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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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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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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0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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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DUMMY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



一.



설왕설래. 이황자(二皇子) 신혜성(晨慧星)은 조당원(朝堂院)의 정전인 대극전(大極殿)에서 벌어지는 지금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조회에서 다루기로 예정되었던 안건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내가 잘했고 네가 잘못했다는 따위의 말싸움만 거세게 판을 쳤다.



“공금횡령이라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뭐 내가 틀린 말을 했소? 허면 수군의 병장기를 보완하라고 대장성(大藏省)1)에서 보낸 예산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오?”


“그걸 우리가 어찌 안단 말인가? 여하튼 우리 병부성(兵部省)에서 받은 기억이 없네. 아마 도중에 누가 먹었겠지. 아니 그런가?”


“아니, 왜 나를 쳐다보시오? 허면 내가 그걸 가로챘단 말이오?”


“대감이야말로 양심에 찔리니깐 그리 말씀하신 게 아닙니까?”


“야, 병부소승(兵部少丞)! 감히 나를 모함하느냐!”



건설적인 대안은커녕 상대방의 잘못을 헐뜯는 비난들만 가득이고, 결국은 편 가르기의 말다툼이다. 신혜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엊그제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다. 언제쯤이 되어서야 진절머리가 나는 싸움이 그치려나. 하루가 멀다 하고 무역선을 약탈하고 배까지도 새카맣게 태워버리는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하려면, 조당의 가치를 훼손하는 저치들부터 먼저 몰아내야할 것 같다. 오늘도 상대의 말꼬투리를 잡는 데만 정신이 팔린 자들을 깊은 바다로 던져버린다면, 필경 그 입만 동동 떠다닐 터.



“…….”



혜성은 대극전에서 가장 높은 단의 권좌를 올려다보았다. 공석이다. 황제께서는 오랫동안 와병이시다. 대리청정하기로 결정된 황태자 신유성(晨瑜星)까지도 부재다.


태정대신(太政大臣) 황효민(黃曉旼)의 주관으로 조회가 시작된들, 신하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정책을 결정할 중심이 빠졌으니 협의가 원활하게 이뤄질까. 대부분의 관원들은 마지못해 조회에 참석했다. 이들에게서 나오는 이야기가 바람에 날리는 겨 같음이야 지극히 당연했다.



‘아,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진다.’



혜성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자자, 다들 너무 성질만 내지 마십시오. 다아 나라를 위한 충정이 강해서 홧김에 하신 소리들이 아니십니까? 여기에 계신 분들이 모두 주변에서 청백리라고 칭송받는다는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허니, 모두들 노기를 가라앉히시오. 그보다 황태자 전하의 혼사에 관하여 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식부경(式部卿)2)의 말씀이 옳습니다. 해적들의 노략질로 민심이 어지러우니, 이럴 때일수록 황실의 후계를 굳건히 해야지 않겠습니까?”


“헌데……, 일전에 서(藇)의 왕실에 국서(國書)를 보내어 진명 공주를 우리 황태자 전하의 배필로 달라고 청하지 않았었는가?”


“아, 내대신(內大臣)께서 그날 조회에는 참석치 못하셔서 그 소식을 못 들으셨나 봅니다. 국혼을 통해 서의 국력을 우리 진에 귀속시킬 의도로, 이젠 약국에 불과한 그쪽의 공주를 우리 대국의 황태자비로 삼아주는 은혜를 베풀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주제도 모르고 우리의 국혼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답니다.”


“뭐라? 제까짓 것이 뭐가 잘났다고 감히 우리나라 황태자 전하와의 혼사를 거절해?”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진이 한과 비교하여 무엇이 부족하다고 우리와의 혼사는 사양해요? 서의 진명 공주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오만방자하게 군답니까?”


“그쪽에서 무어라 답신을 보냈기에 중무소보(中務少輔)는 그리도 흥분하셨소?”


“서에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황태자의 뒤치다꺼리를 해줄 공주는 없다고 했다오.”


“무, 무엇이라! 이 방자한 계집을 보았나! 그 조그마한 나라에서 받들어주니 자기가 정말 잘난 줄 아는구나.”


