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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 님의 서재입니다.

하늘과땅의시대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聰.
작품등록일 :
2012.10.31 20:25
최근연재일 :
2022.07.24 14:15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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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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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7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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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3)

DUMMY

어느덧 여관에 닿아 있었다.

“거 하루 한 번 길구먼. 오늘은 한 잔 먹고 푹 자라구.”

“사 주시는 겁니까?”

농을 섞어 대답을 던지며 문을 당겼다.

쾅!

눈앞이 번쩍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나를 덮친 무언가와 함께 포석 위를 뒹굴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

커다랗고, 무거운 데다 금속성의 눌림까지 느껴지는 작자가 나를 깔고 앉은 채로 고함을 질렀다.

“뭐 등신아. 그만큼 얻어터지고도 정신 못 차리지?”

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열이 받을 대로 받아 그렇게 받아쳤다. 나를 깔고 앉은 작자가 다시 한번 고함을 지르려는지 몸에 힘을 주는 걸 간신히 옆으로 밀어냈다.

그때 그 덩치잖아?

발을 밀어 두어 걸음 물러나고 나서야 나를 깔고 앉은 작자가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부딪치지도 않은 어깨로 시비를 걸었던 덩치가 저만치에서 더벅머리 사내를 을러대고 있었다. 앉은 채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옆에서 치안관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이런 썅, 너 진짜 뜨거운 맛 좀 볼래?”

“뭐, 그 잘난 칼이라도 뽑으시게? 솔직히 그거 쓸 줄은 아냐 이 머저리야!?”

불씨만 갖다 대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목소리가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뭐? 머저리?”

“맘에 안 들어? 좆병신이나 개대가리는 어때? 입맛대로 골라.”

“또 핸슨이군.”

그때껏 나를 부축하고 있던 치안관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네 괜찮나?”

그는 내게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물었다.

정말이지 별일을 다 겪는군··· 아픈 건 둘째 치고 당장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말려야죠···?”

한 걸음 내딛는데 몸이 휘청했다.

“냅둬. 어차피 어떻게 끝날진 뻔하니.”

치안관은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도 혀를 끌끌 찼다. 나와 치안관이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런 씨발! 술 한 잔 따라 달라고 한 게 맞을 거리야!?”

“이 등신 새끼가 진짜! 뭐!? 술을 따라줘? 여기가 센트로이드 뒷골목인줄 아냐? 아니, 당장 그것만 해도 뼈를 갈아 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치맛자락 들추면서 낄낄대는 건 대체 뭐야!? 너 오늘 진짜 내 손에 뒈져 볼래? 이 쓰레기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다 개 호구로 보이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벅머리 사내는 오랫동안 쌓여 온 것은 둘째 치고 한 번 화를 내면 더욱더 불이 붙는 그런 유형의 사람인 듯싶었다.

“실수라고 했잖아!”

“실수? 너 지금 실수라고 했냐!? 너하고 저 잡놈들이 그 짓거리를 하고 낄낄대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게 실수라고!?”

“아이반, 참아! 참으라고! 이게 어디 한두 번야!?”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여관 안에서 역무원 영감님이 뛰쳐나와 더벅머리 사내와 덩치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덩치는 둘째치고 당장 사내부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그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저 병신새끼들이 마을 들어와서 깽판 놓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에요? 갱도에 물 차서 죽을 뻔한 것도 기가 차는데 당장 여기까지 기어와서 저따위 개같은 짓거리를 하는 이유가 뭔데요!”

“좀 진정해! 자네 지위 생각 좀 하라니까?”

“지위요? 무슨 지위요! 제가 지금 광산 일 갖고 이럽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자 참자 하니까 그걸 우습게 보고 저런 개짓거리를 하는 거 아녜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거야 덩치도 못잖았지만 사내의 기세가 워낙 험악하다 보니 끼어들 때를 못 잡는 듯했다.

“니미···! 이딴 다 쓰러져 가는 여관 여편네가 남정네 상대로 할 거야 뻔하지 뭘-”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온 지 사흘도 안 된 나도 너무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평 아닌 불평을 하던 덩치는 꼭지가 돈 얼굴로 성큼 다가선 사내 덕에 채 말을 맺지도 못했다.

“한 번 더 말해봐.”

“아이반!”

광산 일로 다져진 다부진 몸이 덩치의 코앞에 얼굴을 갖다 대고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뚝뚝 끊어 내뱉었다.

“한 번 더 말해 보라고.”

역무원 영감님이 다시 한번 그 사이로 끼어들어 말리려 했다. 하지만 그런 영감님을 덩치가 한 손으로 거칠게 밀어젖혔다. 워낙 깡마른 노인이다 보니 그는 아예 내동댕이쳐지듯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걸 보자마자 안 되겠다 싶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쾅!

