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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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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글

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최근연재일 :
2024.09.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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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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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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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8화

DUMMY

화약을 만들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먼저 동여진과의 각장 무역을 성공적으로 개시하여 전마 수급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가 그 일에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일단은 발해인 장포를 보내 놓았으니 그가 좋은 소식을 들고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또다시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가 버리고 병진년(丙辰年, 1016년)이 되고 다시 두어 달이 지난 늦봄에 기다리고 있던 장포가 드디어 돌아왔다.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기만 하면 좋겠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앞서 장포를 통해 동여진을 잘 구슬려 최대한 고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각장을 설치하겠다던 계획은 일단 반만 성공했다.


장포는 일단 동여진 서른 부락의 대족장(大族長) 노릇을 하는 말다이(麻尸底, 여진어: *maldi ~ maldai)를 찾아가 각장을 놓는 일을 논했다.

말다이는 이에 대해서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거기에 서른 부락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특히 고려 국경에서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사는 포이몬(排門, 또는 裴満, 여진어 *foimon) 부락과 그 영향 아래에 있는 부락들이 말다이가 고려와 손을 잡고 각장 무역을 하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포이몬은 그 이름부터가 여진어로 ‘삼’ 또는 ‘베’라는 뜻이다.

이들은 삼과 모시 재배가 상당히 어려운 북방에서 드물게 이것을 재배하고 베를 짜는 것을 특기로 삼는 이들이었고, 때문에 각장 무역이 열리게 되면 가장 손해를 볼 이들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반발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각장을 여는데 동의하는 말다이의 뜻은 확고해 보였다.

그러니까 말다이의 동의를 구하는 데까지는 어쨌든 계획대로 잘 풀리고 있었다.

심지어 말다이는 각장을 기존 국경에서 북동쪽으로 훨씬 들어온 옛 발해 정주(睛州) 옛 성터, 그러니까 아마도 미래의 함흥 일대가 될 곳에 두는 것까지 동의하기까지 해왔다.


“어차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소이다. 그저 그렇잖아도 없는 힘을 더 잃을까 두려워 징징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소.”


포이몬 부락등의 반발에 대해 말다이는 그렇게 일축했다.

어차피 동여진 내부에서 분열이 어느 정도 일어날 것은 예상한 일이었고, 반기를 든 쪽이 오히려 세가 약한 쪽이었으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모든 일이 문제가 없이 돌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포이몬 씨족과 거기에 붙은 다른 십여 개 씨족들은 그저 반발하고 말다이를 견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말다이의 장담과 다르게 그의 여진 부락들에 대한 통제력은 겨우 제한적인 것에 불과했고, 각장 설치에 대한 그들의 반발심은 예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상당히 강했다.


그렇게 한동안 긴장이 이어진 끝에, 결국 각장 설치에 반발하는 부락들은 일의 진행을 막고자 아주 고약한 수법을 동원했다.

바로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와 손을 잡고 아주 거하게 해적질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포로모타부, 그러니까 여진 말로 풀무도(*fulmudo)라고도 하는 이 부족은, 예전 발해 시절부터 내려오는 조선술(造船術)을 잘도 유지하며 동해(東海)에 끊임없이 해적선을 띄우는 대단한 이들이었다.

그렇게 일군 세력이 적지 않아서 거란에서는 다른 여진들과 다르게 대왕부(大王部)로 삼고 제후(諸侯)의 반열로 취급해 줄 정도였다.

그러잖아도 포로모타부와 가깝게 지내고 있던 이들이 아예 그쪽에 들러붙어서 동해안으로 노략질을 나오기 시작하니, 그 기세가 자못 전례 없던 정도였다.

포로모타부의 해적질이야 이미 십 년 전부터 시작되어 상당히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올해 들어서부터는 그 규모와 빈도 모두가 전례 없는 수준이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갈라전 장백산 여진 삼십 씨족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는 말다이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해 보라고 계속 압박을 넣었지만, 말다이는 그렇게 할 능력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계속해서 자기도 별수가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했다.

