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작지만 작지 않은 전쟁 2-1 >
새까맣던 하늘이 점차 옷을 벗기 시작했다. 멀리서 여명이 떠오르기 전 그냥 환한 기운만이 이글거리며 퍼져온다. 밤새 차가웠던 초원의 밤이 기운만으로도 놀라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지평선 너머로 붉은 기운이 터져나가듯이 세상을 밝힌다. 아름다웠지만 보고 싶지는 않은 광경이다. 오늘의 전투가 곧 찾아올 테니 말이다.
북이 울리며 병사를 재촉한다. 창을 몸에 기댄 채 얇은 천 조각만을 덮었던 병사들이 일어선다. 밤새 추위를 견디던 곁의 동료가 어깨를 두들기며 힘내라 말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왁자지껄 떠들지는 않아도 오늘은 이기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병사들을 잘 정렬한 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적군은 뒤늦게 진을 정리하고는 뒤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두시간을 넘게 천천히 눈치싸움을 하며 물린 병력은 마지막 전장에 도착했다.
평원 한가운데 유일하게 솟아있는 커다란 바윗덩어리, 높이는 사람 열쇠의 다섯 배 정도, 게다가 정상은 사람 수백이 누울 정도로 평평한 천연 요새였다. 그곳에는 하마드를 뜻하는 백색 사자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미끼다. 분명 녀석들이 미끼를 물어야 한다. 적들은 대장이 고지에서 지휘를 하기에 편할 테니 선택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먹음직한 미끼인 것이다. 올라가기도 힘든 저곳은 내려가기도 힘들다. 중요한 대장이 퇴각도 불가능한 곳에 오르겠는가?
어제 회의가 생각났다.
-모루와 망치,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모루는 이 커다란 바위가 해낼 것이다. 녀석들은 분명 나를 잡으려 포위하려 할 것이다. 쐐기 진으로 부대와 바위를 나누려 하겠지. 그때 중앙이 버티고 우익이 망치로 때려버리는 거야. 녀석들은 벽에 밀려 쓰러질 거다.-
-버티는 것도 버티는 거지만, 망치 역할이 될까? 병력도 적은데 망치에 힘을 쓰려고 주력을 빼면 순식간에 밀려버리지 않을까? -
그때, 하마드는 류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말인 줄 알았다. 버텨달라는 얘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녀석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쫓아왔다. 일부는 포기한 지역을 점령하겠다고 돌려버렸지만, 여전히 두 배 가까운 병력. 그 뒤로는 한참을 떨어져 원로들의 병력이 다가왔다.
구경에 힘쓰겠다는 듯이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아모데우스의 뒤를 받쳐주는 형세라 급습도 쉽지 않아 보였다.
"자아! 이 바보 녀석들아. 모두 멀쩡했냐?"
류가 말을 타고 달려와 후진에 버려두고는 대열의 앞으로 나섰다. 맘루크들이 류를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위 위에 아버지가 활을 들고 손을 흔들고 있다. 덕윤이 녀석은 아버지를 잘 지키라 명했는데,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 겁먹고 뒤로 빠졌나? 아버지가 털끝이라도 다치기만 해봐라.'
괘씸한 마음에 눈을 돌려 적진을 노려보았다. 주변의 맘루크들이 자신들의 영웅이 등장하자, 칼을 방패에 두들기며 점점 흥분을 끌어올렸다. 압둘이 다가와 곁에 섰다. 고개를 바로 돌려도 녀석의 목덜미만 보이는 거대한 녀석. 이럴 때 큰 위안이 되는 버팀목이었다.
-온다!-
처음에는 화살이 날아온다. 궁수도 거의 두 배 차이, 하늘에 쏘아지는 화살은 빽빽이 쏟아진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시 못 할 숫자. 하지만 맘루크들은 겁먹지 않고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다. 으윽 하는 신음성이 대열 중간중간에서 터져 나왔지만, 류는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었다. 녀석들의 전진이 시작됐으니까 말이다.
다만 귀에는 기세등등한 맘루크들의 비아냥 소리가 가득 들렸다.
