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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269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13.11.26 00:40
조회
2,368
추천
33
글자
21쪽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9)

DUMMY

四.



자정, 세상에 깊게 내려앉은 어둠에서 새벽을 준비하는 자시(子時;밤11시30분~새벽0시 30분)가 어느덧 반이나 지났다. 만물의 시계가 십일월의 셋째 날에서 넷째 날로 넘어갔음에도 빈청(賓廳)에 있는 영의정의 집무실은 여전히 환하다. 진즉에 퇴궐하여 사가에서 편하게 저녁상을 받고 입가심으로 녹차를 즐기기를 마다하고 호박시루떡 몇 쪽과 수정과 한 잔으로 저녁끼니를 때우고 집무실에 있은 지도 꽤 지났음에도, 노신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다.



“혹시나 해서 왔는데, 역시나 여태까지 계셨군요.”



좌의정 한희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안영은 줄곧 살피던 관문을 책상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중신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일벌레가 아니랄까봐 그녀도 빈손이 아니었다. ‘혹시나…….’는 말뿐이었지, 여덟 치1)의 폭에 높이는 한 장뼘2)으로 짐작되는 서함(書函)을 들고 있었다.


안영은 집무책상에 맞은편에 있는 직방형의 회의용 탁자로 걸음을 놓았다.



“오셨는가? 우선 자리에부터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대감.”



희명은 의자에 앉으면서 서함을 탁상에 내려놓았다. 서함의 뚜껑을 열어서 안에 담긴 두루마리책자들을 꺼내어 안영의 앞에 차례대로 놓았다. 총 네 개. 두께도 만만치 않다.



“혹시나 해서 와보았다는 사람이 일거리를 이리도 많이 가져다주누?”



국가의 녹을 받아먹으며 살아오신 삶이 어언 사십오 년이 되어가는 분이 이제 막 관직을 받은 신출내기의 투정 같은 우스갯소리를 하신다. 희명의 입가에서는 절로 웃음이 맺혔다.



“며칠 동안 계속되는 격무로 고단하실 터인데……, 또 일거리만 가득 안겨다드려서 송구합니다. 허나 영상 대감께서 반드시 확인해주셔야만 내일 아침, 주상 전하와 왕후 전하께 올릴 수 있습니다. 두 분 전하의 재가가 떨어지는 대로 속히 수군의 각 장군들에게 보낼 수 있고요.”


“그렇지, 시간이 없지.”



안영은 돌돌 말린 문서를 하나 들어, 길게 쫙 펼쳐보았다. 명확하면서도 수려한 글씨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한희명의 친필이었다. 아랫사람들을 시켜도 될 일을 직접 작성했다. 작전지휘를 위해 진으로 넘어간 바람에 서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하나하나 꼼꼼히 짚을 수 없는 세자를 대신하여 이쪽의 뒷일을 총괄하는 역할인 만큼, 그녀는 작은 일에도 세세히 신경을 썼다.



“자네가 세심하게 준비하였는데, 내가 따로 검토할 필요까지 있을까. 자네의 능력이 뛰어남은 내 장담하지. 허나, 내 인장은 찍어야겠지?”



안영은 문서를 탁상에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집무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장의 첫 번째 칸을 열었다. 정방형의 조그만 상자에는 영의정의 직인이 들어 있었다. 안영은 인주를 바른 인장을 문서 하단부들에 꾹 찍었다. 그다음 문서들을 일일이 돌돌 말아서 희명에게 건넸다.



“자, 받게나. 자네의 말대로 두 분 전하의 재가를 받는 대로 지체 말고 수군으로 보내야 할 것이야. 종훈이 그 사람이, 진의 해역에서 해적질만 열심히 하다가는 자기가 서의 장수라는 사실까지 망각하겠다고 말하더라고, 장용중장이 서한을 보내왔네.”



안영이 전하는 우림위부장(羽林衛副將)의 소식에 희명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발갛게 윤기가 흐르는 입술에서는 약간 고음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가장 적극적으로 진의 무역선을 터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엄살치고는 너무 타당성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강종훈이는 고민스럽지.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해적질이 진의 경제를 흔들기에는 딱 좋지만, 노략질을 통한 이익도 상당히 톡톡했나 보더이. 짐작했던 것보다도 재미가 너무 좋으니, 이러다가 해적질에 진짜로 관심을 둘까봐 걱정한다네.”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특기를 새로 발견했다면 오히려 축하해줘야지요. 그것도 한때이니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두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우림위부장이 해적질에 열심히 임할수록 진정도감의 필요자금도 충분히 확보되고 나라살림에도 적잖이 보탬이 됩니다. 진정도감의 도제조인 저로서는 매우 기쁠 따름이지요.”


