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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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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글

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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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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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1화

DUMMY

얼마 뒤, 드디어 출정의 날이 밝아 왔다.

임시로 꾸려진 서북면 행영군단(行營軍團)의 상원수 지채문은 패서(浿西) 지역에서 서경으로 결집해 온 군대를 이끌고 먼저 안북부(安北府)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서북면 각지에서 모여든 병력으로 군대를 충원한 다음, 최종 목적지인 흥화진에 도착했다.


바로 내가 출발한 바로 그곳, 대(對) 거란 국경 최전선의 요새로.

최종적으로 흥화진에 결집한 고려군의 군세는 모두 합하여 2만을 웃돌았다.

나라와 나라의 국력을 모두 기울여 싸우는 전면전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이 정도의 군대를 동원한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만큼 고려가 이참에 거란을 압수 밖으로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것에 진심이라는 이야기였다.


“정용신 장군. 이거 오랜만이올시다.”

“상원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맙시다. 우리 원래 구연(舊緣)이 오랜 사이 아니오.”


지채문은 흥화진에 도착하자마자 흥화진사이자 내 본래 상관이었던 정용신 장군부터 찾았다.

보자마자 두 팔로 껴안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이, 두 사람의 인연이 오랜 것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처음부터 정용신 장군이 나보고 지채문을 찾아가라고 지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아주 훌륭한 재목을 내게 보내 주었소이다. 이야기가 벌써 여기까지 들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고의신이 김훈과 최질 두 놈의 역란(逆亂)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었소.”

“예. 이미 큰 공을 세우고 중랑장으로 진급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먼 변경에도 좋은 소식은 일찍 전해지곤 합니다.”


정용신 장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뿌듯한 시선을 내게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운 이가 나왔으니, 장군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정용신 장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일단 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군. 최소한의 병대만 꾸려서 빠르게 훑어보고 오고 싶은데 길을 좀 안내해 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상원수.”


지채문은 위험을 피해서 후방에만 머무르며 지휘하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타고난 장수답게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보고 판단하고자 하는 편이었다.

누군가는 더러 그것을 머리보다 몸이 앞서 나간다고 할 수도 있고, 지휘관이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말도 옳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지채문의 방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지채문의 방식이 아랫사람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지채문은 오자마자 직접 적세(敵勢)를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하겠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 말에 자연스럽게 상원수를 보좌하는 행영 원수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과 행영의 지휘관급인 판관(判官)들이 우려부터 표했지만, 지채문은 단호하게 그 말을 끊었다.


“그대들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직접 보고 판단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오. 위험한 곳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터이니 걱정은 마시오.”


결국 나를 포함하여 100여 명의 별동대가 꾸려져 지채문 상원수를 보좌하여 적의 형세를 살필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적이 보주(保州)성을 쌓고 있는 용만원(龍彎原) 들판은 이곳 흥화진에서 산 고개 하나를 넘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아래 들판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산마루 위에는 적이 성을 쌓고 있는 들판과 멀리 압수(鴨水) 강물까지가 시야에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가 있었다.


지채문의 말대로 굳이 위험한 곳까지 가지 않고서도 적의 형세를 살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곳 지리를 꿰뚫고 있는 정용신 장군이 안전한 자리로 잘 이끈 덕도 분명히 있었다.


“거란이 저곳에 성을 쌓고 있는지 얼마나 되었소?”


산마루에 서서 북쪽을 내다보며 지채문이 정용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좋아 압록강 너머 멀리까지 잘 들여다보일 정도로 시계(視界)가 넓었다.


그러니 그곳 용만원(龍彎原) 들판에서 거란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성을 쌓아 올리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떠나올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어느 정도 성 모양의 꼴을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족히 몇 달은 되었습니다. 작년에 강을 건너와서 군대를 주둔시킬 때부터 아주 이럴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원수.”

“흠······.”


압록강은 솔직히 말해서 자연 국경치고는 그다지 방어에 도움이 되는 강은 아니다.

겨울이면 얼어붙기 일쑤이고, 겨울이 아닐 때도 건너는 것이 어려운 강은 아니다.

심지어 거란군은 압록강 한복판의 검동도(黔同島)에다가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놓은 상황이었고, 여기서부터 부교를 좀 놓으면 수만 대군이 수고스럽긴 해도 강을 무리 없이 건너 고려 땅에 상륙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군이 아예 압록강을 건너와서 성을 쌓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게다가 지금 거란군이 진을 치고 있는 자리는 명목상으로는 고려 땅이었다.

거란이 말을 번복해서 이제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역사적으로 볼 때, 압록강 이남은 서희(徐熙)가 담판을 통해서 거란으로부터 영유권을 인정받은 곳이었다.


다만 바로 건너편이 요나라(거란) 내원성이라 괜히 거란 놈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압록강 연안에는 성을 쌓지 않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고려 땅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괜히 거란이 성을 이곳에 쌓기 시작하자, 고려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결국 군대를 일으키는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저들은 쉬이 물러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저곳에 나와 있는 인원의 대부분은 여진인과 한족을 잡아다가 노역에 부리는 것에 불과하고, 군대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만 전투가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이 되면 언제든지 저쪽 검동도의 내원성과 그 너머 거란 성채들에서 지원이 나올 것입니다.”


