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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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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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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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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2.20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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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정산의 날(4)

DUMMY

[고생 많으셨어요. 나의 챔피언. ]


언제나의 하얀 공간에서, 이번에는 아라크네가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공치사는 집어치우죠. ”


[아니에요. 정말로 고생하셨어요. 너무나도 잘해 주셨답니다. 기뻐요. ]


가슴께 앞에서 손을 맞잡은 채 녹색의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그들은 뭡니까? 안티고네랑 그 마법사요. ”


내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대답했다.


[참 가엾은 아이들이지요. ]


“가엾다고요? 그 녀석들 때문에 몇 천 명이 죽을 뻔했었는지 압니까? 그네들만 아니었어도 이 전쟁은 아예 전투 없이 끝날 수도 있었어요. 제 성좌로서 그들을 막는 것을 도와주진 못했을망정 변호를 합니까? ”


날선 추궁에 아라크네는 오히려 빙긋 미소를 지었다.


[도움은 드렸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요. ]


“뭔 소리에요? 도움은 무슨 얼어 죽을 도움? ”


[필요하셨을 테니까요. 그들이. ]


나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필요했을 거라고?

누가? 설마 그 녀석들이?


“의도적이었다는 겁니까? 안티고네와 마법사의 개입이요? ”


[미르 님이시라면 그 속에 숨어있는 최적의 선택지를 찾아주시리라고 믿었으니까요. ]


이게 말이야, 방구야?

방구 같았지만 이윽고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안티고네와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개입해서 로버트 앤더슨을 빼내지 않았다면?


이상적인 시나리오대로 토런스가 겨울의 물자난을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악에 받친 아르노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어코 강이 얼 때까지 버티다 쳐들어왔다면?


화약과 화포는 만약을 대비해서 개발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얻은 전면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남은 시간을 전부 화약과 화포의 개발과 개량에 투자하는 과감함을 발휘하지는 못했겠지.


자연히 개발은 늦어졌을 테고, 충분한 장약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전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돼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것 때문에 내 일정이 전과 달라졌다면 막 수입해온 암염을 열심히 부수고 있던 릴리와 그날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 포도탄 대신 암염탄을 쓴다는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겠지.


그랬다면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지금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을 터였다.


거기에 또 한 가지, 북방의 운반상인들.


이번 전쟁이 이렇게 빠르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개발한 화포와 암염탄이 적의 주력군을 무력화시킨 탓도 있지만, 그들이 다시 반격하지 못하도록 토런스의 전쟁지속능력을 분쇄해둔 탓이 컸다.


토런스의 주요 수입원인 은의 흐름을 차단해 그들의 자금줄을 말림으로써.


카탈리나 공국과의 무역이 시작된 이후 나는 천사의 산맥과 카탈리나 공국을 오가는 운반상들과 몰래 접촉했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여 토런스를 거치는 육로 대신 호손의 해로를 이용하도록 종용했었던 것이다.


높은 통행세에 진절머리가 나있던 절반의 상인들은 토런스의 반도 되지 않는 통행세에 내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지만,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지난 10년간 안정성이 검증된 가도를 선호했다.


만약 그들이 계속 토런스 편에 붙어 막대한 통행세를 바쳤다면, 혹은 급해진 토런스가 최후의 발악으로 그들의 은을 몰수해서 전쟁비용으로 쓰기라도 했다면, 어쩌면 화포로조차도 전부 무력화시키기 어려운 대량의 병기나 용병을 동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사 승리했더라도 아르노 백작이 몸값을 지불하고 유유하게 빠져나가는 꼴을 지켜봐야 했을 것이고.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앤더슨이 재판에 넘겨진 이후 그뿐만이 아니라 단원들과 그 가족들의 자산까지 연좌제로 묶어 탈탈 털어먹는 아르노 백작의 모습을 보고, 학을 뗀 나머지 운반상들마저 이쪽에 붙어버렸으니까.


토런스는 이제 더 이상 은의 도시가 아니었다.

그 칭호는 조만간 호손이 물려받게 될 것이다.


