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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 님의 서재입니다.

하늘과땅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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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
작품등록일 :
2012.10.31 20:25
최근연재일 :
2022.07.24 14:15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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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06
추천수 :
103
글자수 :
82,070

작성
22.05.2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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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1쪽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2)

DUMMY

셋째 날 오후


“아이고··· 죽갔네 진짜···”

여관 홀의 탁자에 널브러진 채로 그렇게 신음을 흘렸다. 얼떨결에 제설작업에 붙들려 나가 종일 삽질을 했더니 팔다리가 욱신거리지 않는 데가 없었다. 제설작업이라고 해 봤자 치안관사를 파내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겨우 그 정도에도 마을 장정들이 죄다 동원되어 해가 질 때까지 삽질에 가래질을 해야 했다.

턱 하고 부글거리는 맥주잔이 눈앞에 놓였다.

“뭐 얼마나 했다고 엄살이야?”

맥주잔 너머로 부스스해진 더벅머리가 비쳤다.

“제가 평소에 삽질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러십니까 젠장.”

“나이도 젊은 친구가? 내가 그 나이일 땐 쇠못도 씹어먹고 다녔어.”

“나이 차가 나 봤자 얼마나 난다고 그런 소릴? 영감님이 그렇게 말하면 그러려니 하겠네요. 아니 근데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뭘?”

“저 이 마을 온 지 사흘도 안 됐습니다. 간밤에 팔자에 없이 치안관 조수 노릇을 한 것도 기가 차는데 오늘은 광부 노릇이에요?”

그는 내 푸념에 킬킬 웃었다.

“뭐 일 복은 있네. 눈사태가 이렇게까지 나는 것도 오랜만인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문득 오전 중에 본 게 생각이 났다. 이런 서북 개척마을은 눈사태가 나는 게 일상이라 그걸 대비하기 위한 시설도 다들 해 놓는다. 설책(雪柵)이라고 부르는 목책을 사선으로 여러 개 박아서 눈사태가 커지는 걸 막는 게 기본인데 발드라스도 당연히 그런 게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넌지시 운을 띄워 보았다.

“뭐가?”

“오전에 나온 설책 말입니다.”

그냥 내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제설작업 중에 나온 설책엔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뭐라 딱 집어 설명할 수는 없는데 뭔가 좀 위화감이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게 왜?”

“···아녜요.”

뭐가 이상한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판에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만 일어나. 사내자식이 그리 허약해서 어디에 써먹어? 군에도 있었다며?”

관두자.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겠지.

“젠장, 전역한 지가 언젠데요.”

더벅머리 사내의 잔소리에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살인이든 눈사태든 어차피 닷새 있으면 떠날 텐데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무슨 잡부 노릇한다며?”

“기껏해야 실험 준비 도와주는 게 답니다. 위험한 게 문제지 힘쓰는 일은 별로 안 해요.”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픽 웃었다. 그래, 위험한 게 문제지.

“위험?”

“미드웨이에서 수입한 마정석(魔晶石)을 쓰거든요. 터지면 사람 여럿 잡죠...”

실제로 두어 번 터진 적이 있었다. 부서 대빵인 땅꼬마가 안전 수칙 같은 건 엿 바꿔 먹으라는 녀석이라 정말 한 번은 골로 갈 뻔했다.

“마정석?”

먹는 거냐고 되묻는 듯한 그 얼굴에 한숨을 쉬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요.”

“흠. 우리도 편하게 일하는 건 아냐. 갱에서도 가끔 지하수 터진다구? 위험하기로 따지면 우리가 더할걸?”

“아 네.”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갑자기 누가누가 더 힘든 일 하나 그런 대화가 되어 버렸다.

“어어? 허세 부리는 거 아냐. 전에 치안관 영감하고 얘기할 때 들었잖아?”

“뭘요?”

더벅머리 사내는 두 발을 탁자 위에 올리더니 의자를 기울여 몸을 뒤로 누였다. 참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세인데도 그는 절묘하게 균형을 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 카지오네 얼간이들이 경영을 맡은 뒤론 심심하면 지하수가 터져. 진짜라구.”

“그치들이 경영 맡은 거랑 관계가 있어요? 결국 파는 건 아이반 씨네 아녜요?”

어지간히 악감정이 쌓인 모양이다. 뭐 그 치들 하던 짓을 떠올려 보면 그럴 만도 했지만.

“채굴 방향을 병신같이 잡으니까 그렇지··· 나나 에반이 아무리 뭐라고 해 봤자 안 들어. 우리야 뭐 광산주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 카지오 병신 때문에 죽을 뻔한 거 생각하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기억납니다. 갱 하나 폐쇄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6번. 재작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었어. 일하기도 편하고 철광석 질도 좋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요?”

“지금껏 뭐 들었어? 만날 이상한 데로 파라고 시킨다니까? 일부러 수맥 있는 데 찾아서 파 들어가도 그렇겐 못 할 거다. 쯧··· 결국 한 번 제대로 터졌지.”

뭐 내 보기에도 그 지질한 귀족 나리가 지질 같은 걸 잘 알 것 같진 않지만.

“한 번? 얘기 들어보니 여러 번 그랬다면서요?”

“갱도라고 무작정 파고 들어가는 줄 알아? 혹시나 지하수 건드릴 경우에 대비해서 물길도 내놓고 그래. 몇 번 덕을 봤고. 그런 게 무색할 정도로 한 번 제대로 뻥! 해서 그렇지.”

그는 탁자 위에 발 올려놓은 모습 그대로 팔을 뒤로 크게 휘저어 보였다. 참 신기하다 싶은 게 그런 움직임에도 넘어가거나 한 손에 쥔 술을 흘리거나 하는 게 없었다.

