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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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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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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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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9.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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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2화

DUMMY

“허억······!”


다시 인터페이스 화면 아래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켜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지만, 이 정도라면 거의 미래를 예언하고 경험하게 해 주는 것에 가까웠다.

적어도 내가 체감하기로는 그랬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온 느낌을 받았다.


「시뮬레이션 완료. 실현 확률: 88%」


인터페이스 화면에는 건조하게 시뮬레이션이 완료되었다는 글자만 떠올라 있을 뿐이었지만, 그 옆에 있는 확률 88%라는 것이 나를 섬찟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일이 진행될 확률이 88%라면, 이것은 실질적으로 미래를 보여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미 도저히 승리라고 할 수 없는 결과를 내어놓을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이제 와서 전술을 바꿀 수는 없으니, 아무것도 아닌 중랑장 직위로나마 어떻게든 수뇌부를 설득시켜서 적의 매복과 기습을 막을 준비를 단단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들에게 내가 고려군이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고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피해를 남기게 되는 미래를 보고 왔다고 말하며 설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적이 매복을 하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이쪽에 큰 피해를 주려고 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


다행스럽게도 그 증거를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되었다.

나는 임억을 시켜서 적이 매복해 있을 만한 곳을 멀리서 정찰하게 했다.

임억은 비록 거란군이 정확히 어디에 매복했는지 확인까지는 두 눈으로 못했지만, 거란군 기병들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는 여진족을 잡아 오는 데 성공했다.

길잡이 여진족을 잡은 것은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운이 좋게도 우리는 대략 어디에 거란군 기병들이 매복했는지 추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걸 모르고 그냥 들이쳤다면 큰일이 날 뻔했군.”


거란족 길 안내를 했다는 여진족에 대한 심문이 끝난 다음, 지채문 상원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또한 매복한 기병들의 존재를 모른 채 섣부르게 전투를 개시했다가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짐작이 간 것이다.

지휘관 입장에서는 정말로 한숨 돌린 셈이었다.


“그럼 일단 좌군, 중군, 우군으로 나누어서 가되, 좌군에는 최대한 기병들을 많이 포함시켜 빠르게 적의 부교를 끊은 다음, 매복한 적 기병이 들이칠 수 있는 경로를 미리 선점하여 막는 것으로 하지. 중군과 우군도 성을 함락시키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성을 공격하다가 적의 기병이 나타나면 좌군이 몰아주는 적 기병을 받아 내는 데 집중하도록 하겠네. 어차피 완성되지도 않은 성, 적 기병만 성공적으로 막아 내고 난 뒤에는 손쉽게 떨어질 걸세.”


나는 적극적으로 전략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았다.

겨우 중랑장의 직책을 가지고 주제넘게 이곳에서 전략을 논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저 임억을 시켜서 적의 매복을 확인할 증거를 만들어 온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한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지휘관들도 논의 끝에 적절한 전략을 만들어 냈다.

기병으로 이루어진 좌군으로 먼저 거란군 기병을 막아 낸 다음에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해 그들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은, 전략에 그다지 밝지 않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만 좀 아쉬운 것은 미리 이럴 줄 알았다면 검차와 같은 대기병 무기를 충분히 준비해 둔다던가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정도로 시간적 여유와 자원이 충분하지가 않았다.

지금 상황을 고려했을 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뭣보다 이 계획이 성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적 기병의 첫 공세를 막아 내고 그들을 중군과 우군을 향해 몰아갈 좌군이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기병의 숫자만 놓고 보면 절대로 매복한 거란군 기병보다 우리가 우세하다고 할 수 없었고, 그들의 무장 상태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 말은 좌군이 생각 이상으로 분전(奮戰)을 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저는 좌군에서 기병들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내 신력(神力)이 비록 수천의 군대와 홀로 맞서서 전황을 바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소간 존재하는 전세 상의 불리함을 역전시킬 수 있는 정도는 될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좌군에 속하기를 자청했고, 그러잖아도 그렇게 지시를 내릴 생각이었던지, 지채문 상원수는 순순하게 내 요청을 수락했다.


“정용신 장군에게 자네는 특히 말을 몰며 싸우는 솜씨가 탁월하다고 들었네. 이번 작전에는 좌군에 훌륭한 장수가 많을수록 좋으니,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게. 자네를 중군에 데리고 있는 것도 좋겠지만, 자네가 나를 보좌하고 있는 것보다는 직접 나가서 싸우는 편이 전체 전투를 봐서도 훨씬 도움일 걸세.”


그렇게 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끝냈다.

시뮬레이션에서 본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가 아닌, 진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대비를 할 수 있는 만큼은 마쳐 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싸움뿐이었다.


***


멸망 전, 미래에서 읽었던 대체역사 소설들을 떠올려 보면, 대개 주인공들은 지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역사에 간섭하고 그 흐름을 바꾸어 나갔다.

그것이 미래에 대한 지식이 되었든, 아니면 뛰어난 외교 감각이 되었든, 아니면 지혜를 가장한 운이 되었든지 간에 말이다.

그런 소설 속 주인공들과 나는 과거에 갑자기 내던져졌다는 사건은 공유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공유하지 못했다.


특히 나는 내 지적 능력이 역사를 바꿀 정도로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서양 근대사, 그것도 특히 영국사 전공으로 유학까지 다녀와서 박사를 밟았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대관절 서기 1000년 무렵 고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무슨 함의를 가진단 말인가?

역사학 박사 학위를 가지거나 말거나 내가 그냥 역사에 대한 지식이 좀 있는 미래인이라는 것 외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소설은 소설일 뿐, 실제로 과거에 돌아가 보면 미래인이라고 해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일을 경험한 사람 중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었고,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어쩌면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지적으로 아주 탁월한 것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이, 어쨌든 이 시대를 살아남기에 유리하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사실이었다.


