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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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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82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2.0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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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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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글자
20쪽

승리의 함수(7)

DUMMY

“만족하십니까? ”


호손 성채 꼭대기의 탑에 위치한 방에서 로버트 앤더슨이 핼쑥해진 얼굴로 물었다.


“네, 생각 이상의 성과였습니다. 덕분에 전투 한 번 없이 적이 3/4으로 줄었네요. ”

“그게 목적이었습니까? 저는 어떻게든 그쪽이 전쟁을 막아보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요. ”

“물론 그렇게 됐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아르노 백작 각하의 속이 영 좁더군요. 조금 전에 토런스로부터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받은 참입니다. ”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저버리고 작은 승리를 택하셨군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

“그리 확신하시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

“아무리 전쟁의 명분이 궁색해졌다 한들 백작의 병사들이 탈영했을 리는 없으니, 적이 줄었다는 말은 끽해야 동맹군이 퇴각했다는 얘기겠지요. 아르노 백작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토런스의 주력군은 여전히 이곳을 포위하고 있을 테고요. ”

“맞습니다. 제법 날카로운 통찰력이네요. ”

“다시 말해 호손의 모든 육로는 틀어 막힌 셈이고 농사도 무역도 여의치 않게 된 겁니다. 연해의 어장에는 썩은 생선들의 사체만 가득하고 이 소도시에 바깥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배도 별로 없으니, 식량난과 물자난이 올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지요. 게다가 성 안으로 대피한 바깥 마을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대기근이 올 게 빤합니다. 가을수확물이 남아 있는 당장은 성벽 뒤에 숨어 마지막 사치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겨울에 밑천이 드러나면 차라리 오늘 성문 열쇠를 넘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겠군요. ”

“흠. ”

“제 말이 틀렸습니까? ”

“그게, 너무 식상한 얘기라. 한 번 더 들었다간 귀에 딱지가 않겠습니다. 에고, 지겨워라. ”


심드렁한 내 반응에 자존심이 상한 듯한 로버트였지만, 논쟁을 이어가기에는 그도 만만찮게 피로한 모양이었다.


“하, 됐습니다. 어차피 떠날 도시의 운명 따위. 자, 이쪽에서는 약속을 이행했으니 그쪽도 귀족답게 뱉은 말을 지키시죠. 분명 하라는 대로 하면 저를 포함한 단원 모두를 안전하게 토런스로 돌려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지요? ”

“아. 그 얘기 말인데요. ”


나는 검지로 옆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단원들이 포기했습니다. 다름 아닌 그쪽 덕분에요. ”

“뭐, 뭐라고요? ”

“합리적인 결정이지요. 부단장인 그쪽이 자기 살자고 도시의 내정을 꽉 잡고 있는 프라도에게 누명을 씌워버렸고, 그 결과 동맹군이 말 머리를 돌려버렸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얌전히 살아남기는 글렀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벌어진 이상 호손으로부터 배의 손해를 보상받을 길도 사라졌으니 손실을 그쪽 상단으로부터 뜯어 낼 심산일 확률도 높지요. 이래저래 가봤자 신세만 고달파질 게 빤하니, 차라리 이쪽에 투항해 포로 신분으로 성에 남지 않겠냐고 물어봤습니다. 지하 감옥 대신 손님방을 주겠다고 하니 다들 좋아라고 받아들이더군요. ”

“마, 말이 됩니까? 두고 온 가족들은? ”

“현재 토런스엔 당신 말고는 다들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아르노가 출병의 명분으로 삼은 것 중 하나가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기도 하니, 당분간 계속 죽은 척 하고 있는 편이 가족들의 안위에 나을 거란 것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원들의 입장에서는.


하지만 로버트 앤더슨은 그들과는 선 자리가 달랐다.

프라도 자작을 건드린 이상 토런스에 더 이상 발붙이고 살기 어렵게 된 것은 분명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는 프라도 자작이 저 성벽 너머 막사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한시바삐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아버지와 형에게 사정을 알리고 최대한 빨리 남은 재산을 처분해서 다른 도시로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빌어먹을 새끼들이 지들만 살겠다고! ”


분통을 터뜨리는 그를 보며 나는 한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내로남불의 정석이로군요. ”

“내로... 뭐요?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요. ”


재차 얼굴을 일그러뜨린 로버트 앤더슨이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저 혼자만이라도 돌아가겠습니다. 약속대로 말과 여장을 준비해 주시죠. ”

“그건 좀 곤란한데요? ”

“지금 귀족의 명예를 걸고 한 약조를 어기겠다는 겁니까? ”


애초에 나는 귀족 따위가 아닌데.

