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의 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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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에에에, 죄송해요오오... ”
등에 업힌 릴리가 잔뜩 늘어진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무겁죠오오오...? ”
“나름 견딜 만 합니다. 이래봬도 포병 출신이거든요. ”
“포오벼어어엉...? ”
“오늘 보신 것 같은 화포를 다루는 군인을 말합니다. ”
“우와아... 되게 힘드셨겠네요오오... 그래두 갠찬으시다니 다행이에요오... ”
실은 별로 안 괜찮았다.
제대 후 10년 가까이 공부와 연구만 하다 보니 군대시절 붙은 근육 따윈 이미 다 빠져버린 데다, 지금 릴리는 과식한 음식과 맥주 덕에 평소보다 3kg은 무거웠으니까.
그나마 정수리에 오바이트를 하거나 화장실이 마렵다고 보채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취해버릴 거면서 무슨 깡으로 그렇게 마셨어요? ”
“그치마안 저두 한번쯤 취해보구 싶었는걸요오...? ”
그녀가 내 목을 감싼 손을 한층 강하게 끌어안았다.
“헤헤, 이런 기부니구나아아...! 기부니가 조아요오. ”
“나 참. ”
쯧쯧, 혀를 찬 나는 상체를 한 번 들썩여서 기울어진 그녀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 번쯤 취해보고 싶었다, 라. ’
웃어넘기기엔 뼈가 있는 말이었다.
거리에서 마음껏 마시고 취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옆에 있는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고맙다고 해야 할지. ”
“우웅? 고마워요오오? 뭐가 고마워요오오? ”
“아, 일일이 반응하실 필요 없어요. 혼잣말이었습니다. ”
“혼자말만 하시지 말구우 가치 얘기해요오오... ”
그러고는 말과는 달리 푸욱, 고개를 숙여버린 그녀에게 나는 쓴웃음을 흘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성채의 문을 막 통과한 순간, 어느새 다시 고개를 든 그녀로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가 들려왔다.
“훌쩍, 훌쩍... ”
“설마 지금 웁니까? ”
생각보다 술버릇이 나쁘구나, 너?
“아, 아니에요오오... 조은 날인데 울긴 왜 울어요오오... ”
“누가 봐도 훌쩍이고 있는데요? ”
“아니라니까요오오... 그냐앙... 그냐앙 조금 더 일찌익... ”
“...? ”
“일찌익 미르 씨를 만났다며언... 제 동생도오... ”
거기서 릴리가 다시 푹 고개를 떨구었다.
영문 모를 말이었지만 듣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다.
“동생분이 있었습니까. ”
“쿠울... ”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고이 잠들어버린 그녀를 깨워서 추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녀석을 곱게 침대에 내려놓고 나도 맞은편의 내 침대에 드러누웠다.
피곤했지만 아직 잠을 청하기에는 일렀다.
바야흐로 정산의 날이었으니까.
* * *
<두 번째 신탁을 완료하셨습니다! >
[신탁의 주목표를 달성하셨습니다! ]
-대립하는 두 도시 중 한쪽을 택해 승리로 이끄십시오.
-완료 보상 : 100MP
[신탁 강화(Lv.1)에 따른 추가목표를 달성하셨습니다. ]
[추가목표 ‘좁지만 곧은 길’을 달성하셨습니다. ]
-불리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맞는 진영에 서십시오.
-50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추가목표 ‘최소한의 희생으로’를 달성하셨습니다. ]
-가능한 적은 인명 피해로 신탁을 완료하십시오. (1/1)
-50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추가목표 ‘가속하는 문명의 수레바퀴’를 달성하셨습니다. ]
-해당 도시의 과학이론과 기술발전에 기여하십시오.
-50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추가목표 ‘구원자의 길’을 달성하셨습니다. ]
-예정된 운명을 바꾸어 사람들을 구하십시오. (2533/2548)
-2533MP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완료 보상으로 총 2883MP를 획득하셨습니다! ]
[현재 보유한 MP : 2883 ]
<ORACLE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
* * *
‘드디어! ’
뒤풀이 동안 미뤄두었던 메시지를 자리에 누워 쭉 읽어본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어퍼컷을 날렸다.
99.48%, 여태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는 달성율이었다.
‘그래도 모두를 구하지는 못했나. ’
보람에 이어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100% 달성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 숫자 하나하나가 사람의 목숨이라고 생각하면 입맛이 써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무고한 희생자는 없었으니까. ’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쓴 방법들 때문에 추가적인 희생자가 나왔다면 추가목표 중 ‘최소한의 희생으로’는 완료되지 않았을 테니까.
