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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315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09.05.19 01:01
조회
4,421
추천
30
글자
19쪽

1부: 제1장. 물음. (05)

DUMMY

三.



결국 보모상궁 하보희는 울음을 터트렸다. 세희는 마음이 찢어졌으나 보모까지 한에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한은 서와 다르다. 사지(死地)에 가는 것은 자기로 족했다. 해서 가영도 서에 두려고 했는데, 보모가 그건 절대 아니 되노라 거세게 반대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진대 공주마마께서 둘을 용납지 않으시니 하나라도 따라나서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세희는 눈물을 삼켰다.


광덕 삼십칠 년 십이월 구일. 일야 평야만 지나면 한에 당도한댔다. 헌데 하늘 아래 아득하게 너른 벌판이라서 가로지르는데도 보통 이틀은 걸린단다. 이젠 하루만 더 지나면 될까. 그러고 보니 집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푸른 기와가 얹은 집과 아담한 마당이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의 전부였다.


자은당, 어미가 저를 낳았으며 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집. 생전에 어미가 지은 죄들이 지워지지 않은 얼룩처럼 대들보며, 마루며, 섬돌이며, 곳곳에 스미어 있었다. 어미의 이름은 자신이 평생 동안 짊어져야만 하는 슬픔이며, 고통이었다. 그래도 목숨은 버리지 않았다. 곁에 보모와 가영이 있어서 힘겨운 삶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보모의 말대로 가영이라도 데리고 가는 게 나을까.’



세희는 가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영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으며 면주로 은월검을 닦고 있었다. 그녀는 저보다 서너 살이 더 많은데도 다람쥐처럼 눈이 댕그랗고 맑은데다가 뺨도 복숭아처럼 발그레하여 여인보다도 소녀 같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짓는 웃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앵화가 사람으로 변했나 싶었다.



‘그래, 이 아이는 서에 남았어야 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나로 족하다.’



세희는 자신의 심장이 아프다고 토해내는 울음을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가영아.”


“예. 마마.”



영문을 모르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돌아봤던 가영은 세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해냈다. 불안하다. 그래도 일단은 은월검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말씀하시어요. 시키실 일이 있으시옵니까?”


“그래. 네게 시킬 일이 있으니 꼭 해줘야 한다.”


“예. 무엇이든 분부하시어요.”


“한의 국경에 닿으면 너는 서로 돌아가라. 동행한 궁인들을 모두 돌려보낼 생각이니, 너도 그들과 함께 가려무나.”



먹물이 한 점 한 점 뚝뚝 떨어지듯이 너무도 또렷한 명령이다. 가영의 안색이 하얘졌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절더러 서로 돌아가라니요?”


“그래, 돌아가. 너를 데리고 갈 수 없다.”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지요? 저의 충정이 어떠한지를 한번 떠보시려는 것이지요?”


“아니. 꾸밈도 거짓도 아니야. 이것이 내 진심이다. 너는 서로 돌아가라.”


“이러실 수는 없으셔요! 이러시면 아니 돼요! 다른 궁인들은 서로 돌려보내어도 소녀만큼은 곁에 두셔야 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큼은 반드시 마마의 곁을 지켜야만 해요.”



가영의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갔다. 꽃보다 예쁘고 비단결보다 마음씨가 고운 아이. 세희는 진정으로 가영을 울리고 싶지 않았다. 무론 비빌 언덕이 없는 삭막한 타국이니만큼 가영에게서 위로받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영이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이 더 싫었다. 한은 서와는 확실히 다르다.



“아니, 너는 돌아간다. 이것은 주인으로서 네게 내리는 명이다.”


“공주마마!”



가영이 토해내는 부름에 물기가 잔뜩 묻어나왔다. 그녀는 세희의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마마, 이러지 마시어요! 보모상궁마마님도 아니 계신데, 저까지 없으면 공주마마께서 어찌 버티시겠사옵니까? 소녀가 없으면 마마께서는 얼마나 외로우시겠사옵니까?”