[이해가 되신 모양이군요. ]


“조금은요. ”


나는 못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대체 당신은 정체가 뭡니까? ”


[그 질문은 저번에도 하셨던 것 같은데요? ]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 마세요. 그쪽은 분명히 저번에 제 세계의 사람이 제 세상에서 발표한 이론을 입에 담았습니다. 그것도 아직 20년밖에 안 된 최신이론을요. ”


[... ]


“그뿐만이 아니죠. 당신은 날 처음 보자마자 ‘미르 님’이라고 불렀어요. 내 풀 네임은 이미르이고 이 세계에서는 초면일 땐 성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내 세계의 지식과 규칙을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날 통속의 뇌 신세로 만들어놓고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제가 아닌 다른 지구인과 접촉한 적이 있다는 소리겠죠. ”


[적어도 전자는 아니라는 말씀을 드릴 수 있겠네요. ]


“그럼 대답하세요. 대체 언제부터 이 세계와 내 세상이 연결된 겁니까? 이곳에 떨어진 지구인이 내가 처음은 아니죠? 누가 있나요? 그들은 살아있나요? 그렇다면 어디 있습니까? ”


[그들은... ]


입을 열려던 아라크네가 미소를 함께 침묵했다.


[미안합니다. 아직은 때가 너무 이르군요. ]


“또 그런 식으로 회피하시는군요. ”


[하지만 길지 않을 거예요. 머지않아 만나실 수 있을 거랍니다. 미르 님이 생각하시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겠지만요. ]


“이보세요! 이제 수수께끼는 그만... ”


내가 다시 따지려든 찰나, 부서진 컴퓨터 그래픽마냥 아라크네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


뜻 모를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서.



* * *



일주일 후.


승전일 이후 매일 같이 이어지던 축제 분위기가 마침내 잦아들었을 무렵, 호손에 또 하나의 낭보가 도착했다.


“오, 오오오오! ”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십니까? ”

“카탈리나 공작 전하께서, 드디어 내 신종선서를 받아주시기로 결심하신 모양이네! ”


프란츠가 기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내뱉자, 접견실의 가신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

“경축드립니다! ”

“감축드리옵니다! ”

“와, 정말 축하드려요! ”

“잘 됐군요. ”

“다 이미르 공과 자네들 덕분이네. ”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목례를 해 보이자, 입이 귀에 걸린 프란츠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는 보좌에서 뛰어내렸다.


“갈 채비를 해야겠군. 편지로는 조만간 좋은 날을 잡아 방문해주겠다 하셨지만 전하께서는 괴수 문제로 한창 골치가 아프실 테니 말이야. 젊은 가신 쪽에서 찾아뵙는 게 도리겠지. ”


행여 그분의 마음이 바뀔세라 조급증을 내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때 접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자, 자작님! ”

“뭔가? 전쟁도 끝났는데 뭐가 그리 급해? ”

“그게.... 와, 왔습니다! ”

“응? 뭐가? ”

“아, 아니지! 오셨습니다! ”

“아니, 그러니까 대체 누가 말인가? ”


이윽고 병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프란츠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뛰쳐나갔다.


성의 안뜰 너머로 보이는 부둣가에, 인근의 고깃배들은 물론 일전 아르노 백작이 빌려 타고 왔던 군선조차 쪽배로 보일 정도로 커다란 범선이 기항하고 있었다.


중앙의 메인마스트에 걸려 있는 별과 초승달 문양.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것을 보자마자 숨을 삼켰다.


“산타카탈리나호...! ”


카탈리나 공국의 기함.

카탈리나 공작이 호손에 도착했다.



* * *



언제나 프란츠의 지정석이었던 접견실의 보좌는 오늘만은 그가 아닌 뜻밖에 찾아온 손님의 것이었다.


“...태양이 땅을 비추고 밤하늘에 별자리가 빛나는 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변치 않는 충성을 맹세하옵니다. ”


프란츠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서 내밀자 입술을 제외한 온 얼굴을 은가면으로 가린 사내가 일어섰다.


그러더니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손을 맞잡고는 반쯤 쉬어버린, 그럼에도 모종의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의 충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헤르만의 아들 프란츠여. 그 보답으로 신들께서 그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실 때까지 호손을 그대의 영지로 선포하노라. ”


이로서 프란츠는 마침내 진짜 ‘프란츠 폰 호손’이 되었다.


“프란츠 폰 호손 자작님 만세! ”

“후안 데 카탈리나 공작 전하 만세! ”

“프란츠 폰 호손 자작님 만세! ”

“후안 데 카탈리나 공작 전하 만세! ”

“프란츠 폰 호손 자작님 만세! ”

“후안 데 카탈리나 공작 전하 만세! ”


접견실에 울려 퍼진 만세삼창을 끝으로, 2년하고 2개월을 끌어온 것치고는 허무할 정도로 짧은 의식이 끝났다.


