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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270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09.05.19 01:00
조회
5,452
추천
32
글자
21쪽

1부: 제1장. 물음. (04)

DUMMY

외조(外朝) 서쪽중문 희락문(熹樂門)에서 시작하는 반듯한 길 끝에는 금위영(禁衛營) 관서가 있다. 넓은 연무장도 필요했던 까닭에 외조 변두리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젊은 무관들이 배속됨에 따라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활기찬 훈련소리가 관내를 가득 메우니, 언제부터인가 금위영은 외조의 다른 기관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 경관의 멋스런 풍치도 금위영을 별천지로 만드는 데 한몫 거들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배젊은 관리 서넛은 황자와 호부상서를 보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읍(揖)하고1)는 길들을 다시 잡았다. 저들끼리 하는 숙덕거림을 듣잖니, 서현 황자의 혼인에 관한 내용이었다. 황후와 동인들도 영유 황자의 정비로 서의 왕녀를 원하였음은 궁을 드나드는 위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황통을 잇기에 둘 다 자격 미달이라는 황제의 뜻으로 황태자가 정해지지 않으매, 조관들은 지지하는 황자를 중심으로 당을 형성했다. 그것이 지금의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다.


황자 영유를 다음 황제로 옹립하려는 무리들의 수장인 병부상서(兵部尙書) 박의문(朴義文)의 사저가 황궐의 정문인 오문(午門)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위치하여, 그 무리들을 일컬어 ‘동인’이라 하였다. 동인은 영유 황자의 생모인 황후를 정치적 조력자로 두고 있었다. 동인에 반하여 황자 서현을 추대하는 무리들의 수장인 예부상서(禮部尙書) 박민제(朴旼除)의 사저가 서쪽에 있기에, 그 무리들을 ‘서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두 당파의 첨예한 대치 관계를 묵묵히 지켜보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을 중인(中人)이라 칭하였다. 동인과 서인 사이에 벌어지는 작고 큰 싸움에 관하여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겠노라고 중립을 선언한 그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황제파’다. 그들의 중심에 황제가 있었다.


서와의 국혼이 정국에 어떠한 파란을 불러일으킬지에 관해서 황제는 방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국혼이 성사되었다며 무뚝뚝하게 말하던 부친이 떠오르자 서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때마침 진우가 “다 왔네.”하고 금위영에 당도하였음을 알렸다.


개국을 천명한 태조(太祖)께서 하사하셨다던 광의문(光義門)의 암청색 기와는 햇빛을 받아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지금까지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광의문은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비로소 털어놓네만, 솔직히 나는 의외라고 생각했네.”


“뭐가?”


“서나라 공주를 구하려는 것. 그곳의 공주를 황자비로 맞자는 것은 서인의 당의였지, 자네는 정략결혼이라며 불쾌해하지 않았었나? 공주가 황후마마의 계략에 당하여 혼사를 이룰 수 없게 되면, 자네에게 이롭지 않겠나?”


“말이 그렇게 되나.”



고민 끝에 한으로 시집가기로 결정했을 공주의 마음을 고려하면, 잔인한 말이겠으나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혼인이었다. 설령 혼인을 올려도 그녀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생을 살게 되겠지. 그러나 서현은 황후로 인해 죽는 것은 원치 않는다. 적국이나 다름없는 나라에 살고자 오는 그녀에게 최소한의 예우는 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살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



금방 사라질 물안개처럼 엷은 웃음이었다.


본관에 들어선 그들은 곧바로 금위중장(禁衛中將) 김현강(金賢强)에게로 안내되었다. 현강은 금군의 군적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무에는 당최 정이 없는 그에게 군적정리는 정말로 하기가 싫은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위에서 하라면 군소리 없이 수행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처지이니. 씨부렁대며 필사하는 현강을 보고서 진우가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하하. 글자가 빽빽이 박혀있는 거라면 뭐든지 즉시 던져버리는 그, 김현강이 착실하게 군적을 정리하고 있다니! 흔치 않은 볼거리로다. 내일은 분명 해가 두 개가 뜰 거야.”


“염장질이냐?”



현강은 고개를 홱 쳐들더니 음침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아마도 그렇겠지?”



뭐가 예쁘다고 넙죽 대꾸까지 하는지! 현강은 진우를 쏘아보았다. 그러고도 네놈이 내 친구냐고 묻는 눈이었다. 그러다가 냅다 아무 서권이나 집어서 그쪽으로 던졌다. 재수 없는 녀석의 잘생긴 얼굴에 작게라도 멍을 만들어놓으면 꽤나 볼 만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전에 진우의 손에 잡혔다. 현강이 심히 아쉽다며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자, 진우는 픽 웃었다. 펼쳐보니 금군 병사들의 이름과 나이, 출신지 등을 대충 휘갈겨 적어놓은 것이었다.