그렇게 말할까도 싶었지만, 나도 이젠 이곳에 제법 녹아들었으니 좀 더 그럴 듯한 이유를 대기로 했다.


“나 참. 자기가 자기 입으로 발을 묶어 놓고 왜 이쪽의 탓을 하는 건지... ”

“그게 무슨 소립니까? ”

“잊었습니까? 그쪽은 오늘, 프라도 자작의 사주를 받아서 호손의 어장을 망쳤다고 ‘자수’하지 않았습니까? ”

“...! ”

“저도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어 마음이 아프지만 사사로운 약속보다는 법을 우선하는 것이 귀족 된 도리겠지요. 그새 그쪽한테 들어온 고발장만 해도 수십 장이 넘습니다. 떠돌이 상인과의 약속과 자기 성민들과의 약속, 둘 중 하나밖에 지킬 수 없다면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로버트 앤더슨의 낯빛이 탑의 십자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닷물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런 고로 내일부터는 이 탑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서 주무셔야겠네요. 마지막 사치를 마음껏 누리시길. ”


방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우, 웃기지 마! 이 개새끼가! ”

“너무 강한 말을 쓰면 오히려 약해 보이는데요. ”

“닥쳐! 닥쳐라! 이 전쟁이 네놈들의 뜻대로 끝날 성 싶으냐? 어차피 머지않아 너희들은 토런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것이다! 사내들은 살해당하고 여자들은 겁탈당하겠지! 도망쳐도 결국에는 굶어죽거나 맞아죽으리라! 그리고 나는 살아서, 반드시 살아서 네놈이 교수대에 매달리는 꼴을 지켜봐 주겠다! ”


반쯤 실성한 듯 보이는 로버트의 저주에 찬 노성에, 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직 이 말을 안 했네. ”

“...? ”

“호손은 안 집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그걸 위한 첫 단추도 이미 꿰어졌고요. 근데 그게 뭐였는지 아십니까? 레이크우드 백작의 퇴각? 아니, 아니죠. 그런 것까지 어떻게 예측해요. 내가 여신님도 아니고. ”


나는 굳이 로버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토런스의 선전포고였습니다. ”

“뭐, 뭐라고? ”

“궁금하시면 저기 창밖을 보시지요. ”


나는 얼마 전에 날아든 하얀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있던 편지를 떠올리며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밑층에서 보면 아직 망망대해일 뿐이겠지만 성채의 꼭대기인 이곳에서는 벌써 윤곽이 보이고 있었다.


대오를 이룬 채 천천히 호손으로 다가오는, 은빛으로 빛나는 청어들을 흘수선까지 가득 실은 열두 척의 범선들이.


“저, 건... ”

“익숙한 배들이죠? 원래는 당연히 주인한테 돌려드려야 맞는데, 하필 선주께서 이쪽에 선전포고를 해버리셨지 뭡니까. 뭐, 어쩌겠어요? ‘노획’한 김에 열심히 굴려봐야지. ”

“이, 이이이익...! ”


나는 입에 거품을 문 로버트를 향해 선언했다.


“저 배는 이제 제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


만선이었다.



* * *



호손의 어민들이 주로 쓰는 나룻배에 비해 배수량이 20배가 넘는 범선 열두 척.


그들이 전부 흘수선까지 꽉꽉 채워온 청어의 양은 기존의 어선으로 따지면 약 240척분, 어장이 오염되기 전의 호손 전체 생산량으로 따져도 일주일치에 필적했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

“저, 저게 다 청어라고? 이게 꿈이여 생시여? ”


갑자기 벌어진 청어 잔치에, 호손의 온 성민들과 피난민들이 부둣가로 몰려들어 처음에는 놀라움의 탄성을, 이윽고 감격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살았다! 이제 우린 살았어! ”

“감사합니다, 여신님! 감사합니다, 영주님! 호손 만세! ”

“만세! 만세에! ”


가장 앞선 배의 선수에 서있던 앤 남작이, 흐뭇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목례해보이자 나 역시 고개 숙여 대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


말없이 나눈 인사를 마친 그녀의 눈이 다시 부둣가의 인파로 향했다.

이유는 알만했다.


