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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279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09.05.18 12:58
조회
6,369
추천
36
글자
11쪽

1부: 제1장. 물음. (02)

DUMMY

이튿날 세자는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제 오후에 청은 공주가 대궐을 다녀갔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왕실의 위계와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여태 침묵했던 청은 공주가 지금에서 처음으로 입을 연 까닭도 비로소 헤아렸다.


왕은 황제의 국혼 제안을 받아들여 청은 공주를 그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깊이 팬 눈가에는 옥루가 그렁그렁 맺혔다. 왕후는 말이 없었다. 조회는 짧게 끝났으나 여운은 무겁고 길리라. 근정전(勤政殿)을 나서자 파랗게 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은 하늘빛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우의정(右議政) 소은호(蔬誾澔)는 코끝이 찡해왔다. 청은 대군(大君)은 겨울 하늘을 참 많이 닮았다.



“결국은 청은 공주께서 가시는구먼. 자의라지만 실상은 상황이 공주께서 그런 선택을 내리도시도록 종용한 것이나 진배없지. 그러고 보면 우리 마마처럼 생이 기구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갓난아기일 적에 친어미가 자진해서 친어미의 품이 어떤지를 느껴본 적이 없는데, 자라면서도 죽은 친어미의 죄로 인해 조정과 왕실의 지독한 견제에 시달렸지. 왕후 전하의 힘으로 목숨은 구했다지만 이때까지 공주 대접을 어디 한 번 제대로 받아보긴 하셨어? 이웃에 사는 백성들도 그분의 본래 신분을 모른다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는지 모르겠으나, 이웃의 백성들이 공주마마의 신분을 모르는 것에는 마마의 뜻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공주라 알려지는 것이 싫다고, 상궁과 수발궁녀에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가씨라 칭하도록 명하신 것을 대감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옷도 궁녀 정복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옷을 입게 하고요.”



좌의정(左議政) 한희명(韓曦明)은 쓴웃음을 지었다. 은호는 쯧쯧 혀를 찼다.



“아둔한 것들이 지껄이는 소리처럼 청은 공주께서 정말 바보 공주였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지. 아니, 애당초 왕족이 아닌 사대부가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하오나 대감.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공주마마는 이제 한으로 가시옵니다. 장기간에 걸쳐 넓게 본다면 공주마마의 혼사가 결과적으로는 우리나라에 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격조 높은 조각품처럼 잘 다듬어진 희명의 미안에는 조금 날카로운 빛이 떠올랐다.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하였을 뿐, 청은 공주께서 총명하고 침착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한의 국혼 제안이 우리에게 다소 강압적인 요구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완전히 손해만 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으로부터 크나큰 치욕을 받아야 했던 인종(鏻宗) 대왕 이래로, 우리나라는 복수와 부흥의 칼날을 조용히 오랫동안 갈아왔습니다. 재기의 준비가 막바지에 이른 이때에, 우리나라의 변화에 예의주시하는 그들의 날카로운 눈을 가려줄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마는…….”



은호는 고개야 끄덕였지만 주름진 눈매에 묻어나오는 걱정스러움은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꼴에 스승이라 가슴이 더 저미나. 울적해지면서 눈가까지 촉촉하게 젖어지는 양이 싫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영의정(領議政) 노안영의 어깨를 툭 쳤다.



“이보시게, 영상. 자네는 어째서 도통 말이 없나? 혹시 집안에 숨겨놓은 귀한 술이 잘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는감? 행여 내가 불쑥 찾아가 동이채로 꼴딱꼴딱 넘겨버릴까 봐, 꽁꽁 숨겨놓았다던 그 술동이 말일세.”



허공을 휙휙 내젓기까지 하는 과장된 몸짓에 안영은 어이가 없어 픽, 웃어버렸다.



“염려 마시게, 그 술동이는 여전히 잘 있네. 실은 청은 공주마마를 생각하고 있었네. 오늘 조회 때문에 그런가, 마마가 참으로 애잔하이.”



투명한 물속에서 천천히 먹이 풀리듯 비탄이 서서히 퍼져간다. 덩달아 은호의 눈가에 잡혔던 주름도 길게 처졌다. 안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네만, 청은 공주마마를 보면서 마마의 딱한 생은 미리 정해있는 무엇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늘 들었었다니. 허니 마마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생각하면……어쩌면 마마께는 이곳이 아닌 한이 더 나을지도 모르네. 그래도 우선은 그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



안영은 사제지간을 떠나서 세희가 마냥 예뻤다. 그녀가 본디 왕실과는 연고가 없음을 알면서도 친손녀같이 사랑스러웠으며 애틋하였다. 그간 자신은 왕후의 명을 받들어 공주를 혹독하게 교육했다. 마음의 깊은 상처를 어찌 감당해야하는지를 아직 몰랐던 어린 공주는, 힘들고 어렵다고 엉엉 울면서도 배우는 것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별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잘 따라와 주었다. 그것을 보며 죽은 김 소의가 딸 하나는 정말 잘 낳았구나 싶었다.



“영상 대감, 우상 대감. 공주마마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가 어떤 분이신지는 두 대감들께서 가장 잘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여기선 숨죽이면서 살아야 했지만 한에서는 다를 것입니다. 잘 해내실 거예요.”



