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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 님의 서재입니다.

하늘과땅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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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
작품등록일 :
2012.10.31 20:25
최근연재일 :
2022.07.24 14:15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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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14
추천수 :
103
글자수 :
82,070

작성
22.05.27 21:15
조회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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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8쪽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2)

DUMMY

첫째 날 저녁


‘삼각상자의 비밀’.

뭔가 굉장히 과장된 단검을 역수로 꼬나쥔 사내가 무진장 심각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고 서 있었다. 배경인 어딘가 어둑한 흰 꽃밭은 사방에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거기까진 봐주겠는데 그 옆으로 무도회에나 어울릴 치렁한 드레스를 걸친 젊은 여자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는 건 도대체...

저자 니콜라스 테슬리, 그린우드 출판사.

책 표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사고능력이 마비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뒷표지에는 불쏘시개 출판사 특유의 휘황찬란한, 그리고 왠지 엄숙한 문체로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었다.

렌리 E. G. 알 싱카-이카루스... 그리고 타냐 O. M. 앤-이사. 뭔 놈의 이름이 이렇게 길어. 렌리... 저 이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어쨌든 주인공은 뛰어난 칼잡이 겸 총잡이 겸 폭탄 전문가 겸 작타 부대의 정예 요원이고, 연인이 되는 타냐... 아 젠장맞을, 하여튼 저 골 비어 보이는 여자는 주인공이 임무 수행 중에 마주치게 되는 앤-이사 가문의 아름다운 – 그래 이게 빠질 리 없지 – 철부지 아가씨. 그들은 제국 정부를 뒤엎으려는 어둠의 무리에 맞서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는다.

아, 그래. 모험, 항상 모험이지. 절대 다른 단어가 쓰이는 일이 없다. 같잖게 이미 해산된 작타 부대는 또 왜. 그리고 꼭 이름을 이렇게 항상 성명(姓名)으로 써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계속 이런 식이면 책 분량 반쯤은 이름으로 차겠구먼...

누굴까. 잠시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도대체 이딴 걸 가져오라고 한 작자가 누구지. 윌루? 에이 설마. 아니 근데 진짜로 이게 그 인생 파란만장한 교수가 쓴 책이라고? 그냥 있어 보이니까 필명 아무거나 쓴 게 아니라? 저자 약력을 보았다. 교수... 역학 전문. 맞는데?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굳이 저 교수의 약력을 갖다 쓸 리가 없다. 뭐지? 숨어 살다 갑자기 문학에 눈을 뜨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냥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살짝 돌았다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을에 들어설 때 치안관 노인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이딴 삼류 탐정소설을 가장한 연애소설을 찾아서 사람들이 몰려와 난리를 치는데 조소가 나올밖에.

어쩐다? 진짜 이걸 가져가야 하나? 가져갔다간 백발백중 문책당하고 경위서를 쓰게 될 거다. 윌루는 분명 킬킬대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놀려댈 거고. 문득 고개를 돌리자 뭔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사서가 태연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한참을 책은 펴 보지도 않고 책 표지만 바라보며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담컨대 이런 표정으로 표지만 쳐다보고 있던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겠지.

알 게 뭐냐, 젠장맞을. 책을 들고 그대로 카운터로 향했다. 테슬리의 책을 가져오라고 했지, 구체적으로 뭔 책을 가져오라고는 안 했다. 이건 지시 모호하게 내린 사람 잘못이라고. 경위서 쓰라고 하면 쓰면 그만이니 온 김에 휴가나 즐기다 가야겠다 싶었다.

“이 책 빌리는 거 맞죠?”

사서는 마을 치안관처럼 깡촌 마을 도서관 사서의 그야말로 모범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히스테릭한 노처녀의 전형이랄까.

“...다른 테슬리의 책이 있는 게 아니라면요. 그리고 나중에 정식으로 이관신청 할 겁니다.”

사서는 내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에 피식피식 웃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마을을 감싼 절벽 옆으로 짙은 오렌지색 노을이, 그 너머로 낮은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맨몸으로 맞기에는 차갑지만 들이쉬는 숨이 맑아지는 그런 바람이었다. 묘하게 익숙한, 어딘가 그리워지는 그런 바람. 그래, 서부령(西部領)의 바람이 이런 느낌이었-

“그쯤 해라, 등신아.”

피식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휴가 온 셈 치기로 했기로서니.


어떠한 생명에도 끝이 있는 법

죽음으로 모든 생명이 의미를 얻는 법


발을 멈췄다.


