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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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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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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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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6화

DUMMY

가을이 되어 임금이 서경으로 이어(移御)하여 왔다.

그사이 서경에는 패서(浿西) 각지에서 모은 군대 5천 가량이 이미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이후 서북면(西北面)의 여러 주진(州鎭)에서 모은 군대와 합류하여 흥화진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 군대가 여기 모여 있는 것은 중요했다.

이자림은 여차하면 이 5천 군대의 일부를 움직이기로 몇몇 믿을 수 있는 장수들과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그가 최악의 경우까지 대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 혼자 버려지게 되고 나머지는 살아남는 더러운 경우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자림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자림은 김훈과 최질이 자신의 지지 기반인 경군을 끌고 오는 것을 최대한 막아 보려 했던 모양이지만, 그들은 결국 어가(御駕)를 호종한다는 핑계로 수백의 경군 병력을 기어코 서경까지 데리고 왔다.

그것도 모자라 임금이 서경에 체류하는 동안 머물게 될 장락궁(長樂宮)의 경계는 자기들이 끌고 온 경군 병사들에게 맡기겠다는 의사를 일방적으로 전달해 왔다.

때문에, 이자림의 입장에서는 계획의 공백이 생기게 된 셈이었다. 수백의 경군이라고 하더라도 서경에 모인 5천의 군대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일단 이변을 감지하고 장락궁으로 들어와 경군을 제압하기 전에, 김훈과 최질이 먼저 경군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무력의 규모에서는 차이가 났지만, 무력을 동원하는 데 드는 시차 때문에 김훈과 최질이 일시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이자림의 계획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부분이 고민이었는지, 이자림은 나를 다시 불러서 지시 사항을 다소 바꾸었다.


“김훈과 최질 두 상장군이 장락궁의 시위(侍衛)는 오로지 경군에게 맡기겠다고 하니, 일이 꼬이게 되었네. 서경에 모인 군대는 이제 궐 밖에 머무르고 있어야 하니, 유사시에 그들이 경군보다 먼저 진입하거나, 아니면 경군을 제압하고 들어오는 게 힘들어졌어.”


일이 조금 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자림의 눈은 어쩐지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상당히 판단이 기민한 사람이었다.

분명히 상황 변화로 인해서 당황하였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지시를 내리는 그의 얼굴에서는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자칫 두 반역자에게 손을 잘못 대었다가는 일을 크게 그르칠 수 있네. 감히 무엄한 생각이라 말로 차마 옮길 수도 없네만, 내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그대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걸세.”


이자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경에 모인 패서군이 궁궐 밖에 있고 경군이 궁궐 안에 있다면 패서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김훈과 최질이 일방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분노한 김훈과 최질에 의해 임금이 다치거나 살해당하는 것까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이자림으로서는 이런 위험을 끌어안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계획을 다소 수정했네. 패서군을 장락궁 안으로 진입시킬 방법이 사라졌으니, 미리 무기들을 연회가 열릴 곳 주변을 비롯해 장락궁 안의 여기저기에 숨겨 놓아야겠네, 그리고 차비노(差備奴, 궐내 잡역에 종사하는 노비)와 서경유수부 관리 등으로 위장시켜 연회장에 미리 들여놓아야겠네. 혹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는가?”

“그들이 유사시에 무기를 갖추고 연회장을 먼저 장악할 수 있다면, 경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을 바라시는 것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을 때의 일이지만, 그렇네. 물론 최선은 칼을 든 싸움을 하지 않고, 원래 계획대로 두 반역자와 그 휘하의 무관들을 술에 취하게 해서 제압하는 것이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가장 깔끔하겠지만, 당연히 그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준비는 해 두어야겠지······.”


이자림의 말대로 이렇게까지 준비할 필요는 없었으나, 만의 하나 일이 잘못되어 김훈과 최질이 충분히 취하지 않고 연회를 작파하려 하거나, 아니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경군을 움직이려 할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자림으로서도,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도, 최선은 계획대로 김훈과 최질을 비롯한 경군 무관들이 연회에서 만취하여 힘도 쓰지 못하고 빠르게 제압되는 것이었다.

기존 계획대로 수뇌부만 성공적으로 제압할 수 있으면 밖에 있는 경군 병력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지휘할 윗사람이 없을뿐더러, 자칫하다가는 역적이 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과 최질이 힘이 있을 때나 그들의 명을 따르는 게 좋은 일이지, 그들이 무력화되면 그들을 위해 싸우는 것은 그저 반역자가 되겠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고 또 잘못되어 숨겨서 들여보낸 병력까지 제압당하거나 무력화되면 어찌 됩니까?”