“내 안위는 걱정하지 말거라. 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새로 정을 붙이면서 살면 된다.”


“제가 안 돼요, 보모상궁마마님과 약조했사옵니다! 마마님 몫까지 공주마마를 잘 모시겠다고요. 하오니 저를 내치지 마시어요. 저를 데려가주세요!”


“안 돼. 너는 서로 돌아가야만 해.”


“싫사옵니다! 이번만큼은 공주마마의 명을 받들지 않으렵니다! 소녀, 기필코 공주마마를 따라겠사옵니다!”



가영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세희의 마음도 떨었다. 한에서 홀로 살아갈 것이 두려우면서도 가영만큼은 행복하게 사는 양을 보고 싶다는 말을 수없이 토해내며 울었다. 허니 잔인하지만 정을 잘라내야 한다. 생살을 잘라내는 고통을 소리죽여 삼켜야 한다.



“……가영아.”



가영은 고개를 들었다. 어여쁜 얼굴이 눈물콧물로 범벅이다. 세희는 영견(領絹)으로 가영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재차 부탁했다.



“제발 내 말에 따르려무나. 너와 보모는, 불우한 어린 시절에 내게도 허락되었던 행복이었다. 그런 네가 나로 인해 힘들어지는 게, 난 너무도 싫어. 아름다웠던 기억을 소중히 지킬 수 있게 해 줘. 그러니까 제발, 응?”



가영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귀이 여기는 상전의 뺨에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방울 때문이었다. 정말 싫어도……따를 수밖에 없겠구나. 가영은 내키지 않은 대답을 올려야만 했다.



“예……그리하겠사옵니다.”


“고맙구나.”



세희는 미소를 지었다. 가영의 눈에는 상전이 참으로 구슬프고 쓸쓸하게 뵈었다. 상전에게 꼭 올리고픈 말이 있어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말머리를 꺼내보기도 전에,


쿵!


불길한 소리를 내며 마차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가영은 세희를 쳐다보았다. 공주마마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잠깐 밖을 내다 봐야겠사옵니다.”



가영은 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녀는 창을 완전히 가리고 있던 노란 휘장을 살짝 재끼고서 조심히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턱! 가영의 얼굴을 비껴간 화살은 마차의 안쪽 벽에 박혔다. 가영은 크게 놀라며 서둘러 창문을 닫고 다시 휘장을 내렸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 공주마마!”


“느낌이 좋지 않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예에.”



난데없는 상황에 두려워하는 가영을 안정시키고자 의연한 척했지만, 세희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현실은 결국 소망을 배반했다.



“비적이다!”



누군가의 소리침에 연이어,



“어서 마차를 이동시켜! 최대한 빨리 달려!”, “마차를 엄호하라! 공주마마를 보호해!”



행렬을 지휘하는 장군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몹시도 다급한 외침들을 고려하니 간단하게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피비린내를 감지한 세희는 칼자루를 세게 잡았다.


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덜컹거릴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려댔다. 죽음에 직면한 말들이 흥분에 토해내는 괴성이 안까지 들려올 정도다. 이제는 괜찮으리라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마차를 흔들었다. 필경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궁녀들의 것일 터. 세희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마차 밖에서 일어나고 있을 상황을 짐작해보았다.



‘비적의 수가 얼마나 되지? 승산이 있긴 할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은 숫자는 아니다. 계속되는 고함과 처절한 비명, 소름끼치는 쇠붙이소리, 화살에 바람이 갈리는 소리. 온몸의 신경을 건드는 날카로운 소리들은 싸움이 얼마나 격렬한지를 생생히 전달했다. 아무리 도망쳐도 비적들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



끝내 마차가 멈추어버렸다. 마부의 채찍질도, 말들의 울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가영은 흠칫거리더니 머리를 치켜들었다.



“도망치기는 아예 틀린 것 같구나.”



