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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새글

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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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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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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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3화

DUMMY

바로 이튿날, 나는 임억을 데리고 흥화진을 나서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임억은 개경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개경이요? 꼭 따라 가야합니까?” 하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룻밤 사이에 여행 준비를 잘 마쳐 놓았다.

고의신의 기억에 따르면, 이 시절 고려에서의 여행이란 흔히 목가적으로 묘사되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농경지를 따라 마을과 고을을 오가면서 지친 몸을 주막에 누이며 한잠 청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서북면(西北面) 변경과 패서(浿西) 일대는 말 그대로 고을의 중심부를 나서면 농지와 마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가 이내 아무것도 없는 늪과 들판, 그리고 숲으로 이루어진 임택(林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런 임야 지대에는 굳이 산지가 아닌 평야에서도 이리, 여우, 멧돼지 심지어는 호랑이까지 심심치 않게 나타났고, 당연히 이런 곳에서 쉬거나 잠을 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이러한 노지는 길도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데, 여행자들이 몸을 쉴 수 있는 주막 같은 게 있길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제 고을 밖으로는 벗어나지 않는 것이 흔한 시절이다.

주막 같은 것은 이 시대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밖에서 노숙하면서 산과 숲, 그리고 들판을 거쳐 여러 날을 달려 개경까지 당도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솔직히 편하고 쉬운 여행길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이런 여행길에 임억이 붙어 있으니 일이 한결 편해졌다.

혼자 여정에 나서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녀석은 이런 일에 있어 상당히 유능했다.

야숙(野宿)을 해야 할 때는 알아서 자리를 펴고 땔감을 모아 왔고 말에게 모이를 먹였다.

운이 좋아 성내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날에도 역시 알아서 잘 자리를 수배하고 먹을 것을 조달해서 왔다.

그렇게 무난히 며칠을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浿水, 대동강)에 다다랐을 무렵에, 우리는 이번 여정에 있어서 처음으로 큰 난관을 마주했다.

서경(西京, 평양)을 거치지 않고 그보다 상류에서 강을 건너려고 했더니, 다 무너져 가는 나루터에는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삯을 받고 강을 건네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전쟁 이후로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나루도 소용을 다한 모양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경으로 모셨어야 하는 건데······. 면목이 없습니다.”


이쪽으로 오면 더 빠르게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나를 이끌었던 임억이 민망한 듯 말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를 탓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나루터가 이렇게 되었는지 아닌지는 직접 와 보기 전까지는 알아볼 방법도 없는 세상이었다.

예전 기억을 믿고 움직였다고 해서 임억이 딱히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라. 일단 별 도리가 없으니 말을 돌려서 서경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다.”

“예. 그곳이라면 강을 건널 나룻배는 차고도 넘칠 것입니다.”


임억이 멋쩍게 웃으며 수긍했다.

그런데 그때 강 상류, 억새풀이 무성히 자란 곳에서 굽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거룻배 하나가 내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자니 노인 하나가 천천히 노를 저어 가며 배를 몰고 있었는데, 그 노인 외에는 배에 탄 사람이 따로 없었고 짐도 실려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노인장―! 거기 노인장―! 이리 와서 삯을 받고 강을 건네주오!”


거룻배를 발견하자마자 임억은 이때다 싶어 크게 소리치며 노인을 부르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서경까지 발길을 돌려 갈 수밖에 없던 차에 갑자기 강을 건널 방법이 생겼으니, 어떻게든 놓치지 않고 불러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허, 참. 여기 나루터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급한 사정이 있는 듯 보이니 어서 오르시오. 삯은 따로 받지 않겠소.”


임억의 말을 들은 모양인지, 노인은 천천히 거룻배를 몰아 우리 앞으로 끌고 왔다.

사람 둘과 말 둘이 한 번에 올라 건널 수는 없어 보였지만, 다행히 두 번을 나누어 타고 가면 될 정도의 크기는 되어 보였다.


“감사하오. 다만 두 번은 건너야 할 텐데 괜찮겠소?”

“어렵지 않소.”


그런데 어째 노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강에서 배나 모는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건장한 체구에 허리가 꼿꼿한 노인은 밖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피부가 그을리지 않았고 주름도 많지 않았다.

볼과 턱에 무성히 자란 흰 수염이 그가 늙은이임을 알려 주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장정 여럿은 혼자서 상대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해 보였다.

임억도 노인의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함부로 말을 놓지 않고 반공대로 노인을 대했다.

