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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금흔의 서재입니다.

무연무성(無硏武成)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류금흔
작품등록일 :
2013.04.16 22:07
최근연재일 :
2013.12.27 17:37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265,088
추천수 :
2,361
글자수 :
281,912

작성
13.06.04 22:05
조회
4,020
추천
42
글자
22쪽

형문산의 은거고수-16

세상에 모든 행운을 다 가진 소년 홍무연. 세상에 모든 불행을 짊어진 소년 임무성. 세상에 모든 슬픔을 가지는 소녀 화소은. 세 남녀가 그려가는 무림이야기.




DUMMY

육 개월 전, 유건이 무성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던 그 밤.

무성은 유건을 돌려보내고 죽을힘을 다해 묵언을 휘둘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제야 자신이 왜 사문에서 그런 멸시와 천대를 받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대로 부정해 버리면 그만일까?'

문득 떠오른 의문은 이내 머릿속을 떠나 뼛속 깊은 곳에 묻어 버린다.

부정을 하려 하면 할수록 그의 눈에 각인된 무상신도는 더 이상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묵언을 검집에 돌려놓고 유건이 놓고 간 무상신도를 들어 보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을 통해 전달된다.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짧은 도신, 고작 일척 남짓한 칼날에 보름달에 비쳐든다. 무상신도는 서슬 퍼런 한기를 줄줄이 뿜어내고 있었다.

무성은 눈을 돌려 별채 주변에 널린 자신의 머리통만 한 바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무상신도를 들어 바위를 느릿하게 내리찍었다.

쩌적.

그저 살짝 스친 것 같은 데도 불구하고 무상신도에 닿자마자 바위는 정확히 두 동강이 나버렸다.

"이 정도라면 제 아무리 금강불괴라도 별 수 없겠는걸?"

피식, 웃음이 나온다.

달빛을 향해 무상신도를 들어 보였다. 보잘것없는 달빛이건만 눈이 부시도록 빛이 반사 되어져 나왔다.

"크큭... 크크크큭.... 크하하하하하."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다 이내 터져 나오는 웃음, 절대 자신의 인생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증거물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우스워서 일까?

아니다.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들려진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고 일그러진 그의 눈가를 타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젠장... 젠장...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런 짐을 남기신 겁니까?"

참았던 울분이 터져 나오고 평생 입에 담아 보지도 않았던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날이 밝아 오고 반쯤 머리를 내민 붉은 태양이 햇살을 뿌리기 시작하는 데도 무성은 여전히 그 상태였다. 무릎을 꿇고 오른 손에 쥔 무상신도만 멍하니 내려다 본 채로…….

먼 동쪽에서 태양이 비쳐오자 무성을 스르르 자리에 일어선다. 그리고 손에 들려진 무상신도를 잘 갈무리하여 품에 넣었다.

뽑혀 나오는 대검, 다시 묵언을 손에 든 무성은 천천히 천강검식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기분이 나쁠 때나 슬플 때, 기쁠 때, 화날 때……. 감덕윤에게 천강검식을 받기 전까지는 천강검법을 연마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천강검식이었다. 아니 혈영육식이다. 내공이 부족하여 후반삼식은 펼쳐 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다.

죽기를 각오한 것일까? 지금 무성이 펼쳐내고 있는 천강검식은 거칠고 난폭했으며 온 몸 가득 살기를 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힘이 다 했는지 묵언을 놓치고 말았다.

텅그렁, 털썩.

묵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성도 풀썩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린다.

"젠장... 왜 안 되는 건데? 내가 못 할 줄 알아?"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꾸역꾸역 다시 일어서 묵언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혈영육식을 펼쳐 낸다.

"무성오빠, 안에 있죠? 문 좀 열어봐요? 오늘 온종일 별채에 틀어 박혀서 대체 뭐하는 거예요?"

"야! 임무성. 당장 안 나와? 하루 종일 일도 안 나가고……. 죽고 싶어? 빨랑 이거 못 열어?"

