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끝까지 물고 늘어질 속셈이다.
* 재개된 재판일
" 자자~~ 정숙들 하시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재판관님 나오십니다~! "
이 날만을 기다렸던 이들이라 더더욱
소란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쉽사리 소리가 사그라 들지 않자
행정관은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잠재웠다. 물론 불만의 목소리는 줄어
들었으나 매서운 눈빛은 기다린
시간만큼 진해져 모두들 라쿤과
몬스터를 노려보기 바빴다.
" 그럼 그날 중단되었던 시점에서부터
증언을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행정관의 말에 따라 파이가 먼저
재 입장 하였다.
" 장인 쉘의 문양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분명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
순서일 터. 답을 가지고 왔는가? "
재판관의 질문에 파이는 대답 대신
서신 한통을 전달하였다. 행정관이
그것을 받아 건네니 서신에는 짧지만
노기로 가득한 쉘의 서체가 분명히
들어가 있었다.
『 내 작품이 더럽혀졌다는 것은 실로
불쾌를 넘어 손목을 비틀어 버릴
일이나 분명한 이가 없으니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면 정확한
시선을 향해야겠기에 알린다....』
‘ 어떻게 쉘의 서신이 파이의 손에
있는 것이지? 아니.. 아니야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건 휘 갈겨진 양피지
따위가 아니야. '
쓸데없이 시간을, 능력을 낭비하면
안 된다. 확실한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가며
얻어낸 만큼 신중해야 한다.
* 쉘의 공방
" 그것은 분명 안 될 일이지. "
" 저는 부탁을 드리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
" 허.. 내 아무리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라지만 자네와 격이 다름을
알고는 있나? "
" 뒷 배경이 아무리 화려하여도
결국은 저와 조금의 거리만이 있을
뿐인데 제가 무엇이 두려울 것
같습니까. "
" 내가 그것을 내어줘야 하는 이유가
고작 어린아이 하나 죽은 것에 대한
증명을 위한 거라니. 그런다고 죽은
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 것을.. "
" 그렇다면 뒤에 계신 분에게 이리
전달해 주십시오.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어주고 둘을 취할 수
있는 기회라고. "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전의 나였다면 들여다보기도 전에
기절했을 테지만 그 동안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라도 한 듯 흔들림 없이
들어간 탓에 파이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
“ 애초에 몬스터에게 붙었던 것도
대공가에 들어가기 위했던 거였어.
거기다 지나치게 나댄다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니. 하~ ”
파이는 페이가의 하수인이었다.
제국 4대 가문 중 하나인 페이가는
대공가와 연줄이 닿아 있는 핏셔가를
견제하고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
추이를 살피던 중 대공저에 사용인들을
고용 시 갈 곳 없는 부랑아들에게도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알고 그 때를
노려 파이를 계속 노출 시켜 자연스레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 대공비께서 불쌍한 아이들을 돕기
위한 선행을 이용하다니 정말이지 파이
저 자식은 몬스터보다 더 악질이야. "
그렇게 바깥에 상황을 중간중간 살피며
한 번 더 파이에 집중했다.
* 페이후작가.
" 그래. 쉘이 쉬이 내어 놓더냐. "
" 후작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하였더니 거리낌 없이 내어
놓더군요. 어떻게 된 게 주인이나
개나 하나같이 욕심들이 많은지 원.. "
" 짐승들은 원래가 주인을 닮아간다고
하지 않느냐. 흥.. 늙은 여우 같으니라고
공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노인네가
이번에도 공을 독차지할 생각에 들떠
있겠군. "
" 저희 쪽 정보가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
" 되었다. 지금은 그저 흥분한 상태로
두어라. 어차피 곧 대공께 버림받을
양반인 것을 어찌 되었든 쉘이 넘어 온
이상 그 먹이들을 제대로 옭아매어 공을
가로챌 준비나 해. "
" 먹이들이라 하시면 한꺼번에 처리
해도 된다는 말씀이신지.. "
" 욕심도 많구나. 여태 얻어맞은 것을
풀어내겠다는 것이냐? "
" 시궁창에 살면서 제겐 발밑도 허락
할 수 없던 놈들입니다. "
" 이제껏 고생하였으니 그 정도는
허락해주마. 알아서 하거라. "
이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녀석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다. 라쿤와 몬스터를 마음껏
가지고 놀면서 누가 위인지를 보여
주겠다는 것.
* 라쿤과 몬스터가 대전 하던 날
" 크흐윽.... 잠깐만... "
" 어? 정신을 차리네? 맷집 좋은데~ "
" 이야~ 우리 대장한테 맞고도 살아
남다니 대장~ "
잔챙이들이 라쿤을 부르러 간 사이
겨우 앉은 파이는 이를 부득부득 갈아
대며 기다렸다.
" 어쩌나.. 남이 버린 건 특히나
그 자식이 버린 건 줍기 싫은데. "
" 크.. 잠시만.. 주위 좀 .. 물려줘.. "
" 하~ 이것 봐라 야야~ 우리 대장이
우습냐~ 어~ "
" 그날 버린 양산.. "
" 다들 나가.. "
" 에~에에~~ 대장~ "
" 두 번 이야기 하지 않는다. "
좀 전 그 기집애가 말하던 때처럼
얼굴이 순식간에 굳은 라쿤의 모습에
겁을 집어 먹은 조무래기들은 눈치껏
자리에서 물러났다.
