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페젯의 파편
아페젯의 파편
섹서스와 함께 다니려니 신경 써야 하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섹서스가 디디고 만지는 것 모두가 부식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빙의한 캐릭터는 매우 튼튼해서 괜찮게 버텨 주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렇지 않았다면 언노운이 손을 쓴다고 해도 부패하여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들이 빙의한 인간 몸체는 살아 숨 쉬는 세포가 아니고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이다.
언노운은 최소한의 관여로 섹서스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가 닿는 것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지나가며 툭 부딪치는 것은 사정없이 녹아내렸다. 그가 지나간 뒤로 시멘트 아스팔트가 녹아 내리며 시커먼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폭동이 일어난 거리에는 여러 가지 권능이 뒤섞여 있었다.
섹서스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먼저 걸었다.
"상처는 좀 어때?"
"견딜 만해. 너 덕분이야. 난 부패시킬 줄만 알지 재생하고는 관계없거든."
"우주 한구석까지 와서 고생이 많네."
"저쪽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나 마찬가지지. 대신 모아야 할 권능이 없어서 쫄쫄 굶고 있지만."
"아무리 캐릭터의 기본 지식이라고 해도 언어유희는 정말이지 외계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군."
"이쪽 세계 인간은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어. 오래전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지금 시기와는 차이가 나는군. 아마도 사오만 년 뒷일 거야."
"뒤? 그럼 미래?"
"그렇다고 봐야지. 인간이 성간 우주를 여행하고 식민지를 넓혀 가는 시절이었지."
"하긴 그런 차원도 있겠지. 근데 어떻게 마음대로 시간을 넘나드는 거지?"
"여봐. 우주에는 네가 상상도 하기 힘든 것들이 많아. 그중에는 시간을 마음대로 제어하는 능력을 갖춘 친구도 있어."
"질서라는 개념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구나. 시간을 마음대로 넘나든다면 미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거야?"
"적어도 그와 연관된 차원 정도는 그렇겠지. 보라고 모래사장에서 모래 한 줌 들어낸다고 큰 변화가 있을까?"
"하긴 그렇기도 하네."
"우리는 인간들에게 밀려서 다른 차원으로 추방되었어."
"뭐? 인간에게 밀려? 허약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백 년의 삶도 겨우 사는 인간에게?"
"이 보라고 지금부터 수만 년 뒤야. 인간은 부족한 것들을 모두 과학의 힘으로 메꾸었어. 때로 그 힘은 전지전능한 신성력의 범위를 넘어서기까지 했어. 인간이 위광을 휘두르기 시작한 거야. 신성력의 구조적인 해석이 완료되자 그들은 그 힘을 이용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나약한 신체는 기계라는 영원불멸의 신체로 개조하고 말이야. 인간 전사 한 명이 최상급 악마 정예 부대를 도륙 낼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우주의 지성체들도 그런 인간의 힘을 두려워하여 동맹을 맺거나 피하거나 했을 정도니까."
"우린 실패작이라고 들었는데···."
"음, 그가 단 하나의 미련은 남겨 두었는데 그것이 대박을 터트린 거지."
"하나의 미련?"
"너희 뇌에 송과체를 만든 것. 자극할 수 있는 호기심이라는 것을 제거하지 않은 것 정도일까. 너희 말로 지혜의 과실을 먹은 거라고 하더라. 그 지혜의 과실은 인간을 크게 살찌우게 되는 모양이더라고. 몇 번의 격변을 거쳐 토착신의 지위를 손에 넣고 그 이상을 뛰어넘어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 지혜를 향한 호기심이 대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괴물 종족을 만들었어. 그때는 미쳐 그도 짐작하지 못했지."
"그라는 것은 성서 속의 하느님을 지칭하는 거지?"
"인간들이 부르는 단어로 함축하자면 그런거고 그를 지칭하는 단어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아. 씨앗을 뿌리는 자, 창조주, 절대선의 아버지, 빛의 대변자, 희망의 상징, 꺼지지 않는 가우스, 그는 우주의 한 부분이자 빛을 관장하는 지성체니까."
"이 차원은 버려진 차원이 되었는데 신경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그라도 우주 전체를 관장하진 못해. 그의 취미는 우주에 생명의 근원을 뿌리내리게 하는 거니까 그것만 해도 바쁜 그지. 싹 틔우는 일은 그가 하지만 커가는 것은 생명을 받은 것들의 몫이야."
"내게 그런 힘이 있다면 당장 게헤나부터 박살을 내 버릴 텐데. 왜 뻔한 적을 눈앞에 놔두고 자신을 방해하는 것을 상관치 않는 건지 알수가 없어. 자신이 만든 생명체가 잘 커 주기를 바라면 물을 주고 거름도 주어야지."
"그건 흰 날개 애들의 몫이야. 그는 전 우주를 떠돌며 생명을 심느라 바쁘거든."
"지금 어디에 있어? 만날 수 있다면 좀 따져봐야 하겠는데···."
