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불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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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호손 성내에서 연기가 높이 피어올랐다.
“뭐지? 화재라도 난 건가? ”
“혹시 싸우자는 쪽과 항복하자는 쪽으로 나뉘어서 내분이 일어난 건 아닐까요? ”
각자의 희망사항을 말해본 아르노 백작과 프라도 자작이었지만, 진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에서 육지로 불어오는 해풍에 실려 토런스 군의 천막으로 날아왔다.
고소하고 짭짤하면서도 살짝 매캐한 냄새.
다름 아닌 생선 굽는 냄새였다.
[와, 맛있겠다. ]
[얼마나 구웠기에 냄새가 여기까지 날아 오냐? ]
[우리들은 맹맹한 귀리죽이나 먹고 있는데... ]
점심을 먹고 있던 병사들이 동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막사 안에서 닭넓적다리를 뜯고 있던 아르노 백작이 그 소리를 듣고는 왈칵 짜증을 냈다.
“저것들이! 아무 일도 안 하고 밥만 축내는 주제에. 지금 당장 확 성벽으로 돌격시켜버릴까 보다! ”
그 말에 옆자리에서 닭다리를 뜯고 있던 프라도 자작이 화들짝 놀라서는 그를 만류했다.
“고, 고정하십시오, 각하! 아직 때가 아닙니다. ”
“에에잇! ”
그 말에 백작이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아직 살점이 남아있는 닭 뼈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아무리 자기 혼자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아르노 백작이라지만, 변변한 공성병기 하나 없이 라구나 강이라는 천연 해자가 있는 호손의 성벽을 넘으라고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 미스를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인정할 줄 아는 대인배가 아니었다.
“한데 이 상황에 너는 밥이 목에 넘어가느냐? 프라도! 너 때문에 레이크우드 백작과의 관계도 파탄 나고 시작부터 분위기가 이 모양 이 꼴이거늘! ”
“그, 그게 왜 제 잘못입니까? 프란츠 녀석이랑 그 망할 상인 녀석 때문이지요! ”
“시끄럽다! 결국 네가 자기 평판에 집착해서 말실수를 한 탓에 일이 이렇게 돼버린 거 아니냐!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프라도 자작은 대꾸하지 못했다.
“게다가 호손의 어장을 완전히 망쳐놨다고 하더니만 저 생선 굽는 냄새는 무엇이냐? ”
그러게?
프라도도 지금 그것이 의문이었다.
자신의 계획에 따라 한시 바삐 배를 토런스의 어장으로 되돌리고 싶어 했던 프라도는, 로버트 앤더슨의 계획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진척은 얼마나 되었는지 등을 꽤 꼼꼼히 조사했다.
작전은 틀림없이 성공했다.
그런 이상 호손의 어획량은 평년의 절반 이하로 급감했을 것이고, 아무리 아직 청어철이 한창이라지만 저렇게 마구 구워 먹어도 될 정도로 작황이 나올 리가 없었다.
올해 초 카탈리나 공국의 선박기술자를 어렵사리 초빙해, 토런스의 한 분기 예산을 아낌없이 때려 박아 만든 갈레아 선단이 통째로 상대편에게 넘어가 버렸음을 알 리 없는 그는 결국 잘못된 답을 내렸다.
“아아, 그렇구먼! 그런 거였어! ”
“엥? 뭔 소리야? ”
“저건 나쁜 소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소식이죠. 녀석들은 지금 물자가 턱없이 모자란 겁니다. 특히 소금이요! ”
“소금? ”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어장을 망쳐 놨다지만 어쨌든 청어철이니 고기가 아예 안 잡히진 않지요. 그러나 우리나 린우드와의 교역이 막혀있는 이상 놈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물고기뿐입니다. 청어는 재빨리 염장하지 않으면 바로 상해버리는 생선이죠. 린우드의 암염을 수입하지 못하는 이상 저 놈들은 직접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마련해야 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수밖에요. 그래서 아까운 청어가 상하기 전에 눈물을 머금고 최후의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
그럴 듯한 의견에 아르노가 맞장구를 쳤다.
“오호라, 그렇군!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아, 아니지.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
“그 말은 곧 청어철이 지나는 대로 식량난이 찾아올 거란 소리지요. 조금만 더 참고 기다시리면 프란츠 놈의 성채에서 진짜 연기가 치솟는 꼴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좋아! 아주 좋아! ”
그렇게 토런스의 백작과 남작은 착각 속에 소중한 하루를 허투루 넘기고 말았다.