-오는군. 오늘은 신께 녀석들의 목을 다섯 개 바칠 테다.-
-크크, 다섯 번째는 네놈 목으로 하려고?-
-병신같이 몸뚱이만 뒤룩뒤룩 뚱뚱하니 화살을 맞지. 뒤로 꺼져.-
하지만 잡스러운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적들이 천천히 다가오다가 이제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류도 가벼운 원형 방패를 왼손에 잡고 보두엥의 검을 들었다. 방패잡이의 가죽끈이 끊어져라. 억세게 쥐었다.
첫 열이 맞붙었다. 손도끼를 들고 병에 걸린 개새끼마냥 침을 흘려대는 녀석이 처음이었다. 그 뒤로는 창을 들고 자기편, 적을 가리지 않고 찔러대는 미치광이 새끼였고 말이다. 류는 가볍게 방패를 들어 막고는 배에 검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옆구리를 찢고 스쳐 가는 창날에 분노한 류는 있는 힘껏 검을 가로로 베었다.
검에 둘둘 말린 창자가 끊어져 나오며 녀석의 눈앞에서 퍽 피가 튀었다. 눈을 가리며 앞으로 지나쳐버린 녀석의 뒤통수에 폼멜(검 손잡이 끝의 뭉치)을 때려 넣었다. 움푹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녀석은 털썩 쓰러져 주변 병사들의 발에 짓밟혀 나갔다. 첫 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녀석들의 두 번째 열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시 검을 고쳐잡으며 주위를 살피니, 압둘은 양손에 든 커다란 손도끼 두 개를 번갈아 휘두르며 상대방을 토막 치고 있었다.
방패를 들어 막아도 이리저리 서너 번 두들겨대면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역습할 시간도 벌지 못한 채 온몸에 꽂힌 도끼날에 녀석들은 부서져 나갔다. 류는 그 모습에 압둘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류, 난 말이야. 절대 도끼날을 세우지 않아. 그래야 자근자근 두들기는 느낌이 더 오거든. 그거 있잖아. 피가 터지기 전에 뼈가 부러지는 느낌. 그게 좋단 말이야.-
다행히 저 괴물이 같은 편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
“모두 버텨내고 있다. 이길 수 있다. 힘을 내라!”
하마드의 고함에 기수는 백색 사자기를 흔들며 기운을 북돋웠고, 그에 맞춰 북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바위를 기어오르는 적들은 하마드가 병사들을 데리고 가 견제했다. 녀석들의 긴 창이 닿지는 않아도 위협적으로 찔러오기에 바위에 달라붙은 녀석들에게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병사들은 곧 방법을 찾아냈다.
기어오르려 뻗치는 녀석들의 손가락만 결딴내자 비명과 함께 떨어져 자기들끼리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점점 올라서려는 적들이 많아지자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워낙 하마드를 지키는 병력이 적었으니까 말이다.
-패애앵-
장 씨가 날린 살들이 거의 다 올라와 고개를 내미는 녀석들을 노리고 날아갔다. 미간에 맞은 녀석들은 빠각 거리는 소리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다가 고개를 처박고는 쓰러졌다. 하마드를 지키며, 난전 중에 눈에 거슬리는 적의 부장급들이 보이자마자 장 씨의 화살은 날았다.
그래도 녀석들은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젠장, 살이 먼저 떨어지겠구먼. 챙긴다고 챙긴 것인데 모자라려나?’
장 씨는 앞에 세워놓은 화살통 다섯 개 중 벌써 두 개가 비어버린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러다 볼썽사나운 폼으로 칼을 휘둘러야 할지도 모른다. 곁에 있는 병사들의 존경 눈빛이 경악스럽게 바뀔 텐데······. 걱정이었다.
***
더이상은 힘들다. 혀끝에 단내가 풀풀 올라온다. 괴물 압둘의 도끼도 조금은 느려졌나? 아니구나. 여전히 녀석은 홍수로 불어난 강물 속에 우뚝 솟은 섬 같은 녀석이다.
“죽어버려!”
이런 상투적인 말을 터트리며 다가서는 녀석, 사슬갑옷을 제대로 입고 앞에는 십자군처럼 써코트를 걸쳤다. 아모데우스의 쌍두머리 뱀이 수놓아진 걸 보니. 적어도 졸개는 아니었다.
“오려면 대장 녀석이나 올 것이지.”
류는 거의 부서져 가는 방패를 던져버리고는 두 손으로 검을 힘있게 꼬나쥐고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이젠 진짜 힘들다. 하지즈. 망치는 아직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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