“그러니까 내 뭐라 말했소? 황태자 전하의 배필이 될 훌륭한 규수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데 구태여 타국의 공주까지 끌어온단 말이오? 버릇없는 거만한 계집을 황실에 들였다가는 괜한 분란만 생길 것이오.”


“치부대보(治部大輔)의 말이 맞습니다.”



혜성은 한숨을 삼켰다. 종묘사직을 지키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차원에서 황실의 혼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말은,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 결국엔 황실과의 혼사로 자신들의 권세를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는 논리―즉, 한(韓)이 서와 국혼을 맺어 자칭 맹주라는 허세를 부리려는 속셈이 괘씸하니, 우리도 서와의 혼맥(婚脈)을 맺자는 것―로 그 나라의 국본을 이쪽의 황태자비로 달라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이 세상의 어느 나라가 자국의 후계자를 타국으로 시집보내려고 할까. 사내대장부도 아닌 한갓 계집이 어찌 후계자로 책봉될 수 있느냐고 무시할 때는 언제고, 그 나라가 우리나라와의 혼사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분노들 했다. 혜성은 절로 헛웃음이 새나왔다.


차라리 이쯤에서 일어서는 편이 낫겠다. 형님마저도 국정을 방관하고 있는데―저들의 말대로―비천한 후궁의 소생 주제에 무슨 영광을 보자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나, 라는 자조 섞인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는 머릿속이 댕―댕― 울린다. 역시 혼자로는 벅차다. 혜성은 우대신 김종찬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쯤에서 조회를 접는 편이 어떠시오?’


‘알겠습니다.’



종찬은 고개를 까딱이면서 난데없이 박혀드는 따가운 눈총을 느꼈다. 좌대신(左大臣) 조손백(曺遜伯)의 것이었다. 나이가 올해 예순둘이라 어느새 백발이 무성하고 이마에는 주름이 팼지만,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으며 물건을 움켜쥐는 손힘도 강했다. 하지만 종찬은 좌대신이 보내는 경계의 눈치를 무시하고 직접 어수선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하실 말씀들이 많으시겠지만, 오늘 조회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떠하시오? 해적들을 소탕할 방법은 다음 조회에서 다시 논의하십시다. 태정대신, 태정대신께서는 다른 생각이 있으십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네. 우국충정이 강해서 매사 나랏일을 염려하느라 다들 피곤해뵈는데……, 서와의 혼사가 깨진 사실에 언짢은 사람들도 많아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기가 어렵지 않나 싶네.”



황효민은 허허 웃었다. 동그란 콧방울과 부드럽게 흘러내려온 눈매는 인상을 선하게 만들지만 실속은 그다지 없었다. 태정대신이라는 최고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신들의 옥신각신을 확실히 정리시키지 못한다는 취약점이 있었다. 물론 김종찬은 속생각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미소를 넉넉히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차 물었다.



“허면 이쯤에서 일어서는 것이 어떠시오?”


“예, 다음 조회 때 다시 논의합시다.”


“네, 그렇게 하지요. 황자 전하, 소신들은 이만 물러나옵니다.”



한 시간을 족히 넘기는 협의에서 이렇다 할 소득이 하나도 없는데도 아무도 우대신의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서다보니 오늘 회의도 역시나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모레에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이야기하자고는 말했으나, 결과는 똑같으리라. 신혜성은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썰물이 빠지듯이 신료들이 우르르 나가매 대극전에는 이황자와 우대신만 남았다. 김종찬은 신혜성에게 다가왔다.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가봅니다. 가을공기치고는 제법 찬 것이 올해는 겨울이 빨리 올 모양입니다.”



하지만 종찬이 보기에 황자의 낯빛은 여전히 우울했다. 솔직한 속마음이야 어떠하든지 지금의 상황에서 황자의 수심을 무조건 외면할 수만은 없어서 제안했다.



“하오시면 잠시 제 집무실에 들러서, 차나 한잔 하시고 가시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 오늘따라 날씨가 쌀쌀하니 따뜻한 말차(抹茶)3)로 몸에 서리는 냉기를 누그러트리시지요.”


“좋습니다. 허나 차는 황자궁에서 마시시지요.”


“왜요, 소신의 집무실이 불편하십니까?”


“딱히 그렇기보다는……, 차는 제가 대접하고 싶습니다.”



종찬은 신혜성이 말 사이에 잠깐의 틈을 둔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결코 아무도 들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프나.