걱정은 말라더니 막상 일이 터지자 얼굴을 싹 바꾼 것이다.


결국 이 해적질의 규모는 한 번에 2, 3천 명 가까운 여진족들이 움직이는 정도로까지 불어났고, 무슨 용기를 얻은 것인지 화주(和州) 앞바다에 배를 대고 화주성으로 밀고 들어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화주성이라 하면 바로 내가 있는 곳이었다.

동북면병마사부(東北面兵馬使府) 직속의 정병(精兵)들과 함께.


***


“성 밖 들판이 여진 놈들로 가득 찼습니다. 성을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이대로 두면 성 밖의 읍락(邑落)들이 모두 약취(略取)당할 것입니다. 어찌하여야 좋을지 명을 내려 주십시오.”


전례 없는 대규모의 여진구(女眞寇, 여진 도적) 내침(來侵)이었다.

그것도 동북면의 요충지인 이곳 화주(和州) 일대를 노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동요하는 백성들을 최대한 화주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피난시키기는 했지만, 이대로라면 화주 성 밖이 모두 노략 당하고 불타 버릴 게 뻔한 상황이었다.

주변 고을에서도 급하게 파발을 보냈고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동북면병마사 지채문이 급하게 회의를 주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번 일에 대응을 하는 것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다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문제였는데······.

성과 요충지를 중심으로 방비를 단단히 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서서 여진을 토벌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빠른 선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찌하면 좋겠나? 우리 성안에 병사가 고작 일 천에 불과하지만, 이는 공장(工匠)과 전장(田匠), 투화(投化), 생천군(鉎川軍) 따위를 모두 제한 숫자로 실로 단련된 정졸(精卒)들이나, 되놈들의 수가 수천이라고 하네. 상대 못 할 수는 아니겠으나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 숫자도 아니네. 병마부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탄없이 말해 보시게.”

“일 천이 아니라 오백 정병이라도 충분합니다. 제게 초군(抄軍)과 좌군(左軍) 오백만 내어 주십시오. 이들은 마대(馬隊)와 노대(弩隊)로 이루어진 실로 정병들이니 영새군(寧塞軍)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적을 패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정예한 병사들이라고 하나 어쨌든 대여섯 배는 될 적을 상대해야 할 것인데······. 좀 더 병력을 대동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가능합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게다가 되놈들 잡겠다고 성의 모든 가용 병력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패전하더라도 시간을 두고 동북면 각 주진(州鎭)의 군대를 모아 대응하면 될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병력이 겨우 수백이라고 하면 그 수가 매우 적어 보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병력은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이 시기 고려에서 동북면에 군적(軍籍)상 상시로 배치되어 있는 병사의 수는 대략 1만 명 내외였다.


그 가운데 화주에 배치된 병력이 초군(抄軍) 10대(隊), 좌군(左軍) 10대(隊), 우군 10대(隊), 영새(寧塞) 8대(隊)로, 한 대가 25명으로 이루어지니 도합 950명이었다.

거의 동북면 병력의 10분의 1이 화주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당연히 주 병력이 아니고 보조 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졸의 수는 제외한 것이었다.


그러니 950명이 적게 보이지만 이것은 절대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

거란과의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할 때 고려가 실질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상한 자체는 10만을 훌쩍 상회할 수도 있지만(아마도 20만 이상도 원칙상으로는 가능했다), 그 모두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병사들은 아니었다.


그런 규모는 말 그대로 농한기에만 훈련받는 부병(府兵)이거나 긴급하게 징병한 농민들, 그리고 지방 호족의 사병 따위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동원할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전시가 아닐 때 상시 편제의 전투병 병력은 대략 중앙 4만, 서북면 4만, 동북면 1만가량이라 봐야 했고, 그 가운데에서도 농민으로서 군역을 지는 번상병(番上兵) 따위를 제외하면, 아마 넉넉하게 잡아서 5만 명 내외가 정예병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가운데 1천에 가까운 병력이면 절대 우습게 볼 수 없는 숫자였다.

