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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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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작품등록일 :
2024.09.0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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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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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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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DUMMY

흥화진에서 정신용 장군이 보내서 왔다는 말에, 지채문 상장군은 흔쾌히 나를 집 안으로 들였다.

나는 먼저 정신용 장군이 보낸 서신을 그에게 건넨 다음, 그가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간략하게 거란군을 물리친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과 같은 때에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막아 내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하기 짝이 없군. 수고가 많았네.”


중년의 남성은 내 말을 심각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듣더니, 약한 탄식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일에 무슨 어려움과 수고로움이 따로 있겠습니까. 아래위로 힘을 합쳐 오직 적군이 더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싸웠을 뿐입니다.”

“아닐세. 자네는 몰랐겠지만, 지금 도성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일세. 거란이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필시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어떻게든 군대를 더 몰아서 개경까지 노려봄 직했을 것이네.”

“······.”


지채문 상장군이 눈을 번뜩이면서 하는 말에 나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좀체 잘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찌푸린 표정으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운을 뗐다.


“오면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도성은 완전히 역적 김훈과 최질에 의해 장악되었네. 이들이 경군(京軍)을 제 수족처럼 부리면서 궁궐에 진을 치고 성상(聖上)을 겁박하고 있네.”

“폐하를······?”

“놀라울 만도 하겠지. 그런데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네. 아직 서북면까지 이야기가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이미 문관들 여럿에게 죄를 주어 장을 치고 도성 밖으로 내쫓았네.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경군의 영업전(永業田)을 회수해서 관리들 녹봉을 주겠다는 말에 화가 나서 난을 일으킨 게야. 같은 군관으로서 그 화를 전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네만, 일이 원치 않게 흘러간다고 바로 창칼을 돌려세우고 반역할 것 같으면 나라의 기둥이 남아나겠는가? 더군다나 언제고 거란이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백척간두(百尺竿頭)같은 상황에서?”


내게 하소연하듯 말하는 지채문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고의신의 기억에 비추어 보면, 지채문은 지난 전란 중에 백관(百官)과 궁인(宮人)들이 모두 임금을 버리고 도망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임금의 파천(播遷) 길을 지키며 호종한 충신 가운데 충신이었다.

그리고 그 일로 명성이 드높아져 고려 땅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의 성품이 그 명성대로라면, 그가 지금 이렇게 근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임금을 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의사에 반해서 군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면, 그것을 반역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지금 김훈과 최질 두 사람이 그런 식으로 정권을 농단하고 있다면, 지채문의 입장에서 지금 나라는 반역자들의 손에 떨어진 셈이다. 당연히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감히 소관(小官)이 듣기에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니, 들어야 하네.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앞에 앉게 된 순간부터 자네는 이 문제를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네.”


지채문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라 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분위기가 일변한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잖아도 성상 폐하를 어떻게든 개경 밖으로 모시고 나간 다음에 서북면 군대를 끌어모아 김훈과 최질의 두 역당을 칠 생각을 하고 있었네. 그리고 그런 일을 해야만 한다면, 서북면에서는 내가 믿고 일을 부탁할 사람이 몇 없네. 그 가운데 하나가 자네 상관인 정용신 장군이고.”

“그렇다는 건 상장군께서는 제가 그 말씀을 흥화진사에게 전하기를 원하십니까.”

“얼마 전이었다면 달리 사람도 없고 특별한 방도도 없으니 아마도 그렇게 했을 걸세. 그런데 자네가 가져온 정용신 장군의 안건 덕분에 조금 다른 길이 보이는군. 거란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변경의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그야말로 빈대를 잡으려다가 집을 다 태우는 우를 범할 수 있는 일일세. 기왕이면 그렇게 하지 않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


나는 묵묵하게 지채문 장군이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가 내게 무슨 일을 맡기려고 하든 피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퀘스트의 일부로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몸 하나 편하게 안락 하자고 과거로 넘어온 것이 아니었다. 가야 할 길이 있다면 힘들더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침묵 속에서 잠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던 지채문 장군은 이번에는 자기 술잔에 술을 부은 다음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매우 매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듣게.”

