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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크 님의 서재입니다.

머큐리 [추억편]

웹소설 > 자유연재 > 드라마, 판타지

완결

이루크
작품등록일 :
2019.12.26 20:08
최근연재일 :
2020.09.12 15:27
연재수 :
3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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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321
글자수 :
2,632,291

작성
20.09.0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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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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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제313화 - 이별 준비하는 사람들(중)

DUMMY

-회상편-

늦은 저녁, 동주는 창밖의 전경을 응시하며 어떤 사색에 골똘히 잠겨 있다. 어젯밤 동주 연구실로 세혁이 갑자기 불시에 들이닥쳤다.


“저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하다니까요?”


유간호사가 세혁을 못 들어가게 말리고 있다. 동주는 연구실에서 태훈과 면담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헤~ 거참! 아가씨.. 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니까? 내가 워낙에 바쁜 사람이야! 면담 끝날 때까지.. 안에서 기다린다고 내가 설마 고매하신 박사님께 해코지나 하려고 찾아왔겠나.”


세혁은 예의라고는 눈곱만치 없이 아주 무례하고 거만하고 태연하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유간호사 당황한 얼굴로 문전 앞에서


“아니야.. 우리 얘긴 다 끝났어요. 타이밍은 정확하신대요? 실례지만.. 누굴 찾아오셨는지?”


“한동주 박사님이 어느 쪽?”


세혁이 넌지시


“한 박사?”


태훈이 부르자 동주가 고개를 돌린다.


“제가 한 동주입니다만...”


동주는 전혀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고 경계심도 없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의연하고 차분하다.


“젊은 양반이셨구만? 난 그쪽 스펙만 보고 실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인가 해서.. 나이가 좀 있는 가 싶었는데...."


세혁이 담담히 걸어온다.


“저기.. 나 먼저 일어 날 테니까? 선생님? 이쪽에 앉으셔서 편하게 말씀 나누시면 됩니다. 끝나면 연락해...”


태훈은 도와주시는 커녕, 동주만 혼자 남겨 놓고 눈치껏 자리를 쓰윽 피해준다.


“네.. 원장님."


“유간호사는 나가서 볼 일 보세요."


동주는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간호사를 내보낸다.


“네.. 박사님."


“여기는 차 같은 거 없어? 무슨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해...”


간호사도 나가고 세혁과 동주 둘만 남았다.


“앉으시죠.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세혁은 동주 앞을 자꾸 맴돌다 그의 테이블 위에 있는 뭔가를 보고 구미가 당겨서 시선이 멈춘다.


“아.. 이게 강이수 환자 진료차트입니까?”


동주는 의연하게 이수의 서류파일들을 표지를 덮고 가만히 서랍에 넣어버린다.


그리고 의아한 눈빛으로


세혁을 바라보며


“외람되지만 강이수씨와 어떤 관계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뭐.. 어쩌다 좀 알게 된 사이.. 설명하자면 아주 기니까.. 내 소개는 생략하지? 당신이 강이수 담당 주치의 맞소?”


무사태평한 얼굴로 동주를 마주보며 세혁은 소파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다.


“네.. 제가 담당 주치의인 것은 확실하지만.. 별로 유익한 대화가 아닌 것 같군요. 회진이 있어서 전.. 그만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세혁은 카리스마 있게 재킷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테이블에 가운데 확 꽂는다.


“현재 강이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그것부터 알아야 되겠어. 일단 진료기록부 부터.. 오픈.”


“글쎄요. 보아하니.. 경찰은 아니신 것 같고 이미 제 소재파악도 충분히 알아보고 오신 것 같은데.. 아까부터 계속 딴소리만 하고 계시니... 아무래도 선생님은 타인에게 신분을 밝힐 처지가 못 되시는 것 같습니다."


동주는 눈썹하나 바뀌지 않고 차분한 표정으로 말 돌리지 않고 꾸밈없이 직설적으로 말한다.


“뭐.. 아직은 그런 셈이지.”


“그런 거라면.. 여기 잘못 찾아오셨네요. 환자의 개인 증상에 대해서 외부로 절대 누출할 수 없습니다. 그건 의사윤리법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환자 개인과 환자가 동의여부를 수락한 보호자 외에 그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습니다.”


“의사양반.. 그러니까! 내가 이런 하자의 수법을 쓰잖아? 당신 같으면 본인이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처지인데.. 내가 환자 현실 후견인이라고 보호자 확인 증명서를 떼어줄 수 있겠소?”