“아니, 이 사람 좀 보시게나. 필요 이상 활발하게 해적질하는 것을 조금은 자제하라고 말려도 모자를 판에 더 열심히 하라고 부추기나? 자네야말로 내직은 잠시 쉬고 배를 타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내 사람들로부터 들으니, 우리의 좌의정께서는 문식(文識)뿐만 아니라 무략(武略)과 무예에도 상당히 능통하다면서.”


“어머나, 영상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어느새 나이가 불혹이 된 입장에서 이런 말이 외려 우습게 들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래봬도 소싯적에 창검에도 꽤나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여 문과가 아닌 무과에 응시할까 상당히 갈등했었지요.”


“오호, 그래? 만약 자네가 무관으로 출사했더라면 지금 용양위(龍驤衛)3) 총관(摠管)으로 있는 예소화(芮素花) 장군과 쌍벽을 이루는 여중호걸이라 불렸겠군.”


“글쎄요. 안타깝게도 전 소화보다 무도가 뛰어나지도 않고 무장으로서의 지략도 부족하니, 그녀와 난형난제를 이루지는 못할 겁니다. 해서 고민 끝에 문관으로 나섰지요.”


“문관으로 출사했대도 자네는 이미 예 장군과 난형난제를 이루고 있네. 자기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이는 것이나, 여인으로서 뛰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칭찬이라면 일단 제 귀로 듣기 민망하기는 둘째 치고 반사적으로 그 숨겨진 의도부터 파악하려고 들겠지요. 허나 영상 대감께서 저를 위해서 건네주시는 말씀은 마냥 좋습니다. 대감께서 주신 칭찬 때문이라도 저는 더 열심히 일해야겠습니다.”



때론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일처리가 확실하며 대인관계도 정확하고 합리적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좌의정 한희명이 꾸밈없는 웃음꽃을 피웠다. 안영은 본인부터서 수제자라고 칭찬하며 아끼는 희명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여하튼 세자께서도 참 재미난 분이시지. 거대한 해적조직으로 꾸며서 진의 무역선을 공격한다라……, 진이 해로를 통한 무역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음을 노린 계획이겠지.”


“한때 절대적인 군권으로 진을 지탱하던 황제가 오랜 투병으로 쇠락해진 지금, 황태자는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조당은 분열되고 있습니다. 권신들은 자기 밥그릇에만 관심을 두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서로 싸워대니, 조당은 제 기능을 잃고 대내리의 실무는 엉망이 되었지요. 날로 활개를 치는 해적단을 완벽하게 소탕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이보시게, 좌상. 그쪽에서 들으면 속상해할 말씀은 마시게. 그들은 해적단의 실체를 전혀 몰라. 그들에게는 악귀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해적단이 실은 이 나라의 세자께서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온 수군이라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나. 듣자하니 진에서는 신출귀몰한 해적단을 일거에 쓸어버리겠다고 그쪽에서는 제법 괜찮다는 무장들을 바다로 보냈다던데.”


“쓸모가 있는 병장기가 있으면 뭐합니까? 통솔자가 부재하는 형국이라, 그 무장들도 회의감을 느끼는지 기대만큼 맞서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해서 저는 다소 아쉽습니다. 진에서 해적단의 토벌시도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우리는 그쪽 해역에 해적단으로 위장하고 있는 수군 제일부(第一部) 전체에 실제와 가장 가까운 전투를 경험해볼 수 있게 할 텐데요. 모의전투의 수준을 넘어선 가장 실질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역시나, 가차 없는 말씀이로세.”



안영이 웃으며 건넨―물론 아주 살짝은 진담이 섞인―농담을 희명은 먼저 부드러운 미소로 받았다. 안영은 말문을 열어 그다음 말을 이었다.



“허면, 그쪽 연안지역들의 민심은 어떠한가.”


“현재 해적단의 표적은 주로 대규모 상단의 상선과 군선으로, 생계유지의 어선이나 소규모 상선은 건들지 않고 있습니다. 뭍으로 넘어가 어민들의 생활근거지를 침범하지도 않는 등, 오히려 우리 쪽에서 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지요. 하여 아직까지는 그쪽 백성들에게서 크게 원망을 사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


“허나, 해적단의 약탈이 진의 경제에 가시적인 타격을 주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해적질의 표적을 백성의 어선들과 소규모 상선들에까지 확대하고 필요에 따라 해안가의 민가들도 노략해야할 것입니다. 그곳 백성들에 대한 해적단의 활동이 극악무도하고 잔인할수록 민심은 그들의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지 않은 황제와 조당에 점차 불만을 갖게 되겠지요. 자기 잇속만 챙기는 당파싸움으로 분열된 조당에 대한 불신이 심화될수록, 향후에 벌어질 우리나라의 침탈에 대한 그곳 백성들의 반발심이 줄어들지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살기가 너무 힘들 바에는 차라리 세상이 뒤흔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어두운 소망이 품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공을 들여야겠군.”