“할일이 없어서 방정맞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다면 날 좀 도와라. 그렇지 않아도 일을 거들어주기로 했던 장교 녀석 하나가 말도 없이 내빼서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원하신다면 내 친히 몇 글자 적어주지. 아무렴 내가, 글자를 발로 쓴 것 같은 바보 김현강보다 못 쓰겠는가.”



진우는 의자를 빼내서 앉더니 백지를 펼쳤다. 서현은 넓은 책상에 어질러져있는 서류들을 보더니 그중의 하나를 집었다.



“병부에서 이번에 대대적으로 군적정리를 한다고 들었네. 헌데 이런 일에 군부(軍部)의 무관들까지 동원되어야 하나? 병부사(兵部司) 낭관(郎官)들로도 충분할 것인데.”


“그래! 내가 하고픈 말이 바로 그거야! 이런 군적정리는 행정업무를 담당한 병부사에서 해야지, 어째서 우리들까지 책상에 앉아서 서류나 뒤적거려야 하느냐고! 병부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비싼 녹봉 처먹고 무슨 생각을 하신다냐? 말이 협조를 구한다는 거지, 이것은 완전히 부려먹는 거다. 이런 염병할!”



한번 노려보았다가 말로 얻어맞을까 걱정되는 몰인정한 병부상서와 실실 웃으면서 칼과 도끼를 들이댈 병부시랑을 떠올리자마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그 모양새가 똥이라도 집어먹은 양 우스워 진우가 결국 하하, 웃어버렸다. 현강은 당장에 붓으로 삿대질했다.



“이보쇼, 호부상서님. 이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요.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봅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너도 상서성에 있는 높은 ‘대인’이시잖냐. 너두, 병부의 상관들이 내린 지시가 옳다고 보냐?”


“당연히 아주 잘못되었지. 김현강 같은 천하의 바보에게 묵향이 지독하게도 나는 일을 시키다니. 다 모은 군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상서성 병부로 옮기라는 일이 더 맞지. 이번에는 병부상서께서 확실히 실수하셨네.”



꾸중하는 시어미보다도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얄미운 웃음이었다.



“참나…….”



제 발에 걸려 앞으로 넘어져 코가 깨진 격이 된 현강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말을 돌렸다.



“헌데 다들 어인 행차시냐? 오늘은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온 듯한데, 아니냐?”


“제대로 보았네. 서를 상대로 서현의 혼사가 준비되고 있음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아, 국혼 이야기라면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엄청 들었다. 서의 공주를 맞는 일이야 태상부(太常府)에서 전담하겠지만, 여차할 경우에는 금위영에서도 지원한다고 하더라. 헌데 그건 왜? 설마 황후마마와 동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진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장난삼아 현강에게 곰처럼 바보라고 놀려대도 그의 눈치가 비상함은 일찍이 인정했다. 그것은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맹수가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냥 감각이었다.



“이번 국혼은 단순히 서의 공주를 황자비로 맞고자 함이 아니네. 서를 견제하는 한편, 서가 가진 잠재력을 우리의 것으로 이끌어 황태자의 후보자 중 하나인 황자를 황실과 조정 내에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기 위해서네. 황후와 동인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매력적인 재목을 쉽게 정적에게 빼앗길 수는 없겠지.”



현강은 붓을 벼루에 내려놓았다. 사뭇 심각해진 얼굴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러니까 지금 날더러 서의 공주를 무사히 장안까지 데리고 오라는 거 아니야?”


“십이월 일일에 비영토구역인 공지대에 들어간다는 급서가 황궐에 당도했네.”


“그래? 하기야 십일월 십일에 서의 경도(京都)인 진양(禛陽)을 출발한댔으니, 육로로 오면 그만큼은 와 있어야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닷샛날이니, 글피쯤 되면 그쪽도 슬슬 일야(日倻) 평야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헌데 거기가 좀…….”


“무슨 술수를 꾸미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지.”



서현은 옷소매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 현강에게 건넸다. 꺼내어 보니, 공주 일행의 예상 이동로가 그려진 약식지도였다.



“하지만 금군을 움직이는 일은 결코 만만치가 않아. 금군은 오로지 황제의 명만을 받들어.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황태자의 명령도 받긴 하지만, 그것은 황제가 윤허하였다는 전제하에서만이야. 현재의 전하는 황태자가 아닌 일반 황자잖아. 행여 전하가 금군을 움직이려고 했다는 말이 아니꼬운 자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바로 전하 자신이야.”


