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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새글

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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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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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2화

DUMMY

내가 그녀에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엄숙하게 무언가를 선언했었다.


「아이야. 너의 대답을 잘 들었다. 너는 이제 초월(超越)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이니, 네 필멸(必滅)한 육체는 거듭나서 불멸(不滅)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네 모든 가진 지혜와 힘을 다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게 될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내 이름으로 약속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내 귀에는 예언에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의 모든 공간이 무너지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


의식이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낀 것도 잠시, 나는 이내 누군가의 몸에서 깨어났다.


현재 동화율······ 0%


그러나 나는 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몸은 내 통제 밖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각을 포함하여 몸으로 들어오는 감각 정보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을 하는 것뿐이었다.


“契丹 盜賊아 너희 엇뎨 감히 鴨水를 너머 드러 오ᄂᆞ뇨! 제 命 아닌 일로 주글 자리ᄅᆞᆯ ᄎᆞ자 왓노라 ᄒᆞ고 怨望을 내디 말라.”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 한가운데였다.

나는 말에 올라 있었고,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면서 철퇴를 적들에게 후려치고 있었다.

철퇴를 들고 있는 팔의 근육에서 느껴지는 힘이 대단했는데, 내 몸은 그 무거운 철퇴를 가벼운 곤봉 휘두르듯이 어렵지 않게 적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내리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근력을 뛰어넘었음은 물론, 신체의 협응 능력이 내가 느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효율적이었다.


“別將하 이리 오쇼셔!”


내 몸이 알아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철퇴를 휘두르고 있는 가운데, 어디선가 누가 소리치는 게 들렸고, 곧이어 내 몸이 그쪽으로 반응했다.

내 몸은 나를 향해 소리친 이에게 뭐라고 수신호를 보내더니, 마저 덤벼들던 놈의 머리에 철퇴를 후려치고 나서, 말의 고삐를 바쁘게 잡아서 방향을 바꾸었다.


현재 동화율······ 21%


“흐압······!”


아마 그 부름은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내 몸은 기합성과 함께 남들과 비교되지 않는 위력을 부리며 적들을 철퇴로 뭉개면서 길을 뚫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 아군의 사기가 조금씩 올랐다. 내 활약으로 적들 사이에 갇혀 있던 얼마간의 아군 군사들에게 내 몸이 개입한 순간부터 활로가 열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일당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위세를 보이면서 말이다.


“敵이 믈러나거든 時急이 ᄧᅩ치 말라. 반ᄃᆞ시 더시 이실ᄊᆡ니라.”

“에ᇰ 올ᄒᆞ시ᅌᅵ다.”


조금씩 몸에 적응되고 나니, 이제 주변이 눈에 좀 더 잘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가 튀기는 싸움이 이미 한참을 진행된 상태 같았다.

이쪽도 저쪽도 쉬운 싸움은 아니었던지,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죽어 가는 자의 수가 많았다.

적들은 다양한 형태의 변발을 하고 있었고, 이쪽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었지만,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여긴 어디일까······. 가늠이 안 된다.’


나는 내가 갑작스럽게 깨어난 이곳이 어느 시대, 어느 곳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말이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예스럽고, 사람들의 신체는 작달막했으며, 싸움에 쓰는 무기들이 중세에나 썼을 법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갑자기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나 과거로 돌아온 상황임에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함을 느끼며 주변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단순히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기 오기 직전에 나는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내 유일한 안식처와 같았던 어린아이를 묻고 온 상황이었다.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에 깊게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무언가가 내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감정의 격류가 다시 요동치는 것을 막아 주고 있는 것 또한 느껴졌다.


현재 동화율······ 62%


“別將하 將軍이 旗ᄅᆞᆯ 셰오시니 이만 兵을 물리쇼셔.”

“됴타. 그리ᄒᆞ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몸 주위에 수두룩하던 적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투의 승기가 이쪽으로 기운 모양이었다.

주변에는 죽거나 부상이 심해 움직이지 못하는 적들만 보일 뿐, 이미 대부분이 제각기 도망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일부는 정연히 퇴각 대형을 이루어 빠져나가고 있었다.

쫒는다면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니 내 몸이 아랫사람으로 보이는 군관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둘은 퇴각하는 적군을 뒤쫓지 않고 병사를 추슬러 본진으로 물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적군이 물러나는 속도와 비교했을 때, 이쪽의 퇴군(退軍) 속도는 다소 늦었다.