즉, 구해내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내가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은 없다. 처음의 라딘을 제외한다면.
그러니 지금은 구해낸 2533명을 생각하며 자축해도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뒤 오라클을 불렀다.
[*부르셨어요? ]
‘응. MP가 모였으니 쓰고 싶은데. 역시 저번에 못했던 권능 강화를 하는 게 낫겠지? ’
[*낫다기보다 그거밖에 하실 수 있는 게 없는걸요? ]
‘그야 그렇지. ’
총 보상이 200MP였던 첫 번째 신탁에 비해서는 무려 열 배 이상 벌었는데도 ‘기능 강화’나 ‘신탁 강화’의 다음 단계를 열려면 3배는 더 모아야 한다.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지.
게다가 이번에는 개방에 쓰고도 2700이 넘는 MP가 남아 있을 테니, 상점을 열면 뭔가 살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오케이! 가자, 오라클. ’
[‘권능 강화(1단계)’를 개방하시겠습니까? 해당 선택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Y/N) (*가즈아!) ]
‘YESYESYES! '
오랜만의 황금빛 섬광과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권능 강화(1단계)’의 효과로 ‘상점’이 해금되었습니다. ]
‘좋아. 뭐가 있나 구경해볼까? ’
그때였다.
[‘신탁 강화(1단계)’의 효과가 ‘상점’ 기능과 연동됩니다. ]
[‘티어3’가 해금되었습니다. ]
‘엥? 연동? 티어3? ’
속으로 물어보자마자 파란 설명창이 떠올랐다.
[도움말]
연동 - 신탁 강화(1단계)로 인해 상점에서 구매하는 마법/스킬의 수준이 주변의 문명수준(티어)과 연동됩니다.
[도움말]
티어3(Tier3) - 다음의 기술개발이나 전수, 발견으로 인하여 해금되었습니다. (상세보기)
나는 (상세보기) 버튼을 꾹 눌렀다.
<< [티어3(해금됨)] >>
#현재 점수(130점/100점)
용광로 : 30점
등자 : 20점
윤작법(무휴경) : 20점
항해술 : 20점
흑색화약 : 20점
전장식 화포 : 20점
‘이게 뭔... ’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려니 다시 설명창이 튀어나왔다.
[도움말]
개방된 티어 및 이하 티어의 마법/스킬은 정상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합니다. 더 높은 티어의 마법/스킬을 구매하시려면 티어 차이 당 제곱배의 MP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뭔 소리여, 이게? ’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는 건지 더는 도움말도 없었다.
잠깐 멍해져 있던 나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지.
‘오라클? 상점창을 띄워 줘. ’
<ORACLE>
[상점]
#전체 | 공격 | 방어 | 보조...
[ ]
*뭘로 하시겠어요?
‘흠. 마법이라면 역시 그건 있겠지? ’
나는 검색창에 다소 민망한 단어를 쳐보았다.
<ORACLE>
[상점]
#전체 | 공격 | 방어 | 보조...
[파이어볼_ ]
-딸깍!
[상점]
#전체 | 공격 | 방어 | 보조...
[파이어볼_ ]
(T1)파이어볼(Lv.1) : 1MP (150J~)
(T2)파이어볼(Lv.2) : 5MP (750J~)
(T3)파이어볼(Lv.3) : 25MP (600kJ~)
‘와, 진짜 있네? 심지어 티어 별로? ’
잠깐의 고민 끝에 과감하게 질러보기로 했다.
딱 1MP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에 타는 물건이 없는 석벽으로 가서 말해보았다.
“Lv.1 [파이어볼] 한 발 살게. ”
[파이어볼(Lv.1) 1발을 구매하셨습니다. ]
[결제완료. (현재 보유 중인 MP : 2782(-1) ]
‘하하, 참... ’
마법이라니? 심지어 포인트를 주고 사는 마법이라니?
내 입으로 직접 말하고도 현실감이 없다. 혹시 만취해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구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써보세요!) ]
하지만 불안도 잠시, 떠오른 메시지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대체 뭘까?
아니, ‘파이어볼’이라면 생긴 건 빤하지.
게임 속에 나오는 스크롤 같은 것을 주는 거려나? 아니면 바로 내 손 위에 불타는 화염구가 둥둥?
‘후자라면 엄청 뜨거울 것 같은데... ’
설렘 반 걱정 반으로 Y를 누른 순간 오른손이 묵직해졌다.
‘...응? ’
생각 외로 뜨겁지는 않았다.
어두운 새벽인데 빛도 안 났다.
게다가 이 촉감과 이 질감은 설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거 실화임? ‘
단 1MP로 살 수 있는 1레벨 파이어볼.