“지금의 내 지위로는 금군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음을 알고 있네. 금군의 도움 따윈 기대하지 않아. 자네의 도움만 있으면 되네.”


“그래? 나야 전하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가지.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진우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자네에게 몇 십 명 붙여줄 걸세. 그들을 이끌고 일야 평야로 가 주게. 공주 측에서 계획된 날짜에 맞춰 미처 이동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일야 평야뿐만 아니라 그 부근도 살펴보고. 여하튼 황후께서 먼저 치시기 전에 자네가 공주와 그 일행을 지켜야만 하네.”


“출발은 언제?”


“경시(庚時;오후4시30분~5시30분)를 넘기면 더 늦어지니, 퇴궐하는 즉시 동안태문(東安太門)으로 가게. 거기에 사람들을 미리 와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알았어. 대신 일 때문에 한 십여 일은 집에 못 들어간다고 우리 집 마나님에게 말 좀 전해줘. 어이, 정진우. 부탁 들어줄 거지?”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강은 지도를 담은 봉투를 반듯하게 접어 겉옷 앞섶에 넣었다.



“공주님도 참으로 박복하시네. 혼인하기도 전에 본인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한다니……,이 얼마나 기가 막혀? 그분은 한의 조정이 어떤 상황인지를 모르고 오시는 거겠지? 난 말이지. 이번 일이 우리들만의 기우로 끝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네.”



진우는 서현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붓을 움직였다. 서현이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를 짐작하나 일부러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한에서 서로 국혼을 제한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부터 일은 이미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이대로라면 공주는 필연적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가냘픈 흰나비가 무서운 앞발을 가진 사마귀에게 무참히 찢어지듯이.







대전내관 최만평(崔滿平)은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연은 용상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아서는 잠자코 들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싸늘한 미소를 흘리면서 말이다. 누가 봐도 황제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위압감을 내뿜는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이 어린 내관 하나가 지레 겁을 먹고 엉엉 울어버렸었다. 만평도 처음에는 어전에 서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는 황제가 자신을 똑바로 봐도 의연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헌데 조금 의아스럽사옵니다.”


“무엇이 말인가?”


“금군은 오로지 황상의 명만을 수행하는 군사 집단이옵니다. 더구나 서현 황자 전하는 황태자도 아니시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금군을 움직일 수 없사옵니다. 그것을 황자께서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어이하여 금위영에 가셨을까요?”


“금위중장 김현강을 만나기 위해서지. 본인의 계획을 비밀리에 확실히 수행해 줄 사람으로 본인이 진실로 신뢰하는 벗만큼 적합한 이가 없지. 게다가 금위중장은 여차한 경우엔 짐보다도 벗을 우선시할 사람이 아닌가.”


“황상! 이 어찌 망극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그는 황상의 신하이옵니다!”



만평은 크게 놀라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연은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니야.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쳐 신의를 지킬 수 있는 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황자의 복이네. 현재 서현의 최측근으로 있는 정진우와 김현강이 본디 서현의 배동(陪童)이었지? 내가 배동들을 아주 잘 골라줬었군.”



서현 황자의 배동 출신이라서 황제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 더불어 긴장을 풀었다가는 그들의 우정이 서현 황자의 숨통을 옥죌 올가미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황제의 충실한 수하인 만평은 성심을 헤아렸어도 그 요지를 서현 황자와 그들과 알려주지 않는다.



“만평.”


“예, 황상. 말씀하시옵소서.”


“자네는 청은 공주가 과연 한의 땅을 제대로 밟을 수 있으리라고 보는가?”


“예?”



만평은 심히 당혹스러워 머리를 홱 들고 말았다. 도대체 황상께서는 어디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시나. 만약 그리된다면 한과 서의 관계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팔십 년 전의 서가 아니다. 새파랗게 질려버린 만평을 보고서 연은 웃었다. 만평이 보기에는 무어라 말로 옮기기 어려운 기이한 웃음이었다.



“소 상시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영유가 어젯밤에는 황궐을 빠져나가 무얼 하고 다녔는지 알아오라고 지시했더니, 벌써 돌아오는군.”


“하오면 소인은…….”