"글쎄, 그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은 그 자신 뿐이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존재가 아니거든. 그 앞에서는 시공간 따위는 인식의 범주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럼 그가 빛의 중심인가?"
"중심은 아니고 단지 생명의 순례자일 뿐이야. 우주가 만들어질 때 무에서 탄생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 그 중심에 있는 절대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존재이며 무의 존재 그 자체야. 당연히 어둠을 관장하는 그것 또한 존재하지, 그래서 우주는 탄생과 죽음이 정확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거야.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존재 자체도 언급하지 못할 먼지 이하인 거지."
"하느님이 단지 생명을 심는 자일뿐이라고? 그럼 그 위에 존재하는 것은 어느 정도야?"
"우주의 본질 그 자체다. 시간과 공간과 중력이 만들어낸 차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괴물들이지."
"괴물들?"
거리는 난장판이지만 우리의 대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섹서스가 멈췄다.
"여기야."
"브라이튼의 골동품점?"
"이 차원을 유지하고 제어하는 곳이지."
"악마들은 왜 이런 유치한 장난을 좋아하는지 몰라."
"그들 중에 진지한 개구쟁이들이 많으니까."
"참, 네가 있던 워랜워드 은하계의 인간은 어느 정도지?"
"대단해. 카오스의 신과 정면으로 싸워 대가리를 깨버린 놈이 있을 정도니까."
정말 놀랐다. 카오스의 졸개도 아니고 카오스 신의 뚝배기를 깨버린 인간이 있다고?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신의 뚝배기를 깨? 인간이? 말이 되는 소리를···."
"난 거짓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다. 인간이 먹은 지혜의 과실은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힘을 발휘했어. 신의 힘을 뛰어넘어서일 정도로···. 우주에 진출한 인간은 마치 개미 떼처럼 온 우주를 뒤덮게 돼.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진짜 악마들이지. 녀석들은 포교라는 신념으로 다른 생명체를 억압하고 공포를 심었으니까."
"무엇 때문에? 지혜의 과실이 그토록 중요했던 거야?"
"인간이 절대선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거지. 인간 뇌에 송과체를 만든 건 그의 실수인지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송과체가 신의 힘을···."
섹서스는 문득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골동품점 계단에 반쯤 서서 대화가 이어졌기 때문일까 그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텐데? 넌 게헤나와 우주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구나. 신생이야? 어떻게 탄생한 존재지? 네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어? 파리 교단 소속이라고 듣긴 했는데···. 잡다한 능력을 갖췄지만, 생각은 아직 햇병아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우주에 나가 본 적이 없어."
"뭐?"
"이 차원을 벗어난 적이 없거든. 게헤나에서 모든 기억은 봉인 당했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완벽히 포맷된 이후였어."
"그랬군. 그래서 백지가 된 거구나."
"맞아. 지금 내 능력조차 다 찾아내지 못했을 정도니까. 난 내가 누군지도 몰라. 어느 날 바알이 날 불러서 낙인을 찍어 버렸거든. 어쩔수 없이 파리 교단 명부에 내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니까."
"너도 사연이 많은 놈이구나. 하긴 사연 한둘 없는 놈이 더 이상한 거지만···."
-딸랑
문이 열리자 싱그런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응?"
냄새! 아니 향기다. 아주 독특한 향기가 났다. 기억에도 없는···. 지금까지 맡아본 모든 냄새를 통틀어 처음인 묘한 냄새가 상점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대머리 중년인이 들어온 우리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짜식, 저거 우리가 물건 사러 온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보네."
섹서스가 씩 미소를 지었다.
"너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지"
"당연히."
"돌아가면 어떤 처벌이 기다리는지도?"
섹서스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거는 소멸 못 시켜."
대머리는 나를 보고 고개를 흔든다.
"여기서 이러면 서로가 곤란해집니다."
"곤란해지라고 이러고 있는 거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섹서스 상점에 왔으니 기념품 정도는 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풍스러운 가게다. 진열된 물건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진짜배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물건에서 풍겨 나오는 권능의 아지랑이가 모두 진짜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거참 이딴 차원에 왜 이런 물건을 진열해 놓는 거야? 누구에게 판매하려고?"
"여기 있으면 심심하잖아. 내 작은 취미지."
난 코웃음을 쳤다.
"네가? 웃기는 소리 그만하지. 네가 무슨 능력으로 이런 가게를 운영해? 요즘은 주인이 없으면 종업원이 주인 흉내를 내나?"
대머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대머리는 끽해야 3급 정도의 하급 악마인데 이런 값진 물건을 취급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여기 있는 것 중에 교황청 지하에 있는 것보다 높은 등급의 물건이 많았다.
"관리다. 관리. 내 거라고 하지 않았다. 물건을 관리하는 것이 취미일 뿐."
"넌 공포 자체가 없는 놈이군."
"간이 배밖으로 나와서 말이지."
내가 오른쪽 선반에 섰을 때 아주 작은 긴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왜? 공포가 없다면서 왜 그렇게 긴장하지? 그러니까 이런 물건을 함부로 이곳에 두면 안 되지."