“예, 소신이 고송궁(高松宮)으로 가지요.”



종찬은 황자의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혜성은 고맙다고 엷게 미소를 지었다. 우대신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아바마마께 보일지도 몰라 걱정했었다.






시녀가 내온 다구를 종찬이 잡았다. 애당초 그가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으니, 차는 본인이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김종찬을 고송궁으로 데려오려는 목적을 달성한 혜성은 그가 뜻대로 하게끔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찬은 마음을 편안케 만들어주는 진녹색이 고운 말차를 혜성의 앞에 놓았다.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혜성은 다완(茶碗)을 들어 따뜻한 말차를 한 모금 넘겼다. 우대신이 자신을 위해서 직접 만들어줘서 그런지 추웠던 마음이 훈훈해졌다. 만약 미천한 신분의 후궁에게서 난 황자에게도 살뜰히 관심을 건네주는 우대신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좌대신도 용인했대도 황태자도 참석치 않은 대극전에 감히 발걸음을 놓을 엄두는 못 냈으리라. 혜성은 다완을 다상에 내려놓으며 말을 냈다.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만, 그래도 여쭙습니다. 돌아가신 형주(兄主)의 장례는 잘 치르셨습니까?”



황자가 건넨 물음에 답하고자 종찬도 다완의 넓적한 아가리에서 입을 떼었다. 그도 다완을 다상에 내려놓았다.



“아, 예……, 사촌형님이 영경(寧京)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계셨던 터라, 거기까지 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장례를 치른 지 벌써 칠일이나 지났는데, 소신의 소소한 가사(家事)까지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우대신에게 혈친(血親)4)이 있는지를 몰라선지, 유독 기억에 남더군요.”



혜성은 김종찬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사실은 ‘혈친이 있다’보다는 ‘혈친이 남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터. 그의 암울하고 고통스런 가정사를 건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말을 골랐다.


김종찬의 조부는 열도를 통일한 진의 개국공신이었으며, 가문은 진의 전신인 평안국(平安國) 시절부터 현재의 제국시대까지 명문가로 손꼽혔다. 하지만 선황제로부터 크나큰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멸문지화를 입었다. 김종찬의 부친이었던 전(前) 좌대신 김옥형(金玉亨) 대한 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선황제는, 그의 부모와 형제는 물론이거니와 조카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김종찬은 때마침 유학생으로 타국에 나가 있었기에 목숨을 건졌다. 혜성이 김종찬이 해안(海安) 김가(家)의 일족이 몰살당했던 과거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자로 알고 있었는데, 그의 사촌형제도 한 명 생존했었단다. 필경 하늘의 도우심이 있었으리라. 어쨌든 혜성은 김종찬이 가슴속 깊은 곳에 겹겹이 쌓아둔 비통한 기억까지 건들고 싶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너무도 쉽게 그 시절의 일을 언급했다.



“황명을 받은 우근위부(右近衛府)의 장졸들이 들이닥칠 때, 소신의 사촌형님만큼은 충성스런 노복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영경을 빠져나가실 수 있었답니다. 사실 소신도 지금의 황제 폐하의 하해와도 같은 은덕을 받아 신원이 회복되고 대내리(大內裏)의 고관이 되어서야 열아홉에 헤어졌던 형님의 소식을 다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황제 폐하의 하해와도 같은 은덕이라! 종찬은 혜성의 눈에 비쳐질 표정으로는 황제를 향한 감사심을 생생히 드러내었지만, 그가 결코 파악하지 못할 깊은 속마음으로는 황제를 향한 비아냥거림을 토해냈다.



현재는 무려 십년 가까이 편전 청량전(淸凉殿)에서 자리보전하는 황제가, 구사일생으로 건진 생명을 선뜻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쥐 죽은 듯이 살아았던 자신을 다시 조당으로 불러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덕분에 벼슬이 종일품의 우대신에까지 이르렀으며, 빼앗겼던 가문의 명예도 되찾았다.