정용신 장군이 손을 들어 압수 강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강 한 가운데에는 검동도라 불리는 섬이 있었는데, 그곳에 거란이 이미 내원성이라는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며 말을 덧붙였다.


“강 한복판 내원성에 군사들이 주둔해 있고, 또 강 건너편 정원성(定遠城)에도 또 예비 병력이 있을 걸세. 저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될지 가늠이 안 되는 만큼 저들이 본격적으로 군대를 다 동원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우리가 이긴다는 보장은 없을 것이오.”


지채문 상원수는 그렇게 말하고서 조금 고민이 된다는 듯 아래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옅게 숨을 흘렸다.

그러다 뒤를 따라온 제장(諸將)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흥화진으로 돌아가서 어찌할지 고민해 봅시다.”


***


지채문 상원수는 흥화진으로 돌아와서 바로 군의(軍議)를 열어 거란을 어떠한 방식으로 상대하면 좋을지 논의를 하였으나,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압수를 건너와서 성을 쌓고 있는 적의 병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쪽도 이미 지금쯤이면 이쪽의 이상기류를 알아차렸을 것이고, 2만이나 되는 군대가 움직이면 바로 내원성(來遠城)과 정원성(定遠城) 등에서 군대를 보내 출격시킬 것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본래라면 압수 강물 자체가 적의 원군을 막아 주는 장벽이 되어 줘야 하겠지만, 이미 거란군이 강의 양안(兩岸)을 모두 점령하고 내원성과 통하는 부교(浮橋)를 놓아 둔 시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어진 이야기였다.


게다가 상대해야 할 적의 정확한 규모를 알지 못하니 섣부르게 전략을 결정하고 싸움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회의가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끝난 뒤, 나는 혼자 조용한 곳을 찾아 인터페이스에 접속했다.

접속과 함께 주변의 모든 시공간이 멈추는 것은 여전히 내게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거대한 화면 아래에 편하게 몸을 눕히듯이 앉아서 컨트롤러를 잡았다.


화면에는 몇몇 기본적인 정보들과 함께 지구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는데, 나는 그 화면을 먼저 한반도로, 다시 강동육주(江東六州)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흥화진 주변으로 점점 확대해 나갔다.


적의 축성 중인 보주성(保州城)과 검동도(黔同島)의 내원성(來遠城), 그러다 압수(鴨水, 압록강)과 흥화진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 정도에서 확대를 멈추었다.

예상대로 지도에 보이는 흥화진 주변과 고려군에 대한 정보는 자세했지만, 적에 관한 정보는 최근에 정탐한 내용과 적의 대략적인 규모, 그리고 적의 성채의 위치 등에 대한 기본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변 지형 정보가 적이 점유한 지역이라도 정찰 없이도 정확하게 나타난다는 정도가 보통의 게임들과는 다를 뿐이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건 게임이 아니고 가상현실도 아니다.

이런 인터페이스가 분명히 현실에 있을 법한 장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비현실로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내가 과거로 와서 경험하고 있는 것은 단언컨대 현실이었고, 이 인터페이스가 그러한 현실에 어떤 식으로든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역시 ― 역설적이게도 ― 현실이었다.


「무엇을 시뮬레이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인터페이스에서는 고려 가능한 모든 물리적, 사회적 변수를 고려하여 정책, 기술, 경제, 전술 등의 여러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목표와 수준에 따라서 필요한 공헌도의 양이 정해집니다.」


인터페이스에 떠올라 있는 문자열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노인으로부터 대략적인 설명만을 들었을 뿐, 실제로 시뮬레이션을 수행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일단 인터페이스에서 [전술 시뮬레이션]을 택하자, 곧 인터페이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전술 시뮬레이션]을 선택하셨습니다. 먼저 공격 측의 군대와 지휘관을 설정하여 주십시오.」


나는 공격 측 병력으로 현재 흥화진에 집결해 있는 서북면 행영(行營)에 속한 2만 4천 7백 5명 전체로 놓고, 총지휘관으로 지채문 상원수를 설정하였다.

그러자 인터페이스에서 다시 음성이 흘러나왔다.


「공격 측의 전술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주십시오.」


공격 측의 전술적인 목표는 당연히 현재 축성 중인 보주성과 그 일대의 점령과 더불어 거란군을 완전히 압수 건너편으로 축출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인터페이스에 그러한 내용을 입력해 넣자, 인터페이스는 자동적으로 수비 측을 거란군으로 설정한 다음, 마지막으로 필요한 내용을 물었다.


「전술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시점을 설정하여 주십시오.」


이번 회의에서 아무것도 결정이 된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의견이 합치된 것은 전투를 미루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점, 기왕이면 모레나 글피 사이에는 전투를 개시하여 바로 결착을 봐야 한다는 것이 지휘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는 그것을 감안해서 전투 시점을 모레로 잡았다.