" 그 말은 집어넣는 게 좋을 거다. "
" 그 녀석만 눈이 있는 건 아니야. 그 날
나 역시 확인했으니. "
" 그럼 알 텐데 진실을. "
" 이 쪽 세계는 너무 좁아. 대장은
하나로 충분할 텐데 말이지. 몬스터만
네가 맘에 들지 않는 게 아니야. "
" 어차피 말 해봤자 누가 믿어주겠어~
거지 패거리 아이들 말은 지나가는
개도 비웃는다고 "
" 만약에 계집애가 필사적으로
덤빈다면 상황은 달라질 테지 내가
아는 녀석이라면 말이야. "
" 그래봤자 귀 닫고 있는 자들에게
들이민 들 제대로나 들어줄까?
의심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지. "
" 네가 민 그 아이는 특별한 아이다. "
“ 아니라고~ 했을 텐데~~~!!!! "
" 그러니까 그런데 그 말 역시
믿어줄까? 네 입으로도 말했잖아. "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 분명 이 사건은 크게 번지면 모를까
절대 쉽게 사그라들진 않을 거야.
왜냐면 네가.. 아니 뭐 그 아이가 바로
대공녀니까. "
파이의 말에 라쿤도 라쿤이지만
나 역시 놀랐다.
‘ 파이 이 자식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
진짜였어? 그럼 여자애를 구했어야지
대체 왜... '
순간 일렁이는 두통이 온 것이 아무래도
집중을 못하고 딴 생각을 한 탓인 것
같아 난 곧장 파이에게만 시선을
모았다.
“ 그러니 경비대장이든 누구든 이 일을
해결하려 혈안이 될 테지. 아무리
못해도 포상이 분명 있을 거니까.
만약 네가 경비대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
“ 글쎄... ”
“ 범인을 만들어야지~ ”
“ 어떻게 무슨 수로 거짓 자백이라도
만든단 소리야? ”
“ 쉽게 자백 받을 수 있는 먹잇감이
천지에 널렸지. ”
“ 설마... 우리들? ”
“ 안 그래도 골치였는데 이참에 제대로
쓸어버릴 수도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
없지. 근데 만약 누군가 범인을 지목
할 수 있게 된다면 아니 적어도 경비
대장을 구슬리기라도 한다면? "
“ 잘못 하다 간 내가 지목되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거네. ”
" 그러니까. 제안을 하려는 거야 어때? "
“ 푸하~ ”
한계점에서 끌려가지 않고 간신히 빠져
나온 난 어지러움에 대기실 의자에
잠시 몸을 뉘었다. 자린이 만들어 준
인형이 내 손에 눌려 잔뜩 구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 이거 아니었으면 밉상인 주님을
만날 뻔 했네. 큭. 그보다 라쿤 저
악마 같은 새끼가 파이한테 넘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는 걸? "
라쿤은 애초에 잡혀온 것이 아니었다.
파이가 제안한 판에 미끼가 되어
적당히 놀아준 뒤 몬스터를 밟고
자신만 빠져 나올 속셈인데.
“ 파이가 너도 가지고 논 걸 알면
어떻게 될까? ”
악마 같은 놈이 생각 외로 단순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잘하면 나도 이
상황을 조금은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잠시 쉬어갈 겸
이어지는 파이의 증언에 귀를
기울였다.
" 그냥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양산
같지만 이것엔 재미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선
장내를 어둡게 만들어주셔야 하는데. "
파이의 말에 수석 행정관은 시중인에게
눈짓으로 지시하니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4개의 유리창 위로 암막 커튼이
서서히 내려와 빛을 차단했다.
" 저.. 저거 보게~!!! "
" 뭘 보라는 건가? "
" 저 자의 손이 빛나고 있는 게 안 보여? "
" 손에..손에 전혀 안료가 묻어 있지
않아요. 저 빛은 양산에서 나오는
거라구요~!! "
몇 몇이 현상을 발견하자 앞 다투어
뒤늦게 확인한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에 곧 행정관은
다시금 주변을 밝힘과 동시에 정숙을
요청했다. 허나 아직 경이로움에
심취한 이들의 수근거림까지
멈추게 하진 못했다. 수석행정관은
그런 것엔 개의치 않는 듯 파이에게
양산을 돌려받은 뒤 한 번 더 확인을
위해 위치를 찾았다.
" 위치는 쉬이 눈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야광안료는 고가의 제품이긴 하나 이미
시중에 조금씩 풀려 있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같이 미색을 띄고 있어
그냥 보기엔 물 얼룩자국처럼 금방
발견됩니다. "
“ 재판관님 이 양산엔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 당연합니다. 쉘이 사용한 안료는
동방인 온에서만 나오는 특정 재료를
섞어 육안으로 보기엔 식별이 힘듭니다.
그것을 이용한 기법으로 자신만이 알아
볼 수밖에 없는 표식과 함께 밤하늘에
가득 들어 찬 별빛을 닮은 특별함까지
얻게 된 것이죠. "
" 허나 이것은 그리 특별해 보이진
않군. "
" 재판관님께선 양산을 언제 쓰시는지
아십니까.. "
" 허.. 그야 낮에 여인들이 쓰는 것이
아닌가 뭐.. 장식품으로 더 쓰이는
쓰잘 데기 없는 물품이지. "
"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낮에 사용
하기에 이를 밤이나 어두운 공간에서
펼칠 생각을 못하지요. 바로 그것을
노린 장인 쉘의 장난 끼 어린 작품인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 안료 덕에
얼룩자국이라는 단점까지 보안
했으니 여지껏 모조품이 나올 수
없었던 유일 무이의 물품이
된 것이죠 "
파이의 막힘없는 말들로 양산이
진품인 것과 대공녀의 소장품임을
밝힘으로서 자신이 거기에 자리
했다는 말에 또 한 번 무게를 주어
힘을 실었다.
" 허나 그것은 자네의 존재만 입증
할 수 있을 뿐 이번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
여전히 무언가를 더 요구하는
재판관의 말에 나 역시 무얼 더
말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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