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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73,973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2.21 22:25
조회
418
추천
18
글자
19쪽

나침반이 향하는 곳(1)

DUMMY

<세 번째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


[신탁의 주목표는 아래와 같습니다. ]

-카탈리나 공국의 괴수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완료 보상 : 1000MP

-상태 : 진행 중


[신탁 강화(Lv.1)에 따라 성좌 아라크네로부터 추가목표가 주어집니다. ]


[추가목표 ‘좁지만 곧은 길’이 주어졌습니다. ]

-불리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맞는 진영에 서십시오.

-달성 시 500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상태 : 진행 중


[추가목표 ‘최소한의 희생으로’가 주어졌습니다. ]

-가능한 적은 인명 피해로 신탁을 완료하십시오. (0/2)

-달성 시 500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상태 : 진행 가능


[추가목표 ‘고대의 통일언어’가 주어졌습니다. ]

-해당 도시의 과학이론 및 기술발전에 기여하십시오.

-달성 시 500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상태 : 진행 가능


[추가목표 ‘구원자의 길’이 주어졌습니다. ]

-예정된 운명을 바꾸어 사람들을 구하십시오. (0/7269)

-달성 시 ‘구한 인명 수x1’의 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상태 : 진행 가능


[선택목표 ‘멘로 파크의 마법사’가 주어졌습니다. ]

-새로운 동료를 영입하십시오. (0/1)

-상태 : 진행 가능



* * *



그날 밤, 베일의 귀부인 이사벨라와 한참 이야기를 나눈 나는 달이 거의 중천에 걸렸을 무렵에야 돌아왔다.


“...오셨어요? ”

“음? ”


그런데 릴리가 아직 잠들지 않고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

“그러게요.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미르 씨가 워낙 밤잠이 없으시니까 저까지 옮아버렸나 봐요. ”


그녀가 멋쩍은 듯이 귀밑머리를 간질였다.

몸의 방향을 보니 벽난로를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불멍 중이셨나요? 좋지요. ”

“불멍이요? ”

“불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거요. 줄여서 불멍. ”

“별 걸 다 줄여서 말하시네요. ”


피식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시선을 다시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들로 향했다.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

“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제 곧 봄이니까. ”

“봄. ”


나는 왠지 그녀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떠날 생각이시군요. ”

“네. 이곳에는 더 이상 제 도움이 필요 없으니까요. ”


고질적인 물 부족은 해결되었고 전쟁위기도 끝났다.

프란츠는 문제없이 신종선서를 마쳤고 앙숙인 아르노 백작은 완전히 실각했으니 이제 호손에는 꽃길을 걸을 일만 남은 셈이었다.


“이제 와서 제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지금의 호손이라면 남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닐 겁니다. 치료사이자 제 부관으로서 많은 도움을 주셨으니 대우도 나쁘지 않을 테고요. ”


내 말에 미소를 지은 릴리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호손은 좋은 곳이고 다들 좋은 분들이시지만, 제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요. ”

“고향 말인가요? ”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르 씨도 그렇지 않나요? ”


그 말에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 전 아라크네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불가능해요. 저뿐만이 아니라 어떤 성좌에게도 시공의 제약을 역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미르 님께서는 앞으로도 계속 이 세상에서 살아가실 수밖에 없어요. ]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습니다만... ”


고개를 갸웃한 릴리가 다시 입술을 떼려는 순간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전 아마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

“왜요? ”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 돼버렸거든요. 제 고향은. ”

“아, 하긴. 서쪽의 대양 너머라고 하셨죠? 웬만한 배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네요. 선원들도 엄청 필요할 테고... ”


그녀의 오해를 나는 굳이 바로잡지 않기로 했다.


입을 다문 채 자기도 모르게 불멍에 빠져있던 나를 한동안 바라보던 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미르 씨? ”

“네? ”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미르 씨가 전해주신 항해술 덕에 전보다 훨씬 먼 바다를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으니, 열심히 모으다 보면 언젠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난번 ‘함수’ 때도 그렇고, 녀석의 말은 오해에서 나온 것임에도 묘하게 핵심을 찌를 때가 있었다.


그래. 열심히 모아야지. 돈이 아니라 ‘MP’를.


