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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위로 님의 서재입니다.

행운 1,500으로 선협 세계 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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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아위로
작품등록일 :
2024.05.18 23:25
최근연재일 :
2024.07.04 00:54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266,649
추천수 :
7,729
글자수 :
241,210

작성
24.06.19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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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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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글자
21쪽

정리

DUMMY

최겸이 하는 짓을 지켜보던 주변의 사람들은 쩍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아깝지도 않은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제자가 되지 않겠나?


분타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분타주가, 직접 그를 향해 제안했다.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내 사람이 되라고.


‘저런 제안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저런 소리를 했으니, 최겸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야 장호연은 결코 그를 섭섭히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영 후기의 수사, 그것도 한 분타를 다스리는 절대강자의 휘하에 들어갈 수 있는.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가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억만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는 기회.


헌데.


-송구하오나···.


최겸은 그런 기회를 대놓고 걷어찼다.


그것도 모자라.


“어르신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 직후, 보란 듯이.


약초원을 돌보는 일을 할 뿐인, 권력이나 힘과는 거리가 먼.


그런 늙은이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지극히 공손하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저건!’


이는 마치, 장호연을 따르면서 얻을 무궁한 일신의 영달보다.


저 보잘것없는 늙은이와의 의리가 자신에겐 더 중요한 가치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

‘난 놈은 난 놈이군.’

‘저만큼 비범한 구석이 있는 자니 천도 축기경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게지.’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질투심에 그의 성과를 인정하기 싫어하던 자들조차.


이 시점에서는 한차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늘, 수많은 뇌겁을 얻어맞고도 살아남아 천도 축기경으로 승급한다는 지고의 대업을 이뤘다.


하지만 더 대단한 건, 그런 미친 짓을 벌이고 나서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인연을 맺었던 자에게 한결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천재는 찾아보면 결국은 나온다고 해도, 이와 같은 기개를 지닌 자는 그야말로 천하에 둘을 보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장호연이 이 꼴을 보고도 얌전히 넘어가겠냐 하는 것인데.


“알았다.”

“!!!”


놀랍게도 그는 조금조차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제안은 이후에도 유효하다. 부탁할 게 있다면 말하거라.”


그는 한 차례 더 최겸을 향해 후하게 인심을 베풀기까지 했으니.


이는 마치 앞으로 대놓고 그의 뒤를 봐주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 않는가?


***


‘흥.’


제자가 되지 않겠냐던 분타주의 말.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해야만 했던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


첫 번째로, 난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든 한동안 경류문을 떠나 있을 생각이었다.



천도 축기경 돌파에 성공하면서, 난 불필요한 관심을 너무 많이 받았다.


조심해야 할 잠재적인 위험이 많다. 칠호는 물론이거니와, 이곳 내부는 물론 외부의 적 역시 문제였다.


‘내가···.’


물론 한 가지 사실을 느낄 수 있긴 했다. 난 이미 연기기 위, 결단기 아래에선 최강에 가까운 수준의 무력을 갖췄다는 걸.


내가 몇 번이나 연화했던 천겁의 기운은 여전히 내 몸속에 잔뜩 남아 있었다.


물론. 이건 주로 단약이나 법기, 부적 제작 등에 사용될 뿐. 직접 전투에 활용하기 위해선 그 용도가 무척 제한적이었으나.


내 무기는 오직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몸 안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천지영기를 응집한다’는 반천역도공의 효과였다.


‘···게임에서 마나 재생 풀세팅을 한 것 같은 느낌이야.’


난 느낄 수 있었다. 천도 축기경의 길을 걸으며 생긴 변화와 더불어, 이 반천역도공이 내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선사하고 있는지.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그래봤자 축기기는 축기기라는 것. 여전히 결단기 이상의 수사를 상대론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승리할 수 없다.


그러니 난 조만간 빨리 신분을 숨겨야만 했다. 내겐 아직 스스로를 지킬 만큼 충분한 힘이 없었다.


‘저 사람···.’


그리고 두 번째론, 분타주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호연]

[경지: 원영 후기]

[중시하는 가치: 검소, 나태, 의타]


관각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원영 후기라는 살벌한 경지와 달리, 온순하기 짝이 없는 성격은 물론.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장호연 저자는, 전음 법술을 익힌 적이 있는 건지 아까부터 남몰래 나에게 한두 마디씩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런···. 뭐, 싫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뜻대로 하시게.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태도.