허나, 이 모든 것을 선황제로부터 크나큰 죄를 입어 멸문되었던 죄인의 자손을 갸륵하게 여긴 성은으로만 여길 수는 없었다. 황제라는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로 인간으로는 차마 저지를 수 없는 일을 자행한 추악한 아비의 죄를 덮기 위한 아들의 보상책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사람들은 좌대신의 아들이 당시 타국에 머물고 있어서 진상을 모두 알지는 못하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다.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자신은 일찍 귀국하여 이미 진의 영경에 있었다. 집안에 닥친 재앙을 감지한 부친이 자신을 자택의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지하창고에 숨겼다. 그래서 사랑했던 가족의 죽음을 하나하나 똑똑히 목격하고 들었다.


선황제는 생전에 상시 음주가무를 즐겼지만,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탐한 것은 여색이었다. 후궁(後宮)에 내리의 꽃나무들보다도 더 많은 여인들을 두고 매일 밤을 뜨겁게 보냈음에도 더 매력적인 미녀들을 찾았다. 그의 눈에 드는 여인이라면 신하들의 아내와 딸까지도 수중에 넣고자 했다. 진에 속한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인 고로, 일개 신하의 아내와 딸도 당신의 소유라는 논리였다. 만약 그 신하가 자신의 아내를 황제에게 바칠 수 없다고 저항하면 수뢰(受賂)와 관직청탁 등의 온갖 비리나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심지어 역모라는 대죄까지 씌워 대내리에서 쫓아내었다.


퇴관명령만 내리면 그나마 다행이지, 재산몰수에다가 참형에까지 처하니 관원들의 여인들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부름에 응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아비나 부친이 다치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끝까지 저항한 이들도 있었다. 그 경우 여지없이 가족들의 처형은 물론 일족 전체가 중벌을 면치 못했다. 최악의 경우 멸문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당한 가문이 바로 해안 김가(家)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두고 사람들은 미남이었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보다 더 빛나는 미인이었다. 외모가 출중한 부모를 둔 까닭에 네 살 위의 누님은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인 양 몹시도 아리따웠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좌대신의 여식이 천하절색이라는 소문은 궁중의 담을 넘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제는 부친에게 일러 딸을 황궁으로 들이라고 명령했다.


부친은 순순히 명에 따를 수 없었다. 당시 선황제는 마흔 여섯의 부친보다 무려 열 살이나 더 많았었다. 더군다나 색정에 눈이 멀어서 딸을 얼마나 짓밟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부했다. 당연히 황제는 진노했다. 부친더러 불충의 죄를 짓는다며 태형에 처하려고 했다. 보다 못한 모친이 나서기로 했다. 화장기가 없는 파리한 모습에 죄인임을 나타내는 무명옷을 입고 황제에게 애원하고자 했다.


뜻밖에도, 아무런 장식도 가하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 모친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더 돋보였다. 선황제는 발정난 개새끼처럼 인수전(仁壽殿)에서 모친을 범했다. 그날 밤, 모친은 치욕을 참지 못하고 자진했다. 부친은 크나큰 충격을 입어 하룻밤 사이에 머리털이 하얗게 새버리고 몸에는 일부 마비증상까지 일어났다.


자기의 욕정대로 모친을 유린한 선황제는 어미가 아름다우니 그 딸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느냐면서 자택으로 군사를 보냈다. 그 딸을 잡아오라고. 거동이 불편하고 기력이 쇠약해진 아버지와 반드시 살려서 가문을 다시 이어가게 할 남동생을 위해, 누님은 선선히 군사들을 따라 입궁했다. 그리고 황제가 딸자식의 연배인 누님의 알몸을 탐하려들 때, 누님은 비녀로 제 목을 찔렀다. 눈앞에서 선혈을 흘리며 싸하게 식어가는 누님을 보면서 황제는 분노했다. 자기를 우롱했다면서 해안 김가의 일족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했다.


사전에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부친은, 하나 남은 당신의 아들부터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는 우근위부 장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목숨을 끊으셨다. 황제는 좌대신의 가문이 패역을 저지르고 불충했기에 멸문시키노라고 말했지만, 과연 이 모든 것들이 내 아버지의 잘못에 기인되었을까.


나는, 근 이십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원통함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사촌형님은 그때의 난리에 심히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하여 현 황제 폐하의 은혜로 가문의 명예가 회복되었음에도 형님은 본명과 가문을 모두 숨기고 다른 사람처럼 사셨답니다. 해서 주변 사람들도 사촌형님이 본디 누구인지를 몰랐었지요. 헌데 그런 사촌형님에게도 슬하에 딸자식이 하나 있기에, 소신이 저희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진즉에 돌아가신 형수님이 고아였던 탓에 종질녀(從姪女)5)를 맡아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예, 그러셨군요.”