세혁은 고집을 피우고


“그럼 보호자확인증명서 떼 오세요? 그러면 이수씨 진료기록부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동주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하~나.. 이 골 때리는 사람을 보소! 척하면 척이지.. 그거 하기 싫으니까! 박사님을 일부러 찾아 왔잖아? 다른 방법이 있다면 이렇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지...”


“떼 오세요.”


씨알도 안 먹히는 동주는 매우 단호하게 말하고 서둘러 연구실을 나가려고 했다.


성격이 유들유들해서 선해 빠진 동주가 아니다. 두뇌가 명석할 뿐만 아니라 아주 집요하고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이성적인 합리주의다.


“강이수.. 생명이 걸린 일이야?”


세혁의 그 말 한마디에 동주는 문 앞에서 걸음을 우뚝 멈춘다.


“생명의 걸린 일이라는 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본 거.. 들은 거.. 외부로 까발리지만 않으면 되잖아? 나도 그 정도 지식은 되거든... 그러면 당신도 의사 가운을 벗는 일은 없잖아.”


“당신을 어떻게 믿죠?”


동주가 다시 소파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그래.. 강이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됐어? 못 믿겠다면.. 여기서 손가락 잘라서 혈서까지 쓰면 믿으시겠소?”


세혁은 밑도 끝도 없이 과감하게 손바닥을 펴서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 보기 흉한 걸.. 제가 굳이 갖고 있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까? 나중에 재활용 하기도 뭐 그렇고.. 그냥 국가 예산 낭비하는 거죠? 혈서.. 천만장의 무게보다 사내 대장부의 말 한마디가 더 중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동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주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어떤 사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칼을 보고도 겁을 내지 않는 흐트러지지 않는 강인한 눈빛으로 세혁을 심리분석가의 시각으로 유심 있게 관찰하다.


그의 본성이 질이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편파적인 직감으로 간파했는지 동주는 진료기록부를 공개 했다.


“보세요.”


그제야 세혁은 뒤끝 없이 잭나이프를 테이블에서 뽑고 태연히 재킷 안주머니에서 샘플로 가지고 다니는 물티슈를 꺼내 칼을 대충 딱고 재떨이에 버리고 블랙 가죽 재킷 바깥 오른편에서 연두색 풋사과를 꺼내더니 반쪽을 쪼개서 한쪽을 손에 들고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맹수처럼 한 입 크게 단숨에 배어 물고 와그작 씹어 먹었다.


동주는 어이없어 웃고


“니미럴... 배고파 뒈지는 줄 알았네?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난 말을 많이 하면 이 스태미나가 딸린다고 당신이 그냥 줘버렸으면.. 이러지도 않았잖아!”


세혁이 윽박지르며


“강이수씨하고 정말 무슨 사이에요? 이수씨 친구나.. 지인이 그렇게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동주가 던진 물음에 잠시동안 적막이 찾아오고 침묵이 흘렀는데 세혁이 무겁게 입을 연다. 살짝 목에 힘이 들어가는 음성이었다.


“어떤 인정머리 없는 친구 놈의 딸...”


“네.. 그렇군요.”


정말 상식을 깨는 특유의 친화력을 가진 소유자 언제 봤다고 초면인 동주에게 반쪽자리 사과를 내민다.


“사과가 아주 다네.. 좀 들겠나?”


"아니요. 전 사양하겠습니다."


세혁은 풋사과 과즙의 새콤함이 참 인상적인 단내가 아련하게 퍼진다. 세혁은 맛있게 쩝쩝 씹는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흡입했다.


가만히 응시하던 동주는 그 다음 부터 세혁의 신분의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당신이 아까 말한 생명의 걸린 일이 무엇인지 제가 이 자리에서 꼭 들어야겠습니다.”


“내가 듣기론 아직 강이수를 머리의 총을 쏘고 달아난 범인을 아직 찾지 못한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동주의 눈빛이 민첩하게 동요한다.


“2년 전.. 이수가 혼수상태로 입원한 병원에 사건이 하나 터졌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해당했지”


“살해요?”


세혁은 태연하게 사과 남은 반쪽도 쉬지 않고 계속 흡입했다.