“예. 민심의 분노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면, 조당의 무능력을 부각시켜 진의 내부분열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계획은 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진의 근원인, 평안국은 본디 작은 연안국이었으나 강력한 해군력(海軍力)을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열도를 통일하고 마침내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내우외환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저력을 아예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안영은 희명이 아까까지만 해도 진의 혼란스러운 내정 상황을 비꼬던 태도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그녀는 진의 조당과 대내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든든한 힘’을 간과하지 않았다. 한에 필적할 정도로 강력한 제국으로 군림하던 진이 이제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대도 그쪽 황실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현신(賢臣)과 맹장(猛將)이 아직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궁극적인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을 둘 수 없다. 어디까지나 하늘의 도우심으로 운기(運氣)가 이쪽으로 기우려는 것처럼 보일 뿐, 싸움판은 아직 펼쳐지지도 않았다.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고 설레발을 치는 방심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한다.



“헌데……, 세자 저하도 같은 생각이신가.”


“예. 하여 현재 진에 잔존한 육정신(六正臣)4)들을 처리할 방도를 다방면으로 구상하고 계십니다.”


“허나 그것이 쉽겠는가. 조당에 간신, 악신(惡臣), 사신(邪臣)들이 판치는 형국에도 여전히 황제를 받들며 진을 지키려는 자들이네. 과연, 그들을 한 명도 빠트리지 않고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간이 참 많이 걸리겠지요. 설득으로 우리 쪽의 사람으로 완벽하게 포섭할 수 없다면, 암수를……그것도 어렵다면, 살수라도 둬야지요. 이것이, 저하께서 고민 끝에 내리신 결론이고,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참고로 저하께서는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하고 계십니다.”


“최악의 경우라면, 어떤?”


“상황이 불가피해진다면, 우대신 김종찬을 제외한 정신들은 모조리 제거한다.”


“…….”



희명의 말투가 냉정하리만치 단호하게 들려서인가. 안영은 분명히 좌의정 한희명을 마주하고 있는데 얼결에 진명 세자의 과감한 모습이 겹쳐보였다. 아니다. 한희명은 세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생각을 전달했으니,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터. 오히려, 이제 겨우 약관(弱冠)을―청은 공주가 아닌 진명 세자에게는 보통 여자의 나이를 일컫는 ‘방령(芳齡)’을 쓰는 것이 묘하게 이상스럽다―앞둔 세자의 입에서 그와 같은 결정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기야 본국의 동궁에서 얌전히 제왕수업만을 받을, 마냥 양순한 세자였더라면 처음부터 ‘대사(大事)’을 꾸밀 마음조차 먹지 않았겠지. 제국이라고 불리는 진의 땅과 바다를 서의 지배하에 두겠다는, 엄청난 야망을.



“자네는 저하의 그 말씀에도 동의하는가.”


“예, 실현가능하다면 아군의 승기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들이 앞으로 거침없어질 우리 쪽의 공격에 어떻게든 맞서 진을 지켜내겠다는 신념 아래 모인다면, 그 자체로도 큰 저항세력이 됩니다. 가급적이면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적어도 영경과 근거지 내에 있는 자들이라도 깔끔하게 제거해둬야, 세자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원활하게 이뤄집니다.”



안영은 그렇다고 응수하는 의미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와 나라의 전쟁에서 저편의 충신은 곧 이편의 적이다. 저쪽에 대한 어쭙잖은 동정심은 외려 이쪽의 안전을 흔들 흉수를 만들기도 한다. 이쪽의 생존과 평화를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을 감수하고 칼날을 휘두르는 편이 백번 낫다.


다만 문제는, 희명의 말에 내포된 의미대로, 마음먹은 바가 모두 보기 좋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의 머릿속에 그려진 미래가 모두 당자의 눈앞에 있는 현실로 그대로 옮겨지면 얼마나 좋으랴.



“그리고 저하께서는 현재는 해적단으로 위장한 우리 쪽의 해군력으로 한때 진의 자부심이었던 해군의 위세를 꺾고 그곳의 바다를 침해하는 것을 중점으로 두고 계시나, 시기를 봐서 다른 방법으로 진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 방법을 고르고 계십니다.”