“소신의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허면 이제는 소신이 전하께 여쭙습니다. 아까 대극전에서 안색이 너무도 어두우시던데, 황제 폐하의 건강이 염려되어서입니까?”


“예, 대극전의 옥좌를 지키셔야 할 분께서 오랫동안 자리보전하고 계시니 아들로서 심히 염려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더구나 황태자인 형님께서도…….”



혜성의 얼굴에는 잿빛그림자가 짙게 끼었다. 나라의 어지러운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러함을 김종찬은 안다. 와병기간이 너무도 오래되어서 다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을지 의문마저 드는 부황을 이어 진을 이끌 재목은, 어쩌면 황태자 신유성이 아니라 차남인 이 사람일지도.


그러나 대내리의 누구도 신혜성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황자 신혜성의―물론 그들의 기준에 보았을 때의―능력과 자질은 차치물론하더라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조건조차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황제가 첫 번째 황후를 폐위시키고 이듬해에 새로이 맞았던 황후로 십이 년 전에 서거한, 장남 신유성의 모후 전혜음(全蕙廕)은 태정대신과 좌대신을 여러 번 배출한 명문귀족가의 장녀였다. 하지만 차남 신혜성의 생모 조비연(曺飛燕)은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에서도 지위가 높지 않은 어식소(御息所)6)를 모시는 궁녀, 여방(女房)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애당초 신분이 중인도 아닌 평민이었다. 황제의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실과 조당으로부터 하대를 받았다. 황제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비연의 지위를 갱의(更衣)7)에까지 올렸지만, 황실과 조당이 보기에 그녀는 여전히 천한 신분의 계집이었다.



진은 아버지인 황제의 뜻에서만 황태자가 결정되지 않는다. 전신이었던 평안국에서 제국인 진으로 바뀌었어도 황태자 책봉을 결정짓는 요인은, 역시 모친의 지위와 가문이었다. 설령 어머니가 적녀(嫡女)가 아닌 서녀(庶女)이더라도 그 가문의 혈통이라고 인정받는다면, 가문의 보호 아래에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조비연은 그렇지 못했고, 소생도 황태자의 자질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의 후보에조차 오를 수 없었다. 애당초 대안이 없었으니, 신유성이 황태자의 책무를 방기한다면 현재 진의 문제를 해결할 방책이 없다. 유일한 방책이라면 황제가 병석에서 일어나는 것뿐인데,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요원하다.



“이 나라를 지탱하시는 분께서 병석만을 지키시고 계시니, 그저 걱정스럽습니다. 신기관(神祇官)8)에 일러 황제 폐하의 쾌유를 비는 제사라도 준비해두라 할까요?”


“예, 그리하십시오.”



혜성은 우대신의 조언을 선뜻 받아들이면서 그다음을 덧붙였다. 황제의 의중을 확인하면서 우대신에게 다시금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사안이 있다.



“하늘에 기원하는 것은 신기관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곳 지상에서 황권을 강화시킬 대책을 마련해야지요. 황권이……, 십여 년 전보다 많이 약해졌습니다. 황권의 강화를 위한 아바마마의 그간 노력이 무색해질 만큼 퇴보되었습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렇지요.”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대신의 영애를 황태자비로 보내주십시오. 혼인을 통한 우대신과의 결연은 황태자 전하의 정치적 기반을 단단히 하고 황실의 위신을 드높일 것입니다. 우대신의 영애가 황실의 혈통을 잇는다면, 우대신의 가문에도 그보다 큰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허니 황상과 황실을 위해 황태자 전하와의 혼사를 진지하게 고려해주십시오.”


“…….”



종찬은 예전에 황제로부터 비슷한 언질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새삼스레 신혜성의 말에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자신을 향한 눈빛과 목소리가 맘에 걸렸다. 봄바람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에는 바위와도 같은 묵직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안 된다고 딱 잘라서 말할 수만은 없었다. 신혜성이 생모의 신분이 천하여 황태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뿐인 여식의 혼사입니다. 어디 저 혼자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아이에게 충분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의지이지요.”