“그 자는 누군가에게 거액의 돈을 받고 이수를 없애라는 밀명을 받은 암살범이었지. 그날 병원에 몰래 잠입하여 의식조차 깨어나지 않은 이수를 제거하기 위해 나타났어. 그런데 운이 안 좋게 실패했어. 그자가 이수를 만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타나 방해했거든..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때? 이수를 계속 여기에 두어도 괜찮을까?”


“이수씨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건 나만 알고 있어. 이수는 물론 가족들도 이 사실은 모르지. 병원에서 입단속을 제대로 시켰는지 외부로 공개하지 않은 모양이야? 병원이미지가 한순간에 나빠지거든...”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에요. 천만다행이긴 한데.. 누가 그 사람을 살해를 했을까요?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 그자한테 아주 큰 빚을 졌으니.. 기필코 그자를 만나게 된다면 응당 사례를 꼭 해야 되겠어.. 병원에서 입단속 시키는 바람에 그 놈은 횡재 한 거나 다름없다고...”


동주는 순간 소름이 확 끼쳤다. 방금 전 어떠한 표정도 읽을 수 없는 세혁의 눈빛이다. 뭔지 모를 섬뜩한 기분이다. 심리분석가의 직감이다.


“이 사람이.... 살인...”


“내가 아까 말했을 텐데.. 내 신분을 절대 밝힐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아무튼 여기도 그렇게 썩 안전하질 못해.”


사과 하나를 다 먹은 세혁은 칼에 묻은 이물질을 자신의 손수건으로 깨끗이 청결하게 꼼꼼히 닦는다. 동주는 분석 들어간다.


지금 세혁이 들고 있는 잭나이프가 단순히 사과를 깎아 먹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칼이 언젠가는 사람을 살인 하는 흉기로 둔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놈들을 무시 하지 마.. 얼마나 집요하고 비열한데.. 어린 생명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유치원 건물에 불을 질러 죄 없는 무고한 생명들까지 희생시킨 극악무도한 놈이야. 내 친구.. 내 아내도...”


동주는 방금 세혁에게서 들어난 절대 감출 수 없는 속 감정, 고통스러운 표정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당신.. 강이수씨에 대해서 정말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군요.”


“제가 뭘 어떻게 당신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먼저.. 내가 이런 말을 한 박사한테 꺼내는지 그 이유를 잘 생각해봐.. 내가 사람은 좀 볼 줄 알거든.. 인간은 본래 간사하고 언제 변할지 모르는 깜찍한 생물들이라 믿을 수 없지만.. 내가 지금 그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


세혁은 냉철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만도 하겠군요. 오늘부터 저는 당신한테 완전히 낚인 셈 입니다. 우린 피차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저는 제 의사직 걸고 당신 앞에 마주하고 있고 당신은 신분과 정체를 절대 들춰서는 안 되는 입장으로 보호자들도 알지 못하는 이수씨에 과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제법 영리하군.. 더 이해하기 쉽게 확실히 설명 해준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한 얘기들은 당신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굳이 한 박사 머릿속에 일일이 담아 둘 필요도 없고 잊어버려도 상관없어.. 지금은 안심해도 될 단계니까.. 괜찮지만.. 그래도 당신의 그 자물쇠는 제대로 잘 채워두게... 절대 외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네..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 구멍이 뚫려버리는 즉시 자네뿐만 아니라 이 요양원, 그리고 제일 중요한 우리 이수에 신변과 안위마저 장담 못 하게 돼 버리네.”


순간 동주는 창백하고 긴장한 얼굴로


“이수를 지금 당장 퇴원시킬 수 있겠나?”


세혁은 담담하게


“퇴원이요?”


진료기록부 샘플들을 살펴보고 있다.


“PTSD, TBI 두 가지다 있다는 말인데.. PTSD는 양호한 편인데.. 문제는 TBI군.. 약물치료는 어떻소?”


세혁이 한숨을 내쉬며


“약물치료로는 어느 정도 완화는 가능하겠지만...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건.. 문제 될 것 없는데.. 뇌압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은요?"


세혁은 평소와는 다르게 동공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오랫동안 고심한 부분이고 이수와 관계된 일이라 섬세해지고 사뭇 진지하다.


“국내에 들어온 의학기술로는 약물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전부입니다. 그것도 아직 임상적인 실험결과일 뿐 완벽하지 않습니다.”


“수술부위인.. 전두엽 측두엽 손상이 치명타군...”


세혁의 눈매가 매서우면서 예사롭지 않게 민첩해 진다.