세희는 검을 빼어들었다. 가영이만이라도 지켜내야 한다. 저야 애당초 삶에 미련이 없었기에 예서 죽는대도 상관없다. 하지만 가영인 아니다. 비명횡사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


저벅저벅. 걸음소리가 점차 도렷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멈추었다. 문 상단부의 빗살 사이 창호지에 사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세희는 슬며시 문 쪽으로 다가갔고, 가영은 숨을 죽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복면과 검은 옷.



“공주가 여기 있다!”



세희는 즉시 검으로 비적의 왼쪽가슴팍을 찔렀다. 사내의 동공이 일순간 커졌다. 세희는 검을 빼내자마자 곧바로 문을 잠갔다. 털썩, 비적의 몸이 자빠지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신 차리자. 제발 정신 차려! 네가 겁먹으면 가영이도 위험해져!’



그러나 가영은 눈치를 채고야 말았다. 상전이 한 치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적잖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말이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나의 아씨는 사실은 너무도 여리고 약했는데……. 조관들이 당신을 죽이리라는 공포감을 억누르고자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가련한 분임을 잊고 있었어.’



가영은 슬그머니 웃옷 앞섶에 손을 대었다. 진양을 떠나왔을 때부터 줄곧 겉옷 속에 감추고 있었던 단검의 칼집이 잡혔다. 한의 깊은 내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공주마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으라며 보모상궁마마님이 주셨다. 공주마마를 지킬 수만 있다면 미련 따윈 없다. 가영은 조심스레 세희를 불렀다.



“마마.”



세희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눈이 떨고 있었다. 가영은 싱긋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옵니다.”


“나도 그렇길 바라지만 상황이 너무…….”


“소녀를 믿으시옵소서.”



그제야 세희는 가영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설마…….”


“저들이 이쪽을 알아차릴지도 모르니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시간이 없습니다. 무조건 제 말씀에 따라주셔요. 이 마차에는 작은 짐칸이 있사옵니다.”


“짐칸?”



세희는 마차 안에 소품이나 간식을 싣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이 있음을 떠올렸다. 헌데 어째서 가영이 왜 그곳을 언급하는 거지? 설마!



“안 돼, 난 그럴 수 없어. 내 어찌 너를 버리고 내 목숨을 구하겠느냐?”


“고집 피우지 마시옵소서. 공주마마께서 혼자 저들을 상대하신다는 게 더 무립니다. 마마의 목숨도 지키기 힘든 이 상황에서 소녀까지 살리실 수는 없어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옵니다. 허나 운이 따라 한 사람은 살릴 수 있다면, 제가 마마를 위해 희생하겠사옵니다. 마마를 보필하고 지키는 것이 소녀가 존재하는 이유이니까요.”



가영은 즉시 막을 걷어냈다. 두꺼운 합판으로 둘러싸인 짐칸은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없어 보였으나 여유 공간이 적었다. 성인 여자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했다.



“들어가셔요. 시간이 없사옵니다.”



세희는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전은 너무 다정하고 착했다. 순한 성품으로만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도 각박하고 어렵건만. 누군가는 곁에서 이분을 보살펴줘야 할 텐데. 진심으로 영원토록 곁에서 모시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소녀를 죽이실 생각이시옵니까? 어차피 서로 돌아간다고 해도 전 자결할 생각이었습니다. 공주마마를 홀로 한으로 보내놓고 어찌 소녀 혼자 편히 산답니까? 하오니 얼토당토 않는 고집이랑은 집어치우셔요.”


“뭐……?”



애당초 자결할 생각이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세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가영은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존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용서해주셔요.”



가영이 칼자루의 끝으로 세희의 옆머리를 찍었다. 세희는 띵-하는 충격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몸은 옆으로 쓰러졌다. 가영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먼저 세희의 옥색 두루마기를 벗긴 다음, 단번에 그녀를 짐칸으로 밀었다. 은월검도 그 속으로 던졌다. 적들이 알지 못하도록 장막을 완전히 내리고 안석(安席)들과 담요 따위를 모조리 밀쳐뒀다. 그리고 옥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단검을 챙겼다.