희명이 덧붙이는 마지막 말에 안영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고른다?”


“예, 한편으로는 기존의 것보다 더 좋은 계략이 없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계획하십니다. 일단 지금은, 지역별 공략 방법들을 최대한 많이, 다양하게 구상해두시겠답니다. 그다음 시기를 보아 적절한 시점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수를 놓으시려는 것이지요.”


“이른바 ‘신(神)의 한 수’를 노리시는군. 세자께 이, 늙은이도 앞으로 저하께서 과감히 두실, 그 한 수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주게.”


“예.”



희명은 싱긋이 웃더니 관복의 소맷자락에서 홍색 견(絹)에 싸인 네모난 어떤 것을 꺼내어 내밀었다. 안영은 그것이 서한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세자 저하께서 수하를 통해 보내셨습니다. 해시(亥時;밤9시30분~10시30분)가 다 지나갈 무렵에 당도하였지요. 실은 야심한 시간에 대감을 찾은 것은, 이 서한을 바로 대감께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랬나. 잊지 않고 바로 챙겨줘서 고맙군.”



안영은 서한을 잡았다. 첫새벽의 냉기를 억누르고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을 연상시키는 진홍(眞紅). 창공의 빛깔을 옮겨놓은 깊은 청색이 청은 공주의 상징이라면, 짙은 붉은색은 진명 세자를 의미했다. 이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개인적인 연락을 취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안영은 견에 둘린 끈을 풀어, 거기에 담긴 서한을 꺼내었다.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내용이 주되었으되, 한의 동정을 잘 살펴달라는 당부가 덧붙여졌다. 서의 세자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서 진에 잠입했다는 비밀이 한에 넘어가지 않도록 본국에 숨어있는 한과 진의 세작들을 은밀히 색출하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 진과의 대전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기밀도 밖으로 새나가서는 안 된다. 심지어 한나라에 있는 청은 공주에게도 숨겨야 한다. 이제, 그 아이는 서현 황자의 정비로 한나라 황실의 일원이다.



“내일인가……, 청은 공주마마의 혼사까지 보고서 귀국한 성절사가 진양에 당도하기로 예정된 날짜가.”


“예, 윤형원 예조참의가 한의 땅인 산경도 해주를 떠나면서 급히 띄워 보낸 서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다행히 바닷바람이 좋아서 성절사가 탄 배가 오늘 중으로 라혜시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희명의 친절한 설명에 안영은 알겠노라고 답하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명은 어릴 적에 병마에 잃어버린 친아비를 대신하여 가깝게 지내는 분의 얼굴에 설핏 떠오른 속마음을 빠르게 포착해냈다. 그리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청은 공주마마를 보고 싶으시죠? 대감께서 무척이나 귀애하셨던 제자이지 않습니까.”



안영은 빙그레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비적단의 손에 죽은 줄로만 알았을 적에는 제자가 하늘의 도우심으로 구사일생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한탄했었다. 그러다 한의 땅에 생존했고 그곳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관원이 되었음을 알았을 적에는 제자가 정말 이 세상의 하늘 아래에 살아있다는 증명을 직접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아쉬워했었다. 마침내 진명 세자를 통해 제자가 친필로 쓴 서한을 받고 나니, 그 애틋하고 귀여운 제자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다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그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언제나 만날지는 모르겠으나.



“건강을 잘 챙기셔서 내년 동지사(冬至使) 정사로 한의 장안에 다녀오세요.”


“아, 그렇게 하는 방법이 있었구려. 허나 나 혼자서는 못 갈 것이야. 분명히 우상, 그 사람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설 게 뻔하거든.”


“흐음……, 영상 대감께서 조정을 비우시는 것도 매우 곤란한데, 우상 대감까지 함께 가셔버리면 저로서는 국정운영이 상당히 걱정스러워지겠습니다. 허나, 설마하니 방법이 아예 없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좋은 방도가 생각나겠지요.”


“그래, 그 사안에 관해선 그때에 다시 이야기함세.”



안영은 미소로 답하며 일단 논의를 덮어두었다. 희명이 이 늙은이의 맘까지 헤아려준 것은 진심으로 고맙다. 하지만 자신이 영의정으로 있는 한, 동지사의 정사로 한의 땅에 들어가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어느새 나이를 예순다섯이나 먹은 몸이 그 먼 거리에서 얻은 노독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도 걱정스럽고. 제자를 다시 만나기가 어려운 현실에 대한 아쉬움은 홀로 달랠 거리다. 아니다. 은호, 그 사람과 함께 술잔을 기울 수 있으니, 그렇게까지 쓸쓸하고 서운하지는 않겠구나.