귓가에서 그런 소리가 울렸다.

보통 맞는 소리면 퍽 그런 소리 아니었나.


“이분 정말 괜찮은 거예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 얼핏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그 친구 맞은 것도 있지만 탈진해서 그런 것도 있을 거야.”

“탈진이오?”

나이든 목소리가 하나, 그리고 젊은 남자 목소리가 하나. 어디에 있는 건지 향수인지 비누인지 뭔가 옅은 꽃 냄새가 났다.

“어젯밤에 그 일 때문에 잠을 못 잤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근데 이 친구 오늘 제설작업도 도왔는데.”

“뭐 그렇다손 쳐도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자네 주먹이겠지.”

그 말 뒤로 흠흠 하는 머쓱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아이반, 이런 자리니까 한마디 함세.”

“예?”

“아까같이 행동하지 마.”

“···그 꼴을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요?”

되묻는 목소리에 당장 분노가 실렸다.

“명색이 광부들 대장이면 좀 냉정하게 대처를 하란 얘기야. 당장 카지오 그치가 광산 폐쇄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능히 그렇게 할 만한 작자고 해도 눈도 깜짝 않을걸.”

어딘지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아저씨,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그런 건데···”

“너든 아이반이든 잘못한 거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사실 아이반이 한 게 잘한 행동이지. 좀 제대로 된 주인이라면 아랫사람이 저렇게 개망나니처럼 굴게 두진 않을 텐데···”

사방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당분간은 좀 잠잠하겠지.”

“고마워요, 아이반.”

“아닙니다. 홀에 의자 부서진 건 제가 내일 고쳐 둘게요.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친구 참··· 계속 투덜대는 것처럼 온 지 사흘도 안 됐는데 와서 별꼴을 다 겪네요.”

“그러게. 쯧, 울릭 그 영감태기가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곧 돌아오시지 않겠어요? 그나저나 저분 수건 좀 갈아야겠어요.”

“너도 참. 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물수건은 무슨··· 난 핏자국 닦아내려고 갖고 온 줄 알았더니.”

눈을 떴다. 뭔지 모를 흰 조각이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TMD-?

뭔 훈련이었더라. 어떤 조건에서든 글자 읽는 훈련이었는데. 덕분에 그 뭔지 모를 조각 아래 음각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여관 아가씨가 내가 일어난 걸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신 들었어?”

“오, 진짜네. 어이, 괜찮아?”

“···저 철도 뚫리면 도망갈 겁니다. 진짜로요.”

눈을 뜨자마자 한 푸념에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쿡쿡 웃었다.

“멀쩡하구먼.”

어쩐지 더럽게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이, 무리하지 마.”

“아우 젠장, 도대체 이게 뭔···”

“그래도 뭐, 이 친구 주먹에 맞았는데 멍도 안 들었으니 다행인 셈 치라구.”

“저만 때린 거 아니잖아요.”

“자넨 안 때렸어? 어린애도 아니고 나만 때린 거 아니잖아요는 무슨?”

치안관의 핀잔에 사내는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그런 사내 뒤로 여관 아가씨가 방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날 여관 아가씨의 방으로 데려온 듯했다. 몇 가지인가 간소한 가구와 화장대 같은 것이 보였다. 바로 옆 침대에 그 묘한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끼었어, 자넨.”

치안관은 습관대로 담뱃대를 꺼내어 물다 멈칫했다. 그 시선이 잠든 아이를 향한 채로 한숨을 쉬더니 다시 담뱃대를 조끼에 달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뭔 소리예요? 끼다니?”

“아이반한테 얼굴 맞고 핸슨한테 목 뒤를 맞았지. 그리고 기절.”

“얼굴은 무진장 욱신거리네요. 목은 그닥···”

그렇게 대답하며 왼뺨을 문질렀다.

“미안.”

“됐습니다. 저 진짜 철도 뚫리면 방 빼서 도망갈 거예요.”

내 한숨 섞인 푸념에 두 사람 다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불평하는 걸 보니 아직 팔팔하구먼 뭘. 우편 마차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니 그때까지 통행증 갱신 신청이나 써 두게.”

대답 대신 끙하고 침대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 계세요. 무리하지 마시고.”

마침 들어오던 여관 아가씨가 나를 말렸다. 물을 갈러 갔던 모양인지 들고 들어온 대야에 물이 찰랑대고 있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제 방에서 쉬죠. 어, 그런데 제 외투 어디에?”

“여기 있어요.”

여관 아가씨가 침대 아랫목에서 외투를 들어 건넸다.

“이거 꽤 무겁네요?”

“방수(防水)라 그럽니다. 비바람 몰아쳐도 끄떡없죠.”