“예. 장군. 말씀하십시오.”

“내일 편전(便殿)에서 폐하께서 중신들을 모아 놓고 정사를 돌보실 걸세. 물론 그 옆에 김훈과 최질 두 역당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것이니, 실은 폐하께서 정무를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역당이 의사를 제멋대로 처결하는 자리가 될 것이네. 그러나 역당이 있든 없든 긴급한 국무(國務)는 마땅히 그곳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고, 나는 거기에 자네가 흥화진에서 들고 온 이 문제를 꺼내어 논제에 부칠 것이네.”

“이 문제라 하시면······.”

“자네 상관이 제안한, 군대를 일으켜 적을 압록강 너머로 아주 구축(驅逐)하여 다시는 강을 넘나들지 못하게 하자는 제안 말이네. 힘겹더라도 서북면에서 군대 2만을 동원해서 적이 성을 다 쌓기 전에 몰아내야 한다고 말을 꺼내 보겠네.”


지채문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만 나 대신에 그 국경의 정황을 조정 대신들 앞에서 똑바로 고해 줄 사람이 필요하네. 그렇다면 국경에서 지금 바로 도착한 무관보다 그걸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제가 단순히 국경의 실태가 어떤지 아뢰면 되겠습니까?”

“다소간의 과장을 더하여도 괜찮네. 거란의 위협이 그만큼 위중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전달할 수만 있다면 될 일이네. 그리고 그게 서북면에서 군대를 일으켜 거란을 쫓아내는 일뿐만 아니라, 나라에 닥쳐온 혼란을 바로잡는 데도 도움이 될 걸세. 그러니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네. 못하겠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주게.”

“아닙니다. 뜻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지채문은 내 말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에게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지 그 전모를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에서 그가 이 일을 지렛대로 삼아서 김훈과 최질을 어떻게 처리해 보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우묵한 눈 아래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는지 모두 짐작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식사를 든 뒤에 임억과 함께 송악산에서 개경으로 흘러내리는 배천(白川) 상류 자하동(紫霞洞)까지 올라가서 몸을 씻었다.

오늘 입궐까지 하는 마당이니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다.


“내관의 안내를 받은 뒤 기다리고 있게.”


몸을 씻은 뒤, 복두(幞頭)를 쓰고 각대(角帶)를 찬 다음 개경 황궁(皇宮)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나아갔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채문은 그곳에서 내관 하나를 내게 붙여 주고 먼저 입궐해서 들어갔다.

고작 정7품 별장인 내가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함께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그들이 부르면 그때 들어가서 내가 아는 바를 고하도록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리로 오시오.”


나를 인계받은 궁중 내관(內官)은 수염을 손으로 훑으며 냉큼 나를 궐 안으로 이끌었다.

내관이라고는 하나 고려의 내관직(內官職)은 환관(宦官)이 아니다.

쉽게 말해 고자가 아니라 명문가의 자제가 관직에 출사하면 맡게 되는 직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관은 딱히 무례하지도 내게 특별히 예의를 잘 갖추지도 않았다.

그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궁내의 문을 여러 개 지나도록 나를 이끌고 가더니 어떤 전각(殿閣) 앞에 세웠다.

걸려 있는 편액(扁額)을 보니 이름이 중광전(重光殿)이라고 적혀 있었다.

임금이 평소에 집무를 보는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인 모양이었다.

개경 궁성도 전쟁 와중에 완전히 불타서 복구가 아직 한창이었는데, 이 전각은 그 가운데 멀쩡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전각 가운데 하나인 듯했다.


“따로 안에서 부름이 있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리고 편전 안에 들어서거든 절대로 허락 없기 고개를 함부로 들지 말고, 무릎걸음으로만 움직여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나는 내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관은 그 뒤로도 임금 앞에서 어떻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지 궁중 예법을 구구절절 길게도 설명했다.

나는 그런 말을 그냥 흘려듣지는 않고 적당히 듣고 기억할 것은 기억해 두었다.

