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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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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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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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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화

DUMMY

“별장님······!”


다시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임억이 달려오며 소리치는 소리가 귀를 때리듯이 들려왔다.


“내가 죽기라도 했나. 왜 이리 호들갑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대에서 뛰어내리실 줄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리 별장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때는 오금이 콱 저렸습니다.”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그럼요. 이건 분명 부처님의 가호십니다. 정말로 부처님의 가호십니다. 저는 진짜 위타천(韋陀天)이라도 강림한 줄 알았습니다.”

“위타천은 무슨······. 누굴 도깨비로 만들려고 그러나.”

“무슨 도깨비라니요, 팔부신장(八部神衆)에 견주는 것이지요.”

“이제 그만해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그렇게 말하고서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임억에게 건넸다.


“어디 가시려고요?”

“뒷정리 좀 부탁하마.”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니 이건 소문이 날래야 나지 않을 수가 없어 보였다.

화양루 위에서도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날 보고 있었고, 화양루 아래, 영봉문 밖 구정(毬庭)에 있던 서경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도 내가 벌인 기행(奇行)을 고스란히 본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얌전하게, 조심스럽게, 적당히 지나쳐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퀘스트를 성공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던 나는 어떻게 세련되게 힘을 조절해서 보여 줄까 하는 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적지 않으니 이제 예전과 같이 조용한 생활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삶은 각오한 바였다. 안락한 삶을 누리고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조금은 내가 알던 역사의 궤도와 멀어진 느낌이었지만, 이제 나는 차라리 더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만 하는 처지였다.

앞으로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역사의 흐름을 뒤틀어 놓아야만 좋은 것이지, 역사의 복원력대로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삶은 이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더군다나 불멸(不滅)이라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특성과 함께 말이다. 다만 나는 이 모든 것을 아직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마음은 그에 대해서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상하게도 내가 과거로 오게 된 그 순간부터 그랬다.


***


장락궁 연회에서의 사건이 정리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자림은 난리가 정리되자마자 신호위의 무관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반역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자들을 빠르게 추려 내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병사들보다는 대정(隊正) 이상의 무관들이었다. 군인전(軍人田)의 수조권을 대대로 물려받는 대가로 경군(京軍)의 무관직을 채우는 군반씨족(軍班氏族) 출신들이니 서로 얽히고설킨 것이 많은 것이다.

이자림은 그 가운데 다시 핵심적으로 김훈과 최질에게 부역한 자들을 추려 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이 이미 내 손에 죽어 버려서 그렇게 남은 자들은 채 열도 되지 않았다.

이들이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임금의 명에 따라 이미 죽은 김훈과 최질의 목이 잘려서 먼저 효수(梟首)되었고, 그 아래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무관들도 모두 참수되었다.

서경 연회의 끝은 피의 축전(祝典)이었다.


“그대 덕분에 난을 쉬이 정리하고 역신(逆臣)들의 목을 서경 문루에 매달 수 있었다. 내 이를 각별하게 치하하지 않을 수 없어 그대를 이렇게 따로 불렀느니라.”


그리고 그 난리가 다 끝날 무렵, 나는 장락궁(長樂宮) 내의 관풍전(觀風殿)으로 자리를 옮긴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임금의 주목을 받으려고 한 행동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본의 아니게 임금에게 깊은 인상을 준 모양이었다.


