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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 님의 서재입니다.

하늘과땅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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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
작품등록일 :
2012.10.31 20:25
최근연재일 :
2022.07.24 14:15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39,516
추천수 :
103
글자수 :
82,070

작성
22.05.27 21:17
조회
83
추천
5
글자
8쪽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3)

DUMMY

“여러분들은 아마 대부분 여기 누워 있는 이 사람을 기억할 겁니다.”

비쩍 마른 얼굴에 안경을 걸친 중년의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 말과 함께 가슴 위에 포개어 올린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 얼굴처럼 수척하기 이를 데 없는 손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 여인이 연단 위의 단상에 누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핏기없이 창백한 여인의 목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여러분은 아마 그녀를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조합의 지도자로 기억할 겁니다. 어느샌가 무슨 폭도 단체마냥 핏빛 9월단이라고 저 사람들이 조소와 경멸을 담아 부르는 그 단체 말입니다. 그래요, 안나는 우리의 지도자였습니다. 안나는 나 같은 늙은 직공 나부랭이를 위해 나서 준 사람이었습니다. 안나는 여러분과 같은 방직공이었습니다. 안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하루에 16시간을 일하면서도 내일 먹을 빵을 걱정하는 어린애를 위해 가슴 아파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얼굴은 슬픔보다 더 큰 어떤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여기 누워 있는 안나 레니나가 아마 여러분을 걱정한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 난리 통에 목숨을 잃은 유일한 사람도 아닐 겁니다. 하지만 난 말할 수 있습니다. 안나는 처음으로 우리를 위해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안나는 우리를 위해 말했고, 싸웠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안나가 얻은 상처 중에는 심지어 여기에 선 우리에 의해 생긴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상처도 안나가 여러분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목을 가린 흰 천에 손을 가져다 댔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덜덜 떨리는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상처를 얻기 전까지는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그 천을 걷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많은 사람이 그 광경에서 시선을 피했다. 탄식, 흐느낌, 분노에 찬 중얼거림이 열병처럼 번져 나갔다.

“이것이 8인 회의의 대답입니다.”

조금 전까지의 덜덜 떨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서릿발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것이, 그동안 그녀가 던졌던 수많은 물음에 돌아온 딱 하나 대답입니다.”

그 목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조금씩 격해졌다.

“생전에 안나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앞서서 길을 열겠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게 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그 말을 지켰습니다. 안나는 앞장서 길을 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따를 차례입니다.”

광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마치 조금씩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듯헀다.

“그녀의 목숨으로 연 길인데 마땅히 우리가 그 뒤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자들을 향해 선고를 내렸다.

“무기를 듭시다!”

그 한 마디가 마른 들판에 치이는 벼락이 되었다. 분노가 불길처럼 광장에 번져 나갔다.

죽여라!

“죽여! 전부 죽여버려! 저 버러지만도 못한 돼지 새끼들을 싸그리 죽여버려!”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아아아아!!!

혼돈 그 자체였다. 분노에 찬 함성, 둔탁한 깨지고 무너지는 소리, 유리창의 파열음. 도시의 모든 것이 분노, 피, 그리고 불길로 얼룩져 있었다. 오직 하나 붉은빛을 띠지 않은 것은 밤하늘에 세 갈래로 갈라진 조각들의 창백한 은빛뿐이었다.


한 남자가 허리 뒤에 찬 단검에 손을 올린 채로 그 광경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한 사람들에 의해 육중한 철문이 떨어져 나가고, 그 뒤에서 안간힘을 쓰던 경비병들이 해일에 휩쓸리듯 군중의 발밑으로 사라졌다. 8인회의 의장의 저택은 그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처참한 몰골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비록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군중은 남자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저택의 정경을 바라보며 길을 가늠하고 있었다.

- 일가 4명, 목격자를 남기지 말 것.

단 한 줄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차가운 문장도 드물었다.

암살자는 앉아 있던 저택의 담에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정원을 가로지른 그 모습이 정원수를 기어오른다 싶더니 나뭇가지에서 창문으로 날았다.

챙그랑!