만평은 얼른 본래 그가 있어야 할 자리로 옮겨갔다. 이윽고 문창호지에 불곰처럼 몸집이 큰 사람그림자가 어렸다. 들어도 좋다는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소덕장이 들어왔다. 연은 여전히 오른손을 턱에 괴고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봉황전(鳳凰殿) 청담실(淸談室). 이곳은 황실의 평안과 나라의 번영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가 오고가기 위해 특별히 마련되었으며, 종친과 중신들이 황후를 알현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과거 황제들은 황후에게 국모라면서 알량한 관을 하나 씌워 주고는 내정(內庭)에 가둬 외조의 대사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청담실에서는 논담보다는 분내나 비빈들의 웃음소리가 더 잦아지게 되었다.


덕분에 국정을 논함에 있어 황제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발휘하던 황후의 정치적 입지는 퇴보되었다. 그네들은 기껏해야 내명부의 기강을 잡겠노라며 후궁을 비롯한 ‘아랫것’들을 단속하는 것에 주력하거나 적통황자를 낳는 데에 노심초사하였다. 대국이라 불리는 한의 황후가 신하국인 서의 왕후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했다.


그런데 이백팔십 여년을 이어 내려오면서 고착화된 관습과 고정관념을 사하란(砂夏蘭)이 과감히 부셔놓았다. 후궁이 황후가 될 수 없다는 관례를 깬 것도 모자라 단계를 밟아 서서히 정치력을 드러내었다. 처음에는 황실에 관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내선성(內選省)을 황후의 지배 아래에 두고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내정의 대소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관리하더니, 점차 그 세력권을 확대하였다. 황후의 지위를 백분 활용하고 탁월한 정치능력을 발휘하여 측근들의 입을 빌려 본인의 견해를 강하게 피력하거나 이면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다양한 방법으로 국정에 관여했다.


처음에는 황후의 정치개입을 격렬히 반대하던 중신들은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소견을 경청하고 그 주장을 납득했다. 그리고 이제는 권력구도에 있어서 황후를 황제의 뒤를 잇는 이인자로 인정했다. 영유를 다음 황제로 옹립하고자 하는 동인들의 수장이 병부상서가 아니라 황후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그래서 서인들은 서의 공주를 서현 황자의 정비로 삼고자 애를 썼던 것이다. 황후가 영유 황자에게 힘을 실어주듯이, 서의 공주가 모국의 잠재력을 서현 황자에게 돌려주길 바라서다.


몇날며칠의 설전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공주는 서현의 정비로 정해졌다. 동인들은 공주를 놓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그것은 영유 황자의 생모인 하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현의 정비로 청은 공주가 온다고요?”


“예, 서현 황자가 황실의 장남이니, 그들도 그곳 왕실의 장녀인 청은 공주를 보낸다고 하옵니다. 헌데 듣자하니 그 공주는, 왕후의 소생인 진명 세자와는 달리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랍니다. 미욱하기까지 해서 그를 두고 왕실과 조당에서는 ‘바보 공주’라고 놀린답니다.”



병부상서 박의문의 얄브스름한 입술에서는 말소리가 담담히 흘러나왔으나, 여우처럼 가느스름하게 찢어진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큰 신장에 마른 체형인데 콧마루도 뾰족하고 광대뼈도 조금 도드라져 전체적으로 매서운 인상을 주었다. 황후는 넉넉한 보름달처럼 온화하고도 부드러운 인상에 기품까지 갖추었는지라 외형만을 두고 봤을 때에 당최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신진(新進) 관리는 물론이고 녹을 받으며 산 지 꽤나 되었다는 중견 관리들도 내심 무서워한다는 박의문은 황후의 든든한 오른팔이었다.



“허나 서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을 겁니다. 뉘가 되었든 서 왕실의 핏줄이기만 하면 상관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너무도 잘나서 나대기를 좋아하는 계집은 또 싫어하겠지요.”



손님에게 자랑하기 위해 탁자에 올려놓은 청화백자와 같은 존재. 서가 장차 한에게 설욕하려 들지도 모른대도 아직은 한이 상국이다. 국력이 강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나라의 왕녀가 타국에서 받을 대접은 여일했다. 값비싼 인형, 그것이 그 아이의 운명이다. 하늘은 세상에 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두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헌데 공주가 불쌍하군요.”



어인 일로 영유가 말문을 열었다. 하란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로 왼손으로는 찻잔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영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의문도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황자는 여기에 앉아있는 것만도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란은 행여나 잘못 들었었나 싶어 되물었다.



