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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235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09.05.20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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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8
추천
32
글자
11쪽

1부: 제1장. 물음. (08)

DUMMY

십이일 십사일의 해가 떠오르매 지붕과 담장에 수북이 쌓였던 눈들이 시나브로 녹으면서 집집마다 백금가루를 흠뻑 뒤집어썼다. 서현과 진우는 현강으로부터 시신을 운구해왔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그의 집으로 향했다. 현강이 허락받은 귀휴(歸休)1)는 오늘까지. 안주인 최명주(崔鳴姝)는 방그레하며 남편의 벗들을 맞았다.



“그이는 지금 객실에 있어요. 이왕 오신 거, 점심도 드시고 가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진우는 미소로 답했다. 명주는 식사를 기대해도 좋다고 응수하듯 생긋거리고는 주방(廚房) 쪽으로 향했다. 싱그러운 사과 향기를 남기고 가는 그녀를 보면서 서현은 말했다.



“집에 처음 보는 여인네의 시신이 있어도 전혀 놀라지 않는군. 역시 명주 씨는 남달라.”


“암, 시신에 겁먹을 여인이 아니지. 현실성이 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현강이 시신보기를 두려워한다면 명주 씨가 주걱으로 머리통을 후려치며 ‘이 못난 인사야. 시신을 무서워하는 네놈이 더 끔찍하다!’하고 소리칠 거야.”


“그래.”



서현은 픽 웃었다. 그들은 수령이 백오십 년을 넘겼다는 은행나무가 멋스럽게 서 있는 객실로 향했다. 건물이 보일 즈음에 현강이 먼저 그들을 발견하고는 여기라고 손짓했다.







겨울에 일부러 창문까지 활짝 열어놓으니 방에는 냉기가 돌았다. 장안의 숯들을 모조리 쓸어왔다는 과장도 선선히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시신이 뉘인 침상 주위에는 까만 목탄이 가득이었다. 마치 깊이 잠든 것 같은 공주의 형색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이었다. 이미 죽은 자의 얼굴이라고 넘기기에는 공주의 마지막 표정이 참 다르게 다가왔다.



“결국은 우리가 당했군.”



서현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씁쓰레한 감정을 도로 삼켰다. 비록 원치 않은 혼인지마는, 그래도 이런 식의 첫 만남은 원치 않았었다.



“서의 왕녀라서 죽어야 한다니, 하늘도 너무 하시지 않냐?”



현강이 내뱉은 말에는 분기가 섞여있었다. 진우는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엄밀히 말해서 하늘이 아닌 사람에 의한 참사였지. 난 이분이 청은 공주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프네.”


“그래도 청은 공주마마시다. 입고 계신 옷이나 몸에 지니고 계셨던 신분패를 보더라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현강은 청은 공주의 노리개를 서현에게 건넸다. 금패에는 주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른손 중지의 은반지도 단순한 장식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빼내어 살펴보니 뒤편에 왕후의 존명이 뚜렷하게 각명되어 있다. 왕후께서 공주에게 하사하지 않으셨다면 공주가 훔쳤다는 소리인데, 그건 맥락에 맞지 않다.



“인정해야만 하는가.”



서현은 금패 노리개와 은반지를 다시 현강에게 주었다. 현강은 소중하게 받아서 적갈색의 상자 속에 넣었다. 철컥 내려닫는 뚜껑만큼이나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 상당히 의문스러워.”



이래저래 시신을 살펴보던 진우가 불쑥 말을 흘렸다. 예민한 시선은 시신의 옷차림을 샅샅이 살폈다. 현강은 이제라도 결과를 뒤엎을 무언가를 찾아냈나 싶어 잔뜩 기대에 찼다.



“뭐! 뭔데? 무슨 이상한 거라도 발견했어?”