평소와 같이 시골 노인네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쪽이 먼저 건너시오.”


노인은 누가 먼저 건널 지까지 자기가 집어서 일러 주었다.

나보다 임억이 먼저 건너라는 것이었다.

임억은 순간 내 눈치를 보았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 말을 끌고 먼저 거룻배에 올랐다.


“그럼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임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그를 보냈다.

노인은 임억과 그 말을 태우자마자 전혀 수고롭지 않다는 듯이 천천히 노를 저어 강 건너편 언덕으로 향했다.

강물이 꽤 드세게 흐르고 있는데도, 노인이 무심하게 모는 배는 나아가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듯 물결을 자연스럽게 헤치고 지나갔다.

마치 배가 물 위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스쳐 지나간다는 듯이 말이다.

잠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배는 저쪽 기슭에 닿아서 임억을 내려놓았다.


“실은 내 따로 할 말이 있어 저이를 먼저 보냈소.”


그렇게 임억을 내려놓고 다시 강 이쪽으로 건너온 노인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을 내게 던졌다.


“나를 아시오? 노인장이 내게 할 말이 무엇이 있소?”

“일단 배에 오르시오. 강을 건너면서 이야기합시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내 말의 고삐를 쥐어 말에 올려놓았다.

나는 노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노인이 하자는 대로 잠자코 배에 올랐다.


“몸은 좀 익숙해지셨소?”

“······!”


내가 배에 완전히 오른 것을 확인한 뒤, 노인은 다시 노를 잡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도 않고, 오로지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만을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던진 질문을 나는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제 몸이라고 생각하고 잘 쓰면 될 것이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무슨 말씀이시오. 그쪽······ 도대체 뭘 알고 계신 거요?”


내 물음에 노인은 허연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가볍게 웃었다.


“내가 뭘 아는지가 중요하오? 그건 내가 때가 되면 또 일러 줄 일이 있을 것이외다. 그때까지는 궁금한 것이 많더라도 좀 참고 기다리시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오늘 여기서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니란 말씀이시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소. 비단 오늘 내가 당신과 만난 것만이 아니라 세상 제행만사(諸行萬事)가 그리하지.”

“······.”

“내 오늘은 일러 줄 말이 있어서 무리하게 이런 인연을 만들어 보았소.”

“말씀하시오.”


나는 약간의 경계심을 드러내며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내 반응조차 예상했다는 듯,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머지않아 필시 그 신체의 잠력(潛力)을 완전히 끌어 써야 할 일이 있을 것이오. 그때 그 가진 능력을 의심치 말고, 모든 힘을 다 꺼내 발휘하시오. 그 몸은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몸이올시다. 어떠한 병도 감히 침입하지 못할 것이고, 죽을 상처를 입어도 쉬이 회복할 것이며, 팔 하나로 큰 수소를 목을 졸라 죽일 수 있을 것이오.”

“노인장, 아니, 어르신······. 대체 누구십니까?”


노인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내 물음에 노인은 그저 묘한 표정과 함께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이미 나를 태운 배는 강 건너편까지 다 다다라 있었다.


“지금은 일단 내 말을 듣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시오. 때가 되면 다시 만나서 남은 이야기를 해 주리다. 그때는 들을 자격이 되어 있겠지.”


노인은 강기슭에 배를 대며 그렇게 말했다.

더는 묻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는 나를 내려 주고서 지체할 겨를도 없다는 듯 다시 노를 잡았다.

나는 노인을 붙들고 뭐든지 더 알아내 보려 했지만, 노인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대화도 나눈 적이 없다는 양,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치 나타날 때처럼, 다시 유유자적하게 배를 몰아서 강 하류를 향해 떠나갔다.


“보통 노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뭘 하는 노인일까요.”


임억이 멀리 사라져 가는 노인의 배를 보며 말했다.


“너에게도 뭐라고 말을 하더냐?”

“별말은 없었습니다. 그저 윗사람을 잘 모시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덕담이나 해 주더군요. 별장님은 무슨 말을 들으셨나 봅니다? 뭐, 점복(占卜)이라도 칠 줄 아는 노인인가 모르겠습니다.”

“나도 따로 들은 말은 없다만······.”


임억에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이야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억은 그런 나를 힐끔 보더니, 갈 길이 멀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그 노인 덕분에 강을 건널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남쪽으로 말을 바삐 달려가시지요. 오늘은 밖에서 자고 싶지는 않습니다.”