곧이어 만찬장에서 풍성한 연회가 펼쳐졌다.


손님이 손님이라서인지 겨울임에도 살아있는 소를 잡아 만든 스테이크가 나왔고, 정식판매를 시작하자마자 ‘피에르의 온도’의 새로운 명물이 된 탕수대구도 메인 디시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감자 요리들은 ‘악마의 열매’에 대한 호손 밖의 인식을 생각해서 내지 않으려 했지만, 다름 아닌 공작 본인이 ‘천사의 열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며 꼭 맛보고 싶다고 하여 부랴부랴 감자튀김과 감자전까지 추가로 올렸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네? ”


[이미르 휴브리스 공, 계십니까? ]


그동안 지내며 익숙해진 이곳의 시종이나 시녀들과는 판이한 목소리에, 나는 문 밖에 서있을 미성의 청년에게 물었다.


[제 주인께서 찾으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주시지요. ]


“지금은 좀 바쁜데요? ”


[그러십니까. 그럼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얼씨구?


“...잠깐 양치만 좀 하고요. ”


계란껍질을 태워 빻은 가루와 박하즙을 섞은 물로 가글을 한 뒤 문을 열자, 검은 칼집의 레이피어를 허리춤에 패용한 금발의 미청년이 꼿꼿한 자세로 서있었다.


“어디의 누구십니까? ”

“카탈리나 공국 후안 성의 시종장을 맡고 있는 니콜라스 클레멘테라고 합니다. ”

“공국의 시종장이시라면 대충 백작님쯤 됩니까? ”

“말씀대로입니다. 정확히는 궁정백이지요. ”


프란츠 정도의 아이는 아니지만 작위치곤 상당히 젊었다.


그래선지 보통의 꽉 막힌 귀족들이라면 언짢은 티를 냈을 법한 내 말투에도, 그는 싹싹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기색도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바로 밑층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


그런데 바로 아래층에 오래 걸리지도 않는단다.

이상한 소리였다.

왜냐하면 아르노 백작조차 좁다고 불평했던 이 호손 성채에는, 남방의 대영주라 불리는 공작 전하를 만족시킬 규모와 시설이 없었으니까.


후안 데 카탈리나 공작은 자신의 배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시각에 여기까지 와서 나를 부른다? 식사 중에 프란츠한테 잠깐 소개받은 이국의 학자일 뿐인 나를?


감이 왔다.


“앞장서시죠. 릴리 씨? 다녀오겠습니다. ”

“아, 네! 다녀오세요! ”


잠시 후.


-똑똑똑!


[누구야? ]


“니콜라스입니다. 말씀하신 학자 분을 모셔왔는데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 ”


돌아온 목소리에 나는 스스로의 추측이 옳았음을 직감했다.


[아, 당연하지! 들어와.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끼익!


은은히 방을 밝히는 밀랍초의 불빛 아래 한 폭의 초상화처럼 앉아있는 붉은 머리카락과 검은 드레스의 여인.

일찍이 신명재판에서 만났던 베일의 귀부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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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나침반이 향하는 곳(2) +1 22.12.22 384 15 13쪽
63 나침반이 향하는 곳(1) +3 22.12.21 419 18 19쪽
» 정산의 날(4) +2 22.12.20 445 20 12쪽
61 정산의 날(3) +3 22.12.19 432 21 13쪽
60 정산의 날(2) +6 22.12.17 497 2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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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새로운 불꽃(7) +1 22.12.15 526 21 16쪽
57 새로운 불꽃(6) +1 22.12.14 498 22 14쪽
56 새로운 불꽃(5) +1 22.12.13 514 19 13쪽
55 새로운 불꽃(4) +2 22.12.12 541 22 19쪽
54 새로운 불꽃(3) +3 22.12.11 581 25 14쪽
53 새로운 불꽃(2) +2 22.12.10 583 24 14쪽
52 새로운 불꽃(1) +3 22.12.09 617 26 13쪽
51 승리의 함수(7) +2 22.12.08 618 27 20쪽
50 승리의 함수(6) +7 22.12.07 632 2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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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승리의 함수(4) +1 22.12.05 665 25 18쪽
47 승리의 함수(3) +4 22.12.04 685 24 17쪽
46 승리의 함수(2) +4 22.12.03 699 21 12쪽
45 승리의 함수(1) +1 22.12.02 736 2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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