“그런 상황까지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그렇게까지 일이 꼬이지 않기를 바라야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를 더 추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냥 지시대로 준비를 하겠다고 부복하고 나와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나는 장락궁 여기저기에 무기들이 잘 감추어졌는지, 위장하여 궐내에 들어와 있을 서경군 병사들은 특별히 믿을만하고 우수한 자들로 선발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유사시에 합을 맞추어 움직일 수 있도록 잘 준비가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점검하며 그날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준비가 마무리되고 나자, 퀘스트 창이 갱신되었다.

연회 준비가 완료로 바뀌고 새로운 임무가 이어서 추가된 것이다.

퀘스트 창은 이제 김훈과 최질을 사로잡거나 죽이라고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


「튜토리얼 퀘스트 (진행중):

- 강림(降臨) (완료)

- 흥화진 진장(鎭將) 정용신 장군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기 (완료)

- 개경에서 지채문(智蔡文) 상장군을 찾아가 보고하기 (완료)

- 이자림(李子琳)을 수행하여 서경에서 연회를 준비하기 (완료)

- 출정 연회에서 김훈과 최질을 사로잡거나 죽이기 (미완료)」


내가 잠시 퀘스트 창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옆에 있던 임억이 은근슬쩍 말을 걸어왔다.

녀석은 일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지금 김훈과 최질을 잡기 위한 덫을 놓고 있다 정도는 내가 일러 주었다.

다만 그런 사실이 녀석을 조금 불안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히 목숨 내걸고 죽을 자리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말입니다.”

“괜찮다. 설령 일이 잘못되고 너 혼자 잘 빠져나가서 도망에 성공하더라도 내 원망하지는 않으마. 아니면 지금이라도 일에서 빼 주랴? 급한 용무를 핑계로 너를 흥화진으로 오늘 당장이라도 보내 줄 수 있다.”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별장.”


임억은 그렇게 말하며 툴툴거렸다.

이미 나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과 더불어 성공 시에 주어질 보상을 고려한 뒤, 이렇게 된 이상 이참에 한 몫 거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임금이 직접 허락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일이 잘 안 풀리는 순간 역도로 몰려 목숨을 내놓게 생기지 않았는가.

녀석의 망설임을 감지한 나는 일단 장담 해 주지 못할 약속을 마치 장담해 줄 수 있다는 양 말하며 녀석을 안심시켰다.


“일단 날 믿고 따라와라.”


원래 이런 말을 하면 그래도 도리어 의심을 해야 정상인데, 임억은 어쩐 일인지 그 말 한마디에 쉽게 수긍을 해 버렸다.


“그래요. 휴······ 좋습니다. 별장님이라면 어떻게든 일이 성사되게 만드실 겁니다.”

“네가 날 그렇게 믿는 줄은 몰랐다.”

“믿고요. 믿고말고요. 그렇지 않으면 왜 제가 전장에서 별장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겠습니까. 별장님 옆에만 붙어 있으면 산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가 별장님을 그렇게나 믿는다는 말이오이다.”

“······.”

“여하튼 정신 단단히 차리고 있겠습니다. 저도 일이 잘 풀려서 밭뙈기나 좀 받고 별장도 달아 보고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튜토리얼 퀘스트부터 실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작부터 무너지려고 과거로 돌아온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


다음 날, 대동한 문무(文武) 신료들과 서경유수부(西京留守府)의 관헌들, 거기에 서경의 부민(府民)들까지도 모두 모은 성대한 연회가 장락궁(長樂宮)에서 열렸다.

임금은 직접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김훈을 상원수로, 최질을 원수로 임명한 다음 부월을 직접 하사했다.

영봉문(靈鳳門) 앞의 커다란 구정(毬庭)이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모여들 정도로 규모가 있는 연회였다.

그러니만큼 임금과 함께 장락궁으로 들어선 김훈과 최질의 두 상장군은 수상함을 느끼기는커녕, 그들이 탈취한 정권을 공고히 할 좋은 기회를 받아 출정한다는 생각으로 살짝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거란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압수를 건너와 성을 축조하고 있는 거란병을 몰아내는 일만 하더라도 반드시 쉬운 싸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패서와 서북면 전역의 군사를 2만 가까이 긁어모아 출정하는 것이다.