설령 내가 지구로 돌아가 다시 만날 수는 없더라도 ‘레버레이션(계시)’을 사용해 소식이라도 전할 수 있도록.

혼자가 된 여동생이 하다못해 내 생사라도 알 수 있도록.

그리고 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하고 녀석이 원한다면 이 세상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그러려면 확실히 여길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야겠네. ’


비데까진 무리라도 수세식 화장실 정도는 있는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웃픈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근처에서 틱 뭔가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맞은편 침대에 앉아있던 릴리가 어느새 내 옆자리에 와 있었다.

언제나 소중하게 목에 걸고 있던 나침반 목걸이를 한손에 꼭 쥐고서.


“뭡니까? ”

“이거 받으세요. ”

“이건 릴리 씨의 나침반이잖습니까? 이걸 왜 저한테? ”

“지난번에 선물해주신 장갑의 답례에요. ”

“이제 와서요? ”

“좀 많이 늦기는 했지만요. ”

“하지만 이건 릴리 씨의... ”

“제게는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이에요. ”


쓸쓸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나는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릴리 씨가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에도 나침반은... ”

“필요하겠죠. 하지만 이거일 필요는 없어요. 성채 창고에 쌓인 것 중에 아무거나 가져가면 그만이니까. ”

“기능 면에서야 그렇겠지만 이 목걸이는 릴리 씨가 하나님의 사도에게 받은 유물 아닙니까? 소중한 물건일 텐데... ”

“네. 그래서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미르 씨가 가져가 주셨으면 하는 거고요. ”

“...? ”

“제가 드릴 수 있는 제 소중한 물건은 이것뿐이니까요. ”


‘나머지는 미르 씨가 전부 똥물에 집어넣어버리셨잖아요?’라며 릴리는 웃었다.


“받아주세요. 그리고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게 되셨을 때, 이 나침반을 써주시면 기쁠 거예요. ”

“아... ”


비로소 그녀의 뜻을 이해한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

“... ”

“이별선물인거네요. ”

“...네. ”


알고는 있었다.


아라크네의 제안대로 그녀의 챔피언이 되어 세계를 유랑하기로 한 이상, 호손의 사람들은 물론 릴리와도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오리라는 것을.


하지만 가슴이 시큰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슬프기도 했고 걱정되기도 했다.

그동안 동고동락하며 쌓인 정이 적지 않은데다, 아무리 조심한들 이 시대에 소녀 혼자 여행하는 것이 순탄할 리 없으니까.


게다가 한 방을 오래 쓴 탓일까? 성격이나 외모가 어딘가 조금은 닮은 탓일까?

그녀와 있으면 마치 이 세계에 또 한 명의 여동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다.


하지만 이 감정에 휩쓸릴 수는 없었다.

내 진짜 여동생은 지구에 있고 녀석은 태평양 상공에서 갑자기 사라진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테니까.


가야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길로, 나는 내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

“그래야겠죠. 더는 하나님과 사도님들을 찾을 단서가 없으니까요. 예전에는 목걸이의 ‘계시’를 따랐지만, 이제는... ”

“계시라고요? ”

“이거요. ”


그녀가 목걸이의 꼭짓점 중 한 곳을 가리켰다.


중앙의 나침반을 둘러싼 얇고 넓은 마름모꼴의 크리스탈, 그 한쪽 귀퉁이에 음각된 작은 삼각형.

전에 나침반을 고치려 했을 때는 잡은 손가락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것이 지금은 똑똑하게 보였다.


“희한하죠? 아시다시피 나침반의 바늘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켜요. 그런데 이 목걸이에는 북쪽이 아닌 서쪽에 따로 표시가 되어있죠. 그걸 보고 생각했어요. 제게 이걸 내려주신 사도님들은 서쪽으로 가고 계셨구나. 그럼 나도 서쪽으로 가면 그분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제게 ‘계시’를 주신 거구나. ”

“... ”

“하지만 이렇게 대륙 끝까지 왔는데도 만나기는커녕 흔적 하나 찾을 수가 없네요. 어지간히 만나주시기가 싫으신가 봐요. 아니면 모든 게 제 착각이었거나... ”


서글픈 미소를 지은 릴리가 힘없이 내뱉었다.


“어느 쪽이든 제 여행은 이제 끝난 거겠죠. ”


어깨가 축 쳐진 그녀를 나는 위로할 수 없었다.

