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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찢는 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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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7.1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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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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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

DUMMY

모든 생명력을 불태우고 이젠 빈 껍데기만 남은 발라트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듯 지나칠 정도로 우울한 회색이다.


“정말로······.”


발라트의 목소리에서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무미건조한 억양 그대로 말했다.


“정말로 애석한 일이군요. 내 마지막 발악이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였다니? 원통한 걸 넘어서 허탈하군요.”


샬릭은 몸에 묻은 그을음을 털어내듯 손으로 가볍게 갑옷을 털었다.


“상대가 나빴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차라리 제국공과 싸웠으면 지금보다는 좀 더 승산이 있었을걸.”


저 말은 자신이 제국공보다 더 강하다는 뜻일까? 발라트는 웃으려 했으나 몸 안의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그래요, 차라리 테레모와 싸웠다면 이것보다는······.”


발라트의 숨소리가 점차 옅어졌다.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난 북부인이고, 북부의 관습에 따라 내가 죽인 적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있다.”


발라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테레모를 죽여달라고 하면, 그것도 들어줍니까?”


샬릭이 곧장 대답했다.


“아니.”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있다면서요?”


“그래서 들어줬잖아. 난 들어주겠다고만 했지, 부탁한 대로 해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이 무슨 말장난인가? 그러니까 적의 마지막 부탁을 그냥 귀로 듣기만 하고 부탁을 들어줬노라 주장한다는 건가? 북부의 관습이라면서 그걸 이토록 가볍게 여겨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샬릭이 답했다.


“북부인은 그래도 돼.”


그 대답을 가만히 곱씹어보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기야 북부인은 본래 제정신 아닌 족속들 아닌가······.


“그럼 유언은 그게 끝인가? 다른 할 말은 없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보통 이럴 때 하는 말이 있지 않나? 그 왜, 감히 칼록의 성기사를 건드렸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고 경고하거나 말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라트가 웃었다. 처절할 정도로 메마른 웃음이라 샬릭도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런 말을 왜 합니까?”


“안 하나? 할 줄 알았는데.”


“할 이유가 없지요. 상대가 당신인데 어찌 감히?”


내가 뭘? 샬릭이 어깨를 으쓱이자 발라트가 메마른 목소리를 뱉어냈다.


“모든 북부인은 용 사냥꾼이라고 하지요. 용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죄 죽어버리지만 어쨌건 용 사냥을 하긴 하니까······. 그런데 당신 같은 진짜배기도 있었군요. 정말로 용을 죽인······. 난 그게 그냥 전설인 줄 알았는데.”


“별 대단한 일은 아니야. 용도 결국 생물인지라 칼 찌르면 죽거든.”


그럼 지금까지 죽은 수많은 북부인은 칼 찌를 줄 몰라서 용한테 다 죽었나?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지만 발라트는 웃을 힘도 없었다.


“내 잘못입니다. 나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죽겠군요······.”


“갑자기 웬 고해성사?”


발라트가 쓰게 웃었다.


“내가 죽었으니 칼록의 성기사들이 당신에게 복수하려 들겠지요. 그들은 제국공을 죽이는 것보다 북부인 하나를 죽이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그들 모두는 죽은 목숨입니다. 결국 나 때문에 죽은 셈이지요.”


샬릭이 잠깐 생각해보니 과연 옳은 소리였다. 칼록의 성기사들은 발라트의 복수를 하려 들 텐데, 감히 제국공에게 대적할 용기는 없을 터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상대에게 덤벼들 텐데 문제는 자신이 그냥 북부인이 아니라 용 사냥꾼이라는 사실이다.


샬릭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죽인다. 그러니 발라트의 말대로 성기사 수십이 죽게 되리라.


“그럼 내가 들어줄 마지막 부탁은 그걸로 하지.”


“···부탁이라니요?”


샬릭이 저 멀리 쳐다보며 말했다.


“네 친구들에게 말해주겠다고.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나한테 덤비지 말라고. 그럼 그 친구들도 안 죽을 것 아닌가.”


그게 뭔? 성기사들한테 덤비지 말라고 하면 그들이 안 덤비나? 대체 뭔 생각으로 하는지 모를 말에 발라트가 허 소리와 함께 말했다.


“말하면 듣겠습니까?”


“들어야지. 안 그러면 죽을 테니까.”


그럼 결국 다 죽겠군. 칼록의 성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바로 자신처럼.


발라트는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샬릭은 조용히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발라트의 숨이 완전히 멈추자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사악한 저주가 담긴 병. 그 안에 담긴 걸 시체에 뿌리면 발라트의 영혼은 더럽혀질 것이고 육신은 시체 기사로서 되살아나리라.


꺼림칙한 일이지만 일을 맡았으면 끝까지 해내야 한다. 샬릭은 병뚜껑을 열고 발라트를 향해 저주를 뿌렸다.


“그윽······.”


분명 숨이 끊어졌던 발라트의 몸이 저주에 휩싸여 꿈틀거렸다. 마치 내면의 정의가 사악한 저주로부터 저항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칼록의 성기사라 할지라도 사악한 저주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발라트는 한참 동안 몸을 꿈틀거리다가 곧 저주를 받아들여 시체 기사로서 되살아났다.