* * *
사실 두 사람의 추측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오늘 호손시 광장에서 청어 수백 마리를 구워 잔치를 벌였던 이유는, 피난민들을 위로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한 가지 ‘물자’가 모자랐던 탓이 컸으니까.
‘설마 그새 보관할 통이 모자랄 정도로 잡혀버릴 줄이야. ’
‘오라클’로 청어 잡이 영상을 봤기에 어련히 많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고기잡이에 쓰는 배를 줄여도 되겠네. ’
계획을 조금 앞당겨도 될 것 같았다.
전쟁발발 이후 프란츠가 수시로 순시를 나가는 덕에 이젠 거의 내 집무실이 돼버린 접견실 한쪽에서, 탁자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앤 남작이었다.
“오셨습니까? 여독은 좀 풀리셨나요? ”
“예. 덕분에요. 릴리 양의 처방대로 생명수에 각성수를 조금 섞어 마시니 피로가 빨리 풀리더군요. 그저 귀여운 아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우수한 치료사였습니다. ”
“그 친구한테도 의외의 면이 많지요. 이번에 소금 대신 함수로 청어를 절이는 방법도 녀석 덕에 생각이 난 겁니다. ”
“엇, 그랬군요? ”
나는 놀라워하는 앤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는 자세를 고쳤다.
“지난번 항해는 어땠습니까? ”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나침반이라는 물건이 정말로 물건이더군요. 날이 흐리든 해무가 끼든 언제나 가야 하는 방향을 알 수 있으니, 뱃사람들도 불안해하지 않고 지시를 내리기도 손쉬웠습니다. 비록 목소리는 궁내관님의 그것을 빌렸지만요. ”
“다행이군요. 그리고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
내 말에 숨은 뜻을 알아챈 앤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조나선이 들으면 슬퍼하겠네요. ”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쉬게 해드리고 싶지만... ”
“아뇨. 이해합니다. 호손과 토런스와 카탈리나 공국, 세 도시의 밤하늘이 어떤지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성에서는 저밖에 없으니까요. 전서구를 다룰 줄 아는 것도 저뿐이고요. ”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이미 짐작하신 모양이지만, 곧 있을 다음 항해에서도 앤 공께서 실질적인 선장 역할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얼굴마담으로는 저번처럼 궁내관을 붙여드리지요. ”
“좋은 생각일까요? ”
“지난번에는 공께서 먼저 부탁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우락부락한 뱃사람들이 귀족이라 해도 부녀자의 명령을 순순히 따를 리가 없으니, 그들한테 대신 명령을 내려줄 인물이 필요할 거라고요. 잭슨에게 딱 맞는 역할이었을 텐데요? ”
“아, 그 부분에서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
그녀가 다시 지은 쓴웃음에 나는 앤의 말뜻을 이해했다.
“아아, 멀미 얘기로군요? ”
“예. 풍랑이 거센 날이면 하루 종일 선장실에서 누워만 계셨으니. ”
내륙의 린우드 출신에다, 호손에 와서도 평생 육지에서 살아왔던 잭슨은 배 멀미에 쥐약이었다.
오죽하면 충성스런 기사인 그가 적선 열두 척을 이끌고 만선으로 귀환하는 영광스런 자리에서, 선수에 서는 것마저 마다한 채 선장실에 틀어박혀 골골대고 있었을까.
하지만 이제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특효약을 만들어 두었으니. ”
멀미는 뇌가 균형을 유지할 때 사용하는 감각정보가 서로 충돌하며 발생한다. 평소 겪지 못한 움직임에 뇌가 반응하는 과정에서 어지럼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뇌가 활발하게 반응하지 못하게 하거나 감각을 덜 느끼게 만들면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전자를 일으키는 약을 부교감신경차단제라고 하고 후자를 일으키는 약을 항히스타민제라고 부른다.
전자는 구하기 어렵지만 후자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책상 아래에 보관해두었던 도자기를 꺼냈다.
“그건? ”
“사과식초입니다. 승선하기 전에 미리 한 컵 마시게 하면 괜찮을 겁니다. 수건에 묻혀 냄새를 맡게 해도 좋고요. 잭슨 말고도 멀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
일종의 천연 항히스타민제 처방이었다.
“오오, 알겠습니다. 한 시름 놓았군요. ”
“아, 그리고 오신 김에 ‘이것들’도 가져가세요. ”
나는 옆자리에 놔두었던 꾸러미를 탁자 위로 올렸다.
“그건 또 무엇인가요? ”
“카탈리나 공국과 직거래할 항로를 개척하고, 무사히 호손으로 귀환하시는 데 큰 도움이 될 물건입니다. ”
장거리 항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로 가야 하는 방향을 알아야 하고, 둘째로 스스로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요컨대 위도와 경도.