그럴 정신머리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설마? ’


뭔데?

‘이게’ 대체 왜 여기 있어?


-키릭!


나는 릴리 몰래 목걸이의 나침반을 좌우로 비틀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는지 굉장히 뻑뻑했지만 나침반과 크리스탈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의 저항 후 찾아오는 맞물리는 촉감.

그것으로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저기, 릴리 씨? ”

“네? ”

“일단 목걸이는 돌려드리겠습니다. ”

“네? 왜요? ”

“아무래도 생겨버린 것 같거든요. ‘단서’가요. ”


그녀와 내 인연은 조금 더 이어질 모양이었다.


“같이 갑시다. 카탈리나 공국으로. ”



* * *



사흘이 지난 호손 시의 부둣가.

출항을 앞둔 산타카탈리나호 앞으로 구름 같은 인파가 모였다.


이제 완전한 호손의 영주가 된 프란츠 폰 호손 자작.

그의 시녀장인 엠마 터너와 궁내관 잭슨 터너.

최근 신설된 외교관에 오른 앤 베지에 남작과 그의 남편이자 호손 성의 수석 대장장이인 조나선 스미스.


저번 만찬을 계기로 호손과 토런스를 넘어 카탈리나 공국에도 소문이 퍼져나갈 ‘피에르의 온도’의 주방장 피에르 고르멧과, 사랑돌이 신혼부부 아마씨 쏟아지듯 쏟아져 나온다는 피에르 광산촌의 새 촌장이 된 게일.


그 밖의 마을 사람들과 병영의 군인들을 비롯한 성민들의 절반이 작은 항구를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후우. 정말로 가는 건가. ”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운을 뗀 프란츠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애꿎은 바닥을 툭툭 차며 말했다.


“믿기지가 않는군. 돌이켜보면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인데, 기분이 마치 10년 지기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해. ”

“그리울 겁니다. 이미르 님. 릴리 양. ”

“크흠... 조심해서 가십시오!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크흠! 크흠! 아이, 대낮부터 뭔 놈의 먼지가... ”


헛기침 한 잭슨이 코를 훔치며 고개를 돌리는 사이 한 발 앞으로 나온 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평생의 은인을 이렇게 떠나보내려니 아쉽네요. ”

“그러게나 말이여. 아, 근데 궁내관님 말씀대로 진짜 먼지가 많나 봐, 여보? 꽃가루 때문인감? 훌쩍... ”

“혹시라도 탕수대구 생각이 나면 언제든지 찾아주십시오. 두 분이라면 평생 무료로 모시겠습니다. ”

“진짜로 가십니까요? 킁... 쇤네가 이런 말 잘 안하는데... 그동안 모셔서 좀 영광이었습니다요. ”


저마다 한 마디씩 남긴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우리에게 안겼다.


“프라도 녀석이 도망길에 챙겨갔던 금화라네. 뒤뚱대는 몸으로 부지런히도 해먹었더군. 노자로 써 주게. ”

“‘진실의 손’에 들어있던 보석입니다. 이제 호손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 공께 선물로 드리고 싶네요. 저희 집 가보로 내려온 진귀한 돌이니 분명 보탬이 될 겁니다. ”

“쓰시던 말안장과 등자를 가져왔습니다. 말이 바뀌어도 이걸 쓰시면 훨씬 빨리 적응하실 수 있겠지요. ”

“아끼는 아이에요. 이미르 님과 릴리 양의 옷으로 훈련을 시켰으니 두 분을 잘 따를 거랍니다. ”

“저야 뭐, 대장장이가 달리 해 드릴 게 있겠습니까? 사흘 밤낮을 두드린 녀석이니 공국제와 비교해도 밀리진 않겠지요. ”

“말린 대구와 감자전분입니다. 물에 불려서 밀가루와 섞어 튀기면 얼추 반 정도 맛은 나올 겁니다. ”

“어이쿠! 마침 내가 빵이랑 밀가루를 좀 가져왔는데 잘 됐구먼? 아, 요놈들은 그저께 캔 사랑돌 조각인데, 모양이 참 예뻐서 차마 용광로에 못 넣고 빼뒀습니다요. 기념으로 하나씩 가지십쇼. ”