“박사님이 볼 때는 말이야.. 지금 이수 상태가 어떤 것 같소? 2년 동안 코마상태로 있다가 의식이 돌아왔어.. 두개골을 열어 실탄이 전두엽을 뚫고 측두엽과 후두엽 사이를 관통한 환자가 2년 만에 깨어났지. 오래 살 확률은 극히 드물어. 그런데 기억도 차츰 돌아오고 있고 회복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설마 당신도 남들이 다 말하는 기적이라고 떠들지 않겠지.”


“사람 뇌라는 것은 일정한 형식이 있거나 짜여진 폼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의 뇌는 참으로 신비로운 거죠. 그 어떤 과학자도 함부로 이렇다 확실히 단정을 짓기 어렵습니다. 저도 인간의 뇌를 연구한 사람이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건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죠. 이수씨 의지와 정신력은 보통 일반 사람들보다 차원이 틀리다고 밖에 판단되지 않습니다. 어제 이수씨와 병실에서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거죠?”


동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박사님이 거기까지 알아야 될 필요성이 있나...”


세혁은 옅게 미소 짓고


“죄송합니다. 전 주치의로서 강이수씨 일이라면 모든지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건 이수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 당신이 치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그럼.. 앞으로 동향은 어떻습니까?”


“당분간 이 한국을 떠야지...”


“예?”


동주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한국보다 외국 생활이 좀 편할 테니까.. 한시라도 이곳을 떠나야 해.. 안 그럼 이수 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다쳐...”


“그럼.. 이수씨가 해외에서 지내는 데.. 안전하다는 보장은요?”


“내가 보호자잖아! 내가 따라간다니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들어!”


세혁은 까칠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그럼.. 저도 같이 동행 가겠습니다.”


“뭐라고?”


“담당 주치의가 간다면 이수씨도 편하지 않겠어요? 가족이 따라간다면 모를까.. 당신을 어떻게 믿고...”


동주는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가 그렇게 변변치 않아 보여?”


세혁이 짜증을 내며


“당신을 못 믿겠다는 건.. 그것도 있지만 다른 겁니다. 이수씨가 발작이나 쇼크가 오면 당신이 옆에서 응급처치를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필요할 겁니다.”


"한동주 박사.. 이수한테 관심 있나?”


세혁이 정확하게 찔렀는지 동주는 곧바로 당황했다.


“아닙니다. 전 이수씨 담당주치의 입니다.”


"박사님이 이수와 절대 가면.. 안 되는 이유.. 딱 하나 있어? 마음의 정이라는 건데.. 이수가 힘들고 지칠 때 위안을 삼는 힘을 자네가 원동력이 돼서는 안 돼.. 이수가 당신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단지 담당 주치의 선생님이라고만 생각할까? 아니.. 우리 이수는 당신을 볼 때 동시에 다른 것도 확인해..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서.. 자신의 연정의 대상을 각인시키는 거지? 약혼자 이혜성을 말이야.. 박사님께는 좀 유감스럽게 들릴 테지만.. 더 깊어지기 전에 이수와 정리해! 두 사람은 절대 인연이 될 수 없어. 이수는 어쩌면 당신을 볼 때마다 계속 이혜성을 떠올릴 거라고 이수가 그것을 계속 혼동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지. 당신이 의사라면..."


“저도 압니다. 저는 이수씨의 담당 주치의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요.”


세혁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심리분석가보다 뛰어나고 돗자리 깔아도 될 정도로 촉이 매우 정확하다.


“하루 빨리 이수를 여기 있지 않게 하는 게 좋아..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갑자기 무방비상태에서 놈들의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돌이킬 수 없어.. 또한 그 주변에 피해가 안 온다는 보장은 없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게 하고 싶소!”


동주는 강경하게 나오며


“아직은 강이수씨는 치료가 다 완치 된 게 아니에요! 아직 케이스바이케이스입니다. 그 불완전한 상태로 외국은 간다는 건...”


“자살행위지.. 물론 그 상태로 병은 계속 지연되겠고 그런데 아직 국내에서도 확실히 치료법이 없는 건 사실이잖아.”


세혁은 절대 상대방 말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다.


“제가 치료법을 찾을 겁니다.”


“그 치료법이 내일이라도 당장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이수가 표적이 된 이상.. 한국에서 숨어있을 만한 곳을 찾기 어려워.. 이미 출국날짜에 맞춰 내가 손을 다 써놨소.”


