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273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09.05.19 12:05
조회
4,435
추천
33
글자
11쪽

1부: 제1장. 물음. (06)

DUMMY

흥칠은 흡족해하며 바지를 추켜올렸다. 그는 침과 정액으로 범벅된 송장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참 예쁜 몸이다. 곧 있으면 딱딱하게 굳어져 매끈매끈한 피부의 감촉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깝다. 그래도 마음껏 즐겼으니 이쯤에서 정리해야지. 마지막 인사랍시고 송장의 입술을 비벼대던 흥칠은 목덜미 뒤쪽으로 날카롭게 스치는 칼바람에 멈칫했다. 자신만의 쾌락을 남이 보는 것은 싫어서 마차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는데, 찬바람이라니? 이상하다.


무심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흥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계집이 당장이라도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흥칠은 서둘러 칼자루를 쥐었으나 여자가 더 빨랐다. 사시나무마냥 바들바들 떨리는 양손으로 그의 복부에 박혀든 검신을 잡았다. 투명한 칼날은 요사스런 빛을 흘렸다. 흥칠은 여자를 향해 몇 마디 내뱉으려고 했으나 눈앞이 컴컴해졌다. 세희는 발로 시체를 마차의 구석으로 밀쳐냈다.



“아아…….”



살해된 모자라 능욕까지 당한 가영을 보고서 세희는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를 끌어안고서 섧게 목 놓아 울었다.


미안해, 가영아. 정말 미안해.


죽은 가영을 자신과의 마지막 기억이 남은 마차로 옮겨왔다. 뜯어낸 천들로 가영의 몸을 깨끗이 닦아내고 새로 옷을 입혔다. 옷깃을 여미고 띠도 단정히 메었다.



“미안하다. 너는 내게 준 것이 많은데 나는 네게 줄 것이 없어. 대신 내 이름을 가지고 있어. 오늘저녁, 아니면 내일, 아니, 모레라도 누군가 너를 찾으면 나라고 여겨 장례라도 치러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세희는 옷고름에 달고 있던 노리개를 떼었다. 삼작노리개 가운데의 것은 금은세공품이나 홍옥 같은 보석이 아닌 금패(金牌)였다. 주작이 정교하게 새겨진 금패는 서의 공주를 상징하는 신분증이나 다름없었다. 세희는 오른손 중지에 끼고 있던 은반지도 빼내어 가영에게 끼어줬다. 왕후께서 부디 가영을 어여삐 봐주시어 이 아이의 남은 가족을 돌봐주시기를.



“가영아, 이제 안녕. 네 단검은 내가 가져갈게. 네가 내게 남기는 유품이라 여길 거다.”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세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부하의 시체를 살펴보던 광훈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다. 세희는 등줄기에서 진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오돌토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한 살기다. 감각은 그가 자객들의 수괴임을 똑똑히 알려주었다. 세희는 칼자루를 꽉 쥐고서 한 걸음, 한 걸음 정확히 움직였다.



“쓸 만한 것들을 챙기러 간 사이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더군.”


“쓸 만한 거? 왕실 보물들만 따로 챙긴 것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한갓 비적들에 의한 소행으로 보이도록 위장하기 위해서겠지. 일대가 평야라 그 많은 보물들을 숨기기 어려울 터인데 잘도 버렸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네가 따로 챙겨놓았다는 그것들이 지금 이 주변에 없으니까. 지금 네 주변에 있는 것은 안장만 얹혀있는 말뿐이야. 보물이나 패물을 따로 넣었을 법한 짐이 어디에도 없지 않으냐?”


“뭐야, 제법 영리하잖아? 허면 하나 더 묻도록 하지. 네가 남은 다섯을 죽였나?”


“내가 죽였는가 안 죽였는가가 그리도 중요한가.”



세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투명한 칼날은 광훈의 목에 겨누어졌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걸어오는 장난 정도로만 여긴다는 듯이.



“눈에 살기가 가득하군. 내게 상전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냐?”


“내 손에 죽기 싫다면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인다는 것은 적어도 상대가 나와 대등한 입장이었을 때 성립하지. 지금의 너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를 죽일 수 없다. 증오만으로는 적을 죽일 수 없어.”



광훈은 숨통을 노리던 칼날을 손가락으로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밀어냈다. 세희가 검을 고쳐 들려고 하자 이번에는 그녀의 손목을 세게 쳐냈다. 허점을 읽히고 만 것이다. 은월검은 땅으로 떨어졌다. 세희는 사납게 노려보았으나, 광훈은 비린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네. 허나 나는 너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청은 공주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놓았으니 그 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리고 한 녀석 정도는 살려놔야 이 비통한 소식을 서에 전하지 않겠나?”