이중 위도는 별을 볼 줄 알면 별자리의 위치를 이용해 쉽게 계산할 수가 있다.
문제는 경도다.
적도를 기준으로 길잡이별의 고도만 가늠해도 측정이 가능한 위도와 다르게, 경도는 하루에 한 번씩 지구가 자전하는 탓에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16세기 스페인과 18세기 영국 등 쟁쟁한 해상강국들이 거액의 상금을 걸고 경도 측정법을 공모까지 했을까.
물론 내 세상에서는 이미 해결책이 나왔다.
경도가 달라지면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달라지고 따라서 서로 사용하는 ‘시간’이 달라지니, 시계를 사용해 각자의 시간을 비교하면 자연히 경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존 해리슨이라는 시계공이 흔들리는 선박에서도 사용 가능한 안정적이고 정밀한 태엽시계, 크로노미터를 발명하면서 이 문제는 지구상에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건 현재 호손의 기술력으로 재현하기에는 지나치게 정교한 장치였다. 현대에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손목시계 중에는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것이 드물다.
게다가 적도를 기준으로 해 이곳이 행성인 이상 무조건 존재하는 위도와는 달리, 내 세상 기준으로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초자오선으로 하는 경도는 우선 측정할 기준점을 잡는 것부터가 난국이었다.
다행인 점은, 이쪽이 알고 있던 호손에서 토런스까지의 육상교역로와 앤이 가르쳐 준 토런스에서 카탈리나 공국까지의 육상교역로를 쭉 이어 보니, 카탈리나 공국의 북쪽 부두가 호손시의 정남향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
“똑바로 남쪽으로 가면 닿는다고 했지요? ”
“예. 하지만 생각보다 쉽진 않을 겁니다. 해안선이 튀어나와 돌아가야 하는 곳도 있고, 이쪽 패를 감추기 위해서는 토런스 근해로 들어가는 것을 피해야 할 테니까요. 몰래 해로를 개척하려면 원양으로 빙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
“그렇겠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
나는 그녀 앞에서 눈앞의 꾸러미를 풀어보였다.
“이건 나침반과 양초로군요? 근데 둘 다 참 희한하게 생겼네요. ”
“이번에 새로 개량한 나침반입니다. 제 고향에서 예전에 썼던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를 작게 만들어 덧붙였죠. 위에 다림대(수평 맞추는 기구)와 추도 달아 놓았으니 선상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시각을 알 수 있을 겁니다. ”
“감사합니다. 장거리 항해에서 시간을 아는 건 참 중요한 일이지요. ”
“그리고 같은 시계의 대형 버전을 호손시의 부둣가에도 설치해 두었습니다. 마침 공국 북쪽의 항구가 호손 시의 정남향에 있다고 하니, 이는 곧 두 도시의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같다는 의미죠. 따라서 배의 시간과 호손의 시간이 일치하는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어렵잖게 공국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
“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
감탄한 앤이 곧 다시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흠. 하지만 정작 배 위에서 이곳의 시간을 알 방법이... ”
“그래서 준비한 게 이 양초입니다. 특별히 주문 제작해서 딱 하루가 지나면 다 타도록 만들었죠. 여기의 눈금 하나가 하루의 1/24, 즉 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출발할 때 부두의 시각을 기록한 다음 불을 붙이면 남은 길이로 호손의 시각을 추정하실 수 있을 거예요. ”
“아하! 양초에 왜 선이 있나 했는데 그걸 위해서였군요. ”
“약간의 오차야 있겠지만 일단 해안이 보이면 이후로는 연안항해를 하면 되니까요. 그 정도 역할은 해 줄 겁니다. 모래시계를 쓰면 더 정확하긴 할 텐데 여기에는 유리세공인이 없으니 공국에 도착하면 수배해보십시오. ”
“알겠습니다. 덕분에 망망대해에서 미아가 될 걱정을 덜었군요. 감사드립니다. ”
나는 다시 꾸러미를 포장해서 앤에게 넘겼다.
“공작 전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시니 잘 부탁드립니다. ”
“예.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그리고 이것도. ”
나는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것은? ”
“무사히 후안 성에 도착하신다면 공작 전하의 대리인을 맡고 계신 붉은 머리의 귀부인께 이 편지를 전해주십시오. 꼭 그녀에게 직접 주셔야 합니다. ”
“예. 알겠습니다. ”
앤 남작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한쪽 창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운데, 맞은편에서 거의 둥글어진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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