“허면 두 사람이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 수 있는 상황은 만들어주실 수 있지요?”


“예. 거기까지는 소신이 노력할 수 있지요.”



종찬은 신혜성이 혼담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솔직한 속생각은 어떠하든 일단은 번거로운 상대방을 안심시켜놔야 하니.



“고맙습니다.”


“전하야말로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헌데……, 오늘도 황태자 전하께서 대극전에 나오지 않으셨던데, 중요한 용무로 출타하셨습니까?”


“예, 선약이 있으시어 불가피하게 오늘의 조회에는 참석치 못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종찬은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냉소를 지었다. 신혜성은 하나뿐인 동생으로서 형의 허물을 덮어주려고 둘러댔지만, 오히려 황태자의 결점만 두드러졌다. 정사를 논하는 조회보다 더 중요한 용무란 어디에 있을까. 황태자가 정사를 내버려두고 향한 곳이 어딘지는 종찬도 이미 알고 있다. 방탕하고 우매한 황태자 같으니라고. 이래서 진의 앞날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몇 안 되는 충신들이 현실을 개탄하다가 급기야는 속세를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가 버렸다.



“허면 소신은 밀린 공무가 있어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바쁜 사람을 오랫동안 잡아둬서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전하와 차를 나누는 시간은 소신에게도 기쁨입니다.”



종찬은 예의를 갖춰 황자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문이 닫힌다. 혜성은 우대신이 앉았던 자리를 보면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1) 대장성(大藏省):(본 소설의 설정상) 진의 8성(省) 중 하나. 경제정책의 수립, 화폐와 금은, 주옥, 작물 등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며 국유재산의 관리 따위에 관한 사무를 맡아봄.

2) 식부경(式部卿):(본 소설의 설정상) 진의 관직 중 하나. 식부성(式部省)의 장관. 식부성은 조정의 문관인사, 예의예식, 서훈, 행상을 담당.

3) 말차(抹茶): 가루차. 차나무의 애순을 말려 가루로 만든 차.

4) 혈친(血親): 가까운 혈족 관계에 있는 친척.

5) 종질녀(從姪女): 사촌형제의 딸.

6) 어식소(御息所):(본 소설의 설정상) 진의 여어(女御), 갱의(更衣) 등, 황제의 침소에서 시중하던 궁녀. 황자와 황녀를 낳은 여어와 갱의를 가리키기도 함.

7) 갱의: (본 소설의 설정상) 진의 황제를 위한 후궁인 여관(女官)의 하나로 여어(女御) 다음가는 자리.

8) 신기관(神祇官):(본 소설의 설정상) 진의 관부 중 하나. 조정에 있어서의 하늘과 땅의 신의 의식·제전 및 대상·진혼·복조 등을 통괄 담당하며 전국의 관사나 축부를 지배한다.











1) 혈친(血親) : 가까운 혈족 관계에 있는 친척.


작가의말

#.
전에도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휘린>에 나오는 관직이나 의제 등은 실제의 것을 참고하긴 합니다만, 그것을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았어요. 제 편의에 따라 수정하거나 만든 것들도 있으니, 유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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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3) +4 13.11.05 1,906 43 16쪽
15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2) +5 13.11.03 2,442 36 13쪽
»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5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5 27 7쪽
12 1부: 제1장. 물음. (11) +11 09.05.20 4,577 28 12쪽
11 1부: 제1장. 물음. (10) +2 09.05.20 3,966 30 11쪽
10 1부: 제1장. 물음. (09) +5 09.05.20 4,181 29 16쪽
9 1부: 제1장. 물음. (08) +4 09.05.20 4,479 32 11쪽
8 1부: 제1장. 물음. (07) +5 09.05.19 4,246 2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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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부: 제1장. 물음. (05) +3 09.05.19 4,419 30 19쪽
5 1부: 제1장. 물음. (04) +3 09.05.19 5,452 32 21쪽
4 1부: 제1장. 물음. (03) +4 09.05.18 6,345 33 12쪽
3 1부: 제1장. 물음. (02) +5 09.05.18 6,369 36 11쪽
2 1부: 제1장. 물음. (01) +4 09.05.18 10,348 74 13쪽
1 1부: 序. +30 09.05.18 24,667 7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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