“다들 고맙습니다.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

“감사합니다! ”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호리호리한 체구의 미청년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작별인사도 나누신 듯하니 출발하겠습니다. 배에 오르시지요. ”

“예. 여러분, 그동안 여러 모로 감사했습니다! ”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


[살펴 가십시오, 학자님! ]

[학자님 덕분에 쇤네들이 맛있는 감자빵을 먹습니다요! ]

[크흑! 싸랑했다, 릴리야... ]


손 흔드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산타카탈리나호에 오른 나와 릴리는 선장실 바로 옆의, 침대 두 개가 서로 마주보는 커다란 선실로 안내받았다.


웬만한 거실보다 큰 사이즈에 식탁에는 테이블보와 꽃병까지 놓여있는 것을 보니 예사 방은 아닌 듯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

“고맙습니다. 클라멘테 백작님. ”

“니콜라스 공이면 됩니다. 한데 시중을 들 시녀나 시종은 정말 필요 없으십니까? ”

“네. 신경써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그게 더 불편합니다. ”

“알겠습니다. ”


가볍게 목례한 그가 문을 닫으려다 문득 멈추었다.


“참. 부탁하신 ‘그것’은 테이블보 아래에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

“귀한 물건이니 부디 조심해서 다뤄주십시오. ”


닫힌 문 뒤로 양손에 가득한 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나와 릴리는 하얀 린넨이 깔린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후. 막상 떠나려니 싱숭생숭하네요. ”

“그러네요. 왠지 복잡한 기분이에요. 슬프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


고개를 끄덕인 릴리가 새장 안에서 ‘구구국!’ 소리를 내고 있는 하얀 비둘기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아이, 귀여워라. ”


-구구국, 국!


그렇게 한동안 교감을 나누던 그녀가 말했다.


“음. 근데 이 아이, 많이 답답해하는 것 같은데... 잠깐 문을 열어줘도 될까요? ”


그녀의 질문에 나는 머릿속으로 침잠했다.

머릿속 인터넷 오라클에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비둘기/반려동물 - 세피로스위키(*참고하세요!) ]


나는 눈앞에 펼쳐진 문서를 빠르게 읽고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개를 기를 때 산책을 시키듯이 하루 한 번은 자유롭게 날게 해주는 편이 좋다고 하네요. 비둘기의 귀소본능에는 자기장뿐만 아니라 냄새도 크게 작용하니 앤이 자신할 만큼 훈련시킨 비둘기라면 우리의 냄새를 기억하고 돌아올 겁니다. ”

“그렇군요! 그럼 바로 열게요? ”


-푸드득!


반색한 릴리가 새장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펼친 비둘기가 방 안을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 맞은편의 창밖으로 날아갔다.

혹여 그대로 방생이 돼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푸드득!


몇 분 후 돌아온 비둘기가 중앙의 테이블에 내려앉아 부리로 깃털을 골랐다.


그런데 녀석을 다시 넣으려고 새장 문을 연 순간, 놈이 훌쩍 릴리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똑똑한 녀석이네요. ”

“그러게요. 참! 이 아이 혹시 이름이 있던가요? ”

“음, 제가 기억하기로는 없을 겁니다. 붙이기 나름이겠죠. 저는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릴리 씨 편한 대로 하시면 될 겁니다. ”

“그럼... ”


눈을 감고 고민하던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요나. 요나라고 부를래요. ”

“요나. 낯설면서도 친숙한 이름이네요. 전에 재밌게 본 영화에 나왔었는데. ”

“영화라면... 미르 씨네 고국에서 자주 한다는 연극 말씀이시죠? 커다란 하얀 천에다 빛을 쏴서 한다는. 솔직히 그게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요. ”

“네. 굉장히 화제가 됐던 작품입니다. 아쉽게도 천만까진 못 갔지만 우리나라에서만 930만 관객을 동원했으니까요. ”

“구, 구백삼십만이요? 농담하시는 거죠? ”

“제가 이런 걸로 허튼소리 하는 것 봤습니까? ”

“세상에... ”

“아무튼 제 기억으로는 요나가 거의 주인공급 인물이었을 겁니다. 멸망해버린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였으니까요. ”


모처럼 내 세상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신이 난 나는 오라클이 띄워준 영화의 스토리를 마저 말하려다, 릴리의 표정이 심상찮은 것을 보고 멈추었다.