더군다나 서북면과 동북면의 국경 주진은 남쪽의 일반 주현들과 다르게 군사 요새에 가까웠고, 사실상 국경 지대에 한해서는 병영국가(兵營國家)나 다름없는 고려이기에 이곳 병사들은 평상시에 농사를 짓는 부병(府兵)들이라고 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내 생각에는, 우리가 고작 수백의 병력만을 당장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여진족의 머릿수를 겁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무장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정예병에 버금가는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저들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거나, 또는 수렵(狩獵)으로 생계를 잇는 평범한 이들일 뿐이다.

이들은 절대로 고려 정예병들은 1 대 1로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했을 때, 오백의 병력으로 그 수가 수배에 달하는 여진 해적을 몰아내겠다는 내 발언은 과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병력을 내가 이끈다는 전제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 신체 능력은 비록 정규군 사이의 대규모 회전을 뒤집을 수는 없지만, 이런 여진족 해적 따위를 상대하는 데는 충분히 비상식적으로 뛰어난 것이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믿고 맡겨 보겠네. 초군과 좌군 오백을 내어 줄 터이니 저들을 쓸어버리게. 나는 동북면 전체의 주진군에 대하여 동원을 내리도록 하겠네. 만약 이번에 승전을 거둔다면 여세를 몰아서 되놈들에게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확실히 알려 줄 필요가 있을 것일세.”


지채문 병마사는 이제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그는 국경을 넘어 동여진까지 위압할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거기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전면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도 없고 그럴 역량도 되지 않지만, 최소한 고려에 대해서 반기를 치켜드는 여진 부락들에 한해서는 다시는 코를 치켜들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일단 쳐들어온 여진 해적들을 성공적으로 패퇴시키고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절반 이상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


오백의 마군(馬軍)과 궁병(弓兵), 그리고 쇠뇌를 다루는 노병(弩兵)들로 구성된 화주군(和州軍) 초군(抄軍)과 좌군(左軍)이 내 지휘하에 화주성 성문을 열고서 나선 것은 병진년(丙辰年, 1016년) 어느 여름 새벽이었다.

이제 막 동이 틀 무렵, 아직 화주 인근 들판에 산개(散開)하여 잠을 청하고 있을 여진족들에게 대비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밀어붙이기 위해서였다.


북방의 바람이 하얗게 물든 억새밭 위로 휘날리는 그 새벽에, 여기저기 듬성듬성 떨어진 마을들에서 아직도 올라오는 연기가 어제까지도 약탈이 한창 기승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척후(斥候)의 말에 따르면 여진 놈들이 성 동남쪽 마을을 완전히 불태우고 약탈한 다음에, 그곳에서 숙영(宿營)했다고 한다. 곧 동이 틀 무렵이니, 놈들도 이제 다시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움직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놈들이 정비를 끝내고 이동하기 전에 들이치도록 한다.”


나는 임억을 비롯한 화주군 낭장(郎將)과 별장(別將)들에게 오늘의 작전 목표를 주지시켰다.

어지간한 경우에도 여진 해적 떼를 상대로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왕이면 적이 진형을 갖추고 우리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쪽의 손실은 최소로 하면서 적의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시점을 잘 잡아야 했다.


“적들이 비록 훈련된 군대가 아니라고는 하나, 밤새 경계도 세우지 않고 무방비하게 숙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접근하게 되면 저들도 반드시 눈치를 챌 것이고, 급하게라도 이에 맞설 준비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놈들이 준비할 틈을 최대한 주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당부를 하고서, 병사들에게 출진(出陣)을 명했다.

모두가 말을 탈 수는 없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다고 하더라도 꽤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기에, 바쁜 걸음으로 행군하는 병사들은 긴장감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새벽녘의 조용한 들판 위로 수백의 군대가 움직이며 나는 땅을 딛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아무래도 적이 일찌감치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이미 진영을 갖추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이 머물고 있는 곳에 접근하였을 때, 임억이 척후의 보고를 받고 내게 와서 적이 싸움 준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해 왔다.