그것도 그냥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뛰어났으니 사실 미래 지식 몇 개를 머리에 쌓아 놓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 더 나은 조건일지도 모른다.


“이쪽으로 와서 도와주십시오!”


굳이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 복잡한 논리를 토대부터 쌓아 올라갈 필요는 없다.

일단 내가 이런 전장 한가운데에서 두려움 없이 적의 머리통을 까부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부터가 내 신체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이제 보니 그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확실하게 한 명은 추가된 것 같았다.


“별장쯤 달았으면 알아서 거란군 열 명 정도는 상대해야 하지 않겠나?”

“진심이십니까? 만약 그게 됐으면 중랑장님이 중랑장이 아니라 제가 중랑장이었겠지요.”


나는 철퇴로 임억 주변에 있는 거란군들의 머리통을 두들기면서 임억에게 말했다.

완연히 피로한 기색인 그는 얼굴에 자상(刺傷)까지 나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의 넉살은 죽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남기(藍旗)가 올랐습니다!”


그렇게 임억과 함께 주변의 거란군들을 하나 둘 까부수며 전선을 밀어내고 있는 와중에, 임억이 나를 향해 외쳤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중군(中軍) 본영(本營)에서 정말로 청람색(淸覽色) 깃발을 일제히 휘날리고 있었다.

남색 깃발이 올라오면 주로 기병으로 채워진 우리 좌군(左軍)은 일제히 빠르게 후면을 돌파해서 매복한 적이 전장에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부교는 완전히 끊어 놓았느냐?”

“그냥 끊어 놓은 게 아니라 활활 타도록 불을 질러 놓았습니다.”


나는 우리의 일차 목표였던 내원성으로 이어지는 적의 부교가 완전히 무너진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내원성에 적이 남아 있더라도 원군을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부교는 활활 타오르며 강물 아래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좌군은 전군 돌격하라!”


그때 때마침 좌군의 총 지휘를 맡고 있던 정용신 장군으로부터 명이 떨어졌다.

장군의 명이 떨어지자 그 주변의 부관들이 일제히 허리에 차고 있던 나발을 높이 치켜들며 불었다.


부우웅-하는 나발 소리와 더불어 이내 전면에 나서 있던 거란 보병들을 두드리고 있던 우리 기병들이 일제히 박차를 가해서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쪽으로는 거란군 병력이 진탕 나 있는 상황이라 돌파는 어렵지 않았다.


“적들이 토축(土築) 위에서 활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걱정할 것 없다. 적이 화살을 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우리는 적진을 돌파한다.”


고려 기병은 거란군에 비해 그 수가 적을지언정 바보가 아니다.

적이 짓다가 만 성의 옹벽(擁壁) 위에서 화살 좀 날린다고 겁나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다들 알아서 팔에 건 방패를 치켜 화살을 막으면서 빠른 속도로 성의 북쪽을 돌아 산과 들판이 만나는 길목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흥분해서 덤벼들지 말고 항상 몸을 조심해라. 괜히 앞서 나가서 녀석들을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나는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옆에서 같이 내달리고 있는 임억에게 충고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앞서 시뮬레이션 중에 보았던 녀석이 죽는 모습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도 나는 녀석이 이 싸움에서 그렇게 의미 없이 목숨을 잃고 가 버리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 중에 녀석에게만 붙어서 지켜 주고 있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녀석 스스로 조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뭐라 그러시는지 잘 안 들립니다!”


녀석은 정말로 제대로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민망해서인지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녀석이 어딘가 들떠 보이는 것이 조금 불안했지만, 설령 미래에 벌어질 일을 어느 정도 알고 행동한다고 해도 그것을 모두 내 뜻대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조심하라고 했다. 특히 너무 앞서나가서 적의 눈먼 화살에 노려지는 일은 없도록 해라.”


그럼에도 나는 녀석의 곁에 다시 한번 따라붙어서 경고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쯤 되면 녀석도 내가 한 말이 한 번쯤은 마음에 걸려 조심을 할 것이다.


“······.”


그렇게 성 자리를 반 바퀴 돌파해 들어가니, 이미 북동쪽 산자락 끝에서는 여태껏 보이지 않던 적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거란이 자랑하는 철갑 기병들이었다.


“적입니다!”


기병 대 기병으로 싸우면 거란의 철갑 기병은 상대하기 곤란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 말은 해당하지 않았다.

나는 칼이 아니라 둔기로 싸우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커다란 철퇴로 타격을 해 대면 아무리 중장갑을 입고 있더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둔기에 싣는 힘은 보통 사람의 그것을 훨씬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괜히 여기서 돌격을 멈추고 지체하느니 그냥 시원하게 들이박은 다음에 한 판 뒹구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 쪽 희생도 있겠지만, 일단 내가 적과 붙기 시작하면 기세를 우리 쪽으로 끌어올 자신이 있었다.

내가 전쟁의 구도를 바꿀 만큼의 능력은 없어도, 전장 일각에서 판세를 유리하게 끌어올 정도의 무력은 있었다.

적어도 나 스스로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돌격하라!”


그리고 때마침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쏟아져 내리는 적 기병을 피하지 않고 바로 지금 기세대로 맞붙어서 싸우기로 정용신 장군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효시가 날아가자 그것을 신호 삼아 좌군 기병들은 일제히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를 붙여 올렸다.


“가자!”


나는 내가 아껴 마지않는 둔중한 철퇴를 힘껏 치켜든 채로 외쳤다.

그리고 그대로 있는 힘껏 말을 몰아 적의 철갑 기병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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