세희의 얼굴에서 독살스런 빛이 강하게 떠올랐다. 한순간이었다. 세희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광훈의 얼굴을 그어버린 것은. 맹수처럼 표독스런 눈매에는 노기가 번뜩 일어났다.



“윽!”



곧바로 덤벼드는 강한 손힘에 세희의 몸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단검은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광훈은 쓰러진 그녀에게로 한 걸음 놓았다. 그의 오른쪽 뺨에는 검상이 비스듬히 길게 났다. 그는 상처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쓱 닦아냈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섬뜩하다.



“제법이군. 허나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이름 모를 계집은 눈앞에 있는 적을 죽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절규하며 빠득빠득 일어섰다. 순수한 핏빛 증오가 광훈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잘 키워놓으면 꽤나 쓸 만한 자객이 될 것이다. 허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광야를 떠돌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면 그것도 계집의 운명이다. 광훈은 곧장 말에 올랐다. “이랴!”하고 발로 가볍게 말의 배를 쳤다.



“어디를 가느냐! 말을 돌려라!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단 말이다! 절대로 너를 살려둘 수 없다!”



그러나 광훈은 멈추지 않았다. 원수가 점차 멀어져 가는데, 세희는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세희는 땅에 엎드린 채로 꺼이꺼이 울었다. 너무도 분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시간은 참 무정하다. 하늘은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은 피비린내도 눈물도 분노도 완전히 쓸어갔다. 의미를 잃어버린 넋 빠진 눈동자만이 남았다. 세희는 단검을 목에 대어보았다. 날붙이가 보내오는 달콤한 유혹. 피부 아래로 조금만 깊숙이 밀어 넣으면 혈관이 찢어지면서도 맥도 끊어질 터.


사실, 차라리 자결하고픈 욕구는 심중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몽중에서 저승사자라도 보면, 제발 저를 데려가 달라고 검은 옷자락을 잡았다. 그래도 막상은 죽을 수가 없었다. 희망이라는 놈이 여지없이 마지막까지 남아서는, 모든 것을 놓으려는 마음을 붙들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살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해서 살아라. 그들을 배신할 만큼 독하지 못하다면 살아남아라.


죽을 수가 없다. 세희는 단검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너무 울다보면 눈물샘도 마른다는 거, 거짓말인가 보다. 눈물이 또 나온다. 그녀를 지키겠노라고 목숨을 버렸던 불쌍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들은 어째서 나를 살리고자 하였나? 내가 뭐라고 어째서 그들이 죽어야만 했나!


세희는 검으로 지탱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무거운 다리를 천천히 이끌었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을 답을 찾아야만 한다. 세희는 비틀거리면서도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일념만을 품고서 무작정 느릿느릿 걸음을 이었다.








별이 총총히 빛난다. 자욱이 내려앉은 비탄의 어둠을 흩어내며 창검을 든 한 무리가 그곳으로 달려왔다. 구하고자 왔건만 그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현강은 얼른 말에서 내렸다. 옆에서 건네주는 횃불을 들고 천천히 걸음을 놓았다. 일렁거리는 다홍 불꽃들은 현장 곳곳으로 흩어졌다. 땅은 피로 검붉게 물들었으며, 부러진 화살과 시위가 끊어진 활은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시신들은 처참한 상태로 낮에 있었던 참극을 보여줬다. 원한이 너무도 깊이 서려있어, 하나 같이 우는 듯했다.



“이건 늦어도 너무 늦었잖아!”



차라리 누가 꿈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이들을 이리도 허망하게 보낼 수는 없다. 하늘이시여,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처럼 가혹한 죽음을 내리셨습니까.



“생존자가 없소. 전멸이오.”



시신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해주던 손길이 멈췄다. 현강은 삿갓을 쓴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고 말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강은 “제기랄.”하고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왕실의 보물들도 보이지 않소. 의도적으로 그것들만 골라갔소.”


“혹시 시신들 중에서 자객처럼 보일만한 자들은 없었습니까? 온몸을 검은색으로 휘두르고 있다거나, 자기들끼리 통할 표식을 몸에 지니고 있다든가.”


“우리도 수상쩍은 자들을 찾아보았지만 없었소. 지금 확인되는 시신들의 복식이나 머리 모양은 모두 서의 것이었소.”