안영은 희명의 말대로 되기를 진정으로 빌었다. 일찍이 후계자로 길러졌던 진명 공주가 번듯하게 존재하기에, 청은 공주의 입장에서는 결코 드러내서는 아니 되었던 눈부시도록 하얀 날개. 그럼에도 어이하여 왕후께서는 그녀를 굳건하게 키우고자 하셨는지……. 그러나 안영은 앞으로도 왕후께 그 연유를 여쭙지 못할 것이다. 이젠 무의미하니.



“이보게 영상.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우리 예쁜 제자를 보러가는 게 어떻겠나? 좌상도 함께 하실 거지?”


“네. 물론이죠.”


“그럼, 어서 가세나.”



앞장선 은호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방울꽃들이 찰랑 튀기는 것 같았다.






이레는 금방 지나갔다.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자은당을 찾아오니, 번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과는 구별되는 공간인 양 한적하던 이곳에도 잠깐이나마 시끄러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씨께서 공주마마이신지 몰라 뵈었다며 이웃들이 무엇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와 사죄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가영이 재미있다고 웃자 보희는 뭐가 우습냐며 그녀의 팔뚝을 꼬집었다. 보희가 아직도 뒤뜰 장독대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은, 세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써 모르는 척할 뿐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한으로 가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라고 되뇌며, 자신은 잘 해내리라고 최면을 걸었다.


세희는 책읽기를 그만두고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달이다. 선녀가 사용하다가 버린 참빗이라던 세류의 말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아마 여덟 살 때였으리라. 그해에, 이름만 들어왔던 동생을 처음 만났었다. 그땐 왜 그리도 티격태격 싸웠었는지……, 그러나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좋았었다. 누군가 꾸준히 자신을 찾아와주고 진심으로 대해준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세류를 만나지 못했다. 한으로 떠나는 날이 벌써 내일로 다가왔는데……. 일부러 피하는 걸까.


때마침 보희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마마, 세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선을 문가로 옮기니 세류가 세희를 향해 씩 웃고 있었다. 세희가 일어서려하자 세류는 되었다며 손을 내저었다. 사내처럼 차려입긴 하지만, 털썩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모양새가 여염집 아가씨보다는 영락없이 한 손에 부채를 쥐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사내아이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어?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많이 바빴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세자 저하를 뵐 시간을 못 낼까요? 저하야말로 어째서 그간 소식이 없으셨습니까? 저는 저하를 마지막으로 대궐에서나 볼 수 있나 싶었습니다.”


“이제야 와서 미안.”



가영이 다과상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유자차의 달콤한 향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드세요. 하 상궁이 손수 절였는데, 맛이 참 좋습니다.”


“그 전에 내가 너한테 줄 것이 있어. 받아.”



세류는 자신이 들고 왔던 검을 세희에게 내밀었다. 기다란 검집의 한 부분에 느슨하게 묶여있는 진청색깔의 술. 세희는 검집에서 무심코 검을 빼내다가 깜짝 놀랐다. 검신(劍身)은 유리처럼 투명하면서도 강철처럼 단단했다. 장식용 검처럼 아름답지만 칼날이 예리하여 자칫하다가는 손을 베일 수도 있겠다. 초승달의 시린 달빛처럼.



“은월검(銀月劍)이야.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


“이건 왕실 보검이지 않습니까? 헌데 저한테 줘도 되겠습니까?”


“아바마마께서 내게 주셨으니 이제는 내 거야. 은월검을 네게 줄 수 있어. 나한테는 적월검(赤月劍)이 있으니, 괜찮아.”


“하지만…….”


“그거 알아? 쌍월검(雙月劍) 중 하나인 은월검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주인을 선택한대. 자기가 잘난 줄을 알아선지, 대책 없이 제멋대로라고 할까. 헌데 지금 네게 쥐여져서는 얌전하네? 아무래도 네가 마음에 드나보다.”



세희는 다시 검을 보았다. 아직은 세류가 하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서의 공주라면 검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왕후의 뜻을 받들어 배우긴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호신술과 정신 단련을 위해서였지, 세류만큼 검술에 능하지는 않았다.



“그건 내가 네게 주는 내 마음이다. 허니 한에서 살더라도 네가 누구임을 잊지 마라. 나도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니.”



심장에 물기가 찼는지 세희는 못내 서글퍼졌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게 등을 돌려도 나는 네 손을 잡을 것이다. 허니 너는 어디에 가든 굳건하게 살아야 한다.’



왕후 전하의 옥음이 귓전에 맴돌았다. 자신의 손등을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너무도 따스하여 세상 모든 어머니의 손은 다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잊지 말라며 은반지까지 직접 손가락에 끼어주시는데, 왈칵 눈물을 쏟아버릴 뻔했다.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고 그때도 입을 꼭 다물었다. 그 바람에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올렸다.


동경했었다. 군주의 위엄과 자애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왕후 전하를. 황홀할 정도로 고귀한 빛에 넋을 잃을 정도로 반했었다. 차라리 왕가가 아닌 일반 백성으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그분의 신하가 되어 지척에서 보필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니, 세류가 왕이 되어 치세를 펼칠 때에 곁에서 뭐든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랫동안 남몰래 가슴속에 품었던 꿈을 이제는 흘려보내야 한다.



“세희야…….”



세류는 세희를 끌어안았다. 세류의 옷자락이 젖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세희는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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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7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5 27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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