임억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으로 노인이 배를 끌고 내려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곳엔 이미 노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패수의 강물만이 말없이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


패수에서 조우한 노인과의 대화는 내게 많은 의문을 남겼다.

그의 존재부터가 의문투성이였지만, 그의 조언은 어쩐지 흘려듣기가 어려웠다.

그는 분명히 나의 존재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보였고, 조만간 내가 내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써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그 뒤로 개경에 도착하기까지 내 신체 능력을 탐색하는 데 틈틈이 시간을 썼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노인의 말대로 내가 다친 곳도 금방 아무는 회복력과 더불어 보통의 사람을 뛰어넘는 반사 신경과 협응 능력, 그리고 괴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반은 놀라고 반은 두려웠다.

이 새로운 육체의 신체 능력이 매우 뛰어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계가 없을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 것 같다는, 근원적인 공포를 건드렸다.

아무리 과거를 거슬러 올라오는 초자연적인 신비를 경험하였어도 나는 내가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게 주어진 신체 능력은 어디를 봐도 일반적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를 이곳으로 보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이제 초월(超越)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이니, 네 필멸(必滅)한 육체는 거듭나서 불멸(不滅)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네 모든 가진 지혜와 힘을 다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게 될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내 이름으로 약속되었다.」


분명 일전에 만난 노인도 내 몸이 죽을 상처를 입더라도 쉬이 회복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정말 불멸하는 존재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인의 말에 따르면 어지간한 일로는 죽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며칠 간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임억과 나는 드디어 목적지인 개경(開京)에 당도했다.

이 시절, 그러니까 서기로 1014년 가을의 개경은 한 나라의 수도라고 부르기에는 큰 손색이 있는 상태였다. 개국 이래, 한때는 번영했을 이 도시는 지난 거란과의 전쟁에 의해 초토화된 상태였다.

도성 전체를 에워싸는 나성(羅城)은 여섯 해 전에 공사를 시작했다가 전쟁을 맞아 완공하지 못하고 공사가 중지된 상태였고, 도시 전체를 에워싸는 성곽이 없으니 도시의 경계가 불명확했다. 도시의 구조는 난잡했고 건물들은 볼품없었으며, 기와를 인 집의 수도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산비탈을 따라서는 그냥 초가집도 아니고 움집들이 늘어서 있기까지 했다.


“개경이라고 해서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는데······ 이건 생각 밖입니다, 그려.”


내가 (비록 멸망하기는 했지만) 현대 문명을 누리다가 왔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 사람인 임억마저도 그렇게 느꼈는지, 어지간히 실망을 한 눈치였다.


“지난 전쟁에서 도읍이 완전히 불타 버렸다고 들었다. 아마 제대로 복구를 할 만한 시간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개경 자체가 원래 너른 땅을 잘 골라서 도읍으로 삼은 곳이 아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협소한 분지에 한 나라의 도읍이 들어앉았으니, 본래부터 공간이 비좁고 도시 계획이 효율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전쟁의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갔음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저 산비탈마다 시골에서나 보는 움집이 저리 늘어서 있지 않습니까.”

“그럼 도성에 오면 집집마다 벽돌로 담을 쌓고 지붕에는 기왓장이라도 올리고 있을 줄 알았더냐.”

“그건 아니더라도 다들 번듯하게 나무 바닥에 마루라도 올려놓은 집이라도 지어서 살고 있을 줄 알았지요.”

“설령 예전에 그랬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쉽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망가지고 약탈당한 도시가 몇 년 사이에 예전 모습대로 회복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도성 인구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니니, 좁은 공간에 이리저리 빠르게 초가집을 올리고 그도 안 되면 움집이라도 지어서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물론 전시가 아니었더라도 개경의 이 수많은 집이 모두 번듯하게 기왓장을 올릴 정도로 나라의 국부(國富)가 풍족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전쟁 전에는 이보다 나은 모습이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개경이 지금 이런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 된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거란의 공이 컸다.

시가지만 타 버린 것이 아니라 궁궐도 불타 버렸고, 고관대작들의 저택들도 터만 남은 곳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것들을 한 번에 재건하는 와중에 도읍 둘레를 따라 나성까지 축조하는 공사까지 하고 있으니 도시에 물자가 돌고 활력이 살아나는 측면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도시가 번영한다기보다는 어렵사리 회복 중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도 다 엉망진창은 아닌 모양입니다. 안쪽으로 들어오니 좀 보기가 낫군요.”