별채 문 밖에서는 의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건만 무성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떨쳐 내야 해! 떨쳐 내야 해.'

수도 없이 머리를 비집고 드는 상념에서 멀어지고자 묵언을 휘둘러 대고 있는 무성은 세상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무성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환하게 밝았던 세상이 점점 어둠에 잠식당해 갈 때 쯤, 무성은 또 다시 묵언을 놓치고 말았다. 이번이 벌써 쉰 번째였다.

'아, 몇 번째였지? 주.. 주워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왜지?'

이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어라계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음에도 점점 멀어져 가는 의식에 무성은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다.

'풋, 이렇게는 죽지 않겠지? 그런데 왜 눈앞이 가물가물한 거지? 목걸이도 없는데…….'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닫힌다.

******

무성은 문득 자신이 이상한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드넓은 초원, 무성은 삼천의 기마대와 함께 서 있었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무성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연신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 전방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온다. 갈치건이다. 모두 정신 차려라!"

무성은 눈을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혈혈단신 일기일마로 긴 창을 꼬나 쥔 채 용맹하게 삼천의 기마대로 질주하고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무성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의 눈에는 공포감이 젖어 들고 말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무성은 다시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혈혈단신, 아니다 그의 뒤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오백의 기마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흑풍대다. 전열을 가다듬어라. 창병 앞으로. 궁수대 준비!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무조건 쏴버려!"

전방에서 지휘를 하는 장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그 병사들 가운데 있는 무성은 병사들의 마음속에 짙게 깔린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선 싸움이 안 되겠는데……?'

병법에 대해 잘 모르는 무성도 그리 느낄 정도였다.

갈치건이라는 사내 붉은색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푸른 광망이 번뜩이는 눈을 한 채 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차 없이 앞으로 내던진다.

슈와아악, 퍽!

"커헉! 이... 이럴 수가……."

맨 앞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던 장군은 눈을 내려 자신의 가슴에 꽂혀있는 창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근 이백 여장을 격하고 날아온 창이 정확히 자신의 가슴에 꽂힐 것이라는 것을 그는 죽는 순간에야 알 수 있었다.

장수를 잃은 기마대는 더더욱 혼란에 빠져 버렸다. 창병들은 갈치건과 흑풍대를 향한 두려움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바빴고 궁병들은 아예 활에 살을 먹이지도 못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런 게 죽음의 공포인가?'

무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갈치건이 기마대와 조우했다. 갈치건은 인정사정없이 쌍검을 빼들고 정신없이 휘두른다. 아니 법식이 있었다. 혼란스러워 보이고 어지러웠지만 분명 법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단 한칼에 세 명의 목이 하늘로 튀어 오른다.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흑풍대가 기다란 창을 앞세우고 기마대를 들이쳤다.

마치 천둥벼락이 몰아치듯,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가듯이 삼천의 기마대는 변변한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죽어 나자빠지고 있었다.

연신 병사들을 무 베듯 베어버리고 짓쳐든 갈치건이 무성의 앞에서 살짝 주춤거리더니 이내 세차게 말을 몰아 무성에게 달려온다.

"으으... 으아아아아..."

몸을 돌려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마치 땅의 속박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갈치건이 두 눈에서 새파란 광망을 흩뿌리며 다가왔다. 너무 빠른 속도, 놀라 부릅뜬 눈에 갈치건의 검이 가득 아로새겨졌다.

"안 돼! 도망쳐야 돼! 이대로는 죽고 말아. 안 돼, 안 돼."

갈치건은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을 사냥하기라도 하듯이 양손에 쥔 쌍검을 교차해서 들더니 전광석화같이 무성에게 다가 들어 목을 베어 버렸다.

서걱.

"아...... 이대로 죽는 건가?"

무성은 정신을 놓아 버렸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대장은 대단하다니까, 어찌 화살도 피해가고 창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것인지……."