이길 가망이 높았고, 이기면 곧 전훈(戰勳)이 되는 일이니, 잃을 것이 적고 얻을 것은 많아 보이는 싸움임에는 분명했다.


“거란이 지난 두 번 내침을 하여 온 것도 부족하여, 이제는 두 나라의 국경으로 삼은 압수(鴨水)를 건너와 요지의 땅을 제멋대로 보주(保州)라 이름하고 성곽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키고자 하니, 그것을 그대로 방기(放棄)하여 놓아두면, 종래에는 나라의 커다란 근심이 되고 적이 또다시 이 나라를 노릴 때 그 첨병(尖兵)이 되리니, 이를 기인지우(杞人之優)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미래의 화근을 솎아 내고 나라의 국경을 튼튼하게 방비코자 하여 패서와 서북면 각지의 정병을 모아 적을 압수 밖으로 다시 몰아내고자 하니, 상원수 김훈은 짐이 내리는 부월을 받아 적을 토벌하고 다시는 압수를 넘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크게 징치(懲治)하고 돌아오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선 김훈은 임금이 내리는 부월을 받아 들고서 일어났다. 전장으로 나가게 되는 것에 긴장한 모습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소 무례하게도, 부월을 받은 뒤 임금이 몸을 일으키라 명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몸을 일으켜서 그 부월을 치켜들고 좌중에 반응을 강요했다.


“만세―!”


좌중에게서 마지못해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김훈은 살짝 찌푸려진 눈으로 오시하며 즐기는 듯 보였다.

겉보기에는 만세의 외침이 임금에게 가는 것인지, 김훈에게 향하는 것인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김훈이 원하고 즐기는 바일 것이다.

그렇게 부월의 수여가 끝나고, 억지 만세 삼창이 다 마무리되자, 임금은 출정연(出征宴)의 개최를 선언했다.


“그간 나라가 거란적(契丹賊)의 내침(來侵)을 받은 탓에 뭇 백성이 함께 신음하고 근심하였다. 나라 안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그치고 좋은 음식으로 서로 나누는 예도 더는 차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데는 상하귀천(上下貴賤)의 유별(有別)함도 없이 나라 안의 모두가 그러하였다. 특히 서북(西北)과 패서(浿西)의 고통이 더욱 극심하였으니, 고을마다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지 않은 곳이 없고, 성채마다 죽은 이를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짐(朕)이 일찍이 이를 가엽게 여겨 위무(慰撫)할 뜻을 품었으나, 오늘에서야 겨우 서경(西京)에 거동하여 군무(軍務)와 민심을 두루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오늘 하루는 창름(倉廩)의 곡식을 널리 풀고 고기를 내어 함께 즐기고자 하니, 너희는 함께 근심을 잊고 즐기며 서로 위로하라.”


연회장은 영봉문(靈鳳門) 뒤의 화양루(華陽樓)라는 누각에 차려졌다.

임금이 가장 상석에 앉았고, 그 앞 가까운 곳에 두 상장군, 김훈과 최질이 나란히 독상(獨床)을 받고 앉았다.

나머지 서경유수부의 관료들과, 왕을 호종하여 따라온 일부 문관들, 그리고 경군 무관들이 그 품계와 지위를 고려하여 자리하고 앉았다.

나와 임억은 그 가운데에서 말석(末席) 가운데 말석, 임금과는 가장 외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도 이자림이 미리 조치해서 자리를 주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연회장에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 다들 술 한 잔씩 들도록 합시다. 참으로 좋은 날이오.”


임금이 연회의 개시를 알리자마자, 상원수 최질이 벌떡 일어나 마치 본인이 연회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술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순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경군 무관들은 웃음으로 환호하면서 최질을 향해 술잔을 치켜들었다.

지금 임금과 조정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이보다 여실하게 보여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 아니라 김훈과 최질 두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자, 우리도 다들 듭시다. 폐하의 만수무강과 두 상장군의 천수(天壽)를 기원하며 함께 술을 나눕시다.”


나는 이자림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흘끗 그를 쳐다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웃는 얼굴로 술잔을 높이 치켜들며 머뭇거리는 문관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김훈과 최질은 그를 흘끗 보더니, 이내 얼굴에 비웃음과 만족스러움이 동시에 떠오르는 미소를 떠올렸다.