그것의 정체는,
무려 짱돌이었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에라이! ’
아까운 MP만 날렸네.
그렇게 생각하며 돌을 내던진 순간,
-쐐액!
‘어? 어? 어? ’
-콰삭!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짱돌이 근처의 옷장 문을 뚫고 깊숙이 박혀버렸다.
릴리가 곯아떨어져있어서 다행이었네.
당연히 원래 내 솜씨는 아니었다.
그랬으면 진작 공부 때려치우고 메이저리그 투수가 됐겠지.
‘그러고 보니 불꽃같은 강속구를 파이어볼이라고 부르긴 하던데... ’
이게 그런 의미였어?
나는 그제야 마법명 옆의 괄호 안에 적혀있던 단위와 수치에 생각이 미쳤다.
J, 줄(joule).
에너지 또는 일의 국제단위.
Lv.1 파이어볼 옆에 적혀있는 150J이면, 정상급 메이저리거가 던지는 야구공의 위력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파이어볼’이기는 했던 것이다.
‘적혀 있는 최소위력만큼은 보정해 준다는 건가? ’
나는 몇 번 더 실험한 끝에 이 상점의 작동방식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Lv.1 [파이어볼]은 투포환, 최소 운동에너지 150J.
Lv.2 [파이어볼]은 투석구, 최소 운동에너지 750J.
Lv.3 [파이어볼]은 직접 써보지는 않았지만 600kJ(킬로줄)이라는 차원이 다른 운동에너지와 주변의 문명수준과의 연동, ‘티어3’ 목록을 보건대 십중팔구 전장식 화포.
‘요컨대 이쪽의 기술 테크를 올릴수록 쓸 수 있는 마법도 강해진다 이 말이지? ’
생각했던 형태의 마법은 아니었지만 허공에서 짱돌을 만들어내는 것도 엄연히 마법이긴 했다. 그걸 프로야구 투수마냥 던질 수 있게 하는 것도 그렇고.
아라크네다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사시 화포를 100발 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름 든든하긴 하네. ’
근데 이럼 나중에는 박격포나 미사일도 나오는 건가?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터무니없이 느껴지는 상상을 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상점 창을 띄웠다.
중요한 볼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라클. 혹시 모든 마법/스킬 목록을 불러올 수 있어? ’
[*도움말로 말씀드렸지만 아직 주인님께서는... ]
‘괜찮으니 일단 목록만이라도 보여줘. ’
곧 엄청나게 긴 스크롤 창이 팝업되었다.
[상점]
#전체 | 공격 | 방어 | 보조...
[ ]
...
(T1)파이어볼트(Lv.1) : 1MP (20J~ x 5)
(T1)파이어볼(Lv.1) : 1MP (150J~)
...
(T2)파이어볼트(Lv.2) : 3MP (90J~ x 5)
(T2)파이어볼(Lv.2) : 5MP (750J~)
(T2)파이어스트라이크(Lv.2) : 10MP (90J~ x 10)
...
(T3)슬로우힐 : 10MP
(T3)파이어볼트(Lv.3) : 9MP (100J~)
(T3)파이어볼(Lv.3) : 25MP (600kJ~)
(T3)파이어스트라이크(Lv.3) : 100MP (3000J~ x 200)
...
‘밑에서부터 찾아보는 게 빠르겠네. ’
내림차순으로 정렬하니 대번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T9)퍼니시먼트 : 9,999,999^6MP (66.6GJ~)
(T9)리스토레이션 : 10000^6MP
(T9)레버레이션 : 10^6MP
...
‘뭔데? 저 999만 MP에 66.6기가줄은? ’
심지어 티어 차 때문에 실제 필요량은 여섯제곱이었다. 위력도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진짜 내 관심을 끈 것은 그 밑이었다.
레버레이션(Revelation)이 내가 아는 그 의미라면...
‘오라클? 여기 이 [레버레이션]은 뭐야? ’
[도움말]
레버레이션(계시) : 특정한 지성체에게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아, 이거다! ’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마법.
유일한 가족인 내가 실종되어 혼자가 돼 버린 여동생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전해 줄 수 있는 수단.
당장은 티어 차이로 인한 패널티 때문에 어림없지만 어떻게든 6티어까지 올라가면 10x10^3 = 10000MP, 가시권에 들어온다. 적어도 ‘퍼니시먼트(징벌)’처럼 터무니없는 숫자는 아니다.
‘아라크네의 말이 그래도 거짓은 아니었구나. ’
희망이 생겼다.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다시 침대에 눕자마자 미뤄왔던 피로가 몰려와서 나는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바야흐로 네 번째 보름달이 뜬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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