본래 우리가 목표한 것은 야영한 다음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진 해적들이었다.

놈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리의 모습에 놀라 자기들끼리 고함을 치우고 동료들을 깨우고 급하게 칼과 활을 챙겨 드는 등 우왕좌왕할 때 공격을 할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아쉽지만 일이 늘 생각처럼 진행되진 않는 법이다.

짐작컨대 저들도 밤새 경계도 세우고, 주변으로 척후병도 보내는 등 정찰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순 해적들이라고 하기에는 그 치밀함이 상당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바닷가에 상륙했다가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약탈을 마치고 다시 바다로 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육지 안쪽까지 기어 올라와서 며칠씩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보통의 해적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든가, 아니면 겁을 잃었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놈들은 실제로 무장 상태도 제각각인 데다 말 위에 올라 있는 놈이 드물고 거의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서 있었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거친 가죽옷과 변발이 그들을 더 포악하고 야만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이쪽도 여진족에 익숙한 이곳 화주의 병사들이었기에 그런 모습이라고 겁을 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충분한 대비 없이 갑자기 싸우게 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의 그 기세 흉흉한 모습이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는 위압적이었다.

실제로 이쪽이 무장 상태가 더욱 훌륭하고 기율이 잡혀 있음에도 그랬다.


“일단 전군 멈추고 대형을 갖추어라.”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병사들을 정지시켰다.

자연스럽게 어느 한쪽이 활을 쏘아도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먼저 조금 더 나아가서 공격을 개시하는 순간, 어느 한쪽이 끝장이 나야 끝이 나는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 간에 불편한 대치가 시작되자,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고 뭐라고 지껄이더니, 이내 고려 말을 할 수 있는 놈 하나를 앞에 내세우면서, 되지도 않는 협상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쪽의 무장 상태나 기율이 딱 봐도 잘 훈련받은 정규병이니, 수적으로 자신들이 유리하더라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한 싸움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놈들이 제시한 싸움을 하지 않고 물러가겠다고 하는 조건이 터무니없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취한 재물과 곡식, 그리고 사람을 그대로 태워서 돌아가게만 해준다면, 우리는 굳이 너희의 피까지 보지 않고 조용히 물러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안심하고 안전하게 바다로 물러갈 수 있도록 너희도 일단은 적어도 십 리 밖으로 물러나라.”


저런 개소리를 고려 말을 할 줄 아는 놈이 나와서 지껄이니, 이 말을 나뿐 아니라 여기 있는 고려 병사들이 모두 들었다.

놈들 기준에서야, 지금 이대로 피해 없이 물러가면 해적질이 대성공인 셈이니, 놈들은 기왕이면 싸우지 않고 바다로 물러가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사람까지 잡아간다는 데, 그걸 듣고도 순순히 그러라고 할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애꿎게 저들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분명히 화살받이로 먼저 내세울 것입니다.”


옆에서 임억이 내게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놈들이 고려 백성들을 노예로 잡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것을 선택한다면, 오히려 구하고자 했던 백성들이 먼저 희생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만약 우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로잡은 너희 고려 놈들을 한 년, 한 놈씩 우리 앞에 내세워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 한 번 공격할 수 있으면 공격해 봐라.”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이쪽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복장을 보나, 총각머리를 보나, 누가 봐도 고려 사람인 어린아이 하나를 저들 앞으로 내세웠다.

이제 고작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말까 한 어린아이였다.

녀석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운지 얼어붙어서는 울음을 토해 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허, 어찌 저런······!”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우리 병사들은 하나같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이가 벌벌 떨면서 살려 달라고 여진족들에게 비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장군!”


임억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찾았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감정이 실린 부름이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다음, 적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네놈들이 사로잡은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쪽으로 돌려보내라. 그렇다면 너희가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허락하겠다.”


나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애꿎은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혹시라도 놈들이 혹해서 일단 이쪽 사람들을 풀어 주면, 일단 그들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최소한의 기병대 정예만 꾸려서 놈들을 뒤에서 다시 습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놈들은 내 제안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더니, 아이를 풀어 주면서 어디 재주껏 이쪽으로 달려가라고 놔주었다.