"이봐, 그러니 무적신장소리를 듣는 것 아니겠어? 내가 흑풍대가 된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라고……. 이대로라면 후량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겠지? 하하하."

갈치건은 부하들이 뭐라고 떠들건 입가에 작은 미소만 단채 술만 홀짝 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불가에 모여 오늘의 성과를 논하고 있을 때, 어둠을 뚫고 관복을 걸친 사내가 흑풍대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다른 볼 일은 없다는 듯 정확히 갈치건을 향해 다가와 말했다.

"갈대주, 군주께서 찾으시오. 함께 가주시겠소?"

"군주가? 날? 왜?"

거만한 표정,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그토록 너그럽더니 그 외의 사람에게는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갈치건이 그렇게 살기를 줄기줄기 뿌리자 관원인 듯 한 자는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며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오.. 오오.. 오늘의 전과를 치.. 치하.. 하고 싶으시다 하였습니다."

"그러냐? 안내해라."

갈치건이 일어서며 살기를 풀자 관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갈치건을 안내했다.

그의 뒤에서는 부하들의 장난 섞인 농담이 이어졌다.

"오오, 대주님, 오늘 드디어 동방화촉을 밝히시는 겁니까?"

"축하드립니다요. 하하하하."

"휘이이익, 부디 잘 생긴 남자아이를 생산하십시오. 클클클."

갈치건은 부하들이 뭐라고 하건 아무상관 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이며 관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대화전이라는 전각이었다. 관원은 제 할 일 다 했다든 듯이 얼른 빠져 버렸다.

"안쪽에서 기다리십니다."

"수고했다."

갈치건은 말을 마치고 대화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홍등이 군데군데 달려 있고 가운데에는 온갖 음식들이 가득 놓여진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탁자에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도 되는 듯이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갈치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주, 어인 일로 부른 것이오?"

갈치건이 담담하게 말을 내뱉자 군주라 불린 여인은 천천히 갈치건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갈장군님, 이리 와서 제 술 한잔 받으셔요."

여인이 손을 잡아끌자 갈치건은 마지못해 움직인 다는 듯이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여인은 갈치건의 손에 옥배를 쥐어주며 호박색의 술을 쪼르르 따랐다.

"오늘의 전과를 경하 드려요."

웃고 있지만 떨리는 손은 숨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갈치건은 그녀의 떨리는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영현, 그대도 내가 두렵소?"

여인은 갈치건이 손을 잡는 순간 헛바람을 들이켰지만 이내 배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그럴리가요."

"그럼 왜 이리 떨고 있는 것이오?"

"오늘은 유독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영현의 말에 갈치건은 그녀를 확 끌어 당겨 자신의 무릎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의 두 팔로 영현의 작은 몸을 꼭 안으며 말했다.

"이러면 덜 추울 것이오."

무성은 갈치건이 그리 나오자 얼른 고개를 돌려 버리려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우우.. 대체 왜 이런 게 눈에 보이는 것이지? 침착해야 해.'

"아잉, 갈장군님도 참... 그러지 말고 한잔 쭉 들이키세요.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술이에요."

영현은 갈치건의 품에서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연신 술을 마시게 했다.

갈치건이 꽤 술에 취해 스르르 잠이 들자 영현은 품에서 화려한 장식이 인상적인 소도를 꺼내 들었다.

'헉. 저... 저것은 무상신도? 설마…….'

설마 하는 순간, 영현은 가차 없이 갈치건의 왼쪽 가슴에 무상신도를 꽂아 넣었다.

무성은 마치 자신이 찔리기라도 한듯 커다란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어 버렸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성은 가물거리는 시선을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푸른색의 도사복을 입은 남녀가 서 있었다.

"정확하게 이 어라계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라고?"

남자가 묻자 여자는 조용히 무언가를 바닥에 적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종남산이에요. 으음... 계산 대로라면 조사동 인근이 되겠네요."