“내니이이이이! ”


한달음에 달려온 초로의 노인이 놀랍게도 훌쩍 배에 뛰어올라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오오오오! ”

“휘이이익! ”


환호성이 한층 격해지더니 휘파람 소리마저 섞여들었다.


“어, 어휴, 정말! 사람들이 보잖아요! ”

“까짓 거 보라고 해! 더는 못 기다린다구! ”


그녀의 만류에도 조나선은 오히려 보란 듯이 앤에게 입을 맞추었다. 앤도 잠시 그의 가슴을 밀치는 듯하더니 이내 조나선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맡겼다.


“와아아아! ”


부둣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어우, 야아... ”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살짝 질려하던 내 옆으로 풍채 좋은 사내가 다가왔다.

이곳의 유명한 요리사이자 생선손질의 장인, 피에르 고르멧이었다.


“허... 장관이로군요. 제가 부둣가에 가게를 열고 산지도 벌써 10년째입니다만, 저렇게 많은 청어를 한 눈에 담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근해의 새로운 어장을 찾은 데다 이제 아르노 백작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앞으로는 일주일이 아니라 삼일마다 이 양이 들어올 거예요. ”

“참으로 대단하군요. 이 정도면 청어철 동안에는 성 안의 모두가 배고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


나는 한창 감격에 젖어있는 피에르에게 물었다.


“하면 청어철 이후에는 어찌될 것 같습니까? ”

“예? 으음. 그건... ”


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두꺼운 턱을 좌우로 쓰다듬더니 아쉬운 듯 침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청어 공급에는 문제가 없다 치더라도 이쪽의 작업속도가 따라가 줄지 의문이군요. 아무래도 일손과 장소, 시간의 한계가 있다 보니... ”

“아무래도 말리는 것은 절이는 것에 비해 품이 많이 들지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

“맞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청어는 기름기가 많은 생선입니다. 덕분에 영양이 풍부하긴 하지만, 하나하나 배를 갈라 꼼꼼히 손질하지 않으면 말리는 도중에 상해버리기 일쑤죠. ”

“요리사로서는 좀 아깝기도 하겠습니다. 맛있는 이리(정소)마저 죄다 들어내 버리고 있을 테니. ”

“호오? 맞는 말씀입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학자님께선 요리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풍부하시군요. ”


오라클 덕이지, 뭐.

나는 살짝 웃어보이고는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염장을 하면 되니까요. ”

“예? 하지만... ”


피에르가 뒷머리를 긁었다.

여태까지 그가 염장 대신 품도 많이 들고 속도도 느린 포 만들기를 해왔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소금이라도 구해 오셨습니까? ”


염장에는 소금이 든다. 엄청 많이.

그리고 이 시대의 소금은 대부분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거나 내륙의 소금광산에서 캔 암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후자는 이미 교역로가 끊긴 린우드에 있고 전자는 직접 만들려면 땔감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프란츠는 전쟁과 물자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저장해둔 목재들을 소금 생산에 쓰느니, 차라리 생산량이 줄고 맛이 없어지더라도 말려서 포로 만들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즉답했다.


“네. 충분히 구해왔습니다. 아니, 사실은 발견이 늦었을 뿐이지 원래부터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지요. ”

“그렇습니까? ”

“순수한 소금은 아니지만 같은 작용을 하는 물질입니다. ”

“그게 뭡니까? ”

“함수(鹹水)입니다. ”


나는 일주일 전에 한 고민과 릴리가 준 힌트를 떠올렸다.

어렴풋이 보일 듯 보이지 않던 승리의 길을 마침내 열어주었던 마법 같은 단어를.


“함수라면 바닷물 말입니까? 하지만... ”

“물론 그냥 바닷물에 담근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소금물을 일컫는 단어 함수(鹹水)는 내 세상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바닷물 그 자체.

또 하나는 소금을 만들 때 쓰는, 바닷물을 염전에 모아서 농축시킨 짠물.

방금 내가 말한 함수는 후자의 의미였다.


“염장이란, 염분의 삼투압 작용을 이용해서 유해세균의 번식을 억제해 음식을 장기간 보관하는 방법입니다. ”

“예? ”

“...간단히 말하면, 음식을 썩게 하는 나쁜 기운이 오지 못하도록 아주 짜게 만들어서 쫓아내는 거지요. ”

“아, 예. 맞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은 사람이 먹기에는 짜지만 그 정도까지 짜지는 않지요. 저도 옛날에 시도를 해봤지만 바닷물에 담가놔 봐야 불과 며칠을 못 가서 상해버립니다. 바닷물을 끓여 만든 제대로 된 소금을 쳐야 하지요. ”

“그냥 바닷물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소금이 만들어지기 직전의 아주 짠 소금물이라면 얘기가 다르지요. ”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이곳의 바다가 내 세상과 같다면 대략 3.5% 정도일 것이다. 피에르의 말마따나 그 정도로는 염장을 할 수가 없다.