철저히 비적들의 소행으로 비쳐지고자, 값진 보물들을 포함하여 자객들의 시신까지 모두 빼돌려? 교활한 것들! 현강은 목구멍까지 넘어오려는 쓴물을 삼켰다.



“청은 공주의 시신을 찾아주십시오. 시신이 공주라면, 본인의 신분을 증명할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알겠소.”


“다른 시신들도 잘 수습해주십시오. 상전을 지키려다가 죽은 자들입니다. 정중히 대해주십시오.”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사내는 걸음을 돌렸다. 현강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주 제대로 당했다.


반 시각을 조금 더 넘겼을까. 누군가 마차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공주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공주의 신분패로 보이는 물건이 있습니다!”



현강은 당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의 말이 맞았다. 옷차림부터서가 달랐다. 옥과 구슬로 장식된 배시댕기, 고급스런 두루마기에 고운 자수가 놓인 저고리와 화려한 스란치마. 왕가나 양반가 여인의 차림새였다. 현강은 옷고름에 매인 노리개를 살펴보았다. 신분을 나타내는 호패. 나무나 옥이 아닌 금으로 된 것이다. 앞면에는 주작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서에서는 왕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 문양으로 공주는 주작을, 왕자는 백호를, 왕세자는 청룡을 새긴다고 들었다. 현강은 금패를 뒤집었다. 금패에 뚜렷하게 새겨있는 두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淸誾(청은). 싫어도 인정해야만 하는 이름이다. 빌어먹을. 현강은 몸을 일으켰다.



“다른 시신들을 수습하는 대로 공주를 모시고 장안으로 돌아갑시다. 서둘러주십시오.”


“예.”, “알겠소.”



현강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마차에서 나와버렸다. 가영의 오른손 중지에 끼어있는 은반지가 눈물처럼 서글프게 반짝 빛났다.


시신들을 수습하고 유품들을 모두 정리하니 푸른 새벽이 밀려왔다. 그들은 공주의 시신과 다른 망인들의 유품을 챙겨서 한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새벽 공기가 얼음장 같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휘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 04 : 휘린1, 2부는 이북출간되었습니다.(구매처 안내) 14.11.03 1,712 0 -
공지 #. 03 : 2부 소개글 14.11.03 1,296 0 -
공지 #. 02 : 팬아트와 인물소개는 서재의 게시판에 있습니다. 14.03.15 1,852 0 -
공지 #. 01 : 외전 모음들. +1 10.11.16 2,730 0 -
25 휘린 2부 표지가 나왔어요~ +2 16.02.15 901 5 2쪽
24 #. 휘린 3부의 연재는 11월 16일부터 시작할게요! +3 15.10.31 1,461 8 3쪽
23 #. 2부 연재 끝을 자축(?)하는 후기 +9 15.10.01 1,160 13 6쪽
22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9) +5 13.11.26 2,369 33 21쪽
21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8) +5 13.11.20 1,811 27 14쪽
20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7) +5 13.11.15 2,545 44 22쪽
19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6) +8 13.11.12 1,676 20 13쪽
18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5) +5 13.11.10 2,645 58 22쪽
17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4) +7 13.11.06 2,058 22 15쪽
16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3) +4 13.11.05 1,907 43 16쪽
15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2) +5 13.11.03 2,444 36 13쪽
14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6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5 27 7쪽
12 1부: 제1장. 물음. (11) +11 09.05.20 4,577 28 12쪽
11 1부: 제1장. 물음. (10) +2 09.05.20 3,966 30 11쪽
10 1부: 제1장. 물음. (09) +5 09.05.20 4,183 29 16쪽
9 1부: 제1장. 물음. (08) +4 09.05.20 4,480 32 11쪽
8 1부: 제1장. 물음. (07) +5 09.05.19 4,246 23 18쪽
» 1부: 제1장. 물음. (06) +3 09.05.19 4,436 33 11쪽
6 1부: 제1장. 물음. (05) +3 09.05.19 4,420 30 19쪽
5 1부: 제1장. 물음. (04) +3 09.05.19 5,453 32 21쪽
4 1부: 제1장. 물음. (03) +4 09.05.18 6,346 33 12쪽
3 1부: 제1장. 물음. (02) +5 09.05.18 6,369 36 11쪽
2 1부: 제1장. 물음. (01) +4 09.05.18 10,351 74 13쪽
1 1부: 序. +30 09.05.18 24,668 71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