그렇게 대답하며 외투를 걸쳤다.

“그런데 아까 뭐죠? 일어났을 때 뭔가 이상한 글자들을 읽은 거 같은데.”

“글자요?”

여관 아가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목 뒤로 돌려 무언가를 풀더니 그것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이거 말씀이시죠? 울릭 아저씨가 우리 자매 데려올 때 주신 거예요.”

내 검지 두 마디쯤 되는 체스 말이 목걸이에 걸려 있었다. 상아 같은 질감의 흰 재료를 깎아 만든 여왕이었다. 온 첫날 여관 아가씨가 홀의 체스판에 꽂아 열쇠처럼 쓰던 게 기억이 났다.

TMDUHESIHOE.

들어 살펴본 말의 밑바닥에는 원형으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과 끝을 구분하려는 듯 사이에 격자가 하나 놓여 글자들을 가르고 있었다.

“무슨 암호 같네요? 금고 비밀번호라도 됩니까?”

“저도 궁금해서 여쭤봤지만 그때마다 맞춰 보라고만 하셨어요. 우리 자매를 위해서 선물을 마련해 뒀다고 하시면서요.”

대답하는 목소리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분명히 그 체스판에 놔뒀을 거다.”

치안관이 일어서며 말했다.

“체스 좋아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무슨 목걸이 장식을 체스 말로 해서 준답니까? 울릭 영감님도 그렇고 윈치 씨도 그렇고 두 분은 사람들이 다 두 분만큼 체스 광인줄 아시나···”

더벅머리 사내의 푸념 섞인 말에 여관 아가씨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램프 아래에 통행증 갱신 양식을 둔 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스스로 정리를 좀 해보고 싶었다.

일단 내가 여기에 온 이유? 내 윗대가리가 테슬리의 책을 가져오라고 공문을 보내서다. 그런데 분명히 테슬리의 책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공문까지 보내서 이관해오라고 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당장 진짜로 그 인생 파란만장한 노교수가 썼다고는 믿기 어려운 저질 모험 소설이니··· 그런데 뭔지는 몰라도 사서가 그 책에 대해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해 놓고 사라졌단 말이지.

뭐 책은 내 개인적인 사정이니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갑자기 발견된 시체가 있다. 명백한 살인인 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총이 쓰였다. 이 두 가지만 해도 군이 정색하고 출동할 만한 일인데 참 기가 막힌 시점에 눈사태가 일어나서 마을이 고립됐다. 시체가 발견된 개울은 지금은 침수되어 폐쇄된 갱으로 연결된다. 생각해 보면 그 갱도로 가는 길도 좀 이상하고.

생각이 나는 대로 이것저것 적어가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오늘 저녁에 도서관으로 갔던 이유- 사서가 시체에서 뭔가를 찾아냈고, 그것 때문에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어 서둘러 갔던 게 그 이유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사서가 치안관에게 남겨 둔 쪽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창고에 누워 있는 친구한테서 이상-

혀를 찼다. 치안 유지군이 도착하면 한바탕 욕을 할 거다. 살인사건의 증거를 제멋대로 들고나온 거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나도 그놈의 책에 정신이 팔려 이걸 놓치고 있었다. 시체에서 나왔다고? 대체 뭘? 덕분에 마을을 일찍 떠날까 했던 생각은 싹 가셨다.

만년필을 집어 연장 신청서 양식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 연구소의 내 상급자에게 쓰는 편지도 하나 같이 썼다. 단어가 뭐였더라···? 편지도 오랜만에 쓰다 보니 쉽게 쓰지는 못했다.


윌루,

지금 노을 보면서 이거 쓰고 있습니다. 양손 다 비워 놓고 이러고 있는 거 오랜만이라 휴가 온 기분도 나고 좋았네요. 딱 여덟 시간쯤만요. 지금은 온갖 요상한 일을 다 겪고 있어서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되는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급행열차는커녕, 이 마을 오는 열차 하루에 한 번 있다는 거 믿어져요?

웬 이상한 책 이관해오라는 공문 받고 와 있는데 뭔가 이상해서 여기 사서하고 얘기를 해 봐야 할 거 같아요. 그 사서 지금 자리 비워서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한 일주일이면 될 거 같은데 뒤처리 좀 부탁합니다.



추신 1. 여기서 가져오라는 책 일단은 찾았는데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네요.

추신 2. 우의 빌린 건 돌아가서 드릴게요. 급하면 엑센한테 말해서 실험실 들어가서 가져가시고요.


그 능구렁이 아저씨가 이걸 보고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보나 마나 알아보기 힘드니 글씨 연습 좀 하라고 구박하겠지. 일단 센트로이드에 보낼 것들이 다 준비되자 그대로 의자에 기대어 몸을 묻었다.