동시에 일부 문관들의 얼굴에는 이자림에 대한 경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자림은 누가 뭐라고 하든 전연 개의치 않는다는 듯, 먼저 벌컥거리면서 자기 술잔을 다 비우고 나서, 다시 술잔에 술을 부으며 사람들을 부추겼다.


“자, 뭣들 하십니까? 어서 잔을 듭시다. 최 상장군 말씀대로 좋은 날 아닙니까?”


나도 임억과 함께 그를 따라 술잔에 술을 부었다.

이자림이 어떤 마음으로 저러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큰일을 위해 장부가 한순간 몸을 굽히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그의 그런 배포에 조금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과연 이자림이 의도한 대로, 그때까지 주저하던 문관들과 서경유수부 관리들까지 다 같이 술잔을 치켜들며 한 모금씩 들이키고 나자, 연회의 분위기가 한층 부드럽게 풀어졌다.

임금은 여전히 상석에 앉은 채로 조용히 말이 없이 있었지만, 아래에서는 순배(巡杯)가 여러 차례 돌면서 점차 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때맞춰 풍악도 갖춰지고, 여인들의 춤까지 어우러지자, 술이 술을 부르기 시작하며 흥이 점점 돋워져 갔던 것이다.


“폐하. 신이 감히 술 한잔을 올려도 되겠나이까?”


이자림이 띄워 놓은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다음으로 나선 것이 이부상서(吏部尙書) 이주헌(李周憲)이었다.

그는 분위기를 띄우는 척 임금에게 술 한잔 올리기를 청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경직되었음과 동시에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주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멀리 앉은 나도 주의 깊게 보면 눈치를 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그가 김훈의 앞에서 임금을 향해 술잔 올리기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게 의도치 않게 김훈의 주의를 끌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별문제 없이 지나갔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훈은 그런 이부상서를 이미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서께서 나이가 들어 수전증이라도 오신 모양이오. 그 나이에 여기 나와서 고생이 많소이다. 허허허.”


임금이 이주헌에게 대답을 하기도 전에, 김훈이 먼저 이주헌을 향해 입을 먼저 열었다.

그리고 그가 뱉은 말에 겨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해 놓았던 연회장에 순간적으로 기다란 정적이 흘렀다.

특히나 오늘 거사를 벌이기로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특히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정적은 일단은 김훈의 옆에 앉아 있던 최질의 한 마디에 깨졌다.


“그리 말씀을 독하게 하시오. 어전(御前)이다 보니 상서께서 좀 긴장을 하신 모양이지. 그렇지 않으시오?”

“그, 그렇습니다.”


이주헌은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당황한 기색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이자림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김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폐하께 바칠 술에 뭐라도 좋지 않은 것을 탔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폐하께 한잔 올리기 전에 그 술을 내게도 한잔 주시오. 내가 먼저 기미(氣味)하지.”


김훈의 눈초리가 번득거리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웃으면서 농을 던지던 표정이 싹 사라진 것이다.

하긴, 아무리 대우에 불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군사를 일으켜 정변을 단행할 정도라면 기질이 보통 기질이 아닌 사람이다.

뭔가 낌새가 수상함을 귀신같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되었소. 상원수. 내 직접 마실 테니 이부상서를 그만 괴롭히시오. 이부상서는 내게 술 한잔 진헌(進獻) 하시오. 내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리다.”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임금의 말에 김훈도 더는 나서지 않고 물러났다.

임금이 적절한 때에 무마를 잘한 셈이었다. 이부상서는 조심스럽게 임금이 앉아 있는 상석으로 나아가 술을 한잔 올렸다.


“맛이 좋군.”


임금이 그렇게 말하며 연회의 분위기를 다시 정리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김훈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아는 바대로라면, 이자림이 세운 본래의 계획은 김훈과 최질의 무리를 연회에서 과음케 하여 인사불성이 되면 잡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두 상장군이 워낙에 술을 좋아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는 일이 잦다고 하니 아주 터무니없는 계획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연회도 아니고 명목상 그 둘의 승전을 기원하기 위한 출정연이 아닌가.

그들이 대취(大醉)하여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주 터무니없는 기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 두 사람이 완전히 방심을 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방심은 의외의 순간에 다시 고삐가 확 채여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때 나는 일이 썩 그렇게 계획대로 잘 흘러갈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으레 불길한 예감이 늘 그렇듯, 실제로 상황은 내 예상대로 안 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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