“신은 그저 무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행하였을 따름이옵니다. 성상께옵서 이리 신을 불러 치하해 주신 성은이 하해(河海)와도 같으시나, 신이 한 일은 그저 등잔불 앞의 반딧불이 같이 미천한 것일 뿐이라 그저 두렵고 또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그리 용맹한 무관이 구변(口辯)또한 뛰어나구나. 내 일찍이 그대와 같이 언변이 좋은 무관을 보지 못했다. 그대가 지금 내게 겸손함을 보이나, 그대가 오늘 보여 준 무위(武威)는 이광(李廣)과 여포(呂布)의 그것에 비견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내 그 무용을 직접 모두 보았으니 내 그대를 치하함에 가감(加減)하여 논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일찍이 우리 해동(海東)에도 많은 뛰어난 장수들이 있었다고 하나, 개국충절공(開國忠節公) 유금필(庾黔弼) 이래로 그대와 같이 이토록 무예에 달통(達通)한 이를 알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싸우는 방식은, 무예에 달통한 것이라기보다도 비상한 신체 능력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임금이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으니 애써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다른 정치적인 이유나 속셈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임금의 말을 잘 듣고 있다 보면, 그가 정말로 내 싸움이 인상이 깊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부족한 재주이니 그저 부끄럽기 짝이 없을 따름이옵니다.”


물론 내가 할 말도 정해져 있었다. 임금이 진심으로 칭찬을 해 준다고 해서, 내가 좀 뛰어나긴 했다며 거들먹거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나를 보며 임금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겸양은 그만하지. 내 그대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여 그대의 품계를 가자(加資)하고 직책을 올릴까 하는데, 서울[開京]로 올라와 근시무관(近侍武官)이 될 생각은 없는가? 이는 명령은 아니고 권유일세.”


아무래도 임금은 나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속마음을 내가 지레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즉위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많았던 임금이다.

내가 대단한 용력(勇力)을 보여 주었으니, 곁에 두고 호위로라도 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임금의 곁을 지키면서 궁중의 복잡한 정치에 얽히고 싶은 생각은 (적어도 아직은) 없었다.

나의 직감이 아직 개경에 올라갈 때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차라리 다음 퀘스트를 이어서 주는 안내창이라도 떴으면 그에 따라서 무언가 행동을 취했겠으나, 튜토리얼 퀘스트가 끝난 이후로 안내창은 더는 새로운 무언가를 띄워 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내 생각을 있는 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임금에게는 적절한 변명을 내세웠다.


“신은 본디 북방을 지키는 군관(軍官)으로서 그 소임을 중히 여겨 하루도 게을리 한 바 없습니다. 거란적(契丹賊)이 압록강을 건너와 성을 쌓고 호시탐탐 왕토(王土)를 침범할 기회만 보고 있는 때에 어찌 한 몸의 평안만을 생각하겠나이까? 더군다나 거란적을 칠 군대가 출병하기 위해 서북면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나이다. 신이 무관 된 자로서 이에 죽을 한 몸 거들지 아니하고 개경에서 한 몸 편히 있을 궁리를 하겠나이까. 부디 성상께서는 이를 헤아리시어 신을 거란적을 치러 가는 군대의 대열에 다시 세우소서.”

“참으로 그대의 뜻이 참으로 장하다. 그대는 정녕 그렇게 하고자 하는가?”

“그러하옵니다. 부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임금의 목소리에서 살짝 아쉬움이 묻어 나왔지만, 동시에 감탄도 함께 묻어 있었다. 별장(別將)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임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변방 무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무관을 친히 들어 써 주겠다고 하는데도 한사코 북방으로 가서 거란을 몰아내겠다고 하니 어쩌면 그게 새삼스럽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알겠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내 재추(宰樞)와 더불어 논의하여 어찌 그대의 공적을 셈하여 줄지 고민해 보도록 하겠다.”


임금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내가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임금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면 된 일이었다.

공적을 셈해 주겠다고 한 것도 딱히 그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크게 미련 두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이걸로 되었다.


***


김훈과 최질의 난이 평정되자마자 빠르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이루어졌다.

임금은 바로 개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경에 머무르며 이를 처리했는데, 이례적으로 빠른 조치였다.

고작 나흘도 지나지 않아서, 나와 임억의 공을 헤아려 그 품계(品階)를 올린다는 고신(告身, 임명장)이 내려왔다.

나는 정7품 별장(別將)에서 정5품 중랑장(中郎將)으로, 임억은 정8품 산원(散員)에서 정7품 별장(別將)으로 직위가 함께 올랐다.