이런 것은 고의신의 기억에도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흥화진 별장 고의신은 들라고 하십니다.”


다른 내관이 편전의 문을 열면서 나와 함께 있던 내관을 향해 말했다.

내관은 내 관복을 한 번 눈으로 훑고 잘못된 곳이 없나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폐하. 별장 고의신이 입시(入侍)하였나이다.”


첨계(檐階)를 올라 편전 안으로 들어갈 때는 예법에 따라 경절(磬折, 예를 차려 몸을 매우 굽힘)하고, 임금이 앉아 있는 편좌(偏坐)를 향해 절을 올려야 했다.

예법대로 입시하였음을 알리고 나니 안에서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별장 고의신은 가까이 오라.”


고려의 예법상, 임금 앞에서는 누구든 감히 무릎을 펴고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관이 일러 준 대로 편전 바닥을 무릎걸음으로 걸어서 임금이 앉아 있는 편좌(便坐)까지 나아가야 했다.

내게 딱히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연로(年老)한 고관들에게는 꽤 고역인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예법의 연원이 삼국(三國)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히 중국의 그것에 비해서도 엄격한 데가 있었다.


“고개를 들라.”


나는 고두(叩頭)로 임금에게 다시 한 번 조아리고 난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임금은 감히 용안(龍顔)을 드러내지 않고 길게 드리운 발 뒤에 앉아 있었고, 그 양쪽 아래에는 김훈과 최질로 보이는 두 사람이 관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지채문 상장군을 비롯한 다른 신료들은 그 둘과는 떨어진 자리에서 좌우로 나누어 앉아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김훈과 최질 두 사람이 다른 신료들과 다르게 임금의 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공연히 드러나는 배치였다.


“멀리서 명을 받들어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국도(國都)를 불태우고 사직(社稷)을 농단한 불공대천지구(不共戴天之仇, 하늘을 같이 하고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다시금 강토를 침범하고 성을 쌓는데, 너와 다른 장수들이 협심(協心)하여 흥화진에 내침하여 온 적을 물리쳤다고 하니 가히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임금의 얼굴은 감히 볼 수 없었으나,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앳됨이 그가 아직 젊은 나이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분명 숨겨지지 않는 강직함 또한 함께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임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그가 평범한 재목은 아닐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늘 너를 편전에 불러낸 것은 단순히 공을 치하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국경의 정황을 자세히 듣기 위해서이다. 너는 네가 아는 바를 한 치의 가감도 없이 고하도록 하라.”


임금의 명에 나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국경의 엄중한 상황을 전했다.


“거란군이 압수(鴨水, 압록강)을 넘어와 용만원(龍彎原) 들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물러가지 않은 것이 벌써 한 해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군대를 그곳에 주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진과 한인(漢人)들을 잡아 와서 그곳에서 성을 쌓는 노역을 시키고 있습니다. 필시 압수 남쪽에 병참(兵站)을 확고히 하고 침략을 위한 선봉(先鋒)으로 삼을 생각일 것이옵니다. 그들은 또한 가만히 성만 쌓고 있는 것이 아닌, 수시로 수천씩 군대를 몰아 흥화진을 비롯하여 강동(江東)의 여러 성채를 공격하고 인근의 마을들을 노략(擄掠) 하는 일을 일삼으니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변경의 우리 군대는 이들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여러 번 전투를 이기기도 하였으나, 저들을 완전히 압수 저쪽 편으로 몰아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한 달 걸러 한 번은 일어나는 전투에 병사들은 점점 소모되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으니, 지난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웠던 군병(軍兵)들도 다쳐서 불구가 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살아남았던 백성들도 이제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유민(流民)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날이 갈수록 변경의 상황이 지난 전쟁 때와도 같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이옵니다.”


나는 고의신의 지식에 의존해서, 그리고 나 자신의 구변(口辯)에 의존해서, 최대한 북방 최전선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윽고 내 말이 다 끝난 뒤, 임금은 물론이거니와 조정 신료들 모두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큰 전쟁을 치르고 나서 나라가 아직도 다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평화와 안정은커녕, 국경에서도 근심거리만 더해지고 있으니 쉽게 뭐라고 꺼낼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신 병부시랑(兵部侍郎) 이자림(李子琳) 아뢰옵니다.”