“공주가 불쌍하다고요? 서인들이 원했고, 황상께서 바라셨던 혼사입니다. 설마 황상께서 공주가 시름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오나 어마마마. 청은 공주는 서현 형님의 정비로 오는 거지, 아바마마의 후궁으로 오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시아버님이 잘해주시면 뭐합니까? 이역만리 타국에서 신뢰하며 의지할 상대는 지아비뿐인데. 지금의 형님을 보면 공주에게 잘 대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부질없습니다.”



검지를 찻물에 푹 담구더니 휙휙 저어대는 영유를 보면서 의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찻물에 손을 넣고 장난을 치다니. 더구나 지금은 모후를 모신 자리이지 않나? 서현 황자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황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나는 황자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을 몰랐습니다. 혹시, 청은 공주를 정비로 원했습니까?”


“설마요.”



영유는 씩 웃었다. 그는 찻물에서 꺼낸 손가락을 꺼내 탁보(卓褓)에 쓱쓱 닦았다.



“청은 공주가 절세미인이면 모를까, 아름답지 않다면 싫습니다. 아, 얼굴만 반반해서도 안 되지요. 소자가 기쁘게 품어줄 수 있게끔 몸매도 풍만하면서도 야리야리해야 합니다.”



황자의 품위와는 거리가 먼 언동에 의문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하기야 그간 영유 황자가 보여준 화려한 전적들에 비하면 약과다. 행여나 정적들이 알까 싶어 황자가 저지른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골머리를 섞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헌데도 황자의 밤놀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황자의 취향에 맞지 않으니 청은 공주를 정비로 맞기란 애당초 틀린 일이었겠군요.”



하란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영유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바보는 아니나, 바보나 다름없는 녀석. 황상이 요새 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설령 모른대도 구태여 알려주고픈 마음이 없다. 하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박 상서.”


“예, 황후마마. 말씀하시옵소서.”


“황자가 처음부터 청은 공주에게 마음이 없었대도 나는 공주가 서현에게로 가는 것도 원치 않아요. 지금이라도 뺏어올 수 없다면 아예 망가트려야겠지요.”


“그렇잖아도 이미 손을 써 뒀으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의문은 미소하였다. 훈훈한 정이 느껴지기보다는 사냥감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의 것처럼 음산하게 다가오지만,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며 영유는 시선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모르는 청은 공주만 딱하다.





1) 읍(揖)하다: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다. 인사하는 예(禮)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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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30 하류빈
    작성일
    09.06.05 08:24
    No. 1

    리메이크 전에 서현은 황태자 아니었나요? 서유의 이름도 바뀌고 성격도 좀 바뀐 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6 은서우
    작성일
    09.06.06 01:20
    No. 2

    ㅇ dkfsj님/ 좀 많이 바뀌었습니다. 서현 씨는 황태자가 아닌 황자로 격하(?)되고, 서유의 이름은 영유로 바뀌었지요. 성격도 변했습니다~딴판으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sfartar
    작성일
    10.12.12 09:25
    No. 3

    청은 공주와 1황자가 주인공인가 보군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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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2부 연재 끝을 자축(?)하는 후기 +9 15.10.01 1,160 13 6쪽
22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9) +5 13.11.26 2,369 33 21쪽
21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8) +5 13.11.20 1,811 27 14쪽
20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7) +5 13.11.15 2,545 44 22쪽
19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6) +8 13.11.12 1,676 20 13쪽
18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5) +5 13.11.10 2,645 58 22쪽
17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4) +7 13.11.06 2,058 22 15쪽
16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3) +4 13.11.05 1,907 43 16쪽
15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2) +5 13.11.03 2,444 36 13쪽
14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5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5 27 7쪽
12 1부: 제1장. 물음. (11) +11 09.05.20 4,577 28 12쪽
11 1부: 제1장. 물음. (10) +2 09.05.20 3,966 30 11쪽
10 1부: 제1장. 물음. (09) +5 09.05.20 4,183 29 16쪽
9 1부: 제1장. 물음. (08) +4 09.05.20 4,480 32 11쪽
8 1부: 제1장. 물음. (07) +5 09.05.19 4,246 23 18쪽
7 1부: 제1장. 물음. (06) +3 09.05.19 4,435 33 11쪽
6 1부: 제1장. 물음. (05) +3 09.05.19 4,420 30 19쪽
» 1부: 제1장. 물음. (04) +3 09.05.19 5,453 32 21쪽
4 1부: 제1장. 물음. (03) +4 09.05.18 6,346 33 12쪽
3 1부: 제1장. 물음. (02) +5 09.05.18 6,369 36 11쪽
2 1부: 제1장. 물음. (01) +4 09.05.18 10,350 74 13쪽
1 1부: 序. +30 09.05.18 24,668 7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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