"사매, 그것 확실한 거야? 난 도통 모르겠는데 말이지."

"호홋, 사형. 절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남자가 당황했는지 말을 얼버무리자 여자는 그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 계산은 정확하니까요. 아시잖아요. 선고께서도 혀를 내두른 제 실력 말이에요."

"으음.. 확실히 그런 일도 있었지. 그럼 다음은 무얼 하면 되지?"

그 때쯤 흐릿했던 무성의 시선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변 경관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반구형태의 석실형태였다. 동서남북에는 제단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각각 세 개의 함이 오르다 있었다. 함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무성이 아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손을 맞잡고 바라보는 석실의 중앙에는 남자의 신장에 두 배 정도 되는 높이에 장정 여덟이 팔을 뻗어야 될 정도의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었다.

푸른색 도복의 남녀, 무성은 왠지 모르지만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 때 무성의 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이곳은 나의 무덤이다. 크크큭, 우습지 않나? 생전에는 신처럼 받들어 놓고 끝내는 저주스러운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은 귀신의 집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야. 저 돌이 바로 내 혼령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저 속에 나의 살과 피 백골, 그리고 원한이 서려 있지.]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어라!"

무성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큰 소리를 질렀는데도 자신의 앞에서 중앙의 바위덩어리를 바라보고 있는 두 남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후후후, 성급해 하지마라. 곧 저 두 사람이 날 해방 시켜 줄 테니까…….]

목소리는 다시금 무성의 귀에 속삭이듯 말을 했고 무성은 마치 목소리가 시킨 것처럼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생전에 자신의 부모를...

"사형, 우선 동쪽과 남쪽의 세 개의 함중에서 가운데 것들을 제단에서 치워 버리시면 되요. 제가 북쪽과 서쪽을 맡을게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순서 인데 동쪽과 북쪽, 서쪽과 남쪽의 함을 동시에 제단에서 내려야 해요."

"알았어. 신호만 주면 알아서 할께."

서화영의 말에 임원규는 냉큼 동쪽을 향했다. 여인도 곧 북쪽의 제단으로 가 가운데 있는 함의 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사내에게 눈짓을 준다.

"그럼 사형. 셋에 동시에 빼는 거예요. 하나, 둘, 셋."

텅, 텅, 그르르르르르릉.

함을 치우자 요란한 기관음이 석실을 진동시켰다. 놀란 임원규가 서화영에게 물었다.

"헉, 사매. 대체 뭐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

"놀라실 것 없어요. 어라계를 해방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에요. 다음은 남쪽과 서쪽이에요."

"근데 말이야. 사매. 난 아무래도 이 거대한 바위가 상당히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데 사매는 그렇지 않아?"

"아니오, 그저 커다란 돌덩어리일 뿐인데 두려워할게 뭐 있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봉인 해제를 서두르자구요. 지금도 그 제갈가의 소공자께서 열심히 이곳을 향해 뚫고 들어올지 모를 일이잖아요."

"알았어."

두 사람은 이번에는 남쪽과 서쪽의 함을 제거 했다. 똑같이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석실 전체를 한참동안 흔들었다.

"아유 대체 이함에는 뭐가 들어 있기에 이렇게 무거운 거야?"

임원규가 함을 툭툭 쳐 보이자 서화영은 이내 빙긋 웃으며 자신이 내려놓은 함을 살짝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철괴가 잔뜩 들어 있었다.

임원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내려놓은 함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기왕이면 금괴라도 넣어 두시지."

"호호, 그러게 말이에요. 자 다음은 맨 왼쪽에 있는 함을 치워야 해요."

두 사람은 차례차례 제단위에 있는 함을 치워냈다. 마지막으로 서쪽과 남쪽에 있는 함을 치워 내자 지면이 흔들릴 정도의 땅울림이 전해졌다.

우르르르르르르릉.

