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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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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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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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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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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카탈리나 공국(3)

DUMMY

“두 분께서는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


니콜라스가 문을 열자 화려하게 치장된 객실이 나왔다.


붉은 벨벳 커튼이 달린 사람 키보다도 큰 창문에 총천연색으로 반짝이는 샹들리에, 벽면을 가득 메운 그림과 조각들까지.

과연 남방의 대영주라는 칭호가 빈말은 아니었다.


“그럼 만찬 즈음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


목례한 니콜라스가 곧은 동작으로 방을 나가자 입을 헤 벌리고 있던 릴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괴, 굉장하네요. ”

“그러게요. 확실히 호손이랑은 때깔부터 다르네. ”


원래도 아담한 규모의 성채인 호손 성은 방어를 중시한 두꺼운 석벽 탓에 내부공간이 겉보기보다도 좁았다.


시녀장 엠마의 깐깐한 관리 덕에 정돈이 잘 되어있긴 했지만 잘 쳐줘야 내 세계의 게스트하우스나 학생 기숙사 정도.


그에 반해 이곳 후안 성의 손님방은 넓이와 화려함에서 고급호텔의 스위트룸 못지않았다.


특히 정중앙에 위치한 침대는 천장까지 쭉 뻗은 기둥이 달려있는 캐노피 침대, 일명 ‘공주침대’였다.


깃털이라도 넣었는지 되게 폭신폭신했다.

넓이도 3명은 족히 나란히 누울 수 있을 만큼 넓었고.


그래서일까.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아차! ’


호손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방심하고 말았다.

거기 방은 이곳보다 훨씬 좁았을지언정 각자 침대가 따로 있는 2인실이었으니까.


여자애랑 단순히 한 방을 쓰는 것까지는 괜찮다.


처음 보육원을 나와서 독립했을 때, 예산 부족으로 여동생과 원룸 생활을 한 나로서는 낯선 환경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침대는 무리지. ’


방을 두 개 주거나 침대라도 따로 놓아 달라고 말해두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앗... ”


릴리도 방금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저기, 어떻게... ”

“할 수 없죠. 제가 카우치에서 자겠습니다. ”

“아, 아니에요! 제가... ”

“레이디 퍼스트, 뭐, 그런 거 아닙니다. 단순한 산수에요. 남자가 1명, 여자가 2명이니 제가 양보하는 게 맞겠죠. ”


나는 내 뒤에 멀뚱멀뚱 서있는 니아를 가리켰다.


“나중에 방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볼 테니, 우선 두 분이서 침대를 쓰는 걸로... ”

“싫은데. ”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등 뒤에서부터.


“니아? ”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나머진 둘이 알아서 해. ”

“뭔 소리야? 바닥이라니. ”

“원래 하녀는 주인 방의 바닥에서 자는 거야. 그래야 주인님이 일어나자마자 시중을 들 수 있거든. ”

“넌 하녀가 아니잖아.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서 너밖에 없을 걸? 값을 치르고 사오는 걸 모두가 봤는데. ”

“설명하면 되지. ”

“그러지 마. 너나 나나 이 편이 훨씬 편할 테니까. ”


외고집에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릴리가 물어왔다.


“저기, 무슨 얘긴지... 제가 원주민어는 잘 몰라서요. ”

“곧 죽어도 자기가 바닥에서 자겠다네요. ”

“역시 그런가요. ”


‘역시’라고? 심지어 릴리가?

나는 니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오해한 모양인데 저 친구는 하녀가 아닙니다. 그럴 생각으로 데려온 거 아니에요. ”

“앗, 그러셨군요. 하지만 본인은 다르게 생각했을 거예요. 무려 은화도 아니고 금화를 주고 데려오셨으니 평생 노예가 된 거라고 생각했겠죠. 하인이 자기 봉급으로 그 돈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

“음... ”

“우선은 놓아두세요. 잘 씻기고, 먹이고, 안정을 취하게 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니아에게 말했다.

아마도 자동으로 번역됐을 원주민어로.


“좋아. 마음대로 해. 못박아두지만 방을 더 얻지 않는 이상 카우치까지 양보할 생각은 없다? ”

“바라던 바야. ”


긍정한 녀석이 벌러덩 카펫 위에 드러누웠다.

나와 릴리는 서로 다른 이유에서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 * *



릴리를 데리고 서쪽의 발코니로 나왔다.