“그러면 영국 론하워드 박사님을 찾으세요.”


동주는 몹시 절박했던 모양이다.


"론하워드?”


세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 박사님이라면 믿을 만한 분입니다. 한국인이라 의사소통이 다소 불편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뉴로 써전이시고 신경외과의사 중에서 그 방면에선 아무도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실력도 있고 관록도 있는 명망 있는 분이시죠.”


동주는 차분한 표정으로


“그래? 당신보다 뛰어난 사람인가?”


“글쎄요. 그건 나중에 실력을 겨뤄봐야 알겠죠?”


세혁의 눈빛이 민첩하게 동요한다.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인 동주에게 그런 이면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할 안 좋은 과거와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하다.


“그럼.. 당신을 믿고 난 계속 이 일을 빠르게 추진하겠소.”


“어디까지나 이건.. 이수 씨를 위해서 내린 결단입니다. 당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동주는 건조한 눈빛으로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이수 담당주치의선생이신데.. 하하.”


세혁은 호탕하게 웃고 여기서 자신이 볼일은 끝났는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


이수 병실로 선배 태훈이 들어왔다.

잠든 이수 옆을 밤새 지키고 있던 동주를 한심하게 바라보고는 넌지시 말을 꺼낸다.


“그만 좀 봐라.. 환자 얼굴 뚫어지겠다.”


동주는 생긋 미소를 짓고서는 가만히 태훈을 본다.


“여자 얼굴 바라보지도 못하던 친구가 어떻게 한순간에 변했냐?”


태훈이 실소를 터트리고


“하긴 뭐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눈을 멀게 된다고 하더라······.”


“벌써 그렇게 티가 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그런 건 잘 봐요.. 괜히 심리의학연구소 의학박사겠어?”


태훈이 진심으로 걱정되는지


“누렇게 떠갖고 너 괜찮냐? 이러다.. 이수씨보다 네가 먼저 잘못 되겠어?”


“전 괜찮아요.”


동주가 우울한 표정으로


“테라피스트들한테 환자와 사적인 감정은 금물이야.”


“저도 알아요.”


동주는 침울한 표정으로


“아니.. 넌 몰라.. 지금 네 얼빠진 모습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 이수씨.. 사랑하냐?”


“그런 거 아니에요.”


태훈이 무덤덤한 어투로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렇게 티나게 행동하니까 소문이 나지?”


“소문이 다 났어요?”


“너 어쩌려고 그래? 우리들한테 그런 건 치명적인 약점인 거 몰라서 그래? 이성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앞서다 보면 자칫 환자를 더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걸.. 정령 모르는 거냐? 너.. 더 깊어지기 전에.. 일찌감치 여기서 마음 접어.. 그래야 네가 상처 받지 않아.. 이수씨 너하고는 인연이 아니야. 그거 사랑 아니야! 연민이야.”


“어제 침대 아래에서 유서랑 수면제도 발견됐어요.”


“그래.. 나도 예상은 했어. 이수 씨가 평소 때와는 너무 다르게 밝아 보이긴 하더라고.”


태훈이 침통한 표정으로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남겨진 가족들이나 주위사람들은 어떡하라고...”


동주는 서글픈 표정으로


“아직 우울증의 원인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우리나라 자살율 넘버원! 자네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야.. 의사의 본분을 망각해서는 안 돼..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동주는 그동안 내색하지 않다가 이수가 이혜성을 기억해내면서 자살을 결심한 소동이 벌어져 요양병원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로인해 평정심이 완전히 무너지며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동주는 눈물을 떨어뜨린다.


“알아요.. 다 아는데.. 자꾸 누나가 생각나서.. 미치겠어요. 크읍... 이런 상황마저도 이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으흐읍..”


태훈은 착잡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가만히 오열하는 동주의 어깨를 토닥인다.


“동주야?”


태훈은 동주의 마음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내가 널 괜히 한국에 불러들인 것 같아.. 한국에 오기 싫어했던 너를 강압적으로 이곳에 불러들인 것은 나니까.. 여기서 그만 손때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태훈은 괜히 미안해져서 소심해진다.


동주가 얼른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걱정 하지 마요..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단계까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충고 고마워요. 그리고 전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전 끝까지 이수씨로 담당주치의로 남을 테니까요. 이수씨는 제가 꼭 치료해서 살릴 겁니다. 그런데.. 선배.. 저 불안해요. 이수씨가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릴까봐.”