죽은 적군의 몸에서 무구(武具)를 수거하고, 살아 있는 자는 목을 치거나 포로로 잡고, 아군 가운데 거동할 수 있는 자들을 후방으로 수송하는 등, 할 일이 많았던 탓이다. 그러나 승전을 한 덕분인지 병사들의 표정은 그럼에도 밝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엄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이겨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기뻐할 만한 일이긴 했다.


현재 동화율······ 84%


그렇게 전투 정리가 대충 끝나고, 내 몸은 뭐라고 병사들을 향해 외치더니, 싸움이 벌어진 들판 너머 산자락에 어스름하게 서 있는 산성(山城)으로 군대를 몰고 회군하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가 산을 휘감듯이 펼쳐져 있었는데, 내 눈에 비친 그 모습에 압도된 나는 잠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제까지 절제하고 있던 감정이 둑을 무너뜨리듯 한 번에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푸르고 청아한 산하(山河)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가 마지막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멸망한 세상에서 돌아와서 무엇보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푸른 신록(新祿)으로 뒤덮인 산과 들이었다.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찰갑(札甲)의 미늘 조각이 부딪히며 걸쩍거리는 소리도, 말이 움직이면서 둔부(臀部)에 느껴지는 둔탁함도, 전투에 다치고 지친 병사들의 모습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청량하게 개어 있는 하늘 아래 예전처럼 빛나고 있는 그리운 자연의 모습만이 두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남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빠져 버렸다.

마치 내 눈으로, 내 뜻대로 세상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있는 그대로 내가 이 풍경을 모두 제 것처럼 감각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동화율······ 100%


“······!”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의 풍경을 내 영혼과 분리되어 있던 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각하고 느끼고 있던 그 순간에, 시야가 깜빡이기 시작하며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해 왔다.

모든 감각의 통로가 고스란히 영혼으로 직접 연결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지식과 정보들이 내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개의 영혼이 한데 엉겨서 뭉쳐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것이 아닌 기억과 내 것이 아닌 습관과, 내 것이 아닌 능력이 모두 내 영혼에 한 줄 한 줄 글자를 새기듯이 각인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주변에서 병사들이 나누는 말이 이제 또렷이 내가 아는 언어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내가 타고 있는 말을 모는 것도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강림 완료.


그렇게 완전히 암전되었다가 다시 뜨이기를 빠르게 반복하던 내 눈에 다시 시야가 명료하게 맺히기 시작하면서, 머리를 쪼갤 것만 같던 두통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두 눈에, 하늘 아래 펼쳐진 미려한 산줄기와 그 사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산성을 배경으로, 마치 영화의 도입부에서와 같은 문자가 떠올랐다.


1014년

고려국 흥화진


그것들은 잠시 그렇게 시야에 떠올라 있다가 이내 페이드아웃 되며 사라져 갔다.

머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잠시 넋을 잃었던 나는, 옆에서 나를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에 정신을 문득 차렸다.


“별장.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잠시 어지럼증이 있어서 몸을 가다듬은 것뿐이다.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마치 내 자신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사내를 향해 대답을 하고 있었다.


“코에서 피가 나십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사내 ― 산원(散員) 임억(任憶)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까 두통과 함께 흘러들어 온 이 몸의 기억 덕분에 나는 그가 나와 가장 가까운 무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서 전장에서 내 옆에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도 바로 그였다.


“전투에서 좀 몸을 과하게 쓴 모양이다.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별일이군요. 별장께서도 그럴 때가 다 있으신 모양입니다.”


임억은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을 하면서도, 약간의 농을 섞어 분위기를 이완시켰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것이 임억의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는 싸움에 아주 능하지도 않고, 머리가 아주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처세술의 달인이었다.


“사람이 힘을 지나치게 쓰면 그런 일도 있지 않······.”

“별장······?”


그러나 나는 다시 임억에게 하던 대답을 마치지 못했다. 눈앞에 다시 문자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무언가룰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튜토리얼 퀘스트 (진행중):

- 강림(降臨) (완료)

- 흥화진 진장(鎭將) 정용신 장군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기 (미완료)」


나는 눈을 비벼 보았지만, 이 문자는 당연하게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나를 과거로 오게 한 그 목소리의 주인이라면 이 정도 일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납득했다.


***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일단 내게 각인된 이 몸의 주인 고의신(高懿晨)의 기억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이 육체는 내가 과거로 오기 전, 멸망 시대를 살아가던 내 몸과 같은 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무언가 안배가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지금 내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내 머릿속은 어떻게든 이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서 내가 과거에 오고자 했던 목적 ― 세상의 멸망을 막겠다는 그 목표를 성취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내게 부여된 튜토리얼 퀘스트였다.