통조림 기술이라도 있다면 스웨덴의 악명 높은 악취음식 ‘수르스트뢰밍’은 만들 수 있겠지만 아직 이 동네의 철을 다루는 수준으로는 무리다.


하지만 바닷물을 증발시켜 염분 농도를 10%이상으로 끌어올리면 바로 저 수르스트뢰밍을 만드는 데 쓰이는 할로박테리움 같은 일부의 호염성 세균을 제외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농도 26% 가량의 포화소금물쯤 되면, 사실상 소금으로 꽉 찬 통에 음식을 집어넣는 것과 효과가 같다. 염장의 원리가 그거니까.


“고체 상태의 소금을 치는 건염법이라고 해도 결국 뿌린 소금은 식품 자체의 수분에 녹아들어 표면에 포화소금물의 막을 형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금을 뿌리나 포화소금물에 집어넣으나 과학적으로는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

“음. 죄송하지만 좀 더 쉽게 설명해주시면... ”

“한마디로 소금을 치나 소금이 나오기 직전의 짠물에 집어넣으나 거기서 거기라는 얘깁니다. ”

“예? 그게 정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그리고 물을 완전히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것과 소금이 막 만들어질 쯤에 불 때기를 멈추는 것은 시간과 비용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요. ”


그러니 소금을 치는 대신 포화소금물을 담은 통에 집어넣으면 된다.


그 생각을 16세기 네덜란드의 어부 ‘빌럼 뵈컬손’도 했었고, 이후 네덜란드는 종전보다 절인 청어를 수십 배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덕분에 이룩한 막대한 경제력은 간척지까지 쳐도 대한민국보다 작은 미니 국가를 백년 이상 온 유럽을 호령한 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했다.


사람들이 그들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일컬었을 정도로.


호손 역시 넘쳐나는 청어들의 뼈 위에서 승리의 기반을 다지게 될 것이다.


“대가리와 이리를 제외한 내장을 적출한 다음 소금 대신 진한 소금물 통에 집어넣어 염장을 하면 같은 땔감으로 열 배 넘는 절인청어를 만들 수 있습니다. ”

“허어! 세상에 그런 간단하고도 기똥찬 방법이... 허구한 날 바닷물을 끓여 자염을 만들면서도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

“특별한 일은 아니지요. 제 세상의 역사에서도 무려 수천 년간 그랬으니까요. ”


때로는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혁명을 몰고 오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피에르에게 덧붙였다.


“참고로 방금 말했지만 이리는 남겨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숙성 과정에서 풍미를 더 좋게 해주니까요. ”


천상 요리사답게 피에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렇군요!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보자, 일단 소금물을 끓였다가 식혀야 하고 물고기 손질도... 허허, 저 많은 청어들이 상하기 전에 할 수 있을지. ”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새로운 ‘칼’이 있다면요. ”


나는 부둣가로 고개를 돌려, 다른 의미의 ‘염장’을 한창 지르고 있는 선상커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흠흠! 마음은 알겠지만 나머지는 성채에서 하십시오. ”

“엇? 이, 이미르 님? ”

“시, 실례했습니다. ”


나는 그제야 앤을 바닥에 내려놓은 조나선에게 물었다.


“부탁했던 칼은 준비되었습니까? ”

“아, 예! 별도로 열처리를 할 필요도 없다고 하셔서 금방 만들었습니다. 말씀대로 우선 50자루 정도. 곧 올 겁니다. ”

“잘 됐네요. 저기 있는 피에르와 그 일행들에게 나눠주십시오. 아, 시제품 한 자루는 갖고 오셨지요? ”

“예! ”


나는 그가 건네준 아마포로 감싼 칼 한 자루와 배 바닥에 널려있는 청어 몇 마리를 들고 피에르에게 돌아갔다.