-굳이 대답하겠다고 몸짓을 하거나 할 필요는 없네. 듣기만 하게. 쓸데없이 자네한테 왕 대접을 받을 생각은 없으니.


이 자가 내게 전하는 말은 분명했다.


-자네는 이미 내 말뜻을 이해했겠지? 난 사문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한 번씩 그대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라네. 그저 훗날 이 장호연이 그대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잊지만 마시게.


그는 지금 당장 고강한 권력을 가졌고, 난 장래가 무척이나 밝으니.


인맥 놀이. 흔히들 말하는 비밀 친구를 하자는 거로군.


-혹시 얼마간 자리를 피할 생각인가? 그것도 현명한 선택이지. 하지만 영영 이곳을 떠나진 말게나. 자네는 훗날 분타주가 될 수도 있을 만한 재목이야.


다만 나중에 분타주가 되라는 제안만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언젠가 원영 대원만의 경지에 오르기만 한다면, 내 주저 없이 친히 그대에게 이 자리를 넘겨주겠네.


분타주의 자리에 오르는 자들은, 경류문주와 직접 대면해 일종의 계약을 맺게 된다.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문규를 어기거나 사문에 해로운 일을 할 때마다 경류문주를 향해 일종의 알림을 보내는 금제.


-자네처럼 영명한 수사의 지휘 아래서라면, 우리 백악봉 분타는 장차 무궁한 영광을 누리고 더없는 번영을 맞이할 수 있겠지.


난 그토록 번거롭고 짜증 나는 책무가 따르는 자리를 직접 차지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이것 외에도 내가 장호연의 제안을 거절해야 할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가장 큰 건 뭐니뭐니해도.


‘어르신.’


내가 추 노인의 모습을.


그가 초라히 손에 쥐고 있던 몇 가지 단약과 약초를 봤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리 선우연에게 말을 남겼던 이유.


그건 별 대단한 뜻도 없이,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혹여나 일이 잘못돼도, 흑련이나 추 노인은 나름대로 재주가 있는 양반이니.


만에 하나라도 나에게 뭔가 도움이 될만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가벼운 생각.


하지만.


설마하니 추 노인이 이 정도로 마음고생을 하고 날 챙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수도자임에도 어느새 전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


상당히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와 있다는 점.


아직까지도 불안함이 전부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


옷에 묻어 있는 흙먼지.


내가 어찌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는가?


‘그냥 넘기지 않겠습니다.’


난 이기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람의 마음을 잊어버린 짐승이 된 건 아니었다.


추 노인이 내심 이토록 진심으로 나를 아끼고 있었다면, 나 역시 내가 손해를 보는 일만 아니라면 그에게 무언가를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왕 사람들이 모여있는 김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번쯤 제대로 그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그의 위치를 잠시 분타주 위에 올려놓으면서까지.


“이···.”


그리고 그때.


“이보게!”


군중에선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최 공자. 내가 사과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염치를 무릅쓰고 이리 뛰쳐나왔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을 한, 추 노인과 비슷한 나이대의 노인 한 사람.


주자호.


일전에 마치 악귀처럼 잔인한 태도로, 사정없이 추 노인을 모욕하며 그의 자존심을 짓밟고자 했던 자.


“내가 미쳤던 게야. 아직도 난 그때 했던 치졸한 행동을 후회하곤 한다네.”


그는 어느새 비굴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미안해! 내가 백번 사죄한다고 해도 충분치 않겠지만, 그래도 부디 내게 용서를 빌 기회만큼은 허락해주게!”


한 사람의 당당한 축기기 수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마치 짐승처럼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우스꽝스럽게 울부짖고 머리를 땅에 찧기까지 하며.


“내 한번 그대에게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고선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을 것 같았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주자호는 도저히 자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네!”


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무슨···.’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 같은 신진 수사에게 구차하게 굴고, 마치 신하가 왕을 대하듯 비굴하게 머리를 찧는다니.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수치를 겪는 건 끔찍하리만치 싫을 것이다. 심지어 이 자는 지극히 교만한 성격을 지니기까지 했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자는 그리 하고 있었다.


문득 내 머릿속엔 현대 지구에서 읽었던 몇 가지 고사들의 내용이 떠올랐다.


‘···.’


죽음보다 더 잔혹한 수치조차도 감수하며,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던 자들.


고려 중기의 원로 무관이었던 대장군 이소응.