마차 밖으로 나가기 전, 가영은 자신이 단단히 가려둔 짐칸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로써 나의 아씨는 무사해지리라.



‘이 미천한 것이 공주마마의 행복이라 말씀하셨사옵니까? 제게 그리 말씀해주셔서 저는 무척이나 기뻤사옵니다. 공주마마는 제 모든 것이었사옵니다. 존재의 이유이자 희망이지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라옵니다.’



가영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역시나 비적들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가영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굴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네가 서의 청은 공주냐?”


“천한 자가 매우 무례하구나. 내가 너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런 일을 저지르느냐!”



조광훈(曺光薰)은 큭 웃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다니. 긍지와 명예를 짓밟히는 것을 목숨을 잃는 것보다 치욕스러워하는 왕족들에게나 나타나는 눈이다.



“서에서는 계집에게도 무예를 가르친다더니 사실이더군. 남자들만 상대해도 녹록하지 않은데 여자들까지 덤벼드니, 솔직히 우리도 좀 벅찼어. 네 잘난 면부를 보려고 나는 수하를 서른다섯이나 잃었다.”


“듣기 싫다! 네놈들이 얼마나 죽어나갔던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다!”


“허나 너의 목숨을 완전히 끊을 수만 있다면 서른다섯의 목숨이 아까우랴? 일국의 공주이니, 목숨 값은 높이 쳐 주마.”


“말해라! 누가 이런 일을 사주하였느냐? 네놈들이 비적일 리가 없다. 필경 모종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공격한 자객들이다! 비적이 아니다.”



수괴의 왼편에 서있는 매부리코 사내가 움찔거렸다. 광훈은 껄껄 웃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왕녀인 줄 알았건만, 아닌가 보다. 그는 칼등으로 가영의 오른쪽 손목을 세게 쳐냈다. 단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죽을 계집이 배후를 논해서 무얼 하려느냐? 정 궁금하거든 저승의 시왕(十王)들에게 물어보아라.”



남자의 검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가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 따윈 무섭지 않다. 상전을 무사히 지켜낼 수만 있다면 백 번도 더 죽으리라.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나의 아씨. 마지막 가는 길에 마마의 다정한 웃음꽃을 한 번 더 보지 못하는 것이 제 유일한 한이어요.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혼을 잃은 몸뚱이는 나무토막보다 못하다. 광훈은 피 묻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젊은 여자의 몸을 보며 입맛을 다지는 흥칠에게 말했다.



“이제 막 죽은 계집이니 살을 주무르는 느낌이 썩 괜찮을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두령!”



흥칠은 냉큼 가영의 시신을 들쳐 맸다. 두 눈은 음흉하게 반짝였다.



“내 잠시 따로 볼 일이 있으니, 다들 예서 기다리고 있어라. 마차나 수레, 시체 들을 뒤져 값나가는 것이 나오면 마음껏 가져라. 그 정도는 주인님께서도 용납하실 것이다.”



다섯 사내들은 크게 기뻐하며 탐욕이 이끄는 대로 흩어졌다. 광훈은 아귀 같은 그들은 뒤로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쾌락을 뿜어낼 장소를 찾아다니던 흥칠은 동료들이 먼저 털고 간 빈 마차를 골랐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다. 세희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배 위에 뭔가가 있는 듯했는데, 확인하니 은월검이었다. 세희는 무심결에 가영을 부르려다가 입을 꼭 다물었다. 심장이 쑤셔왔다. 왼쪽 가슴팍을 움켜잡고서 고통을 삼키는데 불길한 소리가 감지되었다. 서서히 걷어지는 막. 세희는 칼자루를 힘껏 쥐었다.


놀란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귀한 패물이라도 숨겼나 싶어서 고의적으로 모아놓은 듯한 안석과 담요를 모조리 밀쳐내고 막을 들었더니, 웬 여자가 저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뭐야? 설마, 너―헉!”