“그건 또 뭡니까? ”

“앞으로 생선을 손질하는 데 쓸 칼입니다. ”

“칼이요? 칼이라고 부르기에는 날이 너무 짧은데. 청어가 대구보단 작다지만 이런 걸로 목을 치긴 힘듭니다. ”

“그야 목을 치는 데 쓰는 게 아니니까요. 이 칼은 이렇게 쓰는 겁니다. ”


나는 뚱뚱한 반달 모양의 칼날이 달려있는 단검을 엄지를 제외한 오른손가락들로 감싸 쥔 다음, 왼손에 들고 있던 청어의 아가미에 날을 박고 빙글 돌림과 동시에 쭉 잡아당겼다.


처음이다 보니 오라클로 본 영상처럼 단칼에 쏙 뽑는 데는 실패했지만, 어떻게든 이리를 뺀 뼈와 내장을 한꺼번에 적출하는 데 성공했다.


으. 직접 해보니 그로테스크하네.


“대충... 이런 식입니다. ”

“오오! 직접 해 봐도 되겠습니까? ”


고개를 끄덕인 내가 나머지 청어들과 칼을 맡기자,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가 한 번 심호흡을 하더니 곧바로 촥, 깔끔한 참수형을 집행했다.


“이야, 이러니까 훨씬 손질하기 쉽군요! 힘도 적게 들어가고, 시간도 엄청 빠르고. ”

“하하... 역시 장인은 다르긴 하네요. 아무튼 그 칼로 손질하시는 데 익숙해지면 한 시간에 2000마리는 해치우실 수 있을 겁니다. 아예 배 위에서 바로 손질해서 염장까지 해버릴 수 있겠지요. ”

“오! 그럼 먼저 잡은 청어가 상할 걱정 없이 며칠이고 조업을 계속할 수 있겠군요? 작황이나 날씨가 조금 나빠도 만선으로 귀항할 수 있겠습니다. ”

“바로 그겁니다. ”

“들으면 들을수록 굉장하군요! 이렇게 작은 칼 한 자루로 그런 변화를... ”

“곧 50자루 정도 보내드릴 테니, 앞으로는 그걸로 청어를 손질하시면 될 거예요. ”

“알겠습니다. 받는 대로 사람을 모아 작업을 시작하지요! 아, 가게 주방에서 소금물을 미리 끓여놓아야겠군요. ”


의욕이 넘치는 피에르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가게로 가신 김에 사람들한테 맛있는 청어요리라도 해서 나눠주세요. 모처럼 축제 분위기이기도 하니까요. ”

“엇? 저야 좋지요! 근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청어를 절일 함수를 미리 만들어두는 편이... ”

“아까 말했잖습니까? 조금 늦게 발견했을 뿐,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요. 함수라면 충분히 마련해 뒀습니다. ”


그래. 함수는 오래 전부터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몇 달 전, 피에르 광산촌을 비롯한 식수가 부족한 지역에 생명수를 공급하려고 설치했던 ‘태양의 우물’.


그 원리는 바닷물을 넣은 바깥쪽 통에서 증발되어 생성된 증류수를 안쪽의 물통에 모으는 것이다.

거기에 바깥쪽 통에 낀 소금기를 적당히 섞어주면 일종의 인공광천수인 내 버전의 생명수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안쪽의 물통에 생성시킨 증류수만큼의 수분이 빠져나가버린 ‘바깥쪽’ 물통의 소금물은, 그냥 바닷물이 아니라 포화수준에 가까운 염분을 머금은 훌륭한 절임용 ‘함수’가 된다.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함수가 담긴 물통들을 가득 실은 수레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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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정산의 날(1) +3 22.12.16 495 22 13쪽
58 새로운 불꽃(7) +1 22.12.15 526 2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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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새로운 불꽃(4) +2 22.12.12 541 22 19쪽
54 새로운 불꽃(3) +3 22.12.11 581 25 14쪽
53 새로운 불꽃(2) +2 22.12.10 583 24 14쪽
52 새로운 불꽃(1) +3 22.12.09 618 26 13쪽
» 승리의 함수(7) +2 22.12.08 619 27 20쪽
50 승리의 함수(6) +7 22.12.07 633 25 15쪽
49 승리의 함수(5) +5 22.12.06 642 28 15쪽
48 승리의 함수(4) +1 22.12.05 665 25 18쪽
47 승리의 함수(3) +4 22.12.04 685 24 17쪽
46 승리의 함수(2) +4 22.12.03 699 21 12쪽
45 승리의 함수(1) +1 22.12.02 736 20 15쪽
44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6) +2 22.12.01 740 2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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