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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 님의 서재입니다.

무사, 기사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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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화자(話者)
작품등록일 :
2018.04.09 10:01
최근연재일 :
2018.10.11 15:10
연재수 :
2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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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04,559

작성
18.08.05 22:25
조회
2,905
추천
78
글자
9쪽

< #13. 낙성(落城) 5-2 >

DUMMY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 연기가 폐로 들어갔는지 헛기침이 계속 나왔다.


류는 망루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생명이 끝나는 걸 지켜봤다. 주위엔 온통 죽음뿐이었다. 망루로 올라서는 입구에는 거멓게 탄 시체들이 비통에 찬 표정으로 손을 뻗은 채 굳어있었다.


결국 그쪽으로 나서지 못하고 중간에 있던 창에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는 곳에는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뜩 타버린 시체가 부서져 내렸다. 부서지며 물컹거리는 느낌. 피가 튀지 않고 덩어리가 엉겨 붙었다. 다리에 핏물이 주르르 묻어 쓸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짚은 손에는 아직도 열기를 머금은 살 조각이 묻어나왔다.


난 귀신이고 괴물이다. 그렇게 류는 되뇌었다.


앗산의 시체 앞에 섰다. 열기에 눈동자가 하얗게 익어버렸다. 한쪽 눈은 터져버려 진물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던 입속도 새까맣게 타들어 가 진홍빛 혀마저 검어져 있었다. 그동안의 잘못을 빌려 했는지 아니면 빨리 죽여달라 애원했는지 하늘로 향한 팔은 그대로 굳어있었다.


눈을 돌렸다.


아직도 열기를 내뿜으며 잔불이 남은 마당을 지나쳤다. 불에서 용케 피한 이들은 목덜미를 두 손으로 쥐고 몸부림치며 죽었다. 열기와 연기 때문에 질식한 것이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입에는 거품을 문 채 땅을 긁으며 죽어갔다. 손톱이 성한 자들이 별로 없었다.


밖에서 벌어지던 요란한 함성은 잦아 들어갔다. 이제는 내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다. 마당을 지나치며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던 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구토했다.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속에서 온갖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거듭 속을 비워내다가 신물에 목이 쓰렸다.


지옥이 있다면, 아니 믿지는 않지만 있다면 말이다. 그곳에 떨어져 허우적댈 운명이라고 자조하면서 말이다.


성문 쪽이 가장 불이 심하게 타올랐는데 사람들은 살고자 철창을 부수려 애썼다. 조그만 힘을 더 냈으면 부숴졌으리라. 반쯤 철창이 돌벽을 무너뜨리고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많이 죽었다. 결국 류는 성문을 통해서 나가지 못하고 성벽에 줄을 감고서야 내려갈 수 있었다.



***



큰 승리를 거뒀지만 아무도 승리의 기쁨을 떠들 수 없었다.


류의 부하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몇몇 무슬림들은 신에게 죄를 비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됐다. 이들을 더이상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류는 그렇게 생각을 마쳤다.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잠을 자다 등에 칼을 맞고 목이 베일 것이다. 이들을 전부 내보내고 가족만 이곳에 남는다? 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기엔 너무 일이 커져 버렸다. 진실을 밝히고 무관하다는 걸 인정받기에는 너무 많이 죽여버렸다. 불구덩이 속에서 칼리프의 군대가 천 명이 넘게 잿더미가 됐다. 살라흐앗딘이 용서한다고 해도 주변 아미르들은 계속 공격을 할 것이다.


이제는 무슬림의 그늘에서 살아가기는 힘들다.


처량한 떠돌이로 돌아가 다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아버지와 연이가 보였다. 혼자 살겠다고 한다면 노상의 강도를 하더라도 살 수 있다. 오히려 골치 아프지 않고 즐기려 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살아갈 집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아니 집은 내가 만들 터이니. 적어도 집을 세울 땅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 이역만리에 누가 있나? 하마드? 날 용서할까? 일족의 수치를 정리해줬으니 용서할까? 아니다. 마지막 부탁이 생각났다.


'단번에 목을 베어 주게나.'