멀리 링글리 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쌍둥이 항구와 그 옆으로 이어지는 코스코 운하가 보였다.


“그랬군요. 실종된 동생을 찾기 위해 밀항까지... ”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걸 수도 있겠지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릴리 씨한테는 폐를 끼쳤네요. ”

“폐라뇨. 사정을 알았으면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


릴리가 어깨 위에 앉은 비둘기 요나의 부리를 검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잠자리는 나중에 제가 다시 얘기해 볼게요. 제국어를 말할 줄 아는지는 몰라도 알아듣기는 한다니까요. ”

“뭐, 강요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몸보다는 마음이 편한 쪽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돌연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동생 이야기에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것이 원인인 듯했다.


“그, 근데 미르 씨는 원주민어를 어쩜 그렇게 잘하세요? 서쪽 바다 너머에서 오셨다는 분이. ”

“글쎄요. 사실 그렇게 따지면 제가 제국어를 할 줄 아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겠죠. 조난당하기 전까지 전 신성제국이란 나라가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으니까요. ”

“앗! 그러니까요. 저도 항상 그게 궁금했어요! ”


나는 준비해둔 설명을 꺼냈다.


“일종의 재능이지 싶습니다. 릴리 씨의 경우와 비슷한. ”

“네? ”

“릴리 씨가 주문과 두 손으로 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저는 다양한 언어를 듣고 말할 수가 있는 거죠. 예전엔 제 주변에서 다 같은 말을 쓰니 몰랐지만 이곳에 와서 발견하게 된 모양입니다. ”


본인도 직접 기적을 일으키는 몸이니 납득하기 어려울 건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

“그게 그렇게 놀랍습니까? 본인은 맨손으로 물을 만들어내면서요? ”

“당연히 놀랍죠! 왜냐하면 미르 씨가 말씀하신 그건 원래 요정님들만의 특권이거든요. ”

“설마 다시 엘프 얘기입니까? ”

“네. 저도 들은 얘기지만, 엘프님들은 세상의 근원인 세계수와 정신이 닿아 있어서 말을 안 배워도 모든 종족들과 소통할 수 있대요. 심지어 자연 속에 꼭꼭 숨어있는 정령님들 하고도요. 그게 다름 아닌 ‘마법’이고요. 괜히 ‘여신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 거죠. 미르 씨, 정말 엘프님들이랑 아무 관계없으세요? ”

“하하... ”


헛웃음을 흘린 순간 미려한 청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기 계셨군요. ”

“니콜라스 공? ”

“공작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함께 가시지요. ”

“알겠습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작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도착한 접견실.


“들어가시면 됩니다. ”


니콜라스 백작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자, 호손보다 세 배는 커다란 방의 옥좌에 홀로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일찍이 프란츠의 신종선서 때 보았던 화려한 로브로 온몸을, 은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수께끼의 인물.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왔군. ”

“그동안 기체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

“덕분에. 카탈리나 공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미르 휴브리스 공. 그리고... ”


은가면의 눈이 내 오른쪽으로 향했다.


“릴리 누라고 하옵니다. ”

“그래, 릴리 양. 이렇게 정면에서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군. 과연 세간의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어? 치유의 힘이 있다더니 그야 이 정도 미모라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뭇 사내들에게 위로가 되었겠지. ”


칭찬이라기에는 미묘한 말에 릴리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릴리의 생명수와 치료수로 건강을 되찾았지요. ”

“하나 문둥병엔 효과가 없나 보더군. 아쉽게도. ”


릴리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그 말씀은 설마? ”

“손님을 앞에 두고 얼굴을 가면 뒤에 감추어야 할 이유가 추한 몰골을 숨기기 위함 말고 뭐가 있겠나? ”

“제가 살펴볼 수 있을까요? ”


은가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효과가 없었다니까 그러네. ”

“농도나 용법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어요. 물론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어렵지만 증상을 늦추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고요. 적어도 통증은 완화할 수 있을 거예요. 제게 환부를 보여주시면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

“인상적이로군. ”


그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더니 턱을 괴었다.