세희는 검집의 끝으로 세게 사내의 배를 가격했다. 사내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무기를 찾았지만, 이미 늦었다. 칼자루를 잡기도 전에 섬뜩한 검날이 정확히 심장부를 노렸다. 커억! 사내의 입에서는 거친 신음소리가 내뱉어졌다. 세희는 사내의 가슴에 박았던 검을 아주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렸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몸뚱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세희는 어서 가영을 찾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유야 어떠하든 사람을 죽였다고 마구잡이로 밀려드는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그녀는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우선 눈에 들어온 적은 셋. 그들은 시체들을 뒤지며 값진 물건들을 취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땅에는 가영의 손에서 떨어진 단검이 있었다. 세희는 그것을 앞으로 힘껏 던졌다.


비단옷을 걸쳐보면서 좋아하던 남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푹 고꾸라졌다. 옆에서 시체의 손목에서 금팔찌를 빼내던 동료는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동료의 등에는 시퍼런 단검이 박혀 있었다.



“이, 이봐! 이게 무슨 일이야!”



얼른 동료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대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야겠다는 생각했지만 몸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칼날의 차디찬 기운이 목덜미의 피부 아래 혈관을 타고 몸속 곳곳으로 퍼져갔다. 무고한 사람을 무참하게 살해해놓고 저만큼은 살고자하는 바람에 뉜지도 미처 확인하지도 못한 존재에게 애원했다.



“사, 살려줘…….”



세희는 검으로 주저 없이 사내의 목을 베었다. 사내는 제대로 된 비명 한 번 못 질러보고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죽었다. 세희는 첫 번째 사내의 등에 박았던 단검을 다시 빼들었다.



“너, 뭐야!”



마차들을 돌면서 단단히 한몫을 챙긴 덕팔은 동료들에게 자랑하고자 왔다가 뜻하지 않게 그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네 이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게냐!”



덕팔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양손 가득히 들고 있던 패물들을 내팽개치고 검부터 찾았다. 하지만 검집에서 검을 빼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새 덕팔의 눈앞으로 옮겨온 여자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챙! 쇠붙이가 부딪히면서 내는 신경질적인 소리.



“도대체 너 누구냐! 어디서 튀어나온 계집이야?”


“…….”



세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핏빛 분노가 이끄는 대로 은월검을 움직였다. 현란한 검술 같은 건 모른다. 적이 저를 위협하면 필사적으로 막았고, 적에게 틈이 보이면 주저 없이 공격할 따름이다. 아주 오래전, 검술을 익히는 데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사람의 급소들과 혈맥들을 외워뒀던 것이 상당히 요긴하다. 그때는 이런 일이 생기리라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는데, 기막히다. 은월검이 덕팔의 허벅지를 베었다. 덕팔이 반사적으로 왼쪽 다리를 뒤로 빼려다가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다. 몸이 갸우뚱했다. 안색이 사색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으아아악!”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요란한 비명이다. 다른 쪽에서 일을 보던 남자가 깜짝 놀라며 튀어나왔다가 저승사자와도 같은 세희를 보자바자 냅다 뛰었다. 하지만 세희도 기어이 쫓아가 그의 목숨을 끊어놓았다. 털썩 쓰러진 남자의 등판이 피로 벌겋다.



‘이것으로 네 명.’



세희는 시신을 노려보던 냉담한 시선을 거두며 저쯤 떨어진 마차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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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부: 제1장. 물음. (06) +3 09.05.19 4,436 33 11쪽
» 1부: 제1장. 물음. (05) +3 09.05.19 4,422 30 19쪽
5 1부: 제1장. 물음. (04) +3 09.05.19 5,456 32 21쪽
4 1부: 제1장. 물음. (03) +4 09.05.18 6,348 33 12쪽
3 1부: 제1장. 물음. (02) +5 09.05.18 6,371 36 11쪽
2 1부: 제1장. 물음. (01) +4 09.05.18 10,354 74 13쪽
1 1부: 序. +30 09.05.18 24,669 7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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