앗산의 시체를 수습하며 살펴본다면 나에게 원한을 가질 것이다. 하마드는 이제 나를 적으로 볼 것이다. 하지즈? 괜찮은 인물이지만 너무 하마드에게 기울었다. 이제는 자유스러운 용병이 아니다. 거의 하마드의 사병인 데다가 살라흐앗딘의 군대다.


알폰소? 적어도 마구간이라도 살라며 내줬을 텐데. 그도 집을 잃었다. 같은 처지인데 의지하고자 하기도 애매하다.


생각났다. 단 한 사람.


날 구해줬고, 나도 그를 두 번이나 구했던 인연이 있는 사람. 어느 정도 작위와 영지가 있어 날 지켜줄 사람.


발리앙. 그와 함께해야겠다. 이벨린으로 가자. 그는 살라흐앗딘에게도 괜찮은 영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전쟁이 끝나도 발리앙은 남길 것이다.



***



"압둘, 이 정도 금화라면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네."


"음. 그동안 한 일에 비하면 좀 소소한데. 뭐 정성이니 거절은 안 하겠어."


욕심쟁이 압둘은 커다란 금화 주머니 두 개를 챙겨 넣었다. 그 정도 금화라면 낭비만 하지 않는다면 평생 살 것이다. 류의 생각에 압둘은 그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래, 좀 편안한 삶을 살아. 더운 사막에서 적들의 머리통 깨는 일은 그만하고 말이야."


"아. 그냥 내 삶을 살아야지. 설교하지는 마. 맘루크가 돼서 호의호식하다가 어디 작은 도시의 경비대장이나 될까 했는데. 너때문에 다 글렀어. 그러니 위로금으로는 모자라다고"


헤어짐에 앞서 아쉬운지 술을 들이켠다. 둘이 마시는 술은 이게 마지막이리라.


"이제는 좋은 집에다가 아름다운 아내. 아이와 살게나."


"바보, 그렇게 되겠나?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건 좀이 쑤신다고. 몇 명하고 얘기가 돼 있어. 용병대나 하나 차리려고 말이야. 잘 봐둬."


압둘은 손가락을 술잔에 집어넣었다가 탁자 위에 슬며시 문양 하나를 그렸다. 예전, 압둘이 자기네 고대 신의 문양이라며 보였던 문신 모양이었다. 류가 웃으며 사타구니 안쪽에 그려 넣은 건 여자를 파괴하려는 짓이냐며 타박했던 그 문신 말이다.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그냥 주술 같은 거로 믿는 거야. 전쟁의 신이자, 혼란을 만드는 자. 세트다. 잘 봐둬. 난 이걸로 깃발을 만들 거야. 그러니 마주치면 서로 모르는 척하자. 나도 네 깃발을 잊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래, 네 녀석 양물이면 여자들한텐 파괴 신이지. 그러니 차라리 용병 짓이나 하는 게 이 세상 절반에 평화를 가져다주겠네. 그려."


오랜만에 시시덕거림이다. 그렇게 기분 좋게 얘기는 이어졌고, 병기고에 쌓여 있던 무기는 압둘이 챙기기로 했다. 대략 얘기를 들어보니 남을 사람 대부분이 압둘을 따라갈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용병들이라, 결국 너도 가족을 만들기는 했네."


"그래, 가족이지. 나도 가족이 있는 거라고."


희대의 영웅이 되겠다는 압둘의 길에 좋은 일만 있으라. 그렇게 빌어줬다.




***



칼리프의 군대에서 뺏은 전리품은 상당했다. 그것을 제대로 나눠 대부분을 뿌렸다. 일부는 마을의 촌장에게 나눠줬다. 불에 탄 시신들을 수습하고 때가 되면 명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게 뒷정리를 하는 동안에 변고를 들은 칼리프의 추종자들이 알 카락에서 떨어져 이쪽으로 온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제는 더 지체 않고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류는 발리앙의 이벨린을 향해 말머리를 잡았고, 연이와 시녀 둘은 마차에 올라탔다. 말 고삐는 아버지가 잡았다. 원래 저 자리에는 덕윤이가 있어야 했고, 지금 연이와 말동무를 하는 건 샤아여야 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슬픈 마음이 치솟았다.


가족을 잃는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앞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석양을 가로지르며 일행은 여정을 떠났다.




***



"이 빌어먹을 대머리 시키야."


"말이 험하네. 로드 류. 이럴 때일수록 서로 도와야지."