중년 대머리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 저 새끼. 나를 물로 보는 것 같은데. 이것도 모를 줄 알았어."
나는 선반 위에 놓인 검은색 선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안 돼. 그건 손대지 마라. 잘못하면 이 차원이 붕괴할 수도 있어."
"멍청이. 그러니까 다. 왜 이런 물건을 가져가란 듯이 진열해 놓은 거야?"
선글라스를 집어 드는 순간 중년 대머리는 카운터 데스크 아래서 쌍열 엽총을 꺼내 후렸다.
-뻥, 뻥
수많은 쇠구슬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쏟아져 들었다.
리엑티브 펄스 쉴드는 권능이 가득 담긴 쇠구슬을 모조리 튕겨 냈다.
"웃기는군. 날 잡으려고 쏜 거라면 미안해서 어쩌나?"
선글라스를 썼다.
"안 된다고!"
"시끄러"
섹서스가 총신을 잡았는데 모래알처럼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힉"
대머리는 기겁하며 엽총을 놓았다.
세상에 비친 모습이 이상하면서도 굉장했다. 먼저 이 차원의 구조적 형태가 되는 기초가 보였다. 마치 공간에 작은 선들이 수없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사물로 인식된 것은 섹서스와 대머리뿐이고 나머지는 모호하여 구분하기 힘든 선의 형태이다. 차원을 구성하고 있는 커다란 공간에 무수한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이 선글라스는?'
【차원 투과기입니다. 겹쳐 있는 여러 개의 차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수한 유리 재질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차원은 여러 차원이 겹친 차원 중에 하나며 오천이백 번째 차원이다.
쉽게 설명해 아주 두꺼운 책 한 권이 있는데 쪽수가 만 페이지에 달한다고 가정하자. 그 책장 한 장 한 장이 앞뒤가 있는 양면이다. 즉 한 장에 두 개의 차원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그런 차원이 총 만 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LA의 차원은 수만 개의 차원이 겹겹이 쌓인 거대한 책과 같은 곳이었다. 그 차원을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차원 투과기가 바로 이 안경인 셈이다.
사실 여기 올 때부터 이미 언노운이 차원 투과기를 알아봤고 물론 알아봤다기보다는 이곳에 차원 투과기가 있다는 것을 이미 내게 조언한 상태였다.
이곳은 특별히 디자인된 곳이다. 게이트를 통과하는 인간의 욕망에 맞는 차원이 구성된다. 그래서 인간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욕망이 담긴 차원이 열리게 되는 구조인데 그러려면 같은 공간에 수많은 차원을 평면으로 포개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게 하나의 거대한 책과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이다.
이 차원 투과기는 이 공간에 겹친 모든 차원을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장치였던 거다.
선글라스를 벗어서 주머니에 넣었더니 대머리의 안색이 심하게 구겨졌다.
"내놔, 그거 피의 교단 지적 재산 목록에 들어가는 거라고 가져 가면 강탈이지. 피의 교단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이 새끼 진짜 말 많네. 난 거짓말하는 놈도 싫지만 말 많은 놈도 질색이야."
"그럼 죽여야지."
섹서스가 그리 말하며 대머리의 목을 움켜잡자 머리통이 시커멓게 변하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탁, 탁
섹서스는 소리 나게 손을 털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섹서스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권능인 부패는 죽음 그 자체이다. 모든 것은 무로 돌리는 능력이 그의 능력이다. 탄생의 반대 모든 것을 삭혀 버리는 지독한 권능이다.
그의 힘은 악마의 권능까지도 소멸시켜 버린다. 네메시스 중에서도 역병의 신 커크의 종자들은 특히나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헤이! 손대지 마. 그걸 없애 버리면 곤란해."
"아, 그렇지."
섹서스는 열쇠를 주우려 하다 급히 멈췄다.
"근데 그게 뭔데 이놈이 발광하는 거지?"
"차원 투과기야. 다른 차원을 볼 수 있는 장비지."
"아, 그거. 그래서 차원이 무너진다고 했던 거구나."
"이게 뭔지 알아?"
"알지. 아페젯의 거울로 만든 거잖아."
"아페젯의 거울?"
"그래, 그 거울은 차원의 뒤쪽을 비추지. 그 거울 조각으로 만든 안경이 분명해."
"넌 보기보다 잡지식이 많네?"
"할 일이 없었어. 시간 보내기용으로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시간이 많았을 뿐이야."
차원 투과기는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하나 있었다. 아주 매력적인 능력인데 각 차원을 구성하는 요인이 되는 인자 즉 뮤턴트를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어링에 표식이 뜰 정도였다. 지금까지 이곳에 들어온 뮤턴트를 깡그리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이 어디쯤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재미난 장난감을 얻었군. 네 번째 열쇠 가지러 가자."
"섭섭한데 이제 널 죽여야 할 때가 점점 가까워져 가는군."
- 작가의말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못 올렸는데 부지런히 올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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