“그나저나 너무 늦었네. 자네도 어서 퇴궐하게나. 이러다가 궐에서 아침을 맞겠네.”


“예, 이젠 퇴궐해야지요. 대감께서도 어서 댁에 돌아가셔야지요. 사모(師母)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글쎄,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은 날 기다리는 것은 젊었을 때고, 이제는 먼저 자고 있어. 우리 집 집사와 강아지나 자지 않고 날 기다리고 있겠네.”



하지만 안영은 진명 세자의 서한을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견 조각과 함께 잡는 것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설 기미다. 안영이 했던 말이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우스갯소리임을 아는 희명은 빙싯했다. 어린 시절부터 노안영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그의 처에 대해 귀부인보다는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만큼―노 대감의 안사람도 한희명에게는 사모님 혹은 어머님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정경부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정경부인은 당신의 부군께서 자택의 대문을 열고 들어옴을 확인해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희명은 안영이 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서함에 권자들을 넣고 뚜껑을 닫았다.



“허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감께서도 댁에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이런, 날더러 안녕히 돌아가라니. 나 혼자 집에 가란 소린가. 자네도 어서 정리하고 빈청 앞으로 나오게. 같이 퇴궐함세. 내 마차로 자네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네. 허니 어서 일어서시게.”



안영은 손짓까지 동원하여 희명을 당장 일으켰다. 희명은 사실 반점가량 조금 더 공무를 살필 요량이었으나 상관이자 스승의 채근에 못 이겨 서둘러 퇴청을 준비했다.





― 禿鷲之疲翼. 結.






1) 본 소설에서 1치는 대략 3.03cm. 8치는 24.24cm

2) 장뼘: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힘껏 벌린 길이

3) 용양위(龍驤衛): (본 소설의 설정상) 서의 중앙군사조직인 5위 중 하나. 5위는 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驤衛),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

4) 육정신(六正臣): 나라에 이로운 여섯 유형의 신하. 성신(聖臣;인격이 훌륭한 신하), 양신(良臣;어진 신하), 충신(忠臣;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지신(智臣;지혜로운 신하), 정신(貞臣;녹봉(祿俸), 하사(下賜), 증여(贈與) 따위를 받지 않고 법을 받드는, 지조가 곧고 바른 신하), 직신(直臣;강직한 신하)을 이른다.


작가의말

#.

01) 급히 올립니다. 오타나 비문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오타대마왕의 불필요한 총애로 이상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미 부지기수입니다만 그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덧붙여서 미리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요새 예상치 못하게 바쁩니다. 그 바람에 글이 띄엄띄엄 올라가고 있습니다. 틈틈이 써서 다시 성실연재를 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못해도 일주일에 두 편 이상을 올리고 싶습니다.

02) 예소화 총관이 등장하는 장면을 언제쯤 쓸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사람도 개인적으로 꼭 다루고 싶은 인물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나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

03) 뜬금없이 호박시루떡을 넣은 것은, 그냥 제가 지금 이 떡이 댕겨서 그렇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바람떡이랑 호박시루떡이 생각나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 조만간 떡집을 찾아가야겠습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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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6) +8 13.11.12 1,676 20 13쪽
18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5) +5 13.11.10 2,645 58 22쪽
17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4) +7 13.11.06 2,058 22 15쪽
16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3) +4 13.11.05 1,907 43 16쪽
15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2) +5 13.11.03 2,444 36 13쪽
14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5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5 27 7쪽
12 1부: 제1장. 물음. (11) +11 09.05.20 4,577 28 12쪽
11 1부: 제1장. 물음. (10) +2 09.05.20 3,966 30 11쪽
10 1부: 제1장. 물음. (09) +5 09.05.20 4,183 29 16쪽
9 1부: 제1장. 물음. (08) +4 09.05.20 4,480 32 11쪽
8 1부: 제1장. 물음. (07) +5 09.05.19 4,246 23 18쪽
7 1부: 제1장. 물음. (06) +3 09.05.19 4,435 33 11쪽
6 1부: 제1장. 물음. (05) +3 09.05.19 4,420 30 19쪽
5 1부: 제1장. 물음. (04) +3 09.05.19 5,452 32 21쪽
4 1부: 제1장. 물음. (03) +4 09.05.18 6,346 33 12쪽
3 1부: 제1장. 물음. (02) +5 09.05.18 6,369 36 11쪽
2 1부: 제1장. 물음. (01) +4 09.05.18 10,350 74 13쪽
1 1부: 序. +30 09.05.18 24,668 7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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