방금 막 죽은 탓에 시체 기사 특유의 악취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눈에 생기가 없고 초점이 흐리긴 하지만 이 모습만 보면 발라트는 아직 살아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가 완전히 시체 기사로서 되살아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죽음의 기운 때문이다.


“신앙심이 강할수록 더 강력한 시체 기사로서 태어나는 건가?”


테레모가 발라트의 영혼을 더럽히라 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샬릭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발라트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에 반응해 발라트가 이쪽을 쳐다봤다. 그는 샬릭에게 다가오는 듯하더니 그를 지나쳐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 가?”


물어도 대답은 없다. 발라트가 가는 방향을 보니 아크툴 쪽인 것 같은데 어쩌면 제 주인을 찾아가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건 여기 혼자 있을 수는 없었기에 샬릭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용 사냥꾼과 시체 기사는 황무지를 지나 아크툴로 향했다.


저 멀리 성문이 보이자 발라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아직 성문이 열릴 시간이 아니건만 성벽 위의 기사는 발라트와 샬릭을 발견하고서 곧장 성문을 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기사의 인사에도 발라트는 답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갔다. 샬릭도 머쓱해 하는 기사를 지나쳐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발라트가 어디로 갈까? 테레모가 있는 저택일까? 가만히 지켜보니 그 방향이 아니었다.


“테레모한테 가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테레모가 저택에 없는 건가······.”


설마 칼록의 신전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더럽혀진 영혼을 정화하고 회개하길 원하는 건가? 가만히 지켜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발라트는 칼록의 신전을 지나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으니까. 이쯤 되니 대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져서 샬릭도 얌전히 뒤를 따랐다.


광장을 지나고, 아크툴을 통과하는 대로를 따라 한참 걷다가 다시 갓길로 빠지고, 그 뒤에는 또 한참을 걸었다.


가만히 보니 도시 외곽으로 빠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럼 도시 외곽에는 무엇이 있나? 상식적으로 따지면 도심 안에 있기 어려운 시설일 터다.


쓰레기장? 빈민가? 그도 아니면 무덤이라도 있나?


가만히 따라가다 보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건 병영이다. 대병영(大兵營), 죽은 자들이 시체 마법사의 힘으로 부활하여 병사로서 다시 태어나는 곳.


아무래도 이곳에 테레모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곳은 중요 시설이라 아무나 들어가게 해주진 않을 텐데.’


아무리 샬릭이 테레모의 손님이라고 해도 대병영 안까지 들어가게 해줄 것 같진 않았다. 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발라트는 성큼성큼 걸어서 대병영 입구를 향하고 있다. 하기야 저놈은 테레모가 부른 것일 테니 거리낄 게 없겠지.


그럼 나는? 샬릭은 일단 발라트를 따라서 출입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시체 기사 둘? 안쪽에 일손이 그리 부족한가?”


“그런가 보지 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시체 기사가 아니라 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다가온 발라트와 샬릭을 보고도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발라트야 딱 보기에도 시체 기사 같았고 샬릭도 투구로 얼굴을 가린 탓에 시체 기사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발라트와 샬릭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대병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내부는 병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방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불사의 군세가 훈련이 아니라 테레모의 마법에 의해 탄생한다는 걸 생각하면 일리 있는 구조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해?”


발라트는 샬릭의 물음에 답하듯 대병영 안을 걸어 다녔다. 내부에는 산 사람이 하나도 없고 전부 시체 기사며 병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샬릭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제 할 일로 바빴다.


넓디넓은 대병영 안을 삼십 분쯤 걸었을 때일까. 발라트가 어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했는데 어째서인지 사물이 명확히 보였다.


이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 뭔가 마법적인 조화라는 증거였다. 마치 방 안 전체를 새까만 물감으로 칠한 듯한 광경에 샬릭이 오호 소리를 낼 때였다.


“···기회를 주지. 너희의 쓸모를 보이고 이 땅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말이야. 잘 생각해야 할 거다. 나는 자비롭지만 그 자비가 무한정하진 않으니······.”


스산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샬릭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한 무리의 사람과 뭔가 적인 종이를 흔들고 있는 시체 마법사가 있었다.


양쪽 다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부랑자 무리인 것 같고 종이를 흔들고 있는 시체 마법사는······.


“테레모?”


샬릭의 목소리에 시체 마법사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여긴 왜?”


샬릭은 대답하는 대신 부랑자 무리를 쳐다봤다. 그들은 겁에 질린 듯 몸을 떨고 있었는데 마치 협박이라도 당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 누구에 의한 협박인가? 아마 테레모일 테지. 그럼 무슨 협박을 당했나? 시체 마법사가 대병영에 사람 모아두고 할 만한 협박이야 뭐 다른 게 있나······.


생각해보니 발라트가 그랬지. 테레모는 사악한 시체 마법사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그럼 발라트는 테레모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온 건가?


샬릭이 가만히 테레모를 쳐다보니 그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뭔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오해일세.”


샬릭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테레모가 말했다.


“제기랄, 이거 오해라니까. 나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오해는 뭔 놈의 오해? 샬릭이 흠 소리를 냈다.


작가의말

runbox5 님 후원 감사합니다. 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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