“이제 거긴 완전히 미로야. 사람 키쯤은 가볍게 넘는 물구덩이 천지고. 멋모르고 들어갔다간···”

그는 몸을 기울인 그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래서 잠가 둔 거군요?”

“응?”

“오전에 윈치 씨가 자물쇠 가져오라던 거 기억나서요.”

“그렇지. 그런데 유난히 거기에 관심이 많네?”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애초에 말 꺼낸 분이 누군데요? 카지오 병신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습니까.”

내 핀잔에 그는 멋쩍은 얼굴을 하더니 맥주잔을 비워 버렸다.

“마리아 양! 여기 한 잔 더!”

주방 저편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닙니까?”

나도 그제야 내 앞에 놓인 맥주잔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홀아비가 이런 낙도 없으면 어떻게 살라고?”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에 나도 쓴웃음을 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뭔가 좀··· 계속 스스로 신경 끄자 그러고는 있는데 느낌이 영 이상했다. 경험상 이런 느낌은 존중하는 게 좋다. 침수된 광산, 석연찮은 눈사태, 살인사건, 책 – 이건 빼고 - 니콜라스 테슬리, 핏빛 9월단··· 스스로도 뒤에 세 개는 이 마을하고 뭔 상관인가 싶었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이에요.”

“엥? 맥주 다 떨어졌어요?”

되묻는 말에 여관 아가씨는 새침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뇨. 우리 집은 취해서 몸 못 가누시는 손님은 사양이라서요. 벌써 다섯 잔째라구요.”

“무슨 망발을! 이깟 걸로 내가 취할 거 같습니까? 통 하나 다 퍼먹어도 취하기는커녕-”

“네네.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사내는 한참 뭐라고 억울하다는 듯한 몸짓을 해 보이다 그 모습이 주방 너머로 사라지자 한숨을 쉬었다.

“예쁘네요.”

“그렇지?”

그는 그때껏 주방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 참. 사흘도 안 됐는데 돌아갈 때쯤엔 이 마을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가겠네.”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뭐라고?”

“아닙니다, 아무것도.”

여관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서지도 않고 고함을 쳤다.

“야, 아이반! 에반네 애들이 페릴로니 영감 찾았대! 지하실에 들어가 있었다나 봐!”

“그 영감님 그럴 줄 알았지. 명줄 하나는 질긴 분이라니깐.”

사내는 빙긋 웃으며 한입에 맥주를 털어 넣었다.

“지금 갑니다!”

그는 모루 끄트머리에 걸어 둔 조끼를 집어 들었다.

“이따 돌아올지도 모르겠어? 그때 브리지 한 판 어때?”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 버렸다. 그렇게 혼자 있게 되자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식사 나왔습니다.”

저녁이고 뭐고 그냥 들어가 잘까 그러고 있는데 여관 아가씨가 주방에서 쟁반을 들고 나왔다. 쟁반에 놓인 사기그릇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번거롭게 해서.”

저녁 준비할 시간이 아닌데도 굳이 부탁을 들어준 게 고마웠다. 그녀는 쟁반에서 수프 그릇이며 식기 같은 걸 내려놓으며 대답을 했다.

“아니에요. 매번 있는 일인데요, 뭘.”

“꼬맹이는 좀 괜찮아요?”

온 지 사흘도 안 됐는데 한 이삼 년은 이 마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자고 있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녀는 쟁반에 가져 왔던 걸 다 내려놓고는 그렇게 말했다.

“예? 뭐가요?”

“대신 발견자가 되어 주셨잖아요. 아니었으면 이사가 많이 힘들어했을 거예요.”

아, 그거.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평소에도 그렇게 갑자기 쓰러지고 그래요?”

어젯밤에 시체를 가리키던 그대로 갑자기 눈의 초점이 흐려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페이 언니 말로는 뭔가 희귀한 병이래요. 몸이 약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갑자기 그렇게 쓰러져서 잠들곤 해요.”

“...그거 괜찮은 거예요?”

길거리에서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도 괜찮나?

“페이 언니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쓰러지면 한 10분 잠들었다 다시 깨어나고 그래요. 어제도 여관에서 나가신 다음에 좀 있다가 깨어났어요.”

역시 언니라 그런지 말하는 내내 표정이 걱정스러워 보였다.

“알겠습니다.”

굳이 더 묻는 것도 실례다 싶었다. 여관 아가씨는 내가 숟가락을 집어 들자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아, 그렇지.”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발이 갑자기 멈췄다.

“방이 오늘 많이 비었어요. 다른 방으로 옮기시는 게 낫겠죠?”

“예? 방이 났어요? 어떻게?”

눈사태로 철도가 막혔는데?

“여섯 개가 한꺼번에 비었어요. 손님처럼 책 찾는다고 오신 분들인데 카지오 저택에 고용됐다고 그쪽으로 옮기신대요.”

“아, 네.”

“식사 끝난 뒤에 부르시면 가서 도와드릴게요.”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그 재수 없는 귀족 나리가 저녁 제안을 했던 게 떠올랐다. 여섯 명이나? 경호원이 더 필요한가? 머리를 더 굴려 보려다 문득 수프가 담긴 숟가락이 눈에 띄었다.

관두자. 밥 먹을 때는 밥에만 집중하자고.

김이 솟아오르는 사기그릇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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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1) 22.05.27 43 5 8쪽
11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막간 22.05.27 50 4 3쪽
10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3) 22.05.27 44 5 7쪽
»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2) 22.05.27 51 6 11쪽
8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1) 22.05.27 61 4 15쪽
7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3) 22.05.27 58 5 8쪽
6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2) 22.05.27 65 3 16쪽
5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1) 22.05.27 73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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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1) 22.05.27 188 6 16쪽
1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프롤로그 +21 22.05.27 350 15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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