재빨리 굴려 일어난 몸이 저택의 복도를 달렸다. 곧 저 군중이 몰려들 것이다. 그 전에 시체 4구를 남겨 놓고 저택을 빠져나가야 한다. 앞서 두 경비에게서 건네받은 평면도에 의하면 한 층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꺾은 다음 두 번째 방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저택 중앙의 계단을 향해 달렸다.

“이쪽으로! 서두르셔야 합니다!”

“세라! 세드릭! 당신도 어서!”

저만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암살자는 두 갈래로 나뉘는 계단 중 하나에 몸을 붙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낮고 가벼운 발소리가 셋, 무거운 발소리가 셋.

“오신다던 작은 도련님은요? 전 뵌 적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외모가 나하고 비슷해서 보면 바로 알 걸세! 눈 색이 좀 특이한데 그것만 기억하면 돼! 조란, 뒷문은 좀 어떻던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온 일행 중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물었다.

퍽.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계단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목을 뚫고 번뜩였다. 완벽한 기습에 뽑아 들고 있던 칼을 채 들지도 못했다. 찰나의 침묵 뒤로 귀부인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일행 중 또 다른 한 명이 중간의 중년 남자를 뒤로 밀어제치며 나섰다. 그는 뽑아 들고 있던 장검을 암살자가 동료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드는 틈을 타 재빠르게 내리쳤다. 하지만 암살자는 죽은 경호원을 방패 삼아 떨어지는 칼을 막고는 그대로 그를 던지듯 밀어냈다. 칼을 내리친 경호원이 죽은 동료의 몸에 부딪혀 멈칫한 사이 암살자의 어깨가 젖혀진다 싶더니 용수철이 튀어 나가듯 칼날이 날았다.

뽑아 드는 칼날 사이로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검은 머리, 검은 옷, 그리고 얼굴에 뿌려진 검붉은 얼룩. 마지막으로 남은 중년의 남자는 침착히 칼을 뽑아 들었다.

“모이라, 얼른 나가. 뒷문에 마차가 있을 거야.”

중년의 남자는 그 말과 함께 다가오는 암살자를 향해 칼을 세웠다.

“얘들아, 어서! 제발...!”

귀부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독촉했다. 계단 아래로 펼쳐진 긴 복도를 세 개의 그림자가 달렸다. 하지만 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 그림자들은 곧 그 뒤를 쫓기 시작한 다른 그림자에 비해 무척 느렸다.

한 그림자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암살자는 쓰러진 귀부인의 등에 꽂힌 칼을 비틀어 뽑았다. 복도의 벽에 기댄, 남자아이를 덮듯이 하여 감싼 조금 더 큰 여자아이의 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세드릭. 세드릭-”

옷깃을 잡힌 여자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떤 이름을 불렀다. 칼날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오며 뭔가 말하려던 얼굴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아이는 대리석 바닥에 쓰러져 부들거리는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고개가 들리며 그림자를 드리운 자를 바라보았다. 촛불에 비쳐 붉은빛으로 도드라진, 초점을 잃은 두 눈동자에 칼을 들어 올리는 검은 옷자락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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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막간 +3 22.07.24 88 4 3쪽
17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5. 하얀 처녀 (3) +2 22.06.03 62 6 14쪽
16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5. 하얀 처녀 (2) 22.05.28 56 6 8쪽
15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5. 하얀 처녀 (1) 22.05.28 51 4 13쪽
14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3) +1 22.05.27 58 8 19쪽
13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2) 22.05.27 48 5 12쪽
12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4. 인형을 당기는 실 (1) 22.05.27 44 5 8쪽
11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막간 22.05.27 50 4 3쪽
10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3) 22.05.27 44 5 7쪽
9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2) 22.05.27 51 6 11쪽
8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3. 눈사태 (1) 22.05.27 62 4 15쪽
7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3) 22.05.27 59 5 8쪽
6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2) 22.05.27 65 3 16쪽
5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2. 아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1) 22.05.27 74 5 11쪽
»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3) 22.05.27 84 5 8쪽
3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2) 22.05.27 95 5 8쪽
2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1. 출장 (1) 22.05.27 188 6 16쪽
1 책 한 권을 위한 소동 - 프롤로그 +21 22.05.27 351 15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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