“아저씨.”

나도 모르게 튕겨 일어나다 그만 펜을 건드렸다. 간신히 떨어지는 걸 잡은 다음 나를 부른 그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그 묘한 애가 방에 들어와 있었다.

“제발 부탁인데 그렇게 놀래키지 말아 줄래?”

아이는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오늘은 내가 봐야 하는 게 없으면 좋겠는데.”

“······.”

“설령 있다 해도 어제 보여 준 거 같은 건 사양하련다.”

아이는 대답 대신 두 손에 모아 쥐고 있던 뭔가를 내게 내밀었다.

“음?”

검은 체스 말이었다. 아까 여관 아가씨가 보여 준 것과 비슷한. 아니, 크기도 모양도 색을 제외하면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같았다.

“흑단?”

재질은 사뭇 달랐다. 여관 아가씨의 것이 상아 같은 질감이었다면 아이의 말은 묵직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게 거의 확실했다. 아까 보았던 것처럼 말을 뒤집어 그 바닥을 살펴 보았다. 역시나 비슷하게 글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OYAGTRWTLV.

TMD. 첫 세 글자는 기억이 난다. 여관 아가씨의 여왕에 새겨져 있던 문자는 아이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냥 별거 없는 애정표현이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아이가 보이지 않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본 시선에 내가 쓴 편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흰 머리가 보였다.

“낙서는 하지 마.”

아이는 듣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태도로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내가 쓴 편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노을, 양손, 급행···”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힌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계속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우의.”

그 손에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너··· 대체 뭐야?”

아이는 대답 대신 침대에서 뛰어내려 난롯가 앞에 가 섰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 손에 왠 끈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내 머리끈?

그걸 깨달은 순간 묶어 둔 머리카락이 풀리며 얼굴을 뒤덮었다.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분명히 불씨조차 남아 있지 않던 난로에서 조금씩 불똥이 휘날리고 있었다.

“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날리는 불똥 사이로 아이의 눈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나를 아이는 비통하기 짝이 없는, 마치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왜··· 우리···”

어느새 그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말하며 아이는 내게 손을 뻗었다.

스륵.

이상하리만큼 붉어 보이는 눈이 갑자기 풀렸다. 내게 손을 뻗던 모습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는 몸을 황급히 받아 들었다.

대체···?

몸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꿈이라도 꾼 것처럼 사방에 날리던 불똥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켜 두었던 램프의 불빛이 일렁이며 방안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방 안으로 달빛이 비쳐 흰 아이를 비추고 있었다. 침대에 누인 얼굴은 평온했다. 도저히 아이의 것 같지 않던 무표정한 얼굴도, 날 놀라게 했던 비통함이나 원망 같은 것도 편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선 채로 꿈이라도 꾼 걸까. 별 생각 없이 쓰다듬은 흰 머리카락은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저항 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후···

의자에 기댄 채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지만, 나 자신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나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 아이에게 못 할 짓을 했다 해도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건 그렇다 해도 이 아이가 그냥 평범한 애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싸구려 소설에서 단골로 나오는 예언자를 실제로 보고 있는 기분이라고 할지. 내가 '봐야' 할 것. '내가' 봐야 할 것··· 보여 준 것들은 그렇다 쳐도 대체 왜 나를 택한 건지 그 이유는 여전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내가 봐야 할 것.

검은 체스 말을 들어 달빛에 비춰 보았다. 물들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검은색인 나무를 깎아 은제 고리에 엮어 둔 것이었다. 가치는 둘째 치더라도 이걸 조각하는데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울릭이라고 했던가? 이 자매의 보호자이자 자매에게 목걸이를 준 사람, 체스판을 설계하고 제작한 사람··· 얼핏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로는 이 마을의 촌장 격인 사람 같았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조심스레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빈 침대 위로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몇 개인가 갈라진 달빛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빛은 여전히 환하지만, 저 달이 깨져 버렸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내가 뭔 짓을 하든 나란 놈이 혈육을 버리고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것도 변하지 않겠지. 굳이 누군가 되새겨 주지 않아도 스스로 정의나 명예 같은 걸 말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전에도 다시 써 보겠다고 했다가 6-7년 만에 다시 글을 올리네요. 그때는 다시 처음부터 잘 써 보자가 목표였지만 지금은 예전에 썼던 분량이라도 올리자 정도가 목표입니다. 물론 자잘한 오타나 표현, 오류 같은 건 수정해 가며 쓸 생각입니다. 가능한 자주 올려서 예전에 연재했던 분량까지는 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제가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고, 그분들께서 답글을 달아 주셔서 기쁩니다. 일일이 답글을 달고 인사드리는 게 예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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