작의 공을 고려해 강제 노역형을 선고하는 바이며, 탄광으로 다음주에 이동······!!”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 제가 어찌하여 북부 탄광에서 노역을?!!”
북부 탄광은 젊은 사람도 열에 여덟은 죽어나가는 힘든 노역장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나이도 예순이 넘은 남작이 간다면 불과 몇 달을 버티기 힘들 것인데, 무려 50년이라니······
남작은 절망감과 절박함으로 재판관에게 따진 것이지만, 자신의 말을 가로막고 따지는 레이프 남작의 모습에 재판관의 얼굴이 험악해지며 남작을 가까이 오라 불렀다.
남작이 가까이 오자, 재판관은 속삭이 듯 그에게 말했다.
“여인을 겁탈하면 사형까지 갈 수 있다는 거 모르고 그런 짓을 벌였는가?”
재판관의 말에도 레이프 남작은 억울한 듯 계속 따지듯 말했다.
“그,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지키지 않는 있으나 마나 한 법조항이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나도 그것 때문에 황녀 전하께 크게 문책을 받고 오는 길이야, 사법 기강이 아주 문란해졌다고 말이야. 그러니 억울해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드리게. 덕분에 나도 자네 때문에 앞으로 자중하게 생겼어.”
스케이프그레이스 후작은 레이프 남작과 함께 재미로 평민 여인들을 겁탈하는 것을 즐기는 귀족 모임의 회원이었다.
재판관도 지난주에 자신과 함께 빈민가에서 어린 소녀를 데리고 즐겼으면서 고결하는 척 하는 모습이 아니꼽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족이 평민을 범했다고 50년간 강제 노역이라니!! 벌금이면 몰라도 처벌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자네 정말 몰랐나?”
“뭐를 말입니까?”
“그 리리카라는 아이 말일세, 실은 자작의 작위를 가진 엄연한 귀족일세.”
리리카가 귀족이라는 말을 듣고, 레이프 남작은 놀라움으로 눈이 커지고 말았다.
“그, 그게 무슨······”
“어릴 때 영지에 문제가 생겨서 재산을 모두 잃고 저런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엄연히 귀족이란 말일세. 귀족의 여인의 겁탈하려 했으니, 처벌을 피할 수가 있겠나?”
남작은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간 자네는 어떻게 자네 주변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있나? 그나마 3급 참수로 판결하라는 황녀 전하의 명을 내가 강제 노력 정도로 막아준 것이니, 불평 그만하게!”
“3, 3급 참수!!”
참수는 거대한 칼로 죄인의 목을 베어 사형하는 방식으로 급수에 따라 칼의 날카로움이 틀렸다. 1급일수록 칼이 잘 갈아져 있어서 별 고통도 없이 갈 수 있는 반면 2급과 3급이 될수록 날이 무뎠다.
특히 3급이 되면 그냥 칼 모양을 하고 있는 몽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말이 좋아 참수이지 그냥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적국의 스파이나 대역죄인에게만 하는 가장 무거운 사형 방법이었다.
레이프 남작은 이 말을 듣고 황녀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어서 벌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스케이프그레이스 재판관은 다 귀찮다는 듯 대충 법봉을 두드리며 폐정을 선언하고 나가버렸다.
엘버트 백작은 재판이 끝나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며 황녀의 현명함에 감탄 했다.
귀족파인 레이프 남작을 사형할 경우 안 그래도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귀족파에서 어떤 꼬투리를 잡고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어서 벌을 주기는 해야 했기에 타협을 본 것이 바로 강제 노역이었다.
덕분에 황실로서는 체면을 챙겼고, 귀족파는 꼬투리를 잡을 명분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엘버트 단장은 감탄을 하며 방청석을 바라봤는데, 그곳에는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앉아 있는 레베카 황녀가 있었다.
‘역시 현명하고 자애로우신 분.’
엘버트 단장이 감탄을 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황녀는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에잇, 짜증나!! 우리 귀여운 꽃사슴을 괴롭힌 저놈의 목을 그냥 뎅겅 해야 하는데, 재판부 놈들이 또 수작을 부렸네.”
눈에 콩깍지 씌 인 단장의 착각과 달리 강제 노역은 황녀의 뜻이 아닌 듯 보였다.
황녀는 이번 판결에 불평을 하면서 일어나면서도 망연자실해서 직원들에게 끌려나가는 레이프 남작을 통쾌한 얼굴로 바라봤다.
“흥! 우리 꽃사슴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놈들은 내가 전부 피눈물을 흘리게 해줄 거야.”
레베카 황녀는 레이프 남작을 보고 메롱하고 혀를 내밀며 꼴 좋다고 놀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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