물론 이놈들이 아이를 정말 놓아주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필사적으로 이쪽으로 뛰기 시작하자, 놈들은 활을 치켜들고 뛰는 아이를 겨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족히 수백은 될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하면, 그 화살 비를 피하면서 아이가 여기까지 안전하게 당도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놈들 가운데 하나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놓았다.

아이는 그만 그 화살에 귀를 꿰뚫리며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우리 모두는 그 광경을 멀리서 보았다.

그런 와중 정적을 꿰뚫고 화살을 다시 날릴 준비를 하며 깔깔거리는 놈들의 웃음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갔다.


나는 뭐라고 지시를 임억에게 남기는 것도 잊은 채로, 나도 모르게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박차를 가하는 속도를 말이 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나는 크게 분노해 있었다.

갑자기 뛰쳐나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내 모습에 시위를 먹이던 놈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동작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내가 달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잡은 채로 갑자기 일어섰으니 더욱이 당황했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을 보게 되면 순간적으로 어찌 대응해야 좋을지 판단을 쉬이 내리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항상 그 찰나가 내게는 천금과도 같은 귀중한 시간이었다.


놈들의 표정과 숨결이 생생히 전해질 정도로 가까운 곳까지 다다르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철퇴를 꺼내 들고서는 말 위에서 바로 발을 굴러 뛰어올랐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말이 고통스러웠는지 투레질을 하는 소리가 뒤로 들려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하늘을 반쯤 날아서 아이에게 화살을 쏜 놈을 향해 떨어져 내리며 철퇴를 그대로 내려찍었다.


퍼걱―


놈의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귀로 들리고 철퇴가 뇌를 짓뭉개는 느낌이 고스란히 손으로 전해졌다.

놈의 마지막 표정은 당혹감과 억울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놈은 이제 그 억울함을 염라대왕에게나 가서 호소해야 할 것이다.


“······.”


순간적으로 엄청난 정적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놈들 가운데 일부는 당혹감을 이겨 내고 무기를 내게 겨눌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방금 쓰러져 죽은 놈 곁에서 같이 화살을 날리며 낄낄 대던 놈들 가운데 두 놈의 뒤통수를 한 손에 하나씩 잡고서는 두 놈의 머리를 그대로 충돌 시켰다.


“안 되는 줄 알면서······.”


놈들은 사지를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내 악력은 그 정도 저항은 간단하게 무시하기에 충분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놈들에게 물었지만,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빠각거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놈들의 머리가 서로 충돌해서 빠개진 뒤였다.

아마 두 놈 다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잃었건 말건 놈들이 대답을 하지 못했으니, 그것은 놈들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서로 부딪히게 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하지 않았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빠각―


다시 한 번 빠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들의 몸이 축 주저앉았다.

엄청난 힘이 실린 채로 머리가 서로 부딪혔으니, 아마 둘 다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머리가 빠개진 채로 숨이 다 빠져나간 놈들을 옆에다 던져 버리고서, 넋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여진족들에게 외쳤다.

고려 말로 한 번, 여진말로 다시 한 번.


“나는 고려의 고의신이다. 또 머리가 깨지고 싶은 놈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라.”

“······.”

“너희가 오지 않으면 내가 가마.”


놈들은 그제야 허겁지겁 내게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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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 +17 24.09.11 1,417 92 18쪽
9 9화 +9 24.09.10 1,422 102 13쪽
8 8화 +11 24.09.09 1,483 103 14쪽
7 7화 +10 24.09.08 1,515 105 16쪽
6 6화 +6 24.09.07 1,559 94 19쪽
5 5화 +8 24.09.06 1,662 92 17쪽
4 4화 +7 24.09.05 1,787 103 19쪽
3 3화 +11 24.09.04 2,132 116 17쪽
2 2화 +8 24.09.04 2,585 123 19쪽
1 1화 +24 24.09.04 3,203 1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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