그는 새빨갛게 젊은 문신들 앞에서 재롱을 떨다가, 이름 없는 하급 관료에게 뺨을 맞고 조롱당하는 굴욕을 겪고도 그걸 마음속으로 조용히 견뎌냈더란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그런 일이 있지 않았나?


춘추오패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구천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개처럼 기어가 원수의 똥을 핥아 먹고 건강을 진단하는 수모까지 감수하며 끝끝내 살아남았다지.


“최 공자, 헤헤···.”


지금, 주자호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러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죽기보다 싫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치 짐승처럼 바짝 엎드린 채 꼴사나운 모습으로 내게 발발 기는 게.


하지만. 그는 감수한 것이다. 이해한 것이다.


‘영리하군.’


내가 천도 축기경에 도달하며, 우리 둘이 가진 권력의 역학관계는 변했다는 걸.


우리 둘 사이의 원한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두지 않는 한.


이 자의 미래에 남아 있는 건 오로지 파멸밖에 없다는 걸.


‘감탄스러울 정도야.’


할 거면 제대로 하겠다는 듯,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예 대놓고 한바탕 쇼를 벌여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로 과감하기 짝이 없는 결단이었다.


“주자호.”


난 그를 모욕할 생각으로 대놓고 이름 석 자를 불렀다.


“그래, 왜 그러시는가?”


하지만 주자호는 조금조차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으며 비굴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난 피식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추노야의 신발을 핥게.”

“그···그건···.”


주자호는 잠시간 망설이는가 싶더니.


“···그래, 그래야지···.”


결국은 구차하게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추 노인의 신발 앞섬에 입을 맞췄다.


“친구여. 내가 그동안 자네에게 잘못한 게 많았지. 어쩌면 다 질투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비참한 모습.


이 정도면 그래도 관대히 봐주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최 공자. 내가 이렇게 사과하겠네. 부디 날 용서해주지 않겠나?”


하지만.


“싫다.”

“고맙··· 아니, 뭐라고?”

“싫다고 했다.”


난 앞선 고사들의 결말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떠올렸다.


이소응은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결국은 그와 원한을 맺었던 문관을 찾아 그를 내동댕이치고 찢어 죽였다.


구천은 끝끝내 원수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후 조국을 부흥시켜 역공을 가했고, 상대는 결국 권력을 잃고 파멸해 초라히 자결할 수밖에 없었다.


“싫다. 네가 뭐라고 해도 싫다. 난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주자호는 뱀의 심장을 가진 자.


‘우스워 보여도 만만치 않은 녀석이야.’


난 이자를 조금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경계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토록 날 방심하게 만든 후.


내가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전 재빨리 손을 써, 어떻게 해서든 날 암살하고자 하는 속셈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흥.’


한번 결심이 서자마자, 아무런 주저조차 없이 추 노인의 신발을 핥고 천하에 둘도 없을 모욕도 기꺼이 감수하는 독종이 바로 주자호다.


이런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의 마음가짐으로 날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든다면.


과연 얼마나 상대하기 어렵고 곤란한 방식으로 날 공격해 오겠는가?


그늘 속에 숨어, 도저히 대응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예리한 일격을 가하진 않겠는가?


‘우리 사이는 이미 되돌릴 수 없다.’


수도계에서의 삶이란, 애당초 아무런 원한도 맺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일단 원한을 맺었다면, 차선책은 바로 그 원한 자체를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어설픈 자비 따위를 베풀었다간 내가 먼저 당한다.


미리 피할 수 있는 화근이라면 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네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행이야. 옳지···.

-두 계집은 내가 직접 어여삐···.


난 이자가 그토록 악랄하게 추 노인을 괴롭히며, 나와 선우연의 안위를 가지고 그를 협박하기까지 하던 정경을 아직까지 잊지 않았다.


만약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 자는 여전히 악마처럼 우리 약초원 식구들을 핍박하고, 어떻게든 그들을 능욕하려 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


‘저 인두겁 밑엔 마귀가 숨어있다.’


만약 진심으로 반성을 하거나, 심성이 착한 자라면 몰라.


주자호는 천성이 무척이나 사악한 사람일뿐더러, 애당초 모든 원한도 이자가 자기 손으로 자초한 것이었으니. 내가 조금이라도 사정을 봐줄 이유는 없었다.


난 분타주를 향해 읍을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분타주님. 경류문의 규칙은 축기기 이상의 수사가 동문을 죽이는 걸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미리 확인해놨던, 설마 이토록 상황이 잘 풀려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곤 미처 몰랐던 규칙.