두 사람은 그 덕에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사매, 대체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

임원규가 묻자 서화영은 손가락으로 제단을 가리켰다.

"보세요."

무거운 철괴가 가득한 함을 치웠음에도 위로 올라야 할 제단이 되레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제단이 완전히 지면과 평평해지자 땅울림도 서서히 멈춰들었다.

[흐흐흐, 이미 저주는 시작되었지. 나의 안식을 방해한 죄로 나는 저들에게 지독한 저주를 걸었다. 남자에게는 화살비속에서 죽게 하였고 여자에게는 쇠꼬챙이 찔려 죽게 만들었지. 원래라면 둘이 동시에 죽여야 마땅하건만 무슨 이유인지 여자는 꽤 오랫동안 살았더군. 그나마도 내 봉인을 풀어 준 것이 기특하여 가볍게 내린 벌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이 무엇이기에 내 부모님께 그런 더러운 저주를 내린 것입니까?"

[내 이름은 갈치건. 후연의 대장군이다.]

"갈치건?"

무성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곳이 그의 무덤이라면 그는 그 때 분명 죽은 것이 확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화려한 무덤을 지어 놓은 것일까?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무성이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다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웃기는 소리. 그 놈들이 나의 넋을 위로해? 공적을 치하해? 그 놈들은 나를 두 번 다시 환생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묶어 둔 것이다. 온갖 더럽고 저주스러운 물건들 잔뜩 쌓아놓고 말이야. 그리고 그녀도 이곳에 같이 묻혔다.]

"설마, 영현이라는 그분도……?"

[맞다. 무상신도의 주인으로 이곳에서 내 영혼을 봉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지. 크크큭 죽어서도 끈질긴 인연은 그렇게 붙어 다니는 모양이야.]

그 때, 잠시 잠잠했던 땅울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임원규는 얼른 서화영을 끌어 당겨 안았다.

"사매,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저도 모르겠어요. 혹시 갈장군의 분노일까요?"

"안 되겠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고……."

"네, 그래요."

두 사람은 서둘러 환풍구를 통해 장군총을 벗어나버렸다.

"아버지,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무성이가 여기 있다구요."

무성은 장군총을 벗어나는 두 사람을 향해 애절하게 외쳤지만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부질없는 짓이다. 너는 본래 이곳에 없는 존재이니……. 그보다 자세히 보거라. 저 커다란 돌이 움직이는 것을…….]

갈치건의 말대로 커다란 돌은 점점 부유하고 있었다. 희미한 푸른 광망에 쌓인 채…….

"대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더러운 이 땅을 벗어나 정화되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대체 저 커다란 돌이 무엇이기에 여행을 떠난 다는 것입니까?"

[너는 바보로구나. 저 돌이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저 바위인 것이다. 그 놈들은 저 커다란 바위 속에 나를 가두었다. 정화되기를 기원하면서... 내 원념이 사그라지기를 바라면서 말이지.]

커다란 바위는 어느새 장군총 꼭대기 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정화되긴 한 것입니까?"

[그 원한이 정화되어 질 것이라 생각하느냐? 수만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원한을 고작 천년 남짓한 시간에 정화될 거라 생각한 그놈들도 그렇고 너도 바보로구나.]

그도 그렇구나. 라는 생각을 할 때 문득 무성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럼 갈 대장군님. 그 목걸이는 대체 무엇입니까?"

[생전에 내가 차고 잇던 유일한 장신구였다. 그것도 영현과 함께 잠들었을 것인데 멍청한 네 어미가 무상신도와 함께 그것을 가져가 버렸지.]

"그... 그랬군요."

무성은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위는.... 그 커다란 바위는 어디 갔습니까?"

[걱정말아라. 곧 만나게 될 테니……. 네 몸을 통해 나를 현신하게 되는 날. 세상은 여태껏 보지 못한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흐흐흐흐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분명 무언가 좋게 풀어 볼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성의 외침은 공허하게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을씨년스럽기 만한 장군총에 메아리 치고 있었다.