그런데 품계만 한 번에 두 단계가 오른 것이 아니었다.

난을 진압한 공신이라는 이유로 전시과(田柴科) 제도에 따라서 관직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정해진 만큼 받게 되는 전지(田地, 농지) 및 시지(柴地, 땔감용 숲)와는 별도로, 공훈이 있는 공신들에게 지급하는 공음전(功蔭田)까지 따로 주어졌다.

그것도 서북면의 황토(荒土)가 아니라 황산강(黃山江, 낙동강) 인근의 소출 좋은 땅을 택지(擇地)하여 내어 준 것이었다.

고의신의 기억에 비추어 볼 때, 국경의 이름 없는 하급 무관이 공을 아무리 세웠기로서니, 이 정도로 한 번에 품계가 오르고 공음전까지 받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이번에 내가 한 역할에 대해서 임금 ― 또는 조정의 중신들이 ― 높게 평가했다는 말이다.

이와 함께 보주(保州)의 거란군을 치기 위한 행영(行營)도 계획대로 꾸려졌다.

부월(斧鉞)도 죽은 김훈과 최질이 아니라 본래 가야 했었던 사람, 곧 상장군 지채문(智蔡文)에게 부여되었다.

조정에서는 관례대로 군대를 이끌 상원수(上元帥)는 문관이 맡아야 한다는 말이 나왔던 모양이지만, 임금은 지채문에게 예외적으로 문관직을 겸직(兼職)하는 것을 허용하고 예부상서(禮部尙書)의 관직을 임시로 내린 후, 그 다음에 상원수로 임명하는 요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이런 논의를 무마시켰다.

그리고 지채문 상장군은 중랑장이 된 나를 자신의 군영(軍營)으로 불렀다. 자신의 옆에서 보좌를 맡긴 것이었다.


“이것은 이번 일에 대한 내 나름의 보상이네. 사석으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도 자네는 기대 이상으로 일을 해 주었네.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상황에서 활로를 뚫고 두 역적을 직접 그 손으로 처리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쉬이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거란적을 몰아내는 데까지 공을 세우고 나면 필시 뭇 무관들 가운데에서도 탁월하게 두각을 드러내게 될 것이니, 내 그대 앞길을 좀 더 살펴 주고자 내 막영(幕營)으로 불렀네.”


지채문은 자신이 나의 뒷배가 되어 주겠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직접적이게 이야기했다.

그 나름의 보은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국경으로 싸우러 갈 생각이었던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막연하게 정해진 역사의 경로를 바꾸겠다고 다짐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당연히 그러기 위해서는 기왕이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 더 많은 권력을 쥐는 것이 유리했다.

그리고 그 첫발을 내딛기 쉽도록 뒤를 봐주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거절할 이유는 당연히 없었다.


“소관이 능력이 일천하기 그지없고 재주는 부끄럽습니다만, 상원수께서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겸손하면 그것도 은근히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적당히 굽히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려서야 쓰겠는가. 자네 능력은 그날 연회에 있던 사람들이 두 눈으로 다 똑똑히 보았는데, 앞으로 그러지 마시게나.”


지채문 상원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곧 서경에서 공식적으로 출정을 해서 안북부(安北府)에서 서북면의 군대를 결집한 다음 흥화진으로 향할 것이니, 내일부터는 일이 바빠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유념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함세.”


그렇게 지채문과의 대화를 마치고 내 거처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예기치 못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우리가 마주쳤던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얼굴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패수의 강물을 건네주며 나에게 예언을 남겼던 노인이었다.

반쯤 풀어진 백발로 맨 상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비단으로 된 문라건(文羅巾)을 쓰고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좋은 옷을 갖추어 입고 있었지만, 나는 금방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상은 기이할 정도로 쉽게 잊히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오셨소?”

“물론이오. 인도자가 성좌께서 점지하신 도전자가 어디 있는지 모를 수는 없지 않겠소?”


노인의 말에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지금 노인이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 떠올랐던 단어들을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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