발리앙과 류는 성벽에 기대 다가오는 군대를 바라봤다. 이 대머리 녀석이 방긋이 웃으며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꼬드길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수도니까 그래도 이 촌구석보다는 안전하지 않겠냐며? 수비병은 보통 몇천 명에 달한다며 말이다. 물론 하틴에서 수비병들도 대부분 몰살당했다는 얘기는 빼고 말이다.


"참나, 갈 곳 없는 들개 신세라 의탁하려 했더니 이리 뒤통수를 쳐."


"미안해. 그런데 싸울 사람이 너무 없더라. 자네 같은 사람은 더더욱 없고. 칼 한 자루라도 필요했어."


류는 성벽을 지키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기사 열다섯. 류와 발리앙까지 합쳐서다.


종자들이나 가볍게 무장한 자경단들도 있지만 모두 기가 죽어있었다. 그 수도 오백 명이 겨우 넘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지평선 넘어 다가오는 살라흐앗딘의 대군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끝에서 끝을 쳐다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들리는 얘기로는 오만명이라 하였다. 누구는 십만 명이라 하였다.


어쨌든 천년 수도는 이제 마지막의 순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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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 #13. 낙성(落城) 6-2 > +14 18.08.07 3,157 76 9쪽
153 < #13. 낙성(落城) 6-1 > +20 18.08.06 2,926 72 10쪽
» < #13. 낙성(落城) 5-2 > +26 18.08.05 2,906 78 9쪽
151 < #13. 낙성(落城) 5-1 > +12 18.08.04 2,873 81 10쪽
150 < #13. 낙성(落城) 4-2 > +10 18.08.03 2,839 86 9쪽
149 < #13. 낙성(落城) 4-1 > +14 18.08.02 2,985 74 9쪽
148 < #13. 낙성(落城) 3-2 > +28 18.07.31 2,952 71 9쪽
147 < #13. 낙성(落城) 3-1 > +26 18.07.30 3,032 69 8쪽
146 < #13. 낙성(落城) 2-2 > +9 18.07.29 2,967 78 8쪽
145 < #13. 낙성(落城) 2-1 > +12 18.07.28 2,947 74 8쪽
144 < #13. 낙성(落城) 1-2 > +10 18.07.27 3,052 78 9쪽
143 < #13. 낙성(落城) 1-1 > +10 18.07.26 3,143 67 9쪽
142 < #12. 하틴 4-2> +14 18.07.24 3,193 68 9쪽
141 < #12. 하틴 4-1 > +14 18.07.23 3,149 74 9쪽
140 < #12. 하틴 3-2 > +13 18.07.22 3,360 75 9쪽
139 < #12. 하틴 3-1 > +8 18.07.21 3,244 82 9쪽
138 < #12. 하틴 2-2 > +8 18.07.20 3,329 89 10쪽
137 < #12. 하틴 2-1 > +17 18.07.19 3,384 83 9쪽
136 < #12. 하틴 1-2 > +14 18.07.17 3,617 82 10쪽
135 < #12. 하틴 1-1 > +4 18.07.16 3,513 84 9쪽
134 < #11. 이 땅은 내 것이다. 3-2 > +18 18.07.15 3,669 96 12쪽
133 < #11. 이 땅은 내 것이다. 3-1 > +12 18.07.14 3,476 89 8쪽
132 < #11. 이 땅은 내 것이다. 2-2 > +6 18.07.14 3,479 92 8쪽
131 < #11. 이 땅은 내 것이다. 2-1 > +16 18.07.13 3,467 89 10쪽
130 < #11. 이 땅은 내 것이다. 1-2 > +14 18.07.12 3,639 99 10쪽
129 < #11. 이 땅은 내 것이다. 1-1 > +32 18.07.10 3,740 107 10쪽
128 < #10. 작지만 작지 않은 전쟁 3-2 > +10 18.07.09 3,548 92 8쪽
127 < #10. 작지만 작지 않은 전쟁 3-1 > +19 18.07.08 3,632 105 9쪽
126 < #10. 작지만 작지 않은 전쟁 2-2 > +16 18.07.08 3,573 94 9쪽
125 < #10. 작지만 작지 않은 전쟁 2-1 > +13 18.07.07 3,631 9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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