길을 걷고 또 걸어 내가 쉴 그 집으로

내가 잠시 떠났던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누군가 나직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안녕 내 친구여 잠시 내게서 떠났던 내 친구여

나는 이렇게 만날 것을 알았노라


여관 쪽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에 이끌리듯 걸었다. 성당 모퉁이를 돌자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훔쳐 듣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모퉁이에 기댄 채로 노래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내 사랑하는 얼굴을 다시 볼 것을 알았노라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 해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알았노라...


열둘에서 열셋쯤 되었을까. 무척 앳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한겨울인데도 팔다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차림으로 여관 지붕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귀를 간신히 덮은 단발머리가 온통 새하얀 색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어딘가 무표정한 얼굴로 좀 전에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님프의 노래가 저런 걸까. 저물녘 바람에 흔들리는 옷깃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라니.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일 것도 없이 아이는 그 자체로 기묘한 데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기묘함에 사로잡혀 한참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은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도착했을 때 보았던 머리 벗어진 치안관이 담뱃대를 문 채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아이야. 부르는 노래는 장송곡인데 꼭 성가처럼 들린단 말이지.”

“정말입니다.”

행여나 노랫소리에 방해가 될까 나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돌아가나?”

“가던 길입니다. 피곤하네요.”

“미안한데 좀 기다려줘야겠어.”

치안관은 담뱃대를 툭툭 털며 말했다.

“예?”

“저 녀석이 노랠 부를 땐 방해하면 안 돼. 자주 들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이사는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어서.”

치안관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저 머리 하얀 애 이름이 이사인가 보다. 몇 마디 나누는 사이 낮에 나를 맞았던 여관 아가씨가 올라와 말을 거는 듯했지만 아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아이의 언니인 듯 여관 아가씨는 걸치고 있던 숄을 풀어 아이에게 둘러 주고는 익숙한 모습으로 옆에 앉았다.

“잘 안 나와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겁니까?”

“그래. 어릴 때부터 약했는데 재작년엔가 폐렴에 걸리고 더 심해졌어.”

“폐렴이요?”

“저기 마리아하고 할애비 노릇하는 울릭이란 친구가 없었다면 진작 죽었을 거야. 그건 그렇고, 말했지만 지금 돌아가게 둘 수는 없겠는걸.”

그는 그렇게 말을 맺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내 방 가서 체스나 한판 어떤가? 괜찮은 차(茶)도 한 잔 대접해 줄 수 있고.”

“아, 예. 저야 좋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어째선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잠깐 고개를 돌리니 치안관은 이미 뒷짐을 지고 자기 사무실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저 꼬마, 저런 차림으로 괜찮은 겁니까?”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고 치안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뭔 노릇인지 긴 소매 옷을 싫어해. 두꺼운 외투는 말할 것도 없고. 마리아도 그렇고 저 녀석 영감태기도 그렇고 뭔가 입혀 보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며칠이고 도망쳐 다니더군.”

치안관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저런 차림으로 다니는데 병이 안 걸리고 배기나. 결국엔 다들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대신 나올 때마다 마리아가 저렇게 옆에 붙어 있게 됐고.”

여관 아가씨는 일이 바쁜 모양인지 숄을 아이에게 둘러 둔 채 일어나고 있었다.

치안관사에서 나섰을 때는 해가 진 지 오래였다. 저만치 절벽 위로 흩어진 달의 조각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삼지일(三之日)이었네.

절벽 위로 세 갈래로 흩어진 조각들이 창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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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막간 +3 22.07.24 88 4 3쪽
17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5. 하얀 처녀 (3) +2 22.06.03 62 6 14쪽
16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5. 하얀 처녀 (2) 22.05.28 56 6 8쪽
15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5. 하얀 처녀 (1) 22.05.28 51 4 13쪽
14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3) +1 22.05.27 58 8 19쪽
13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2) 22.05.27 48 5 12쪽
12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1) 22.05.27 44 5 8쪽
11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막간 22.05.27 50 4 3쪽
10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3) 22.05.27 44 5 7쪽
9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2) 22.05.27 51 6 11쪽
8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1) 22.05.27 62 4 15쪽
7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3) 22.05.27 59 5 8쪽
6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2) 22.05.27 65 3 16쪽
5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1) 22.05.27 74 5 11쪽
4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3) 22.05.27 83 5 8쪽
»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2) 22.05.27 95 5 8쪽
2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1) 22.05.27 188 6 16쪽
1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프롤로그 +21 22.05.27 350 15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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