도시 한 가운데로 들어오니 그제야 임억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기대했던 도회지의 모습을 발견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했다.

전쟁으로 인해 망가졌을지언정 그래도 한 나라의 도읍이다. 도시 전체가 엉망은 아니었고, 내성(內城)으로 들어서는 남대문(南大門)에서부터 궁성 정문인 광화문(廣化門)까지 이어지는 남대가(南大街)에는, 다른 지방 고을들에서는 보기 힘든 번화한 시전(市廛) 행랑(行廊)이 죽 이어져 있었다.

이 길 주위로는 그냥 일반적인 상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술만 파는 주점(酒店), 차만 전문적으로 파는 다점(茶店), 사치품과 장구류를 취급하는 가게들, 드물게는 송나라, 나아가서 남쪽과 서쪽의 바다 너머 나라들로부터 들어온 귀한 외국 물건들을 파는 가게까지도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저포(苧布)나 은(銀)이 아닌 성종 연간에 찍어 낸 철전(鐵錢)으로도 거래를 시도해 볼 수가 있다고 한다 ― 물론 나로서는 이를 믿기 어려웠는데, 아직 고려 어디에서도 철전으로 거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곳을 구경할 시간을 줄 터이니, 어서 지채문 상장군 댁이 어딘지 물어보아라.”


나는 처음 보는 옷감과 장신구에 정신이 팔려 있는 임억을 재촉해서 사람들에게 목적지의 위치를 묻게 했다.

다행히 임억이 여러 사람에게 묻기도 전에 그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이 나왔다.

우리가 위치한 남대가에서 조금 들어간 길가에, 내가 찾고자 하는 지채문(智蔡文) 상장군의 저택이 있었다. 황폐화한 도성 내에서 드물게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잘 만들어 올린 집이었다.

높은 대문 위로 깔끔하게 이어 올린 기왓장은 이 집 주인의 위세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집 문 앞에서 말을 내린 뒤에 사람을 찾아 불렀다. 내가 개경까지 와서 만나야 했던 사람이 이 집 안에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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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1

  • 작성자
    Lv.72 명원납치
    작성일
    24.09.04 22:40
    No. 1

    퍼거토리 제 인생 대역이었는데 새로 작품을 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ㅜㅜ

    찬성: 12 | 반대: 0

  • 작성자
    Lv.70 아랍나잇두
    작성일
    24.09.04 23:54
    No. 2

    이번 작품도 대박냄새 벌써 나네요
    부디 계속 연재해주셔서 퍼거토리같은 대작 부탁드립니다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69 용구당
    작성일
    24.09.05 00:10
    No. 3

    킹이즈백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53 플러렌
    작성일
    24.09.05 00:37
    No. 4

    이번에도 고려부터 시작인데 전작보다 더 이전이네요. 아직 여요전쟁이 이어지던 시기인데 왜 이때부터 바꾸어야 멸망을 막을 수 있는거지? 흠... 김훈•최질의 난 부터 막아야하는건지 아니면 다음해인가 국지전에서 대패부터 막아서 나중에 3차 전쟁 이후 요동으로 치고 나가야하는건가? 흠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33 겨울보리
    작성일
    24.09.05 01:04
    No. 5

    좋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3 로르샤흐
    작성일
    24.09.05 09:06
    No. 6

    딱 김훈 최질의 난 일어나는 시기군요. 주인공이 김훈 최질 잡아죽이고 현종 구해서 바로 출세하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3 로르샤흐
    작성일
    24.09.05 09:08
    No. 7

    현종 이후 긴 평화 속에 고려 모순 쌓이고 여진 정벌 실패하고 이자겸의 난 터지고 묘청의 난 터지고 하니까, 길게 보고 고려가 내부 모순 안 쌓이게 하려면 현종 때부터가 딱이죠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60 Skilleta
    작성일
    24.09.05 16:27
    No. 8

    개경의 수혈주거까지 표현되네. 역시 고증 GOAT...

    찬성: 1 | 반대: 1

  • 작성자
    Lv.87 ranger
    작성일
    24.09.08 18:50
    No. 9

    저 노인이 산신령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David.N.
    작성일
    24.09.12 08:59
    No. 10

    영원불멸의 황제가 황금옥좌에서 통치하시는 대진국 만세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78 아다지오
    작성일
    24.09.15 17:41
    No. 11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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