“단지……시신의 차림새가 너무 바르게 되어있어서. 서의 사람들이 몰살당했을 정도로 자객들의 공격이 무자비하고 거침없었다던데, 청은 공주로 추정되는 시신의 상태는 지나치게 깔끔하지 않나? 시신을 마차에서 발견했다지만 시신이 전반적으로 깨끗해. 시신 어디에도 혈흔이 없고, 겉옷에는 작은 찢어짐도 보이지 않아. 그렇다고 머리에 둔기로 맞아서 생긴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진우는 혹시나 해서 시신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멀쩡했다. 만일 적에게 살해당하기 직전에 독을 먹어 자결했더라면, 그를 짐작할 어떤 증거가 신체나 겉옷에 남아있어야 했다. 겉만을 봐서는 처참하게 살해당했다고 말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진우는 다시 현강에게 물었다.



“발견 당시 시신과 그 주변의 상태는 어떠했나?”


“뭐랄까, 특이하다면 특이한 거고, 별것이 없다면 별게 아니라고 할까나? 다른 시신들은 상태가 하나같이 좋지 못했는데, 왕실 마차에 계신 청은 공주만큼은 단정했었어. 양손은 배에 가지런히 포개져있었고……, 물론 옷매무새도 잘 되어있었지. 다른 시신들은 심지어 비단옷까지 빼앗겼는데, 공주의 장신구들이 그대로였지. 지금 너희가 보고 있는 대로야.”



작위의 냄새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풍겨졌다. 서현은 공주의 안면을 한 번 보더니, 저고리는 물론이거니와 속적삼까지 벗겨버렸다. 허옇게 드러난 젖가슴에 현강의 얼굴은 벌게졌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말하다가,



“전하, 이미 돌아가신 몸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주마마이신데 속적삼까지 벗기는 것은 좀 그렇지 않……어라?”



그때서야 그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왼쪽 가슴에 비스듬히 자상이 있었다. 서현은 손가락으로 길게 난 상처를 훑었다. 위치를 보나, 각도를 보나, 검날은 분명 심장을 지났다. 그러나 어느 데도 선혈이 남아있지 않았다. 서현의 눈매는 살짝 가느다래졌으며, 진우의 얼굴에는 슬쩍 웃음이 떠올랐다.



“현강이 당도하기 전에 누군가 시신에 손을 댔어. 무자비한 자객들이 공주의 옥체라고 친절을 베풀었을 리가 만무하니, 공주와 관련된 그자가 시신을 닦고 옷을 새로 입혔겠지.”


“그렇담 일행 중에 누군가 살아있다는 뜻이야?”



현강의 억실억실한 눈동자는 진우에게 어서 답하라고 재촉했다. 진우는 눈웃음을 지었다.



“정황을 보건대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크네. 일행의 거의가 자객들의 손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만은 끝까지 살아남았을 정도로 매우 운이 좋았지. 아마도 하늘로부터 엄청난 비호를 받았다든가—.”



진우의 시선은 다시 시신의 면부로 옮겨갔다. 청초하고 아리따운 여인. 죽은 자는 말하지 못하나 산 자는 숨길 수 없는 증거를 남겼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목숨을 구했겠지. 청은 공주는 우리나라의 황자와 국혼을 올릴 몸이었네. 상국인 우리나라와의 향후 관계를 위해서라도 그들은 공주만큼은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고 판단했을 터.”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생존자가 청은 공주일 수도 있다는 거야?”



현강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우는 싱긋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확률은 반반일세. 살아남은 자의 실체까지는 아직 완전히 파악할 수 없네. 우리는 그가 진짜 청은 공주이길 바라지만, 현실은 종종 소망을 보란 듯이 배반해버리지 않나? 그리고 나는, 그가 진짜 청은 공주라면 어째서 금패와 반지를 놓고 갔는지도 의아스럽네.”


“다시 말해서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 하기야 생존자가 무조건 청은 공주라는 보장이 없지. 하……, 맘이 무겁네.”



현강은 맥이 빠졌다. 죽었다가 살아난 강시도 뛰기만 잘하지, 생전처럼 말을 잘하지는 못한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그마한 희망에 기대어보려고 했다가 와당탕 자빠지면서 우울감만 더 깊어질 찰나, 서현이 말을 냈다.



“만일 생존자가 청은 공주라면 어떻게든 장안으로 돌아올 것이네. 현재 한과 서의 세력구도가 어떠함을 잘 아는 왕족이라면, 모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지는 것을 원치 않겠지.”