인터페이스의 정보를 보면 글피에는 겨울비가 조금 흩뿌릴 예정이었고, 당연히 우천 시에는 전략적인 제한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 정보가 정확하다면 글피가 아니라 모레에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 옳았다.

내가 거기까지 모든 필요한 정보를 인터페이스에 입력하고 나자, 인터페이스는 마지막으로 내게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것인지를 물어왔다.


「해당 전투의 시뮬레이션에는 공헌도 800이 필요합니다(현재 보유 공헌도: 1,000). 시뮬레이션을 수행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러겠다고 하자 순간적으로 인터페이스가 암전되더니, 나는 더는 인터페이스 아래에 편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무장을 완전히 갖춘 채로 말 위에 올라 있었다.


***


전투의 개시는 아침 일찍 빠르게 이루어졌다.

지채문 장군은 2만이 넘는 군대를 좌군(左軍), 중군(中軍), 우군(友軍)으로 나누어 반쯤 완성된 적의 보주성(保州城) 앞 들판에 진을 치고 공격을 명령했다.

완성되지 않은 성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세 배 가까이 되는 고려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란군은 어쨌든 반이라도 쌓아 올린 성에 의지해서 고려군을 막고자 애를 썼다.


다만 이쪽도 따로 공성 무기가 없었고 오직 준비된 것은 공성용 사다리인 충제(衝梯)가 전부였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고려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성이 다 쌓이지 않은 탓에 곳곳에 성내로 뚫려 있는 길이 터져 있었고, 이런 실정이었기에 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여기까지는 전투가 잘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있으면 성이 함락될 것이 분명했고, 적의 일부가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압수 강변으로 기동한 좌군(左軍)이 적의 내원성으로 이어지는 부교(浮橋)를 끊고 길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성을 빠져 나와 도망치려하던 거란군 조차 피할 길이 없으니 압수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길을 막고 있는 좌군의 손에 사로잡혀 죽거나 양자택일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는 좌군 소속으로 거란군 잔당을 처리하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동개에서 화살을 뽑아 공격할 적의 위치를 알리는 효시(嚆矢)를 쏘면 좌군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떼를 지어 도망치는 거란군을 잡아 죽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도망치는 이들이 늘어나자, 나는 직접 철퇴를 들고서 말을 타고 뛰쳐나가 거란군을 때려잡는 것을 거들기까지 했다.


적의 보주성이 완전히 고려군에 점령당하고 아직 다 짓지도 못한 성의 누각이 불타오르는 와중에도 내원성의 거란군은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있었다.

이렇게만 간다면 아군의 대승(大勝)으로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승기를 잡았다고 의기양양해 있을 때, 들판 동북쪽 산중(山中)에서 매복하고 있던 거란군 중기병 수백 가량이 한 번에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따로 검차(劒車) 따위를 이용해 중기병을 막아 세울 수 있는 방어 대형을 준비해 놓은 것도 아니고, 기병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고 대부분이 보병으로 꾸려진 고려군 입장에서 이런 수의 거란군 중기병을 갑자기 상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적의 중기병은 그대로 아군의 중군과 우군을 쓸어버릴 듯이 달려들었고, 뒤늦게 내가 속한 좌군이 후면으로 우회 기동하여 적의 기병대를 뒤에서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이쪽의 피해는 상당히 난 뒤였다.

이쪽도 이쪽대로 필사적으로 싸움을 각오하고 전투를 벌였지만, 큰 피해 없이 보주성을 장악한다는 처음의 목표는 이미 달성불가능하게 된 상황이었다.


“중랑장님······!”


그 와중에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임억이 적의 눈먼 화살에 눈을 맞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는 급하게 녀석을 일으켜 세워 내 말에 태우고 싸움을 계속해 나가려고 했지만, 녀석은 그 와중에 다시 등에 화살을 한 번 더 맞고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절명하고 말았다.


“······!”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서 마구잡이로 철퇴를 휘두르며 거란 기병들의 머리를 투구째로 으깨며 나아갔지만, 아무리 신력(神力)을 발휘하는 장수라고 하더라도 수천의 군대를 혼자서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다행히 완전히 와해되기 직전이던 중군과 우군이 어떻게든 방어진을 구축하고 좌군의 도움을 받아 거란군 기병들을 결과적으로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이가 죽었고, 그 가운데는 흥화진에서부터 나와 고락(苦樂)을 함께해 오던 임억도 있었다.

정용신 장군은 한쪽 팔을 잃었다.

자랑스럽게 출정했던 2만이 넘는 고려군은 이제 사실상 한 번의 전투를 더 겪으면 궤멸(潰滅)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까지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적이 당장은 다시 부교를 설치하고 추가적으로 군사를 투입해 이곳을 공격해 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주성을 장악하고 거란군을 압수 바깥으로 몰아낸다는 본래의 목표는 달성하기는 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피해가 너무 컸다.

보주성이 있는 용만원 들판에는 그 뒤로 며칠이 지나도 시체를 뜯어먹고자 날아든 까마귀의 우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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