“병부시랑은 고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시오.”


그 침묵을 깬 것은, 병부시랑의 직함을 달고 있던 청년과 중년의 경계쯤에 서 있는 문관 하나였다.

확실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나서기 전에 지채문 상장군이 그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 몫이 끝났기에 다시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뒤로 빠져나갔다.

내가 그렇게 뒤로 물러서는 동안, 이자림의 말이 시작되었다.


“적이 압록강 동안(東岸)에 성을 쌓고 있는 것을 그대로 좌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저들이 성을 다 쌓고 나면, 필시 다시는 그 성을 취하고 돌려받기 어렵게 될 것이며, 두고두고 서북면, 나아가 나라 전체를 위협하는 화근이 될 것이옵니다. 저들이 아직 성을 다 쌓지 못한 이때가 아니면 일을 되돌리기가 어려울 것이니, 부디 강동(江東)과 패서(浿西)의 정병을 모으시어 저들을 다시 압수 밖으로 내쫓도록 하옵소서.”


이자림의 말은 정론이라면 정론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거란을 고려가 상정하고 있는 국경 밖으로 내쫓는 것까지만 하자는 이야기였음에도 이조차 거란을 자극해서 전쟁으로 일이 크게 번질까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었다.


“아니 되옵니다. 전투에서 이기고 적을 내쫓는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거란이 이를 빌미로 삼아서 대군을 일으키면 다시 온 나라가 참화에 휩싸이고 말 것이옵니다. 일단은 싸움을 고려하기 이전에, 거란에 사신을 보내서 군대를 압수 너머로 물리기를 요청하시옵소서.”

“하오나, 폐하. 병부시랑의 말대로 이번에 군대를 일으키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옵니다.”


그 뒤로도 한참을 격론이 이어졌다.

나는 편전 구석으로 물러나서 오고가는 논쟁을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논쟁에는 결론이 없었다. 팽팽하게 서로가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격론을 끊은 것은 임금의 좌측 앞에 앉아 있던 반역자 가운데 한 명 ― 상장군 김훈이었다.


“신, 상장군 김훈 아뢰옵니다. 병부시랑의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거란을 압수 밖으로 내쫓을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오니, 군대를 일으켜 위엄을 보이소서. 신등(臣等)이 누구보다 앞서서 기치를 치켜세우고 적을 토벌하러 가겠나이다.”


김훈의 말에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결정이 났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임금에게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결론을 내렸으니 어서 재가를 내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참에 전공(戰功)을 단단히 세울 기회를 만들어서 반란으로 잡은 불안정한 정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김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때까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채문이 나섰다.

겉보기에는 마치 김훈을 거들어 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몇몇 신료들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묵직한 목소리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군대만 일으킬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직접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시어 군대를 사열하고 지친 민심을 위무하시옵소서. 큰 전투를 앞두고 폐하께서 직접 성덕(聖德)을 보이시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임금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지채문의 말에 순간 김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쏘아졌지만, 지채문은 그러한 김훈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넘겼다. 단지 임금의 대답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 끝에, 편좌 위, 길게 드리운 발 너머에서 임금의 옥성(玉聲)이 들려왔다.


“내 경들의 충언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압수를 건너온 거란군을 다시 강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허하겠소. 또한 지난 전쟁 이후로 크게 고생한 서북면의 민심을 따로 위무하지 못하였으니, 상장군의 말대로 이번 기회에 내가 직접 서경으로 가서 시정(時政)을 살피고 그곳 민심을 위무하리다.”


임금이 그렇게 말하고 나자, 김훈이 고개를 숙이고서 명을 받드는 시늉을 했다.

임금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다른 신료들의 입에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명히 그것은 하나의 연극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아직 나는 그것이 어떤 무대 위에 올리는 연극인지, 그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까진 그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아닌 무명소졸(無名小卒)의 역할만을 간신히 맡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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