“허나 두 사람이 모두 상호 간에 결투를 원할 땐, 분타주님의 승인만 있다면 한판 생사결을 벌인다고 해도 규칙에 어긋나지 않지요.”


분타주, 장호연은 아무런 주저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난 자네가 누구와 싸운다고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상대의 동의만 얻는다면 그 정도 일이야 알아서 하게.”


그 즉시 내 요청을 수락하고선 고개를 돌려 느릿느릿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


장호연은 최겸이 무슨 일을 벌이든, 더는 그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경류문주와의 계약으로 인한 금제로 구속받는 몸.


알고 있는 사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더욱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스스로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당하기 쉬워지는 사람이었다.


“···.”


우대장로 역시 말없이 몸을 돌려, 한 발자국에 수백 보를 움직이며 삽시간에 자리를 떠나 버렸다.


새파란 아랫사람들이 싸우는 걸 천박하게 구경하는 건 원영기 수사의 품위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크흠.”


다만.


좌대장로인 청운대인 한사람만큼은 여전히 자리에 남아 있었다.


주자호는 어쨌거나 그의 수하. 장차 결단기에 이를 게 거의 확실한 사람.


이토록 가볍지 않은 전력의 장기말을 어찌 가만히 죽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앞으로 백악봉 경내에서 저자는 나의 보호 아래에 있네. 허튼 생각일랑 하지 말게.


하지만 문득 머릿속에 들려오는 분타주의 목소리에, 결국은 그도 어색하게 미소 짓던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웅성거리는 수많은 문도 한가운데에 엎드린 채.


주자호는 수치심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최 공자. 충분치 않았다면 내가 몇 번이라도 더 사과를 하겠네.”


또다시 최겸을 향해 간절한 태도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싸움을 피할 방법은 없는가?”


하지만.


“없다!”


최겸은 단호했다.


“추노야는 내가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모시는 분. 그런 분을 집요하게 모욕했던 순간부터, 너와 나는 이미 불공대천의 원수가 된 셈이다. 일어나라. 질질 끌 것 없이 여기서 결투를 받아들여라.”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상대를 짓밟고야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주자호는 끝까지 싸움을 피하려 했지만.


“···내가 끝까지 자네의 도전을 거부한다면?”


최겸은 피식 웃으며 질문했다.


“너는 신선이 되기 전에 범인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몸인가?”


그리고선, 주자호의 대답을 기다리지조차 않고 말을 이어갔다.


“만약 그랬다면 너에겐 가족이 있었겠지.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 테니, 난 그 마을에 살던 후손들을 찾아 전부 죽이겠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원한.


“네 집안의 사람이라면 젖먹이 아이까지 남기지 않고 전부 추적해, 주씨 가문의 씨앗을 이 세상에 단 하나조차 남겨두지 않고 전부 그 사지를 찢어발겨 처단하겠다.”


최겸의 말속에선 피비린내가 흐르고 있었다.


“신선이 된 자가 있어도 죽이겠다. 만약 그자의 경지가 나보다 높다면, 절치부심해 그보다 더 높은 법력을 쌓을 때까지 기다려서라도 산채로 그를 갈아 마시겠다.”


물론 마음속으로 최겸은 이토록 잔혹한 일을 벌이며 무고한 사람을 해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며, 그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짐작하고 있었다.


“네 조상들의 분묘를 거름으로 뒤덮고, 가족들의 초상엔 오줌을 싸겠다. 너의 여생을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 주자호야, 정말 모르겠느냐! 오늘 너와 난 사생결단을 낼 수밖에 없단 말이다!”


하지만.


‘이···이런···.’


당사자인 주자호의 입장에서야 어찌 이런 말을 마음 편히 무시할 수 있으랴?


또한, 주자호는 식견이 얕은 사람이 아닌 만큼 상대의 말에 담긴 숨은 뜻 역시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녀석···.’


왜 최겸이 자기 성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까지, 구태여 주자호의 가족들을 걸고넘어졌겠는가?


알고 있는 것이다.


한번 시작된 증오와 원한의 고리는 한쪽이 죽지 않는 이상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이치를, 최겸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과연 바보는 아니군.’


그리고 그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주자호는 실제로 그런 속셈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겸은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기하급수적으로 강력한 힘과 권력을 지니게 될 존재.


저런 자와 한번 원한을 맺은 이상, 어찌 주자호가 하루라도 편히 다리를 뻗고 자겠는가?