************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억!"

다시 눈을 뜬 무성은 퍼뜩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아, 의원의 별채 인가? 그것은 꿈이었나?"

무성은 멍하니 앉아 마치 실제처럼 생생히 기억나는 꿈을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뇌리에 온전히 남아 있는 두 남녀의 모습…….

"아버지... 어머니……."

'정말 그의 저주대로 된 것일까? 그는 왜 두 분께 그런 저주를 내린 것이지?'

의문투성이였다. 그가 왜 죽게 되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살해당한 당사자가 그 이유를 모르는 데 무성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하지만 그 물건은 어르신이 가지고 계시니……."

무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별채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밖이 꽤 소란스러운 것 같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 세엣!"

우당탕탕.

"무성오빠, 괜찮아요? 다친데 는 없어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광장한 힘에 떠밀려 널브러져 있는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부를 묻는 의영의 모습이 눈에 가득 비쳐 들었다.

'너도 꽤 힘들겠구나. 이 못난 오라비 덕에 이런 고생을 다 하고...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곳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되겠군.'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일어나 탑처럼 쌓여진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감상평, 댓글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질타도 감사히 받아 들이겠습니다.


작가의말

으음... 뭔가 정신없네요. 죄송합니다.

썼다 지우기를 거의 서른번쯤 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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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남무성, 북무연-1 +4 13.12.27 1,445 41 16쪽
49 강호의 이단아들 -15 +1 13.12.19 1,576 35 15쪽
48 강호의 이단아들 -14 +7 13.07.14 2,215 38 12쪽
47 강호의 이단아들 -13 +5 13.07.11 1,552 40 13쪽
46 강호의 이단아들 -12 +5 13.07.09 1,811 41 17쪽
45 강호의 이단아들 -11 +3 13.07.07 3,147 32 9쪽
44 강호의 이단아들 -10 +4 13.07.06 2,176 29 16쪽
43 강호의 이단아들 -9 +1 13.07.03 1,708 31 12쪽
42 강호의 이단아들 -8 +5 13.07.01 2,124 33 14쪽
41 강호의 이단아들 -7 +4 13.06.27 1,905 39 14쪽
40 강호의 이단아들 -6 +5 13.06.24 2,379 38 16쪽
39 강호의 이단아들 -5 +2 13.06.19 2,663 33 17쪽
38 강호의 이단아들 -4 +3 13.06.16 2,851 37 21쪽
37 강호의 이단아들 -3 +3 13.06.13 2,820 39 17쪽
36 강호의 이단아들 -2 +2 13.06.11 2,900 34 14쪽
35 강호의 이단아들 -1 +2 13.06.08 4,510 42 19쪽
» 형문산의 은거고수-16 +2 13.06.04 4,021 42 22쪽
33 형문산의 은거고수-15 +3 13.06.01 4,434 46 14쪽
32 형문산의 은거고수-14 +7 13.05.30 3,782 49 15쪽
31 형문산의 은거고수-13 +3 13.05.28 4,515 54 16쪽
30 형문산의 은거고수-12 +1 13.05.26 5,024 54 10쪽
29 형문산의 은거고수-11 +4 13.05.25 4,578 44 17쪽
28 형문산의 은거고수-10 +1 13.05.25 4,189 46 7쪽
27 형문산의 은거고수-9 +3 13.05.22 6,435 48 12쪽
26 형문산의 은거고수-8 +3 13.05.17 5,689 46 9쪽
25 형문산의 은거고수-7 +1 13.05.16 4,725 50 12쪽
24 형문산의 은거고수-6 +5 13.05.15 6,340 55 14쪽
23 형문산의 은거고수-5 +4 13.05.14 6,582 55 11쪽
22 형문산의 은거고수-4 +5 13.05.12 5,393 52 14쪽
21 형문산의 은거고수-3 +4 13.05.12 5,947 6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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