“정말? 정말 그럴까?”



현강은 반색했다. 서현은 시신의 속적삼을 다시 원래대로 가다듬으면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어디까지나 짐작만 할 따름이네. 허나, 만일 그가 한이 아닌 서로 갔다면 청은 공주가 아니라 어쩌다 살아남은 운 좋은 수행인에 지나지 않을 걸세. 과거 상전에게 충성스런 아랫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본국에 비통한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겠네.”



현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현은 손수 저고리의 옷고름까지 보기 좋게 매어주고는 다시금 잠잠히 시신의 안면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이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거시는 장난질인지, 아니면 선심으로 던져주시는 도움인지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봐야 할 성싶다.



“허면 자네는 이 시신에 관해서는 어찌 설명할 생각인가. 지금은 현강이 손을 써서 시신의 부패를 늦추고는 있지만, 내일이라도 공주의 피살을 폐하와 조정에 알려야하지 않겠나?”



진우가 물어왔다. 서현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청자의 귀에는 조금 사느랗게 느껴질지도 모를 딱딱한 어조로.



“전원 몰살, 장안까지 운구해 온 시신은 청은 공주. 생존자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하여 우리 쪽에서 몸을 닦고 옷을 새로 입힌 것으로 하고.”







세상에 눈꽃처럼 가련한 꽃도 없다. 꽃도 아닌 것이 꽃을 흉내질한 죄의 대가인가. 다른 꽃들은 떨어지면서 이파리나 열매를 남길 수 있으나, 눈꽃은 그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다. 작디작은 몸이 햇볕에 서서히 녹여지는데, 사람들은 그를 보고 보석처럼 예쁘다며 찬탄한다. 투명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은. 눈꽃의 눈물이런가. 하란은 잠시나마 오동나무의 가지마다 핀 눈꽃을 담았던 시선을 거두었다.


봉황전 경내의 작은 후원(後園)을 오로지 황후를 위한 공간이다. 황후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함부로 이곳에 발걸음을 놓을 수 없다. 황제만이 임의로 황후의 후원을 드나들 수 있지만, 이 연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사하란의 후원을 찾지 않았다.



“황후마마. 그로부터 온 서신이옵니다.



제조부인(提調副人) 김운화(金芸花)가 공손히 내미는, 주황색 비단의 서신은 ‘그’를 가리켰다. 하란은 서신을 받아들었다.



“이번엔 생각보다 늦었군. 그가 직접 전해주었나?”


“네. 다소 늦더라도 전서조(傳書鳥)를 이용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더 확실하다고 하더이다.”



운화의 설명에 하란은 픽 웃었다.



“설령 도중에 타자에게 뺏기더라도 그쪽에서 알아볼 내용 같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적지 않는 사람이, 별걸 다 걱정하는군.”


“일처리에 있어서 그만큼 치밀해서이지요. 확실히 해둬서 나쁠 것이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하란은 서한을 펼쳤다. 적혀있는 말은 달랑 한 마디였다.



「完遂(완수)」



“하온데 황후마마.”


“무엇인가. 말하게.”



하란은 서한을 도로 접으면서 답했다. 운화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청성궁 쪽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손정(巽正;오전9시)을 조금 넘겨서 서현 황자가 호부상서와 함께 황궐 밖으로 나갔다고 하옵니다. 금위중장의 서신을 받은 다음이라고 말했으니, 아마도 김 중장이 장안으로 돌아왔나 보옵니다.”


“서의 왕녀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냈나 보군. 허나 너무 늦었어.”



하란은 서한을 주황색 비단과 함께 운화에게 건넸다.



“불태우게.”


“예.”



운화는 두 손으로 받았다. 하란은 다시 산책을 이었다. 훌륭한 수족은 천천히 황후를 뒤따랐다. 너무도 맑아서 죽은 자만이 서러울 하늘빛이다.






1) 귀휴(歸休): 집에 돌아가거나 돌아와서 쉼. 특히 근무 중이거나 복역 중인 사람이 일정 기간 휴가를 얻는 일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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