비굴한 태도로 사과를 한다고 해봤자, 정말 최겸이 이 원한을 순순히 전부 잊어주겠는가?


또, 그 자신은 이런 치욕을 겪은 다음 어떻게 맨정신으로 수백 년의 삶을 더 살 수가 있겠는가?


‘뭐라도 해볼 생각이었는데.’


만약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저 원한이 잊혀졌기만을 바라며 바짝 엎드려 살 수밖에 없겠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생기기만 한다면. 실지 주자호는 이렇게 상대의 방심을 유도한 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최겸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역시···. 저자는 만만치가 않아.’


하지만 주자호는 이 순간 깊이 통감했다.


최겸은 어설픈 수작에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이 정도면 어쩔 수 없지,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무른 마음으로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그렇단 말이지?”


또한 그는 깨달았다.


싸움이 불가피하다면, 스스로가 결단기에 이를 때까지 충돌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싸움을 벌이기에 그나마 제일 나은 순간은. 아직 최겸이 축기기 수사용 법술을 채 익히지도 않은 지금이라는 걸.


결국 주자호는 조용히 한쪽 다리를 세운 후.


“난 너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섬광처럼 그를 향해 쇄도하며 전력을 다해 그의 오른손에 금속성 법술을 담아 휘둘렀다.


그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오늘. 만인 앞에서 보란 듯이 최겸을 격살할 수만 있다면, 자신 역시 잃었던 체면을 적당히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


‘아니···!’


최겸은 마치 상대의 동작이 훤히 눈에 보인다는 듯, 여유롭게 한 박자 앞서 그 공격을 피하더니.


‘저건!’


한 손을 마치 동물의 손아귀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나머지 한 손은 날처럼 세운 채 수도를 이용해 비스듬히 주자호의 옆구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최겸의 두 손은 마치 화로에 달군 인두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네가 감히 우리 약초원을 능욕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군중 사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서도, 선우연과 흑련.


두 사람은 평소 최겸이 사용하던 법술을 익히 알고 있는 만큼,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를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열화술이다!’


저건 분명히 그가 평소 즐겨 사용하던 열화술.


하지만 축기기로 승급하며 생긴 모종의 변화로 인해, 그를 펼쳐내는 방식 자체가 어느 정도 달라져 버린 것이다.


‘···.’


추풍 역시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약간 젖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최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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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두 번째 모임 (2) +15 24.06.24 6,170 226 14쪽
28 두 번째 모임 (1) +11 24.06.22 6,483 221 13쪽
27 저점 매수 +15 24.06.21 6,510 186 12쪽
26 인망 +8 24.06.20 6,784 212 14쪽
» 정리 +10 24.06.19 7,100 208 21쪽
24 하늘의 길 (4) +17 24.06.17 7,092 233 15쪽
23 하늘의 길 (3) +21 24.06.16 7,064 239 17쪽
22 하늘의 길 (2) +15 24.06.14 6,947 236 14쪽
21 하늘의 길 (1) +17 24.06.13 7,106 238 12쪽
20 승급 (2) +7 24.06.12 7,016 219 14쪽
19 승급 (1) +7 24.06.11 7,111 215 14쪽
18 주자호 +12 24.06.09 7,223 212 15쪽
17 거래 +13 24.06.08 7,459 217 17쪽
16 천영경 +21 24.06.07 7,584 229 13쪽
15 화신기 수도자의 유해 (4) +10 24.06.05 7,635 218 18쪽
14 화신기 수도자의 유해 (3) +8 24.06.03 7,503 193 11쪽
13 화신기 수도자의 유해 (2) +13 24.06.01 7,538 198 11쪽
12 화신기 수도자의 유해 (1) +9 24.05.31 7,910 209 15쪽
11 연단 +5 24.05.30 8,035 222 14쪽
10 식별 +6 24.05.28 8,308 219 15쪽
9 천도 축기경 +7 24.05.28 8,714 223 18쪽
8 통성명 +8 24.05.27 8,844 239 16쪽
7 업무 +7 24.05.26 9,088 242 14쪽
6 이득 +9 24.05.25 9,110 242 13쪽
5 해야 하는 일 +15 24.05.24 9,531 246 15쪽
4 오성 +8 24.05.23 10,127 239 12쪽
3 마음가짐 +20 24.05.22 10,968 238 18쪽
2 자질 +10 24.05.20 11,702 250 12쪽
1 주사위 굴리기 +23 24.05.18 13,078 272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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