“괜찮아요? ”

“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

“신경이 안 쓰일 수 있는 얼굴이 아니신데, 지금. ”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저 진짜로 괜찮아요. 진짜로... 읏? ”


역시, 말하기가 무섭게 터져버렸다.


“우... 흐윽! 죄송해요. 진짜로 죄송해요. 아이, 참... ”


눈가를 훔치는 손바닥 사이로 주룩주룩 흘러내린 눈물이 겨우 멈춘 것은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우... 죄송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

“아닙니다. 혹시 괜찮다면 이유만 좀 말해주세요. 그래야 앞으로 저도 조심하죠. ”

“미르 씨가 잘못하신 건 없어요. 진짜 없어요. 그냥... ”

“그냥? ”

“그냥... ‘그 연극에서는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든 순간 저도 모르게... ”


느낌이 왔다.

보름 전 전승의 날, 평소와 달리 술을 만취하도록 마신 그녀가 내 등에 업혀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아, 아니에요오오... 조은 날인데 울긴 왜 울어요오오... ]

[누가 봐도 훌쩍이고 있는데요? ]

[아니라니까요오오... 그냐앙... 그냐앙 조금 더 일찌익... ]

[...? ]

[일찌익 미르 씨를 만났다며언... 제 동생도오... ]


아무래도 화제를 돌리는 편이 나을 듯했다.


“죄송해요. ”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해요.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죠. ”

“그, 그렇죠! 더 꿋꿋하게, 더 열심히 살아가야죠! ”


그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을 치웠다.


“아! 배고프세요? 점심식사 하실래요? 어디 보자, 아침에 게일 씨가 싸준 빵이... ”


애써 밝은 톤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식사는 때가 되면 저쪽에서 가져다 줄 겁니다. 그보다 기억나세요? 제가 삼일 전 새벽에 한 이야기. ”


나는 그녀가 혹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꺼냈다.

원래는 먼 동쪽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그녀가, 이렇게 나와 함께 남방의 카탈리나 공국으로 가게 만든.


“당연히 기억하죠. 하나님의 단서가 남방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당장은 제대로 된 지도가 없으니 설명을 미루겠다고 하셨지만. ”

“네. 그걸 지금 해드리려고 합니다. 잠깐 그 앞의 꽃병을 좀 치워주시겠어요? ”

“이거요? ”


그녀가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던 도자기를 든 순간 나는 탁자의 테이블보를 훅 뒤로 빼버렸다.


“앗? ”


동시에 드러난 사람 한 명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큰 그림.


“세상에. 지도가 엄청나게 크네요. ”

“네. 공작님께 특별히 부탁을 좀 드렸습니다. 듣기로는 제국 수도에 있는 성유물을 제외하면 이 대륙에서는 가장 정확하고 큰 지도일거라더군요. ”


그게 왜 하필이면 이곳에 있는지는 알만했다.


산타카탈리나호는 공작이 이동시에 머무르는 ‘바다 위의 성’이자 카탈리나 공국군의 기함. 다시 말해 사령선.


선실이라기에는 다소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이 방은, 유사시엔 공작과 공국군의 수뇌가 모이는 참모본부가 되는 것이다.

이 테이블은 일종의 작전판인 셈이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릴리 씨. ‘자북’과 ‘진북’의 차이를 아시나요?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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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정산의 날(4) +2 22.12.20 444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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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새로운 불꽃(3) +3 22.12.11 581 25 14쪽
53 새로운 불꽃(2) +2 22.12.10 583 24 14쪽
52 새로운 불꽃(1) +3 22.12.09 617 26 13쪽
51 승리의 함수(7) +2 22.12.08 618 27 20쪽
50 승리의 함수(6) +7 22.12.07 632 25 15쪽
49 승리의 함수(5) +5 22.12.06 642 28 15쪽
48 승리의 함수(4) +1 22.12.05 665 25 18쪽
47 승리의 함수(3) +4 22.12.04 685 24 17쪽
46 승리의 함수(2) +4 22.12.03 699 21 12쪽
45 승리의 함수(1) +1 22.12.02 736 20 15쪽
44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6) +2 22.12.01 739 2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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