동주가 애써 미소 지어 보이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열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어.. 그러려면 이수씨가 그만큼 기력을 유지해야 되고 살려고 하는 강한의지가 있어야 되."


태훈은 그런 동주가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봄 햇살처럼 따스하고 눈부실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다. 구김살 없이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는 미소천사다.


달콤한 비엔나커피처럼 선량하고 부드러운 인상과 누구한테나 자상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매너와 말솜씨, 허허실실 잘 웃고 살인미소 제왕이라고 별명까지 붙을 정도다. 낙천적인 소유자인 동주의 가슴에도 커다란 가시가 박혀 있다.


가슴 아픈 상처를 딛고 동주가 피나는 노력 끝에 국내 최고의 테라피스트 전문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동기가 될 것이다. 동주한테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다. 동주가 3살 때 친모가 어릴 때 돌아가시고 누나와 단둘이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동주와 누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집을 나가 야반도주하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다가 차에 치여 교통사고를 당해 정신연령이 6살로 바뀌어버린다.


7살차이 나는 친누나는 동주한테는 육친이나 다름없었고 애정과 모성애가 남달랐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하며 평생 원망하게 되어버렸다. 그런 누나를 동주는 지극하게 보살피고 연모했다.


누나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의사가 될 결심을 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수석 엘리트로 하버드 의과대학 심리학을 전공한다.


그러나 누나의 우울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고 다른 합병증까지 겹쳐지는 바람에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까지 되어버린다.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요양원에서 꽃다운 나이 33살에 자결을 하고 삶을 마감해야만 했다.


**


작가의말

 박세혁을 추모하며 ㅇㅅㅇ

동주의 회상편에는 박세혁을 등장 시키고 싶었어요 ㅎ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보석같은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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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추억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CAST-등장인물 19.12.27 209 0 -
320 제319화 - 최고의 선물 (완결) +8 20.09.12 107 4 17쪽
319 제318화 - 안식 +3 20.09.12 46 3 7쪽
318 제317화 - 애도 +3 20.09.11 43 2 9쪽
317 제316화 - 이별 준비하는 사람들(하) +6 20.09.10 55 4 8쪽
316 제315화 - 이별 준비하는 사람들(하) +9 20.09.10 60 4 25쪽
315 제314화 - 이별 준비하는 사람들(중) +3 20.09.09 50 3 20쪽
» 제313화 - 이별 준비하는 사람들(중) +5 20.09.09 50 3 23쪽
313 제312화 - 이별 준비하는 사람들(상) +4 20.09.09 49 3 33쪽
312 제311화 - 이별 준비하는 사람들(상) +6 20.09.08 49 3 30쪽
311 제310화 - 신혼 +4 20.09.07 44 3 13쪽
310 제309화 - 결혼식이 끝난 후 +4 20.09.06 46 3 8쪽
309 제308화 - 웨딩마치 +3 20.09.06 49 2 9쪽
308 제307화 - 영주의 약속 +5 20.09.04 52 2 9쪽
307 제306화 - 솔개의 비상 +5 20.09.03 45 3 7쪽
306 제305화 - 이벤트 +3 20.09.02 41 3 7쪽
305 제304화 - 행복찾기 +6 20.09.02 48 3 7쪽
304 제303화 - 휴식 +3 20.08.31 50 3 13쪽
303 제302화 - 상사병 +3 20.08.31 51 3 7쪽
302 제301화 - 가족의 정 +2 20.08.30 42 2 7쪽
301 제300화 - 사랑을 전하다 +6 20.08.29 43 2 8쪽
300 제299화 - 숙원을 풀다 +5 20.08.28 54 2 7쪽
299 제298화 - 사필귀정 +1 20.08.28 38 1 7쪽
298 제297화 - 그리움 +2 20.08.27 36 2 9쪽
297 제296화 - 양심 +2 20.08.26 41 2 8쪽
296 제295화 - 청혼 +2 20.08.25 38 2 8쪽
295 제294화 - 망자의 하소연 +4 20.08.24 41 2 15쪽
294 제293화 - 낙심 +2 20.08.23 40 2 9쪽
293 제292화 - 류태양으로 +3 20.08.23 45 2 8쪽
292 제291화 - 몽블랑 볼펜의 주인 +2 20.08.22 47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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