“신벌이 옮을까봐 두렵지는 않은가? ”

“무섭다 한들 환자분의 마음만 할까요?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문둥병은 신벌 같은 것이 아니랍니다. 그저 하나의 병일뿐이에요. ”

“흐음. ”

“그리고 제 몸은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 늘 지켜주고 계셔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

“하핫, 과연! ”


은가면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조그마한 소녀 치고는 강단이 대단하군! 이미르 공이 남 주기 아까워할 만도 해. ”

“네, 네에? ”

“아, 몰랐나? 이쪽에서도 혼담을 몇 개인가 보냈었거든. 흠, 아무리 그래도 보여주기조차 하지 않았다니 섭섭한 걸?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몇 달 동안 호손에서 받아왔던 오해가 공국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탓이었다.


“호, 혼담이요? ”

“그런 게 있었습니다.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제 선에서 정리했지만요. ”

“아... ”


나와 릴리.

고귀한 신분의 외국인 학자와 그의 어여쁜 시녀.


전자는 내가 이곳에 녹아들기 위해 만든 가짜 신분이었고 후자 역시 치료사인 릴리를 자연스럽게 성 안에 두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반년 가까이 같은 손님방에서 지낸 데다 전쟁 시기에는 녀석이 사실상 내 비서 역할을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대외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역할이 맞아 떨어지게 된 셈이었다.


게다가 호손 안에서 내 지위가 점점 오르고 바깥으로까지 명성이 퍼지자, 자연히 막 혼인적령기가 된 미모의 시녀에 대한 소문도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전쟁이 끝난 것을 기점으로 나는 전후처리와 어장 복구에 더해서 한 가지 격무에 더 시달려야 했다.


바로 릴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혼담들을 쳐내는 일.


문제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소문이 생겨났고 이내 기정사실이 돼버렸다는 것이었다.


1. 이미르 공은 릴리를 누구에게도 시집보낼 생각이 없다.

2. 왜일까?

3. 빤하지. 지가 노리고 있으니까.


거기에 날씨가 풀리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졌고 결국에는 이런 소리까지 나왔다.


1. 이미르 공과 릴리 양은 미래를 약속한 사이다.

2. 하지만 신분의 차이가 커서 고향에선 이뤄질 수 없었다.

3. 그래서 새로운 땅을 찾아 망망대해로 떠났고 이곳 호손까지 온 것이다.

4. 사랑의 도피, 낭만적.


‘하아. ’


적극적으로 해명할까도 싶었지만, 남녀관계에 있어서는 조선 후기 못지않게 꽉 막힌 유사 중세랜드 사람들이 여자사람친구의 개념을 이해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더 이상한 소문을 불러와 버릴 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조용히 가라앉길 기다렸건만.


“그러고 보니 공이 결혼을 했었던가? ”

“아직입니다. ”

“이유를 알 것 같구먼. ”

“... ”


아무래도 화제를 돌려야 할 때였다.


“그나저나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차피 곧 만찬장에서 뵐 텐데요. ”

“아. 거기에는 부인이 대리인으로 갈 걸세. 호손과 토런스의 신명재판 때 그랬었던 것처럼 말이야. ”

“그렇습니까? ”

“보다시피 식욕에는 영 도움이 안 되는 처지라서. ”

“음... ”

“그래서 따로 한 번 얼굴이나 보려고 불렀다네. 부인이 말하기를, 동쪽에서 창궐한 괴수들을 비롯한 공국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러 와주신 대학자라고 하니까. 여도 공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무척 커. ”

“과찬이십니다. ”

“과찬인지 아닌지는 만찬장에서 자연히 알게 될 테지. ”

“...예? ”

“시종장! 아직 거기 있는가? ”


[예, 전하. ]


가면 뒤에 숨은 공작이 보이지 않는 낯빛으로 외쳤다.


“여기 이미르 공에게 만찬 때 입을 예복을 갖다 주게!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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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나침반이 향하는 곳(1) +3 22.12.21 416 1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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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새로운 불꽃(3) +3 22.12.11 578 25 14쪽
53 새로운 불꽃(2) +2 22.12.10 581 24 14쪽
52 새로운 불꽃(1) +3 22.12.09 614 26 13쪽
51 승리의 함수(7) +2 22.12.08 616 27 20쪽
50 승리의 함수(6) +7 22.12.07 629 25 15쪽
49 승리의 함수(5) +5 22.12.06 639 28 15쪽
48 승리의 함수(4) +1 22.12.05 662 25 18쪽
47 승리의 함수(3) +4 22.12.04 682 24 17쪽
46 승리의 함수(2) +4 22.12.03 695 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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