퀘스트에 따르면 내가 지금 찾아가야 하는 이는 바로 내 상관인 흥화진(興化鎭)의 진장(鎭將)인 정신용(鄭神勇) 장군이었다.

그래서 나는 흥화진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지체 없이 바로 흥화진 관아(官衙)로 향했다.

관아라고는 하지만 정신용 장군이 별장 이상의 무관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는 아사(衙舍)와 평소에 그가 기거하는 내아(內衙)의 초라한 건물 두 동이 전부였다.

현대인의 기준에서는 관청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의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이 시대를 평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런 중세 시대가 아니라 이보다 더했을 먼 고대로 보내졌다고 하더라도 내가 할 일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아의 아사(衙舍)에 들어서니, 정신용 장군은 지도가 놓인 책상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장군은 고개를 들고 나를 맞았다.


“들어오게, 별장.”


나는 가볍게 군례를 올리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군은 내게 자리를 권했다.


“오늘 전투에서 보여 준 자네의 용맹함이 실로 인상적이더군. 덕분에 우리가 적의 대침(大侵)을 또 한 번 지연시켰네. 이번 싸움에서 거란 놈들이 조금이라도 겁을 먹었으면 좋겠군.”


장군도 나도 이번 싸움은 그저 전초전(前哨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고, 그러한 싸움들로 우리가 충분히 약해졌다는 판단이 들면 적은 언제고 대군을 다시 몰아 압록강을 건너올 것이었다.

진짜 전쟁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이 머지않아 오리라는 걸 믿고 있기에, 우리는 이번 싸움의 작은 승리가 침공을 약간 유예시켰을 뿐, 적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장군도 나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적어도 능숙한 거짓말쟁이였다.


“분명히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한동안 다시 압수(鴨水, 압록강)를 넘을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렇게 기대를 한단 말이지, 그들이 꼭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전쟁을 즐기는 계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적의 군대는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압수 주변에서 아직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시 이곳을 들이칠지도 모른다.


“그래. 자네 말처럼 그랬으면 좋겠군.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장군은 그렇게 말하면서 무심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

“저들은 이번에 우리에게 패배했음에도, 끝내 군의 일부를 내원성(來遠城)까지 물리지 않을 것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놈들은 예전부터 압수 이쪽 편에다가 교두보를 만들길 원하고 있네.”


장군은 거기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란이 지금 우리에게 도발을 계속 감행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다가올 전쟁의 준비 차원에서 이쪽의 힘을 미리 깎아 놓기 위함이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넘어서는 목표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연유로 정신용 장군은 거란의 그 목표가 바로 압수 남쪽 고려 땅에다가 교두보 역할을 할 성을 쌓는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거란 입장에서 볼 때, 고려와 거란 사이의 암묵적 경계였던 압수는 그들에게 더 이상 별 고민거리가 아니게 될 것이었다.


“······.”


나는 뭐라고 정신용 장군에게 말을 보태는 대신에, 침묵을 지키며 그가 말을 이어 나가기를 기다렸다.

정신용 장군도 딱히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내게 단단히 봉해진 서간 하나를 건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방금 전투에서 돌아왔는데 이런 명령을 내려서 미안하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시급을 다투는 내용이니 기왕이면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네.”

“무슨 명령입니까?”

“그 서간은 오늘의 전공 보고를 간략히 담고 있네. 그러나 단순히 오늘의 전투에 대한 보고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닐세. 나는 거기에 거란군이 절대 압수 너머로 물러가지 않고 이곳에 눌러앉을 작정으로 보인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적었네. 미안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출발해서 이를 상부에 보고하고 와 줬으면 하네.”


고의신의 기억에 따르면 이러한 지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서북면(西北面)의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지휘부가 있는 안북부(安北府)에 이런 보고를 여러 차례 다녀온 일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바로 안북부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안북부가 아니라 개경으로 직행하게.”


정신용 장군은 무언가 단단한 결심을 내린 투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국경의 일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보고를 올릴 때는 절차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지금 정신용 장군은 그것을 무시하라고 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연유로 그런 지시를 내리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화근의 싹을 잘라야 하네. 나는 나 대신에 개경에 가서 적이 성을 완성하기 전에 군대를 동원해서 압수 너머로 쫓아 내야 한다고 조정에 강력히 주장해 줄 사람이 필요하네. 안북부에 치계(馳啟)하게 되면, 내가 강조한 내용은 다 산삭(刪削)이 되고 오로지 이번 전투에 대한 간략한 보고만이 조정에 올라가게 될 것이네.”

“하오나, 아시다시피 저는 일개 별장에 불과합니다. 제가 무슨 수로 개경에 올라가서 장군을 대신하여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논하겠습니까?”


내 말에 정신용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잠시 후,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강하게 당부했다.


“너무 걱정 말게. 나도 그대가 그런 일까지 해 주기를 바랐던 건 아닐세. 개경에 가거든 지채문 상장군을 찾아, 이 정신용이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게. 그 뒤로는 그의 말을 따르든지, 아니면 다시 흥화진으로 돌아오든지 하면 될 걸세.”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내가 급히 올라가 달라고 일을 맡긴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좀 충분히 쉬고 가도록 하게. 아무리 자네가 용장(勇將)이라고 하나 전투의 피로가 상당할 터, 몸을 좀 쉬게 해야 하지 않겠나. 얼굴을 보니 적잖이 지쳐 보이는군. 아, 그리고······ 가는 길에 임억이를 데려가도 좋네. 말동무라도 있으면 다녀오는 길이 좀 덜 수고롭지 않겠는가.”


내가 장군의 명령을 수락하자마자 퀘스트 창이 갱신되었다.


「튜토리얼 퀘스트 (진행중):

- 강림(降臨) (완료)

- 흥화진 진장(鎭將) 정용신 장군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기 (완료)

- 개경에서 지채문(智蔡文) 상장군을 찾아가 보고하기 (미완료)」


아무래도 이 튜토리얼 퀘스트는 일종의 연계 퀘스트로써 한두 번 누구를 찾아가고 해서 끝나는 단순한 퀘스트는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까지가 고려에 강림한 지 고작 몇 시간 되지 않은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순식간에 적응해서 퀘스트 수행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의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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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69 채여
    작성일
    24.09.04 19:47
    No. 1

    다 좋은데 중세 한국어 옆에 가로치고 해석 좀 ㅠㅠ

    찬성: 1 | 반대: 12

  • 작성자
    Lv.52 22nd
    작성일
    24.09.04 22:36
    No. 2

    체여// 그 조차도 의도한 연출이 아닐까요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초반의 체코인 병사들이 하는 대사처럼

    찬성: 12 | 반대: 0

  • 작성자
    Lv.22 n3******..
    작성일
    24.09.04 23:39
    No. 3

    G.O.A.T is back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69 용구당
    작성일
    24.09.05 00:08
    No. 4

    킹이즈백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3 플러렌
    작성일
    24.09.05 00:35
    No. 5

    1014년이면 2차 여요전쟁이랑 3차 여요전쟁 사이에 있는 국지전 빈발하던 시기네요. 김훈•최질의 난도 일어나는 해인데 아직 터지기 전인가? 처음엔 귀주대첩도 대승인데 그거도 바꿔야하나 생각했다가 국지전에서 고려가 3만인가 전멸하는 기록 있는데 그거 때문인가 하다가 김훈•최질의 난을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멸망으로 예정된 세계를 바꿔야하는 시점이 왜 1014년부터지? 너무 한참 전인거 같은데 어떤 뜻이 있으려나

    찬성: 6 | 반대: 0

  • 작성자
    Lv.56 칼즈낙
    작성일
    24.09.05 16:23
    No. 6

    공요롭게도 高씨네. 고려 클레임 각인가?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2 David.N.
    작성일
    24.09.12 08:54
    No. 7

    잘보고갑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8
    작성일
    24.09.18 14:01
    No. 8

    한자랑 한글 섞인건 아마 동기화 중이라는걸 보여주신거같고…

    시점이 고려인 이유는 작가님 의도니까 왜 고려 인지는 모르지만 핵전쟁 같은걸 막으려면 최소한 천년 전부터 기틀 닦아서 한국을 강국으로 만들어서 막으라는 뜻이 아닐까요 50년전 100년전 정도로는 핵전쟁을 막을 힘을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을까하는..

    그리고 주인공이 불사자니까 1000년동안 문제 생기는건 개입해서 해결하는 식으로 강국으로 가는 리스크를 확 줄일수 있으니…

    그.. 아메리카 배경으로 한 고려 소설 처럼요.. 거기도 쥔공이 불노불사라 암군 나오려하면 개입해서 제거해버리거나 하는식으로 나라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게 하니까..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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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8 24.09.06 1,569 87 17쪽
4 4화 +7 24.09.05 1,685 100 19쪽
3 3화 +11 24.09.04 2,021 113 17쪽
» 2화 +8 24.09.04 2,449 119 19쪽
1 1화 +24 24.09.04 3,028 11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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